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의 시골학교
학교 건물의 뒤편 군부대와의 경계인 10m 높이 알루미늄 벽 위로 담쟁이와 수세미 덩굴이 경주하는 덕양중학교. 그곳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나는 재작년 이 학교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그때로 돌아가 본다.
삼월이라지만, 아직은 꽃샘바람이 뺨을 시리게 만드는 아침. 교직생활 29년 만에 교감으로 부임하는 날이다. 5개월째 병원을 오가며 투병 중인 아내의 축하한다는 말, 그리고 첫날인데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며 출근을 한다. 석도형 교장선생님께서는 척추 수술로 입원 중이시기에 내가 한 달 이상 교장업무를 대행해야 한다.
40년의 역사를 가진 덕양중학교의 입학식이다. 전교생이 165명인 소담한 학교, 소강당에 모인 학생들의 모습이 들에 핀 꽃처럼 싱싱하였다. 교무실의 선생님들을 비롯하여 교육행정실 직원들도 반갑게 만났다. 나는 선생님들께 첫인사로 저는 선생님들을 위해 이 학교에 왔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합하여 열심히 하자는 말로 첫 발자국을 찍었다. 나는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기에 병원에서 출근하고, 병원으로 퇴근하였다.
며칠 후 경기도교육청에서 실시한 교장회의에 참석하였다. 잘 아는 교장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 ‘김 교감은 두 계급 승진한 거네.’라고 농담을 건네셨다. 햇병아리 교감으로서의 업무가 조금은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교장선생님도 안 계신지라 선생님들과 열심히 학교를 끌고 바다로 갔다. 나는 선생님들께 ‘우리 작은 학교에 근무하는데, 대학교 때, 야학에 봉사활동 나갔던 기분으로 이 학교에서 최선을 다하자.’라며 앞에서 끌었다.
한 달여가 지나고 건강을 되찾으신 교장선생님께서도 출근하셨다. 교장선생님께서는 교감인 나와 대화하실 때면, 당신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앉으신다. 잠깐 나와 대화하실 때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씀하신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아 오신 훌륭하신 교육계의 선배님이셨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서 학생들을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졌다. 지역적인 영향인지 몰라도 아이들은 꿈이 없었다. 공부에 재미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하다못해 체육시간 외에는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 등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도 거의 볼 수 없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의 생활지도에 어려움을 겪고, 수업시간엔 학생들의 반응이 없어 허공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행정실의 기사들도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교감인 내가 봐도 우리 학교의 이런 모습은 뭔가 진단하고 치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전임 교감선생님은 정년퇴임을 하셨고, 현임 교장선생님은 정년퇴임 1년 전이셨다. 나는 문득 젊은 교장선생님을 모셔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교육청의 인사관리규정을 보았다. 하지만, 고양시처럼 (다)지역은 초빙교장을 모실 수 없었다. 실망을 가슴에 담고 차선책을 찾았다. 그러던 중 경기도고양교육청으로부터 내부형 학교장공모(교직경력 15년 이상인 자 응모 가능) 의사를 타진하는 연락이 왔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하겠다.’라는 대답부터 꺼냈다. 바로 교장실로 내려가 말씀드렸다. 하지만 교장선생님께서는 그것을 꼭 해야만 하느냐며, 부정적인 표정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그것을 도입하는 취지는 교장선생님 당신께서 학교경영을 잘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우선 교장선생님께 ‘알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교장실에 들어가 ‘우리학교의 변화를 위하여 공모제 교장을 모시게 해주십시오.’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리며, 교장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드디어 9월에 교장공모(내부형)를 교육청에 신청하였다. 그러던 중 10월 28일 내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아픔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동안 투병 중이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음을 추수를 시간도 없었다. 11월 중순 초빙교장 학교와 함께 우리학교가 내부형공모 학교로 지정되었다. 학교홈페이지, 교육청 홈페이지에 공고문을 냈다. 5명이 응모하였다. 처음 하는 일인지라 도교육청의 담당장학사와 전화통화도 하고, 직접 도교육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교육인전자원부에 문의도 하였다. 12월 말 드디어 학교운영위원회에서 2명의 후보를 선정하여 교육청으로 통보하였다. 며칠 후 새 공모교장이 발령을 받았다.
2008학년도 입학식과 함께 김삼진 선생님께서 우리학교 18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교장 자격이 없는 분을 교장으로 선출하였다고 친분이 있는 교장, 교감선생님들로부터도 내게 질시의 시선이 몰려왔다. 그러나 나는 덕양중학교의 미래만 보고, 새 교장선생님을 모신 것이었다. 나중에 결과가 좋으면 다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한쪽 귀로 듣고, 흘렸다. 새 교장선생님은 “덕양중학교 4년 비전보고서”를 앞세우고 선장이 되신 것이다. 비전보고서의 특징적인 것들을 보면, ‘구성원 협약방식’을 통한 규약이해 체제수립, ‘협동학습체계’를 통한 공동체적 학습, 맞춤형 진로교육, 사이버가정학습의 활성화, 대학생멘토링의 적극적 도입, 지역 NGO 등 네트워크 활용, 복지단체와 함께하는 교육, 가정방문 활성화 등이 있다.
우리학교는 공모교장의 부임과 함께 자율학교로 지정되었다.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드느라 교무부장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오천만 원이 우선 배정되었다. 그리고 변화를 시도하였다. 대학생멘토링을 도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푸른사과팀’, 이화여자대학교, 항공대학교 등에서 멘토학생들이 우리학교로 들어왔다. 그리고 경기도교육정보연구원에서 개설 중인 ‘다높이’ 사이버학습을 시작하였다. 행복하게도 우리학교에는 사이버가정학습의 전문가 김재범 선생님이 새로 부임하였다. 반크(사이버 외교사절단)의 박기태 단장님도 전일제계발활동에 강사로 직접 참여하면서 영어교육 일부도 첨가해 주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새로 들어오면서 선생님들의 업무가 많아지기도 하였다. 나는 교감으로서 선생님들이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아직 학생들의 반응은 작았다. 아직 멘토링에 참여하는 학생은 20여 명이었다. 반크활동도 기초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수업방법을 바꾸기 위하여 매주 목요일은 5교시까지만 하고, 전문화연수의 날로 만들었다. 한국협동학습연구회 대표 김현섭 선생님 등으로부터 몇 주가 연수를 받았다. 프로젝트학습 연수, 애니어프로그램, YP프로그램의 연수가 이루어졌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협동학습을 시도하는 과목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일제식 수업일 경우 학습력이 떨어지거나 산만한 학생들은 엎드려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협동학습이 시작되면서 자는 학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학생들의 변화에 선생님들의 사기는 오르고, 희망의 싹이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2009학년도가 되면서 초빙교사 두 분이 부임하였다. 정왕고등학교에서 3학년 담임을 하던 역사 김영식 선생님, 부일중학교에서 정희영 선생님이 전입되었다. 정 선생님은 부군이 수원에 직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근처의 무원마을로 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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