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9. 6(수)
매년 8월 4째 주 일요일은 우리 종중의 벌초하는 날이다. 나는 금년에도 아내와 함께 고향 선영에 벌초를 하러 갔다. 아내는 고향의 시골집에 혼자 사시는 아버님께 정성을 다해 반찬과 음식을 만들어드렸다. 그리고 벌초하고 온 종중 어른들의 점심을 함께 준비하러 은영이네 집으로 내려왔다. 핏줄로 연결된 집안의 형수님, 아주머니들이 모여 콩국수를 만드신다. 열무김치를 버무리고, 가마솥에는 하얀 밥이 김을 폴풀 풍기고 있었다. 여자분들은 오랜만에 모여 눈빛을 주고 받으며 얘기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벌초를 끝낸 남자들은 사랑방과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걸걸한 목소리들과 함께 아주머니 손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동안 남자들은 집안 대소사에 대한 종중회의도 하였다.
나는 지난 일요일엔 연천에 계신 조상님들의 벌초 당번이었다. 나, 정기, 영기 형 셋이서 다녀왔다. 아내는 항상 내가 어떤 일을 할 때면, 알아서 준비물을 챙겨주었다, 또 일을 끝내고 오면 빈틈없이 정리해 준다. 힘들다 소리 한번 안 하고, 나와 가족을 위해 하는 일들을 재미로 사는 것이었다.
아내는 지난 주 친구인 김상분씨와 함께 시내의 한사랑내과에 가서 초음파검사를 했단다. 오른쪽 배에 무엇인가 만져진다고 말한 지 여러 날이 지나고 난 뒤, 이 날 처음 병원 진찰을 받은 것이었다. 무심한 나는 아내에게 ‘병원에 한번 다녀오지’라는 말만 던지고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이었다. 그런 아내가 친구와 함께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의사는 검사결과 담낭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은 아내는 바로 상분씨와 일산백병원에 가서 응급으로 CT촬영을 하였다.
나는 오늘 아내와 함께 그 CT사진을 보러갔다. 처남도 연락을 받고 누나가 걱정이 되는지, 어제 우리 집에 미리 와 있었다. 나는 2교시 수업을 뒷쪽으로 밀어내고, 10시 반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대에 서류를 제출하고 나니, 금방 내과 진료실에서 '윤여숙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의사선생님 앞에 앉았다. 의사는 모니터에 나타나는 CT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이전에 몸에 돌이 있지 않았느냐, 미열이 있지 않았느냐, 가려움증은 없었느냐 등, 특별한 증상이 있었을 거라고 가정해 놓고 묻는 것처럼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사진 속의 담낭을 가리키며, 그 속에 돌이 가득 차 있다고 했다. 따라서 간도 그 영향을 받아 좋지 않다고 했다. 의사는 환자인 아내를 보고는 잠시 나가서 대기하라고 한다. 그리고 보호자만 남게 되었다.
나와 처남은 잠시 긴장의 칼날을 쥐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내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내과의사 문영수 선생님은 말을 꺼냈다. ‘환자의 담낭에 들어있는 것은 돌도 문제지만, 암이 생겨 있습니다.’라는 말을 또렷하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담낭은 이미 다 망가져 있고, 암이 간에 까지 침입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내의 상태가 매우 안 좋단다. 그러나 아직 환자가 젊기 때문에 수술은 해봐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수술을 하면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의사의 시원한 대답은 없었다. 수술을 안 하면 어떻게 되냐고 다시 물었다. 의사는 한 6개월 정도 밖에 살 수 없을 거라고 얘기를 해 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말은 여기 일산백병에서는 수술하기 힘드니,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국립암센터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 곳은 담낭암의 의료진이 약하다고 얘기한다. 서울아산병원이나 세브란스병원, 서울대학병원, 서울백병원 등에서 선택하여 진료를 받도록 추천하고 있었다. 의사선생님은 그 중에서 서울백병원의 이혁상 원장님에게 수술받기를 권했다. 그리고 바로 진료확인증명서와 진료의뢰서를 끊어준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아내는 겉으로는 표정을 감추면서도 몹시 초조해 하는 것 같았다.
궁금해 하는 아내와 함께 수납을 하러 가는 사이에 아버지, 막내동생, 그리고 처제에게서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 모두 걱정이 되어서 급하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다. 큰아들 남인이도 전화를 한다. 엄마 어떻게 진단이 나왔느냐고 다급하게 묻는다. 나는 좋지 않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울먹이는 것이었다. 오늘은 학교 끝나는대로 왕십리의 원룸에는 안 들르고 바로 집으로 온단다.
나는 아내 바로 옆에서 차마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아내가 전화하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의 거리에 가서 전화를 받는다. 앞이 캄캄하였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머리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내는 왜 자기 앞에서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한다. 의사선생님과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내와 처남을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학교로 왔다. 그리고 4,5,7교시 수업을 정신없이 하였다. 평상시 남에게 환하게 보여주며 살던 내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증발해 버렸다.
