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김선생 갱년기 아니오?
멀리 고비사막에서 만들어진다는 먼지가 서풍을 타고 날아와 세상을 온통 칙칙하게 만들지만, 하늘을 향해 웃어대는 히아신스의 오색빛깔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호수 주위로 쭉 뻗은 길을 연인끼리, 가족끼리 상쾌한 바람을 뚫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모습은 활기차기 이를데 없다.
아파트 숲 속의 학교지만, 아이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봄의 연한 햇살이 쏟아지는 교정에서 아기자기하게 고교시절의 추억을 만들고 있다.
나는 신도시에 개교한 고양시 화정고등학교에 1998년 3월초에 부임하여 1학년부장 겸 과학부장으로서 학생들과 멋진 학교를 만들기 위하여 정성을 쏟고 있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밤이 되어도 교실을 환하게 밝힌 채, 학생들은 열심히 책을 읽었다. 나는 학생들과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학교에서 지냈다.
나와 동갑내기인 김선생 또한 2학년 부장으로 밤늦게까지 퇴근하지 않고 학생들과 고락을 함께 했다. 저녁때가 되면 김선생은 담임선생님들과 함께 음식점에서 배달되는 노란색의 도시락을 하나씩 들고 얘기의 꽃을 피우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김선생은 아침마다 수영장을 거쳐 출근하고, 산을 좋아해 등산도 자주 하였다. 술과 담배는 물론 안 했다. 그리고 체력만큼은 누구보다 자신하며, 항상 건강에 신경을 쓰는 패기와 젊음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김선생은 학생부장도 겸하고 있었기에 아침에는 일곱 시가 조금 지나면 매일 교문에 나와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생들은 "아휴! 땡칠이(학생들이 부르는 김선생의 별명) 때문에 학교에 못 다니겠네." 라고 수군거리며 교실로 향했다. 그렇지만 김선생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을 무섭게 지도했다.
늦은 봄 수양버들이 축 늘어져 흐느적거리는 토요일 오후, 학교 근처의 체육공원에 가서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테니스를 쳤다. 몇 경기가 지나고 김선생 팀과 우리 팀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김 선생은 서비스가 강했다. 첫 서브를 받는데 어찌나 센지 손도 못 대었다. 내 짝인 이 선생이 두번째 서브를 받는데 역시 에이스였다. 세 번째는 다시 내가 받는 차례…. 그런데 김선생이 라켓을 하늘로 올렸다가 '팍'하고 친 공이 순간 보이지 않더니, 네트의 폴대를 맞고 튀어 심판인 안선생의 머리를 '탁'하고 때렸다. 구경꾼과 경기자들은 "테니스를 많이 쳤지만 희한한 일을 다 보겠네"하며 깔깔 웃었다.
김선생은 자기 경기를 마친 후 잠깐 보이질 않더니, 조금 지나 비닐봉지를 덜렁덜렁 들고 와서는 큰 소리로 "잠깐 쉬었다 합시다."하고 손에 든 것을 펼친다. 막걸리와 양념 손두부가 보였다. 내가 한 잔을 권하니, 다른 때는 못 하는 술이건만 그 날 따라 벌컥 들여 마신다. 얼굴과 등으로는 땀이 흐르는데, 한 잔의 막걸리를 들이키니 시원하게 넘어간다. 김선생은 막걸리 겨우 한 잔에 벌건 얼굴이 되어 "난 이제 취해서 더 이상 못 뛰어" 하고는 벤치에 앉아 구경을 했다. 그리고 멋진 장면이 나오면, 벌떡 일어나 "나이스 볼"을 외치며 즐거워했다. 김선생은 운동, 바둑, 그리고 등산, 노래 … 등, 거의 모든 것에 감초처럼 빠지지 않았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멀리 서쪽 하늘로 뉘엿뉘엿 지는 해가 저녁노을을 붉게 만들고 있었다. 그 날도 교무실 한 구석의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김선생이 "난 요즘 자꾸만 다리가 아프거든. 테니스를 하려면 예전처럼 날쌔게 뛰기 힘들단 말야." 라며, 허연 다리를 걷어올리고 무릎과 종아리를 주무른다. 나는 "여보게! 김선생 벌써 갱년기가 온 것 아니오?" 하며 농담을 했다.
