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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

말뚝에 대한 기억/박현솔

by 광적 2024. 3. 28.

말뚝에 대한 기억/박현솔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새끼들과 장난을 치는
어미 소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 있다
아카시아나무 잎사귀에 부딪혀서 급강하하는
햇살의 칼날, 소의 몸통이 무수히 조각난다
아버지 약값을 위해 소를 팔던 날
외양간을 나서는 소의 깊은 눈망울 앞에서
후줄근한 몸뻬 차림의 어머니가 휘청거린다
다음 생엔 네가 내 주인이 되어 만나자꾸나
자꾸만 머뭇거리며 고삐를 넘겨주지 못하는
제 주인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미 소가 어머니의 손등을 핥아준다
고삐를 잡은 손이 위태롭게 허공을 향한다
무딘 날을 세워 굳은 땅을 갈아엎던 고집으로
무너지는 일가를 지탱해온 어머니,
어머니가 내준 길을 따라 어미 소가 트럭에 오르고
철제문이 소의 그림자를 가두자,
젖을 갓 뗀 새끼, 어미 소를 향해 울음을 내지른다
트럭의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햇살에 잘린 붉은 파편들이 궤도 밖을 뒹군다
트럭이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말뚝처럼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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