나는 다른 날보다 일부러 일찍 퇴근하여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심각한 얼굴로 ‘나 암이지’하고 묻는다. 진료의뢰서에 나오는 Cancer라는 단어를 보고 아내가 ‘암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암으로 추측되는 것뿐이지,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할 따름이었다. 큰아들 남인이는 엄마가 아프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왔다. 어디서 언제 알아보았는지, 엄마를 위해 면역력을 높이는 음식이라며 현미, 우엉, 당근, 영지, 표고버섯 등을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것들로 야채수프라는 것을 끓인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한 아내는 그래도 식구들의 조반을 준비한다고 미역국을 정성스럽게 직접 끓인다. 아내는 자꾸 암이라고 병명을 스스로 정해놓고 되묻고, 또 확인하고 있었다. 속초에 사는 큰 처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일요일에 오겠다고 한다. 나는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 먼 곳에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처제는 언니에게 이번 기회에 성당에 냉담을 풀고 하느님을 만나러 가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울먹인다. 아내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더니,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으지 길게 통화를 한다. 나는 아내에게 그 동안 나가지 못했던 성당에 나가라고 얘기를 했다. 처남도 울적한 모양이다. 그래도 아내는 식사 후 식구들이 기분을 풀어야 된다고 하며, 돼지족발 집에 전화를 건다. 소주나 한 잔씩 마시라고…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난 소주 두어 잔만 마시고, 안주에는 손도 안 대었다.
온몸에 맥이 풀려 견딜 수가 없었다. 침대에 들어가 잠을 청하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나중에 내 곁으로 온 아내를 가슴으로 꼭 안아주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곧 돌아눕는다. 아내는 두 아들과 내가 불쌍하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훌쩍거린다. 나는 무슨 얘기냐고 화를 내고 말았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 새벽 3시였다. 아내 몰래 아들 방으로 갔다. 그리고 컴퓨터 옆에 놓아 둔 진료기록부를 확인하였다. GB(Gall bladder cancer), 분명히 담낭암. Invasion Liver 분명히 간까지 침범했다는 글자가 내 눈에 명확히 들어왔다. 3T or 4T, 3기 또는 4기… 손이 떨린다. 조용히 컴퓨터를 끄고 안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아내는 자는지, 자는 척하는지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잠보인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2006. 9. 7(목)
휴대폰의 4시 반 울림에 맞춰 다시 눈이 떠졌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지난 번 벌초하고 빨아놓은 운동화 끈을 꿰었다. 그리고 운동복을 입었다. 아내가 눈을 뜬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몸 상태가 쳐지고 있다고, 호수공원에라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아침에 선선한데 감기 들려고 어딜 가려느냐고, 그냥 쉬라고 한다. 잠도 오지 않던 나는, 결국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호수공원과 정발산을 넘어서 아침 운동을 하고 왔다. 그렇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았다. 목요일 아침, 분리수거하는 날이었다. 아내에게 오늘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자, 이번 주는 안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궁금하신가보다. 출근하기 전 아내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정말 어제 있었던 일들이 사실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이 떨렸다.
학교에 와서 전화기를 들었다. 아버지께 결과를 자세히 말씀 드렸다. 걱정하시는 음성이 전화기에서 귀청을 떨리게 만든다. 막내동생 정기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에서 맥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막내처제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마음 약하게 먹지말구, 우린 할 수 있어요, 형부 힘내세요.’라고. 교장실에 들렀더니, 어제 사모님과 병원에 갔다더니 어떠시냐고 물으신다. 말씀드렸다. 그러나 좋은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교감선생님도 걱정을 하며, 적당한 시간에 퇴근하여 아내를 돌보라고 하였다.
목요일 아침의 부장회의도 엉겁결에 진행하였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으니, 아이들이 1교시 수업이라고 내려왔다. 그래도 학생들에게는 내색하지 않고 교과서를 펼쳐들었다. 동료직원들에게도 담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가슴 속엔 쇠덩이가 들어가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입안은 쓰디쓰다. 어제 가입한 담낭암 인터넷카페에 들어가 ‘사랑하는 내 아내가 담낭암 진단을 받았다고 올렸다. 정말 막막하다고, 도와달라고…’
다음 주 월요일(9/11)날 서울백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의사선생님이 뭐라고 얘기할까? 걱정이 된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담낭암에 걸릴 확률은 암환자의 1%도 안 되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담낭암과 췌장암은 예후가 아주 나쁘다고 의사들이 진료경험을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도 그런 말들이 얼음 조각처럼 화면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정말 내 인생에서 최대의 시련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 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하였다. 퇴근길에 막내처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걱정 때문이다. 형부 힘내자구. 우리 가족 모두 힘을 합하여 언니를 살려내자구. 울먹이면서 하는 그런 얘기들이 내 마음을 자꾸 찌른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집에 들어갈 때는 눈물자국이 아내에게 보이지 않도록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확인하였다. 대문을 여니, 처남은 갔다고 했다. 아내 혼자 남아 내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훌쩍였나보다. 왜 눈물이냐고 물었다. 아내는 이 와이셔츠를 내년에 다시 다릴 수 있겠느냐고 내게 되묻는다. 아내는 혼자 있으면 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큰아들한테서 전화와 메시지가 자꾸 날아온다. 엄마하고 산책을 하라고 한다. 나도 그 생각이었는데… 아들과 마음이 통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다리미질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다렸다. 그 사이에 여기저기서 전화가 온다. 호곡중학교 최병국 교감이 방학 중 교감자격연수 때 못 와봤다고 내일 만나자고 한다. 나는 기분이 그렇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리고 일산동중학교 오인수부장이 전화를 한다. 내일 수원에서 교감자격연수 8분임 모임에 가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것도 집안사정으로 가기 힘들다고 하였다.
