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소멸을 위하여/박현솔
횡단보도 앞, 남자가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깡마른 몸의 지퍼를 열고 튕겨 나올 것 같은 뼈들. 뼈마디와 마디 사이로 개울물이 흐른다. 검은 송사리 떼가 물주름을 물고 간다. 남자의 몸에서 세포 분열을 하는 종양 덩어리들. 점점이 박힌 그것들이
개울가의 징검다리 같다. 때로 물이 불어 생의 너머로 건너갈 수 없는 날도 많았겠지. 그런 날엔 수술 동의서 앞에서 만지작거리던 도장을 물 위에 무수히 찍어 보냈겠지. 신호등이
푸른색이다. 등줄기를 따라 갈기를 휘날리며 솟구치는 현기증. 남자가 휘청거린다. 직립해 있던 뼈들이 함께 휘청댄다. 넘어진 그림자가 스프링처럼 일어서고, 정지된 시간 속으로 나뭇잎들 흘러간다. 건너편
신호등은 두터운 여백을 숨기고 있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 사이, 흐름과 멈춤 사이, 핏물이 번진 혀를 내밀고 서 있는 신호등. 그가 횡단보도의 주름을 지우며 걸어간다. 휘청휘청 출구 없는 여백 속으로 그가, 서서히 잠긴다.
박현솔 시인
1971년 제주 성산 출생
동국대대학원석사, 아주대 대학원 박사 졸업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2001년「현대시」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달의 영토』『해바라기 신화』『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
시론집『한국현대시의 극적 특성』
경기시인상 수상. 아주대 출강.
현재, 계간 <문학과 사람>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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