그 뒤 김선생은 시내의 소문난 한의원과 동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더 이상은 별일 없이 학교생활을 했다.
겨울방학이 되었고 다른 동료 교사들은 보충수업을 하지만, 나는 지난 여름에 이어 신촌에 소재한 대학교를 오가며 환경 부전공연수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김선생이 연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과제물 때문에 바로 병원에 들르지 못하고, 이틀이 지나서야 퇴근 후 병원으로 찾아갔다. 안내하는 아저씨에게 병실을 확인한 후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악수도 하기 전에 "어찌된 일이야. 김선생이 왜 여기에 와있어?"하고 물었다. 김선생은 아직은 검사 중이라며, 별로 불편한 곳은 없는데 무릎이 좀 아프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퇴원하겠지, 뭐…" 라고 했다. 우리는 오히려 김선생의 병 이야기는 보다는 방학중인데도 학생들이 고생이 많다는 등 대부분을 다른 이야기만 하고 헤어졌다.
그 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토요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학교에 출근한 날이었다. 김선생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백혈병…. 믿기지가 않았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와 같이 운동하며 뛰어다니던 그가 아닌가. 겨울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도 꿈쩍않고 교문을 지키던 그였다. 순간, 나는 철부지 때 갯가에 정성을 다해 쌓아놓은 모래성이 얄미운 물결에 쓸려 한쪽부터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바로 다음날 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실로 바로 들어가려 하니, 간호원이 "손님 우선 손부터 씻으세요.
그리고 이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세요."라고 한다. 병실문을 여니 흰 마스크를 쓰고 침대 위에 앉아있는 김선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곁엔 사모님이 걱정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다. 김선생은 '림프모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나오긴 했는데, 일단 의사가 더 관찰해 보자고 했다며 착잡한 모습을 보였다.
긴 겨울방학도 지나가고 또다시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3월말이 되니 김선생은 학교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김선생과 얘기를 해보니, 아직은 초기이기 때문에 몸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잘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김선생은 지금도 학생부장인 것처럼 눈에 거슬리는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호통을 치며 지도하고 있었다. 김선생의 모습을 보니, 심각한 병은 아닐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난 후, 김선생은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다시 입원하였다.
또다시 입원하기 위해 학교를 나서는 김선생의 뒷모습을 보고, 착잡한 마음을 추수리면서 나는 김선생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료 교사들도 모두 김선생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성금을 모아 병원으로 전달했다. 아이들에게도 김선생의 투병소식을 알렸다.
학생들은 회장단을 중심으로 김선생님 돕기 운동을 빠르게 펼쳤다. 백혈병의 치료를 위해 헌혈증이 필요하게 되자, 많은 학생들은 자기의 피를 뽑겠다고 모여들었다. 나는 즉시 적십자 혈액원으로 헌혈차를 불렀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 북부지역에는 말라리아의 유행으로 단체헌혈이 임시 중단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하는 수 없이 희망하는 학생들은 각자 혈액원을 찾아 헌혈을 하라고 일러줬다. 우리 반에선 상훈이, 승환이, 경근이, 세진이, 태식이, 유철이, 대영이, 두엽이 …가 참여했다. 그리고 다른 반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두툼하게 헌혈증이 모였다. 또한 학급별로 모금운동을 펼쳐 모인 성금을 헌혈증과 함께 병원으로 보냈다.
김선생은 달포 정도 지나 다시 학교에 출근하였다. 먼저보다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점심은 사모님이 직접 싸주는 도시락을 들었다. 빈 시간에 얼굴을 마주치면 " 난 빨리 나아 얼큰한 메기 매운탕도 먹고, 테니스도 치며 재미나게 생활을 할꺼야" 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김선생은 여름방학을 맞아 병원과 집을 오가며 병마와 싸웠다.
