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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잔/홍진기 빈잔/ 홍진기 언제나 내 곁에는 빈 잔이 놓여 있다 가진 것 모두 담아도 차지 않는 이 잔을 단숨에 그대로 들면 은회색 허공이 된다 언젠가 달빛 한 줄기 이 잔을 다녀갔고 아내의 한숨 소리도 가끔은 드나들지만 시대의 증언을 풀면 전쟁같은 물이 고인다 2008. 3. 6.
봄은/정휘립 봄은/정휘립 1. 멍울진철쭉꽃이다, 탁뱉은가래침이다, 싯누런금강하구까지닻줄에질질끌려갔다가, 또다시삼사오월이면거슬러오르는암초다. 2. 아빠의실종이다, 변변한유언도없이, 수십번까무러져눈이풀려도죽지를않는, 우리네배고픔이다, 핍박이다, 빈곤이다. 3. 엄마의가출이다, 버젓한정절도없이, 황사속을쏘다니다종적감춘누이들 처럼, 무덤을찾을수도없고찾지도못한죄악이다. 4. 산길에마구싸버린검붉은정액이다, 짓푸른그늘만을뜯어먹으며또한시절을난, 그렇다, 그모든부재(不在)에도나의봄은핏덩이다. 5. 줄기찬오줌발이다, 웩토해낸낮술이다, 내내늘어진채욕질매질에이골났 다가도, 또다시사오륙월이면발기하는物件이다 2008. 3. 6.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이정환 가구가 운다, 나무가 운다 / 이정환    한밤중 한 시간에 한두 번쯤은 족히 찢어질 듯 가구가 운다, 나무가 문득 운다 그 골짝 찬바람 소리 그리운 것이다  곧게 뿌리내려 물 길어 올리던 날의 무성한 잎들과 쉼 없이 우짖던 새 떼 밤마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일순 뼈를 쪼갤 듯 고요를 찢으며 명치 끝에 박혀 긴 신음 토하는 나무 그 골짝 잊혀진 물소리 듣고 있는 것이다   감상) 이정환 시인은 2002년도 "원에 관하여"로 중앙일보 시조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어릴 적 늘 매만지고 함께 뒹굴던 토속적인 생활용품으로만 시조집을 일궈내신 그 창작열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호미" "삽" "괭이" "쟁기" "코뚜레" "떡살" "절구통" "은장도" "부채" "인두" "골무" "버선" 등, 80여점의 .. 2008. 3. 6.
빈 들/ 정수자 빈 들 / 정수자 일을 마친 소처럼 순하게 엎드린 들판 지친 숨소리에 하늘 가만 내려와 더불어 들을 쓸면서 끄덕이고 있다 반추의 안개 속에 반쯤 풀린 눈빛이여 여름내 바삐 달린 잔도랑물 뉘어주고 집 놓고 떠돈 낟알들 묻어주는 큰 집이여 미꾸라지 샅에 들고 새떼 먼길 갈 동안 진기 .. 2008.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