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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時調

제주 하르방/김춘기

by 광적 2022. 2. 7.

제주 하르방/김춘기

 

 

 

   성산포에 제주 부씨

   하르방이 살고 있다

 

   초등학교 간신히 졸업하고 출발은 머슴, 온몸은 곡괭이 삽이 되어 고된 하루하루 배 주리며 일군 토종 일개미. 불혹쯤에 벌써 이만 평 중산간 땅 젊은 성주가 되었지. 물만 줘도 쑥쑥 크는 백자 무 같은 자식들 바라보며 경사진 자갈 귤밭 짊어지고 돌개바람 헤친 억척 아방. 사 남매 아들딸 여의어 서울, 분당, 이천, 양주로 죄다 올려보냈다지. 만여 평 땅문서 미리 피붙이들에게 물려주고 허리 좀 펴려는데, 살가운 조강지처가 덜컥 겨울밤 푸른 별이 되었다네. 그를 위로하며 막걸릿잔 부딪치던 깨복쟁이 친구 털보마저 견우성의 친구가 되었다지. 그게 벌써 오 년 전.

   구좌 띠동갑 할망 만나 매일 광치기해변 오가는 게 밥 먹는 것보다 좋다지. 색바랜 장롱면허 꺼내 새 각시가 타고 온 문짝 녹슨 마티즈 몰며, 세화오일장까지 거북이처럼 기어가 세상 구경도 한다네. 식산봉 오름 아래 남아 있는 칠천 평 땅이 자꾸 들썩인다며 얼굴이 대낮처럼 환해지고, 오억 원쯤 되는 현찰 통장을 자식 삼아 쓰다듬는 게 요즈막 재미. 검버섯 제거 크림 바르며 아직도 알랭 드롱 얼굴이라며, 백수 해야겠다고 외식 한번 못 한다네. 그래도 여우 아내에게만은 유명상표 옷에다 생일 케이크까지 자른다는 자칭 배포가 일출봉 분화구 만한 팔순 하르방이라지만, 어제도

 

   오만 원

   달랑 쥐자마자

   농협으로 달렸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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