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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산문

숙직하던 날

by 광적 2008. 3. 1.

 

숙직하던 날 / 김춘기

 

 

 

북한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남이섬과 명지산이 자리잡은 곳, 그 곳에 가평이 있다. 계절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맑은 물, 호젓한 산과 어울리며, 도시의 찌든 때를 벗기고 가는 곳이다. 몇 해 전, 나는 그곳의 가평고교에서 근무하였다.

요즘이야 학교마다 보안경보장치를 설치하고 숙직 전담원을 둬서 선생하기가 얼마나 쉬워졌는지 모른다. 그 시절에는 한 달이면 두세 번씩 숙직을 했다. 그것도 남자교사들끼리 돌아가면서 .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든 적도 있다. "남자라 군대를 다녀왔는데 숙직까지도 우리만 해야 되나"

그래서 새로 학교를 옮길 때면 '그 학교에는 넥타이를 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고 궁금해하곤 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밤이 깊어지면, 불야성을 이루던 학교만 덩그마니 남아 적막이 감돈다. 그리고 학교에는 숙직교사와 서무실의 아저씨 단둘이 남는다.

그날도 H씨와 숙직을 했다. H씨가 미리 순찰을 돌며 문단속을 했다. 나는 자정쯤 손전등을 앞세우고 학교순찰을 했다. 숙직실과 연결된 본관의 복도에는 계단이 세 군데 있었다. 이 학교는 맨 아래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마다 방범셔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실내는 아래층만 돌면 되기 때문에, 타교에 비해 숙직하기에 한결 수월했다. 실외엔 운동장 건너편의 체육관 벽에 순찰함이 있었다. 그 옆의 나지막한 건물은 운동부의 숙소였다. 순찰 중 선수들을 살피니 낮에 재미난 일이 있었는지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얘들아, 내일도 아침부터 수업을 받아야 하고 연습도 있는데 어서 자거라." 이르고, 숙직실로 돌아왔다.

H씨는 피곤한지 고개가 한쪽으로 기운 채 숙직실 벽에 등을 기대고 "-우 푸" 코를 골며 졸고 있었다. 내가 창문을 잠깐 여는 소리에 펄떡 눈을 뜨며 "벌써 다 도셨어요" 했다. 나는 H씨한테 "두어시간 눈 좀 붙일게요." 하고, 요를 깔고 누웠다. H씨는 벽에 물방개처럼 붙어있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껐다. 고요한 밤을 TV소리가 살포시 흔들어 놓았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쾅쾅, 김선생님"하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퍼뜩 잠을 깨니 H씨가 "선생님, 보일러실에서 불이 ."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잽싸게 뛰어나가 보니, H씨가 보일러실 바로 옆에 있는 연못에서 양동이에 가득 물을 담아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일러에 물을 확 끼얹었다. 그러나 불이 꺼지기는커녕 불길이 더욱 거세게 위로 치솟았다.

나는 즉시 서무실 복도의 소화기를 가지러 뛰어 갔다. 캄캄한 복도에서 스위치를 더듬어 불을 켜고 얼른 소화기를 집었다. 보일러실로 달려온 나는 소화기의 호스를 보일러 쪽으로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거품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당황하여 안전핀을 뽑는 것도 잊고 방아쇠를 당겼으니, 소화기가 작동될 리가 없었다. 다시 안전핀을 뽑아내고 타오르는 불에 방아쇠를 당겼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꿈벅꿈벅하더니 금방 멎었다. 나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보일러에서 ''소리가 나더니, 다시 불길이 치솟는 게 아닌가!

나는 "H! 어서 소화기 가져와요. 교무실 복도에 있는 것, 저쪽 과학실 것" 내 말소리가 빨라지니까, H씨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나는 H씨가 가져온 소화기를 재빨리 작동시켜 보일러의 불길로 분말을 퍼부었다. 불이 주춤하고 일단 꺼졌다. H씨는 소화기를 계속 나르고 있었고. 다음 소화기를 작동시키니 이놈은 분말이 나오질 않았다. 저쪽으로 내동댕이치고 또 다른 소화기를 집는데 또 불길이 ''하며 솟아오른다. 순간 나는 "소화기로는 이 불을 도저히 끌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H씨에게는 계속 불을 끄고 있으라 하고 나는 황급히 전화가 있는 숙직실로 뛰어갔다.