아내에게 공원에 나가 산책이나 하자고 하였다. 아내는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 있었다. 아내가 의사인 친정 조카에게 병원에 대하여, 의사에 대하여 전화로 묻는다. 그리고는 이미 예약한 서울백병원보다는 좀 더 큰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즉시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여 세브란스병원 진료와 입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아내와 TV를 보다가 저녁식사를 늦게 하였다. 아내는 밥맛이 없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제 아내가 끓여놓은 미역국에 밥 한 공기를 말았다. 잠시 후 아내와 함께 아파트 숲길을 따라 산책을 한다. 가로등 불빛이 다른 때보다 음습하게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호수공원 쪽으로 걷는다. 나도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의 손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내의 몸에도 열이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아내에게 열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었는데…. 아내가 자꾸 트림을 하고 있다. 속이 안 좋은 것일까? 레이크타운 쯤에서 발길을 돌렸다.
주점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즐거운 일로 저렇게 많이 모인 것일까, 속상한 일로 모여 앉은 것일까, 왜 저 사람들은 무슨 일로 집에도 안 가고 밖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까. 나는 아내와 ‘아이들 얘기, 지나온 얘기들’을 도란도란 나누면서 걸었다. 아내는 힘을 내겠다고 했다. 집에 오다가 두 번이나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아내는 TV의 아침마당에 나오는 부부들이 왜 그렇게 싸우며 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게 긴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고도 했다. 아내는 컴컴한 곳은 송충이가 나온다고, 가로등 빛이 밝게 비추는 벤치에 가서 앉자고 하였다. 어느덧 아내와 함께 우리 아파트에 도착하였다. 시계바늘은 11시 가까이에 와 있었다. 아내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눈이 노란지 보고 있다고 했다. 뱃속도 뜨끔뜨끔한 것 같다고 얘기한다. 나는 당신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말을 해주고 있었다.
잠깐 소파에 아내와 앉아 있다가 나는 아내에게 씻고, 일찍 자자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나보고 먼저 자라고 한다. 낮에 잠을 자서 잠이 안 온다나? TV의 ‘웃찾사’를 보고 잔다나? 굳이 아내를 끌고 오니까, 아내는 침대의 내 옆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내와의 시간들이 이렇게 소중한 것을, 그래서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처음 깨닫고 있었다. 그 동안 정말로 바보처럼 살았다. 빈 껍데기 세월을 살아온 것이었다.
2006. 9. 8(금)
아침에 일어나 생식을 얼른 타서 마시고, 아내에게 큰아들이 엄마를 위해 만들어 놓은 음료인 야채스프를 마시게 하였다. 아내는 오늘 은행에 가서 큰아들 서울 집 원룸의 세를 보낸단다. 내가 출근하면 하루 종일 아내는 혼자 있을텐데… 1교시가 끝나고 나니, 학교운영위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브란스병원을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내 전화번호와 아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점심시간에 식사하고 잠깐 집에 들렀다. 큰 처제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눈물을 훌쩍이면서, 잠깐 소파에 앉았다가 다시 학교로 왔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는데 울산에서 동생이 전화를 한다. 형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업을 하고나니, 잠시 후 운영위원장이 전화를 했다. 9/19(화) 11:30에 세브란스병원에 예약이 잡혀있다고 하였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명랑하게 전화를 받는다. 집에 일찍 들어간다고 하였다. 아내는 학교의 할 일 다 하고 퇴근하라고 한다.
일찍 집에 들어가니, 큰아들이 먼저 와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를 위해서 집에 오는 길에 이마트에서 여러 가지를 사온 것이다. 야채스프를 만들기 위하여 우엉, 무, 당근, 무시래기, 그리고 현미, 각종 녹즙을 위한 유기농 채소 등 양손에 가득 들고 왔다고 했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자식이라고 아빠인 나보다 더 엄마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저 놈이 아마 공부는 못하고 오직 엄마생각만 했을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각종 건강 서적을 찾아보고, 엄마 몸의 면역력을 높이는 보조식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야채스프를 병에 담고, 현미스프를 또 병에 담아내고, 녹즙을 만들고… 남인이와 유기농재료를 더 사기 위하여 농수산물센터로 갔다.
가는 길에 엄마에게 내색하지 말자고 하는 얘기했다. 엄마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그런 얘기를 아들이 아빠인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훌쩍거린다. 나도 가슴이 미어진다. 한쪽으로는 자식을 키운 보람이 있구나하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엄마를 위해서 휴학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아빠인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아들이 군대엘 갔다 오더니, 완전히 어른이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아내와 셋이 산책을 했다. 아파트 길을 따라 호수공원의 발마사지 하는 곳까지 걷고, 또 걸었다. 아내는 군대에 가있는 막둥이 남규가 보고 싶다고 했다. 만약 수술을 하게 되면 남규를 부르겠다고 했다. 어두운 밤길에서 나누는 우리 가족의 가슴 저미는 얘기들, 그러나 아내는 담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에 와서 나는 먼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와 큰아들, 두 모자는 늦게까지 잠에 들지 않고 있었다.
2006. 9. 26(화)
오늘은 세브란스에 진료예약이 된 날이다. 그러나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아 오늘 날짜로 연가를 내었다. 아침 일찍 안산에 사는 막내동생이 오늘 형수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전화를 하였다. 아침 10시쯤 아내와 차를 타고 자유로를 달린다. 가을 하늘에 옅은 구름이 덧칠 되어 날씨가 칙칙하다. 가을이라지만 차 안이 더워 에어컨을 켰다. 그러나, 아내가 춥다고 하여 에어컨을 껐다. 성산대교 북단에서 마포구청 방향으로 진입하여 연세대학교 근처에 가니 길이 막힌다. 11시가 조금 넘어 세브란스에 도착하였다. 소화기내과 대기실에 가니 처남이 먼저 와 있었다.
