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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봄에 관한 시들

by 광적 2020. 9. 17.

 

봄은

 

이대흠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 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상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곳곳에서 탕,탕,탕,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저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시집『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창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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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아이를 낳아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다 헐은 자궁으로


수국이나 박태기나무


여치나 개똥지빠귀 같은


살려내는 우주를


낳고 싶습니다

 

 


-시집『귀가 서럽다』(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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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옥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

만나고 싶었던 사람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봄이 온다.

 

아무 곳에나 흩어져 있던 봄이

제자리를 찾아 달려오는 길목

풋내음 속으로

그 사람이 온다.

 

 

 

-풀과별 엮음『희망의 레시피』(문화발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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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갑

 

 

휴일 한나절
오래 끌고 온 치통 같은 생각 하나
하수구에 흘려보내고
가부좌 편한 자세로 손톱 깎고 있는데
눈 감고
입 닫고
긴 동안거 중이시던
우리 집 전화기
요란스런 하품하며
느닷없이 말문을 열고 있다.

 

뭐 하냐?
나와라.
날 좋다!

 

 

 

-시집 『코뿔소』(문학의 전당,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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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흰나비가 바위에 앉는다
천천히 날개를 얹는다


누가 바위 속에 있는가
다시 만날 수 없는 누군가
바위 속에 있는가


바위에 붙어
바위의 무늬가 되려 하는가


그의 몸에 붙어 문신이 되려 하는가
그의 감옥에 날개를 바치려 하는가


흰나비가 움직이지 않는다


바위 얼굴에
검버섯 이끼가 번졌다
갈라진 바위틈에 냉이꽃 피었다

 

 

-시집『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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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

 

 

가랑비 몇 줄기 지나갔을 뿐인데


밑동도 채 적시지 못하고 스쳐갔을 뿐인데


나무는 가지 끝이 잔뜩 부풀었다.


그 탱탱함 어쩌지 못하고 진저리를 치고 있다.


허망타, 한철 수행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또 한 차례의 수런거림이 누리에 자욱이 번져가것다.

 


-시집 『햇살방석』 (시학,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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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누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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