가을 학기의 시작과 때를 맞춰 김선생은 또다시 학교에 모습을 보였다. 머리가 다 빠져 가발을 쓰고 흰 마스크를 한 채 … 김선생의 얘기를 들으니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 이젠 집을 처분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집을 팔면 다섯 식구들은 어떻게 살 것인지 걱정을 했다. 게다가 완치되려면 골수이식을 해야하는데 가족들의 골수검사를 해보니, 그것도 맞는 것이 없단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골수기증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우리 학교의 힘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인터넷을 이용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생각하였다. 교육정보과의 손선생에게 물어 전자우편에 대하여 배우고, 인터넷 ID도 만들었다. 그리고 김선생의 투병모습과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도교육청 홈페이지의 대화의 광장에 올렸다. 한국교총의 홈페이지에도 "40대 교사 투병 중"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띄웠다.
며칠 뒤 도교육청의 유 장학사로부터 내용을 묻는 확인전화가 왔다. 이어 교육감께서 맨 먼저 금일봉을 보내 주셨다. 바로 다음날엔 교총에서도 나에게 김선생의 투병내용을 자세히 묻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교총관계자가 회장님의 금일봉을 입원 중인 김선생에게 직접 전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또한 교총에서는 「꺼져가는 생명을 도웁시다. 화정고교 김 선생님 힘겨운 백혈병 투병에 제자와 동료교사, 교원단체 발벗고 나서」라는 보도자료를 각 일간지의 기자들에게 배포하였다. 드디어 99년 10월 14일자 경기일보에 처음으로 김선생의 투병내용이 보도되었다.
나는 얼마 전에 장관으로부터 수상한 상금 전액을 김선생의 통장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컴퓨터에 앉아 김선생의 모교인 K대학교 홈페이지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 H, S, … 등, 여러 곳의 홈페이지에 김선생의 투병내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여러 매스컴의 독자 투고란과 홈페이지에도 많은 글을 올렸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거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9월말쯤에는 어렵게 모 방송국의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에 연결이 되었다. "아! 이제야 김선생 돕기가 잘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나는 방송국의 K차장과 작가에게 김선생의 투병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한 젊은 교사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TV에 방영하기로 약속을 받아 놓았다.
나는 김선생에게 얼른 이 소식을 빨리 알리고 싶어 바로 다음날 병원으 로 달려가 얘기를 꺼냈다. 김선생은 대뜸, 그렇지 않아도 어제 방송국에서 병실로 직접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선생은 "우리 주위엔 내 자식들보다 더 어리고 가정사정이 딱한데도 불구하고 몹쓸 병에 걸려 병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참 많습디다. …. 나를 위해 애써준 동료교사에겐 미안하고 방송국의 뜻은 고맙지만, 우선 그 분들을 우선 도와주시지요."라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는 것이다.
김선생의 얘기인즉, 그래도 교사로서 이 세상을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는 "나 이러니 도와주시오."라고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해서 이어놓은 고리인데 김선생이 그렇게 쉽게 외면해 버렸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앞섰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서는 김선생의 엄청난 용기에 놀랐다.
추석 때쯤 교육신문사에서 김선생의 투병모습을 직접 취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바로 S기자와 취재 날짜를 정하고 약속한 날 병원을 방문하여 취재를 도와줬다. 드디어 99년 10월 25일(월)자 한국교육신문에 "그를 다시 세우자."라는 제목으로 김선생의 투병소식이 병원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보도되었다. 처음으로 김선생의 투병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문에도 보도되고 인터넷으로 여러 기관과 단체에 글을 계속 올렸으나, 시간이 지나도 기대에 못 미치는 약간의 성금만 답지될 뿐이었다. 그 정도로 김선생의 치료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나는 며칠간 고민하다가 교장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교장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학교장 명의로 김선생 돕기에 동참해 달라는 공문을 발송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이 말씀을 들으신 교장선생님께서는 나의 뜻을 이해하시고 "좋은 생각이니 공문을 한번 발송해 보시구려" 라고 하셨다. 나는 즉시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젊은 교사를 살립시다."라는 제목으로 공문을 만들어 결재를 받고 고양시 관내의 모든 학교에 빠짐없이 발송했다.
