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갯벌도서관 권여원

by 광적 2023. 6. 28.

갯벌도서관 권여원

 

 

 

썰물에 열리는 점자도서관

밤새 불어난 목록들이 물때에 맞춰 진열되면

하나둘 손님이 들기 시작하지요

어제 대여해 간 태양은 반납이 되어

도서관에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해요

언젠가는 빌려간 책이 돌아오지 않아

며칠째 비가 내린 적도 있지요

농게는 갯벌에 새겨놓은 점자책이 젖었다고 뻘을 말리고

백로는 장문으로 쓴 고둥의 편지를 곁눈질 하고 있어요

고개 숙여 젖은 책을 읽을 때마다 갈매기 사서는

바짝 긴장하지요 목록에서 빠진 것들을 기록해야 하거든요

눈치 빠른 도둑게는 쪽수에 구멍을 내고 글자를 삼키고 있어요

게구멍끼리 이은 점들을 따라가면

도형의 비밀이 풀리거든요

갯벌은 커다란 노트, 새끼 게가 갓 배운 글씨를

비뚤비뚤 뒷발로 쓰고

사람들도 몰려와 호미로 쪽수를 넘기며

뻘밭에 엎드려 바다를 읽고 있네요

높이뛰기로 밀물과의 거리를 측정하고 있는 짱둥어

저만큼 밀물이 다가와요

어제는 뻘게가 쓴 일기장이 지워졌다고 투덜거렸어요

이제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

누군가 또 태양을 빌려갔는지 어둑해졌어요

갯벌에 그어진 밑줄만 잘 읽어도 그날 양식은 두둑해진다던

갈매기가 밀물에 진흙 발을 씻고 있네요

갈매기 사서는 대여해간 목록을 체크하며

긴 부리로 하루를 넘기고 있어요

더듬거리며 읽던 갯벌의 문장들

밀물이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어요

'좋아하는 문학장르 >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는 미소를 바른다/최원준  (0) 2023.07.03
말굽자석/이삼현  (0) 2023.07.03
경운기를 부검하다/임은주  (0) 2023.06.28
밥주걱/박경남  (0) 2023.06.23
바깥에 갇히다/정용화  (0) 2023.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