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오은
처음에 당신은 나를 시력이라고 불렀어요 시월이 되자 나는 아침 기온이 되었고 당신의 샤프심 굵기가 되어 매일 같이 학교에 갔죠 첫눈이 오던 날, 나는 강설량이 되었고 생물 시간에는 페하나 소금물 농도로 둔갑했어요 다이어트를 시작한 당신, 나를 저칼로리라고 부르다가 하루치 감량 체중으로 설정했지요 어느 날부턴가 당신은 나를 당신의 남자 친구로 임명했고 커플링 무게가 된 나는 당신의 약지에 의지하며 겨울을 났죠 당신의 고삼 시절은 내가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했어요 표준편차가 되었다 sinA의 값이 되었다 정신없었거든요 대학에 들어가 플라톤을 배운 당신, 나를 덜 존재한다고 업신여겼죠 내가 없이도 세상을 부를 수 있게 된 거예요 현재완료였던 나는 일순 대과거로 까마득해졌죠 이제 렌즈를 낀 당신은 시월의 찬바람을 맞고도 나를 떠올리지 못해요 만년필을 쓰는 당신, 샤프심이 끊어질까 위태로웠던 순간들을 기억이나 할까요 눈이 내리면 당신은 눈만 봐요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는 안중에도 없고요 남자 친구와 이별한 날, 당신은 약지에서 나를 빼내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렸죠 그리고 반쪽을 잃은 마음고생으로 살이 빠지기 시작했어요 어느날 새벽, 비로소 나는 당신의 몸뚱이에서 완전히 분해되었죠 가뿐해진 거, 당신도 느끼죠? 이제 나는 당신이 없는 곳으로 떠나려고요 홀로 더 존재하기 위해서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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