일주일쯤 지나니 드디어 김선생을 돕는 온정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시내 S, Y초등학교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직접 우리 학교를 찾아와, 고사리 손으로 모은 성금을 전달하였다. B고교에서는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성금을 가지고 오셔서 김선생의 쾌유를 빌어주셨다. 그리고 어떤 학교에서는 직접 병원으로 찾아가 성금과 헌혈증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김선생의 통장으로 직접 성금을 입금시켰다.
이웃 H중학교에서는 전체 선생님들의 성금을 접수하고, 다음 날은 학생들이 모은 성금을 보내왔다. 그리고 친한 아이들 몇 명이 점심시간에 짬을 내 "김선생님, 빨리 나으세요."라는 글과 함께 성금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학교에서는 모든 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님들이 하나가 되어 김선생 돕기에 계속 나섰다. 어떤 학생은 저금통을 털기도 하고 용돈을 반씩 뚝뚝 떼었고, 어떤 학부모님은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선생의 통장에는 수십 개의 학교와 개인들로부터 사랑의 온정이 답지하여 성금의 입금내역이 메모지에 빽빽하게 쓴 글씨처럼 계속 찍혀 나왔다.
김선생은 늦가을에도 힘든 몸으로 학교에 나와 수업을 했다. 얼굴은 푸석한데다 여기저기 검은 반점이 박혀 있었다. 머리는 다 빠져 모자를 푹 눌러 썼고, 역시 하얀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한편 김선생 돕기의 모금 속도는 그 동안의 반응에 비하면 상당히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성원에 감동하여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고, 김선생이 빨리 나아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갖게 되었다.
또다시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김선생은 다시 입원하였다. 김선생은 내가 이 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희망을 가지고 투병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몸의 상태가 먼저보다 상당히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김선생의 병세가 좋아지고 있고, 성금도 많이 쌓여 가면서,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다. 겨울 보충수업 기간에도 가끔 병원에 찾아가 김선생을 만나고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웠다. "우리 교육계가 참 따뜻하지. 많은 사람들이 화롯불처럼 훈훈한 마음을 보내고 있으니 말야." 김선생은 빙긋이 웃으며 "난 참 행복해. 여기 병원에서 보니, 어린애들도 나 같은 환자들이 왜 그렇게 많아! 또 나보다 더 힘들게 병과 싸우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더라구.…"
김선생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한참 쳐다보고 나더니, "나는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있고, 또 여러 사람들이 격려의 전화를 해주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 저기 쌓인 편지들 좀 봐. 제자들이 나 빨리 나으라고 보낸 것들이야." 김선생은 사모님이 건네준 가제수건으로 볼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곤 "나 꼭 나아서 다시 학교로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새 천년 새해를 맞아 학교에 처음으로 출근한 날 아침 교감선생님께서 나를 만나자마자, "지난 크리스마스 때쯤 김선생한테 문병을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얼마나 마음이 걸렸는지 몰라요. 오늘 시간을 내어 나와 병원에 한번 다녀올까요." 하셨다.
"예, 그러지요."하고 보충수업이 끝나자, 나는 얼른 점심을 먹고 교감선생님을 모시고 병원으로 향하였다. 그날 따라 길 위로는 따스한 햇살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그러나 병실을 들어서서 보니 꽃 한 송이가 덩그러니 꽂혀있는데, 김선생은 그전보다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것이었다. 김선생은 몸이 괴로운 듯, 이리저리 뒤척인다. 그전처럼 말도 거의 않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교감선생님은 김선생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셨다. 나도 마음속으로 김선생의 빠른 회복을 빌었다. "며칠 있다가 맛있는 것을 사 가지고 다시 올께."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서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2000년 1월 8일 유난히 살 속으로 추위가 파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잠깐 창을 빼꼼 열고 밖의 바람을 맡는데, "따르릉 따르릉 …" 하는 전화벨 소리가 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오늘 새벽에 김선생이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교육가족들로부터 김선생을 살리기 위한 온정이 강물처럼 흘러들었건만, 김선생이 오늘 눈을 감았다니, 그야말로 맑은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향년 46세로 너무나 안타까운 젊은 나이다.