담당간호사에게 접수를 하고 대기를 하였다. 환자들이 밀려 30여 분 지난 후 의사와 면담이 이루어졌다. 담당의사는 송시영 박사다. 초조하게 진료실로 들어간다. CT와 PET자료를 검토한 의사선생님은 담낭암은 맞는데 그래도 빨리 발견하여 다행이라고 하였다. 보통 담낭암은 예후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아내의 경우엔 끈끈한 액체 같은 것이 뭉친 특이한 암이라고 하였다. 수술은 해야 하고, 아마 항암치료를 먼저 해야 할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리고 수술 후의 예후는 현재로서는 일단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보자고 말하였다. 잔뜩 걱정을 하고 진료실에 들어갔으나 그래도 ‘긍정적인 마음을 갖자’라는 선생님의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그나마 걱정을 조금이나마 털 수 있었다.
원무과에 가서 입원 예약을 하였다. 2인실인데 한, 두 주 사이에 입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 한가위 연휴 뒤 쯤 될 것 같았다. 아내는 아들 친구의 누나인 간호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신경을 써달라고 하고 있었다.
처남은 지난 일요일 벌초하러 밀양에 같다가 옻이 올라서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고, 피부과 병원에 가기 위하여 미리 집으로 가겠고 하였다. 나는 아내와 함께 일산으로 돌아온다. 아내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하여 이런 병에 걸렸냐고 내게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암이 온몸으로 퍼진 것 아니냐고도 하였다. 자유로 왕복 10차선의 차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을햇살을 휘젓고 달린다. 일산에 들어와 남원추어탕에 들어가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아내가 좋아하는 추어탕, 한 그릇씩 먹고, 2인분을 시켜서 가지고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로 왔다.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자꾸 온다. 고양교육청에서 2007학년도 인사예고제와 2006학년도 상반기 성과급에 대한 자료를 보내달라고 재촉이다. 집에 와서 잠깐 쉬었다가 학교엘 갔다. 교무실 사람들은 부장님 오늘 연가인데 어쩐 일이냐고 한다. 잠시 업무를 끝내고 “암을 이긴 사람들”이라는 카페에 가입하였다. 여러가지 자료 중에 담도암 자료를 탐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암 때문에 고민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많은 자료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버님께 전화를 통하여 오늘의 진료결과를 말씀 드렸다. 안산의 막내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수의 오늘 소식이 궁금한 것이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다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두 아들이 와 있었다. 휴가 나온 막내아들이 왕십리에 있는 큰아들 남인이네 집에 가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함께 온 것이었다. 아이들도 엄마의 상태가 예상보다는 덜 하다는 소리를 듣고 안도하려고 하고 있었다. 남인이는 엄마 해준다고 현미를 볶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남규는 청소기를 돌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내 여숙아! 우리 가족의 정성을 모아 병과 싸워 반드시 이겨주길 바랍니다. 요즘처럼 아내가 내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우리 두 아들과 내가 지켜주어야 할 내 아내여, 우리 집의 여왕인 유리새여! 모레 강원도 고성의 부대로 복귀하는 막내를 위하여 고기를 주문한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극한 상황이 와도 모정은 영원한 것이었다.
그래도 약간은 아내가 마음이 놓이는 건지 저녁밥도 하고, 주문한 돼지왕갈비도 굽는다. 나는 아이들과 소주를 몇 잔 하였다. 그리고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9시 반쯤 4가족이 운동을 나섰다. 편안한 복장으로 윗말공원을 지나 육교를 넘어 크리스탈교회, 태영플라자를 지나 호수공원에 들어선다. 아내가 조금 힘에 부치더라도 운동이 되도록 걸었다. 호수공원의 발마사지장에서 발을 디딜 때마다 아이들은 아프다고 야단이다. 남인이는 뒤꿈치가 아프다나. 아내와 나는 그래도 잘 견디면서 천천히 마사지를 하였다. 이렇게 소중한 가족,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내,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내 두 아들… 가로등 불빛을 별빛으로 생각하며, 걷고 또 걷는다. 오늘도 아내의 쾌유를 빌며 잠자리에 들었다.
2006. 10. 9(월)
한가위 연휴가 지나고 드디어 오늘 아내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는 날이다. 아내와 나는 병원에서 쓸 짐을 싸가지고 버스를 탔다. 9706 신촌행 좌석버스다. 아내는 겉보기엔 아주 건강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병원에 도착하여 간단히 수속을 밟고, 신관 18층의 2인실(1814호)을 배정받았다. 간호사가 환자복을 가져다주며 입으라고 했지만, 아내는 쑥스럽단다. 주치의는 먼저 진료를 보았던 송시영 교수이다. 내일부터 각종 검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병원에 아내를 입원시켰지만,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몰라 궁금하기도 하고, 또 걱정이 내 주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야! 그래도 우리 좋은 생각만 갖자고, 병원에 입원했으니까, 앞으로 잘 될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믿기로 하였다.
2006. 10. 13(금)
뭔가 이상했다. 지난 10일 날 세브란스에서 실시한 간조직 검사에서 잘못되어 결국은 복막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담관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아내는 계속 투여되는 항생제와 진통제에 취하고 또 취했다. 계속 혈액 속으로 들어가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는 결국 아내의 정신마저 혼미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입에서는 헛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목이 타는지 계속 입에 물을 묻혀달라고 한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조직검사를 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는 병원 측의 말에 낫겠지 하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그러나 오늘 오후 드디어 의사들이 회의를 하기 위하여 모였다. 그리고 바로 응급수술로 결정이 났다는 것이었다.