투박한 다이알식 전화기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돌린다. " 드르륵 드-르륵 " 다이알은 왜 이렇게 천천히 도는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여보세요. 소방서지요. 여기 K학굔데요. 불났어요." 숙직실이 날아갈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전화기에서는 "어디요? 좀 작게 얘기하세요." 나는 다시 "가평고교입니다 가평고교, 불이 났어요. 보일러실에 불이." 전화기에서는 ",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딸그락"

다시 보일러실로 뛰어가 보니, H씨는 정신없이 소화기로 불을 끄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이젠 소화기도 다 떨어졌는데 어쩌죠? 큰일났어요." 하고 소릴 지른다. 여전히 불은 소화기를 쏠 땐 멎었다가 다시 치솟아 올랐다. "이젠 소화기마저 동이 났는데, 미치겠네."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H씨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야만 했다. 플라스틱으로 된 보일러실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뻘건 불 속에서 지글지글 녹아 내린다. 그 속에서 새파란 불꽃이 보이는데, 그것은 귀신의 눈빛이었다. 매캐한 냄새로 숨은 탁탁 막혔다. 이젠 불길이 후끈 달아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용광로가 따로 없었다. 드디어 불길이 지붕을 타고 오르려 한다. 곧바로 좁아빠진 보일러실이 꼭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애앵 애오애오, 번쩍 번쩍" 하며, 불자동차가 교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순간, 낭떠러지기를 향해 미끄러지다가 간신히 멈춰서는 느낌이었다. 불자동차가 도착하자마자 소방대원 몇 명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둘둘 말린 호스를 주루룩 빼더니 보일러실로 폭포수처럼 물을 내뿜기 시작했다. 나를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던 불길은 순식간에 잠들고 말았다.

숙소에서 경적소리를 듣고 뛰어온 선수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 저희들은 왜 안 부르셨어요." 나는 "아참" 하며,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 하였다.

정신이 없이 뛰다가 넋이 나간 나는 소방대원에게 "이제 불이 다 꺼진 겁니까?" 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소방대원은 보일러의 과열로 불이 난 것 같다며, 확인서에 서명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부웅'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고,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횅하니 교문을 빠져나갔다.

아이들도 다 되돌아가고, 나와 H씨는 그 자리에 멍하니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연못 옆의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친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타고남은 잔해와 소화기들이 전장에서 쓰러진 시체들처럼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은 물로 흥건한데, 시커먼 보일러 위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차린 후, 나는 S교장선생님께 결례인줄 알면서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 "교장선생님,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교사 김 인데요."하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금방 교장선생님께서 택시와 함께 나타나셨다. 그리고 얘기를 들으시더니, "김선생님, 수고했어요. H씨도 혼났구먼."하고 되돌아 가셨다.

나는 H씨와 다시 숙직실에 들어와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등뒤엔 흘렀던 땀이 식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날은 다시 밝아왔다.

이른 아침 숙직실 옆의 인쇄실에 가서 천장을 보았다. 검은 그을음이 보일러실 에서 인쇄실 쪽으로 삐져 나왔는데, 그것은 신부의 순백색 웨딩드레스에 더러운 물이 사납게 스며들어간 모습이었다. 인쇄실과 보일러실의 천장이 미세한 틈으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인쇄실은 복도와 이어진 구조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방차가 조금만 늦게 와서 저 불길이 인쇄실로 새어나와 거기에 그득히 쌓인 종이더미를 태웠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면 불은 다시 복도로, 그리고 교실 전체로 번졌을 것 아닌가

내가 잠깐 잠에 빠졌을 때, H씨까지 깨어있지 않았으면 또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일을 겪은 후, 나는 불에 대하여 예민한 습관이 생겼다. 집안에 소화기 비치, 가스의 중간밸브 잠금 확인, 자동차의 뒤 트렁크에 소화기 준비.

그리고 겨울이면 조·종례시간에 "불조심"에 대해 잔소리를 유난히 많이 하는 선생으로 변해 있었다.

 

-2000년 소방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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