학교에서는 동료교사들이 속속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명지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지키며, 김선생의 장례준비를 했다. 그리고 각 학교에 김선생의 부음을 알렸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김선생의 비보를 듣고 문상객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수많은 제자들은 저마다 꽃을 들고 하늘나라로 떠나신 선생님을 찾아와 슬픔에 잠겼다.
장례식 날 아침, 나는 학생회장이었던 한대현 군에게 김선생의 영정을 들게 하고 영구행렬의 맨 앞에 섰다. 나는 김선생과 함께 산 사람과 죽은 사람으로 나뉘어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김선생은 결국 건강한 몸으로 다시 제자들 앞에 서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저 세상 사람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방학중인데도 많은 학생들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교문으로부터 중앙 현관까지 촘촘히 양옆으로 서서 멍하니 선생님을 맞았다. 그리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선생님께 머리를 숙여 기도하고 빌었다.
"그 동안 몹쓸 병과 싸우시느라 고생하신 우리 선생님, 이제 영원히 아픔이 없고 기쁨만이 넘치는 세상으로 편히 가세요." 김선생은 제자들의 흐느끼는 슬픔의 눈물을 뒤로한 채 정들었던 교정을 천천히 한바퀴 돌고 교문 쪽으로 향했다. 교문을 나서 행렬을 잠시 멈추었더니, 김선생이 울먹이는 제자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 김선생은 그가 어려울 때 의지하며 찾던 성당에 도착하여 신부님 앞에서 미사를 올린 후, 장지로 향했다.
김선생은 사모님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식들을 남겨두고 대현이, 용근이, 학승이, 준호, 현준이, 준용이, 우람이,… 등 여덟 명의 제자들의 품에 안겨 머나먼 나라로 떠났다. 그 날 멀리 과천으로 전학갔던 새침떼기 허민이도 장지까지 와서 친구인 박인, 조혜진, 유금복, 고유미와 함께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선생님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장지에선 조문객들의 문상 속에 장례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몸을 녹이기 위하여 피운 모닥불이 찬바람에 사납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한장 남은 잔디로 봉분이 덮였다. "김선생, 잘 가시오. …" 나는 이 한마디밖에 못했다. 뒤로 돌아서려니 가슴속에 뭔가 꽉 박힌 듯이 답답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잠시 사람이 뜸한 곳에서 차를 멈췄다. 그리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김선생과 이년 여 동안 함께 했던 세월의 한 토막을 떠올렸다. 정신을 차린 다음 곧장 학교로 돌아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 동안 김선생의 쾌유를 빌며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던 수많은 분들에게 김선생 돕기의 마지막을 고했다.
"백혈병으로 투병중인 김 선생님께서 오늘 영면하였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김선생님은 여러분들의 애타는 기원을 뒤로하고 사랑하는 사모님, 그리고 귀여운 두 딸 정민이, 성연이와 막둥이 효섭이를 두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 동안 사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정성을 다해 병실을 지키며 간호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 그리고 동료교사들이 투병에 성공하여 반드시 일어나라고 뛰었지만, 김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없이 기쁨과 사랑만이 넘실거리는 하늘나라로 멀리멀리 날아가셨습니다.
저희학교에서 시작된 김선생님을 살리자는 사랑의 불씨가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져 모닥불처럼 활활 타올랐건만, 김선생님이 떠나고 보니 너무나 허전할 따름입니다.
김선생님은 오늘(2000.1.10) 고양시 시립묘지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고 고이 잠드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김 선생님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 동안 김선생님 돕기에 참여해 주셨던 수없이 많은 교육가족 여러분들의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높았던 사랑과 정성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후원의 물결은 겨울철 하얀 눈 속에서 송송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따스했습니다. 그리고 장강의 끝없는 줄기처럼 도도하였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 이른 새벽 동녘의 샛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라고…
- 소설 국화꽃 향기 발간(도서출판 생각의 나무)기념 체험수기 응모 수상작 -
'나의 글밭 >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 속의 시골학교 (0) | 2009.09.19 |
---|---|
학교장 회고사(080214) (0) | 2008.03.06 |
07년-9월 애국조회 훈화 (0) | 2008.03.06 |
숙직하던 날 (0) | 2008.03.01 |
유리새 연가 (0) | 2007.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