20시경에 아내의 환자복은 모두 벗겨졌다. 하얀 침대보에 싸인 아내는 이동침대에 실려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5층의 수술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불안해 하는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나는 큰아들, 처남과 함께 아내를 수술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잘 하고 나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수술실 문이 닫혔다. 우리는 환자대기실에서 착잡하게 기다렸다. 전광판에 "수술 준비 중 윤여숙", 잠시 후 "수술 중 윤여숙"이라는 빨간 자막이 다른 환자들의 이름과 함께 나타났다가, 숨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입에는 산소호흡기를, 코에는 위장에서 나오는 액체를 빼내는 호스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양 옆구리엔 불그스레한 색깔의 관이 꽂혀 있었다. 배에서 나오는 액체를 빼내는 것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엔 거무스레한 담즙을 배출하는 관도 함께 달려 있었다. 주치의 이우정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복강경수술 방법을 써서 담낭절제와 복막염을 처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절제한 담낭의 모습이 특이하다고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얘기했다. 혹시 암이 아닐지도 모르겠고…라고 하며, 간에서 계란만한 혹이 확인되었으나 오늘은 암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놓아둔 채 수술을 마쳤다고 하며, 급히 퇴근을 하고 있었다.
시계는 밤 11시를 더 지나고 있었다. 가뜩이나 복막염으로 상태가 안 좋아진데다가 수술을 하여 그런지, 아내가 몹시 힘들어 한다. 계속 마약류와 함께 진통제, 진정제, 구토억제제들이 아내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2006. 10 17(화)
아내는 4일간이나 중환자실에서 생과 사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1916호 일반병실로 이동하였다. 아직도 코와 양쪽 옆구리엔 여러 가지 호스들이 꽂혀서 불그스레한 액체를 배출하고 있었다. 의사선생님과 면담한 결과 다행히 절제한 담낭과 간조직에서는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따라서 담낭암은 아니라고 한다. 가장 고약한 암이 담낭과 췌장의 암이라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시원한 냉수를 한 잔 마신 기분이었다. 가을 바람 한 자락 쐬는 기분이었다. 일반병실로 이동한 아내는 가족 모두가 기대한대로 차츰 회복해 가고 있었다.
2006. 10. 30(월)
의사선생님이 오늘 다시 말을 꺼냈다. 이제 아내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간에 있다고 했던 낭종, 이젠 이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직 몸이 이런데 어떻게 수술을 또 하느냐고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면서 수술은 제발 다음에 하자고 얘기하였다. 그러나 의사선생님과 얘기를 해보니, 그 종양이 혹시 암인지도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차피 제거해야 할 것이라면 빨리 수술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단다. 나는 아내에게 '그것이 암이라면 암세포가 당신 뱃속으로 퍼져나가면 어떻겠냐.'고 힘이 들겠지만 어서 수술을 하자고, 결단을 내리자고 타일렀다. 아내도 결국 내 말에 수긍하고 다시 주치의에게 몸을 맡기기로 하였다.
오늘은 두번째 수술하는 날이다. 간의 가운데에 있었던 종양(이우정 교수 말로 오리알 크기의 낭종)을 절제하기 위하여 또 모험을 해야 하는 날이다. 아내는 얼마나 두려울까? 수술 계획에는 간의 한 쪽을 완전히 절제하여 1/3정도의 간만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양의 위치가 간의 정중앙에 있어서 한 쪽을 완전히 절제하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간의 남는 부분이 너무 적어 회복하기 힘들 것 같아 종양 부분을 중심으로 간의 1/4정도를 절제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은 그 수술이 간의 한 쪽을 완전히 절제하는 것보다 어렵고, 출혈도 많았다고 얘기하였다.
오늘 다시 대수술을 한 아내는 또 다시 우리에게서 아주 먼 나라처럼 생각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손을 깨끗이 씻고, 알콜에 소독한 나와 아들, 처남은 잠시 아내를 면회를 하였다. 여보! 하고 부르니, 아내는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는다. 그래도 지난 번 복막염을 수술하고 완전히 의식이 없던 때보다는 조금 덜한 것 같았다. 중환자실의 문이 닫히고 난 뒤, 기저귀, 청결깔판, 압박스타킹 등을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다가 중환자실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아내의 일반병실엔 다른 환자가 들어왔기 때문에 나와 아들, 처남은 잠시 후 일산으로, 왕십리로, 신림동으로 밤의 터널을 뚫고 각자 헤어져야 했다.
2006. 10. 31(화)
학교에서 급히 퇴근하여 병원으로 달려온 나는 급히 아내를 만나러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산소마스크를 제거한 아내는 하얀 어깨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아내의 양쪽 팔은 침대에 묶여져 있었다. 아내는 눈동자도 노르스름하고 얼굴도 옅은 해바라기색이었다. 황달이 온 것이었다. 간호사는 담즙이 잘 배출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였다. 내일쯤에나 일반 병실로 갈 수 있을 것이란다
의사가 떼어낸 거즈 아래의 아내의 배엔 수술자국을 꿰맨 자리가 보였다. 복부의 명치 바로 밑에서 배꼽의 아래까지 YKK 지퍼를 밀어올린 것 같이 보였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수술자국의 길이는 30cm도 넘는 것 같았다.
잠시 정신을 차린 아내는 자신의 수술하고 꿰맨 그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내는 앞의 커튼을 내려달라고 간호사에게 말하고 있었다. 여자로서 맨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가 쑥스러운가 보다. 내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힘내라는 말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께 우리 아내를 꼭 살려달라고 하는 수밖에… 나는 며칠 후에 확인될 아내의 조직검사 결과에서 이상이 없기만을 바라고, 바랄뿐이었다. 부처님께, 하느님께, 돌아가신 조상님들께 마음 속으로 빌고 있었다. 부디 암세포가 정말 없는 깨끗한 결과만 생각할 뿐이었다. 나와 아내를 아는 모든 사람들 또한 그렇게 기원하고 있었다. 나도, 두 아들과 함께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희망을 가슴에 가득 담고 있었다.
우리가 고민을 하거나말거나 고봉산 능선과 정발산 자락은 색옷을 갈아입으며, 발 밑에 수북수북 가을을 쌓아가고 있었다. 우리 집 베란다의 화초들은 베란다 대문이 잠긴 집에서 그들끼리만 있어서 그런지 내가 집에 갈 때마다 엄마는 어디에 갔느냐고 묻는다. 내가 대문을 열면 짙은 향기마저 잊어버린 채 물끄러미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는 그것을 볼 수도 없었고, 나도 또한 그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아내만 낫는다면 무엇을 바라겠는가. 아내가 병을 털고 집으로 돌아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막둥이 제대하여 우리 가족이 무릎 맞대 길, 매일 서로 손을 잡고, 뺨을 만지길 바라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에 김치를 걸쳐 먹으며, 거실에 오붓하게 모여앉아 눈을 맞추며 사랑의 꽃을 활짝 피우는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밤을 즐거운 얘기로 하얗게 지새우는 행복한 날들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사랑하는 내 아내야, 유리새야! 그리하여 당신의 눈부신 얼굴이 우리 집을 환하게 만들어 주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2006. 11. 3(금)
오늘도 학교에서 16:30 퇴근하자마자 집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9706번 신촌행 시내버스를 타고 졸면서, 깨면서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한다. 신촌에 닿으니 벌써 길거리는 어둑어둑해졌다. 그제 중환자실에서 나와 1117호 병실에 있던 아내는 다시 19층의 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낯선 사람들이 있는 병실보다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고향 같은 191병동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처남과 큰 아들이 병실에 있었다. 아내는 매일매일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다. 코로 들어가는 산소의 공급도 끝났고, 왼쪽 옆구리의 복수액을 배출하는 관도 잘려졌다. 그 자리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담즙의 배출은 며칠 전부터 멈추었다. 걱정이 되었던 황달수치도 내려갔다. 췌장염의 상태도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강현종 의사선생님이 수술부위를 소독하고 자세하게 상태를 알려준다. 회복이 잘 되고 있다고 했다. 절제된 간낭종의 조직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조직에 염색을 하여 세밀하게 암세포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직도 배에는 담즙배액관, 소변줄, 오른쪽 옆구리의 복막액 배출장치, 그리고 목의 정맥으로 들어가는 여섯 줄기의 영양제, 항생제 호스 등이 달려 있었다. 아내는 조금만 움직이면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렸다. 목에서는 가래가 나오려고 하는데 기침을 제대로 하지도 못 한다. 억지로 뱉어내는 것은 마른 침이 약간일뿐이었다. 처남도 가고, 아들도 가고 나와 아내만 병실에 남겨졌다. 아내는 너무 아프다며 제대로 된 몸을 만들어 집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걱정을 한다. ‘대수술을 했으니, 얼마나 힘에 부쳤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아내의 마음이 되어 내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내는 아직도 미음조차 먹을 수 없었다. 물로 약간씩 입만 축이는 정도였다. 그래도 대변을 보고 싶다고 화장실엘 가려고 한다. 많은 호스줄기를 정리하고 화장실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배가 아파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엉덩이에 변기를 대주니 억지로 나온 변은 토끼 똥만한 거 한 개뿐이었다. 밤새도록 변을 보고 싶다고, 배가 아프다고 하였다. 그래도 그제보다 어제, 어제보다는 오늘 아내의 눈동자가 더욱 탱글탱글해지고 있었다. 아내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조직검사에서 제발 좋은 결과가 나오길 빌 뿐이었다. 그래서 빨리 아내의 병이 샘물처럼 맑게 낫길 기원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아내. 내가 사랑하며 한 세상 살아가야만 할 운명적으로 만난 아내 유리새야!
2006. 11. 7(화)
오늘도 오후 4시 반에 퇴근하여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간다. 오늘은 멀리 동해안 고성 아야진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는 막둥이 남규가 왔다. 청원휴가를 7일 받아서 나온 것이었다. 아내는 남규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가보다. 간호사실에서 보호자를 부른단다. 의사와의 면담이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강현종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고, 먼저 ‘아내의 조직검사 결과가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의사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암세포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원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의사선생님의 입에서는 암세포가 발견되었다는 소리가 정확하게 내 귀로 들어왔다.
순간 나는 다시 숨이 멈춰지고 있었다. 함께 있던 처남과 아들 둘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주 월요일 절제한 간의 낭종에서 암세포가 정말 나온 것이었다. 그러면 무슨 암입니까? 간암인가요? 아니었다. 대답은 담도암이었다. 그럼 몇 기쯤 됩니까? 1기에서 2기쯤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회복 후 암세포의 박멸 차원에서 항암치료도 해야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다시 병실에서 혼자 무슨 얘기를 하느라 안 금방 들어오지 못하나 생각하며 궁금해 할텐데…
병실에 들어와서 나는 아내에게 암세포가 아주 조금은 있는 것다고 얘기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예상 밖의 결과를 듣고 다시 충격에 휩싸인다. 순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저 순수한 내 아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려 괴로워해야 하나. 이것은 우리 가족 모두의 아픔이고, 고통인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큰 아들이 엄마를 위로한다. 병 문안을 온 큰 아들의 친구 후성이와 중강이는 왜 병실에서 얘기들이 자취를 감추었는지도 모르고,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잠시 병실 밖으로 나갔다.
큰 아들은 엄마에게 이미 수술을 통하여 암을 제거했으니 괜찮을 거라고. 작은 아들도 엄마가 힘을 내어야지 낫는다며, 엄마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리고 따뜻한 손으로 엄마의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래도 아내는 티슈를 계속 축축히 적시고 있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는 것 같았다. 아내는 엄마로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옆에서 가만히 있어 보라고 식구들에게 얘기한다. 아이들이 아빠인 내 저녁식사 걱정을 한다. 나는 생각에도 없는 밥을 먹겠다고 터덜터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병원에서 가격은 헐하지만 맛이 괜찮은 강된장 비빔밥을 시켰다. 아내는 지금 암 확정 선고를 받아 놓고 마음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생각이 없는 이 놈은 밥을 목으로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내가 잘 하는 건지, 덜 떨어진 인간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병실에 들어와 처남과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아내와 둘이 남아서 긴 밤의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내에게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우리 희망을 가지고 회복하자고 의사선생님을 신뢰하며 치료하자고, 이 어두운 터널을 반드시 헤쳐 나가자고… 이 말 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깊어가는 밤과 함께 나는 아내 생각조차 잊은 채, 꿈 속으로 빠져 들어가 있었다.
2006. 11. 8(수)
학교에 출근하여 아침에 병실로 전화를 걸어보니, 큰 아들은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엄마의 결과를 들어보겠다고 회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인데, 아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 때 병원에 도착하여 물어보니, 주치의 선생님은 수술 일정이 빡빡하다며 그 때까지도 회진을 돌지 않았다고 한다. 간호사의 얘기는 의사선생님이 수술 끝나고 바로 퇴근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밤 여덟시쯤 의사선생님 두 분이 오셨다. 주치의 선생님 바로 밑의 김준영 선생님과 강현종 선생님이었다. 아내는 왼쪽 배가 불편하다고 하였다. 의사가 만져 보고는 특별히 이상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간호사실에서 아내의 배가 아프다고 찍은 엑스선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의사선생님과 함께 화면을 보았다. 아직 장의 운동이 활발하지 않아 배에 가스와 변이 차 있는 것이라고, 다른 이상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김준영 선생님으로부터 아내의 현재 병의 상태를 자세히 물었다. 간내담도암이라고 하였다. 진행정도는 어떻게 되냐고도 물었다. 아내의 종양은 특이하여 정확하게 말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 굳이 말한다면 2기에서 3기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앞으로 완치 전망은 어떻게 하냐고도 물었다. 의사가 하는 얘기는 젊은 사람의 암은 아주 독하다고 했다. 젊은 사람의 튼튼한 세포 사이에서 발생하는 암세포는 노년의 암보다 좋지 않다고 했다.
컴퓨터에 들어가 보면, 인터넷에서는 담도암이 예후가 좋지 않다고 눈엣가시가 되어 내 눈을 찌른다. 그 못된 담도암의 섬뜩한 장면들을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큰 바위에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병실에 들어와 아내에게 우리 빨리 회복하여 운동도 하고, 식이요법도 하여 이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말을 하였다. 아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고 있었다. 내 손은 아내의 옷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아내의 깡마른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내는 시원하다고 하였다. 저녁식사는 장모님께서 싸서 보내주신 김밥으로 대신하였다. 장모님께서는 김밥과 하얀 쌀밥, 그리고 정성이 가득 담긴 반찬을 만들어서 처남 편에 병원으로 보내주신 것이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내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해다 주시는 음식 같았다. 오늘은 남규의 단짝 친구 정훈이가 제대하여 병실을 찾아왔다.
아이들은 돌아가고 다시 아내와 나만 병실에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졸음은 애 그렇게 쏟아지는지, 아이들이 가는 것도 억지로 보고 나는 잠의 수렁에 빠진 것이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 깨어보니, 새벽 한 시였다. 아내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도록 도와주고는 또다시 잠의 수렁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것도 새벽 다섯 시 반까지… 나는 얼른 눈을 뜨고 아내에게 물 한 모금 먹여주고, 용변을 도와주었다. 환자복을 갈아 입혀 주고 가방을 챙겼다. 밖에서는 아무 생각없는 빗줄기가 음정을 높이면서 19층의 병실 창문에서 아스팔트 바닥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하루의 첫장을 신촌에서 넘기고 있었다. 일산으로 가는 77번 버스에 실린 내 몸은 꿀잠에 깊이 깊이 빠져 들었다.
2006. 11. 9(목)
아침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동안 못했던 분리수거를 하였다. 신문은 신문대로 모았다. 페트병과 깡통은 구두 발로 꾹꾹 눌러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재활용품들을 경비실 앞에 내어다 놓고 급하게 각각의 부대자루에 던져 넣었다. 두유를 담는 비닐 팩을 넣는 곳을 옆의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그것을 직접 받아서 바로 뒤쪽의 주머니에 넣어 준다. 순간 따뜻함을 느꼈다. 매주 아내가 하던 수많은 일 중의 일부였다. 그런데도 내 등엔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달포 전부터 우리 집엔 사람들이 없었다. 목마른 화분 옆에 내려앉은 적막만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내 발자국만 들락날락 하였다. 가끔 베란다 문을 열 때마다 바람만이 거실로, 방 안으로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도 아침을 먹자마자 후다닥 학교로 출근하였다. 그러나 출근길이 막혀 목요일 부장회의가 시작되는 5분전에 학교에 도착하였다. 교무부 선생님들께서 미리 회의준비를 말끔하게 해 놓았다.
아내를 핑계로 개학을 하고부터 학교 일을 소홀히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우리 교무부 선생님들께서 열심히 일을 해주고, 교장, 교감선생님께서도 나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퇴근하여 병원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막내처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의 병세가 어떤지 묻는 것이다. 최종 조직검사 결과 암세포가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처제는 순간 실망의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그러나 어쩌겠냐고 정성을 다하여 간병하여 꼭 완쾌되도록 하자고 목소리로 합의를 했다.
오늘도 9706번 시내버스에 오른다. 행신동 쯤 가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눈을 떴을 때는 버스가 연세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급히 병실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얼른 병실 복도 쪽을 휙 돌아가니 큰아들이 강현종 의사선생님과 이야기하면서 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 이우정 주치의 선생님과 얘기를 했는데 수술한 아내의 차후 치료에 대하여는 숙고 중이라고 얘기한다. 담도암 부분이 완전히 절제되었다고 본다고 하였다. 따라서 과연 추가로 ‘항암치료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를 생각중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아내와 나, 그리고 두 아들 네 가족이 병실에 모여 앉아 얘기의 꽃을 피운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엄마에게 희망의 촛불을 켜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저녁은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내 아내요, 내 두 아들이다. 나는 딴 일 제쳐두고 오늘도 아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일산의 집 대신 세브란스병원에서 매일 자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나는 가장 행복했다. 사랑하는 내 아내야!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투병하여 꼭 두 아들의 씩씩한 엄마로 나의 사랑하는 아내로, 그리고 든든한 맡 며느리로, 친정의 소중한 맡딸로 다시 태어나길 바랍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유리새여…
2006. 11. 17(금)
막둥이 남규는 지난 월요일 강원도 고성의 부대로 다시 돌아갔다. 막둥이가 귀대하기 전날 밤 아내는 또 눈물을 가득 달고 있었다. 아직도 엄마의 사랑이 많이 필요한 막내둥이가 휴가라고 나왔는데 따뜻한 밥 한 그릇 챙겨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섭섭하다고, 미안하다고 하였다. 자신은 병원에 살면서 매일 生과 死를 넘나들면서, 온몸을 잘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아무리 같은 부모지만 역시 母性은 위대한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오늘은 아내의 48회 째 생일날이다. 새벽에 막내처제에게서 축하메일이 왔다. 조카 승재한테서도 메시지가 왔다. 나도 휴대폰을 꺼내어 축하의 메시지를 내 앞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보냈다. ‘마누라 생일을 축하한다고, 얼른 나아서 즐겁게, 재미나게 살자고’
그리고 오늘은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었다. 학교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감독으로 출장을 가서 휴교를 하여 나는 아내의 병실을 지키고 있다. 아침 7시 반쯤 강현종 선생님이 병실을 방문하였다. 아내의 복강 내에 흐르는 담즙과 복막액이 나오는 두개의 관을 잘랐다. 그리고 옷핀을 꽂아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멈추게 하였다. 며칠 전부터 관찰한 것을 토대로 내린 조치였다.
그러나 두어 시간 후 주치의인 이우정 교수가 회진을 왔다. 복강에서 나오는 관을 보자고 하더니, 거즈를 다시 풀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복강에서 아주 느리게 흘러나오는 담즙과 복막액의 혼합 액체가 호스 속에 응고되어 있었다. 그래서 담즙과 복막액이 흘러나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우정 교수은 호스 속의 응고된 가느다란 덩어리를 핀셋으로 제거하였다. 한 쪽의 호스는 빼낸 다음, 다른 쪽 호스에는 다시 복강에서 액체가 나오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주머니를 장치하였다.
아무래도 담즙의 배출 때문에 좀 더 입원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실 밖으로 휙 나갔다. 낮에도 아내의 배에서는 주머니(모양이 수류탄을 닮아 환자들 사이에선 '수류탄'이라고도 부름)에는 담즙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한 낮의 창밖은 초겨울 햇살이 서럽게 부서지고 있었다. 여의도에 물구나무를 서있는 63빌딩, 그 옆에 다정히 손잡고 있는 LG쌍둥이 빌딩, 목동을 상징하는 하이페리온 빌딩, 그리고 스모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오밀조밀한 아파트와 연립주택들, 그리고 연세대학교 앞을 지나는 차량들이 서울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점심이 들어오고 나는 아내의 밥상에서 아내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밥에 막내처제가 보내준 깻잎과 고추절임과 함께 새롭게 입맛을 만들었다. 나는 신자는 아니지만, 침대 옆에서 카톨릭교 기도서를 꺼내어 병자를 위한 기도문을 펼치고 아내에게 읽어줬다. 그런데 내 목에서 울컥하고 무엇인가 솟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에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기도문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부부를 위한 기도문을 사랑을 담아 읽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내 아내의 병을 꼭 낫게 해주시리라 기도한다,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간청해 본다.
저녁 때 서쪽 스카이라인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은 서해 어느 바다의 일몰처럼 장엄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큰아들에게서 전철소리와 함께 전화가 왔다. 생일 축하 케이크를 사가지고 가도 되냐고, 그리고 또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잠시 후 아들이 바람을 몰고 들어왔다. 아담한 케이크가 아들의 손과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 큰아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셋이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케이크에 아내 생일 회수만큼의 촛불을 밝혔다.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생일축하 노래도 불렀다. 옆의 침대에서도 이를 알아보고, 병실 가족들이 모두 박수와 함께 밝은 얼굴로 축하해 주었다.
아들이 엄마의 두 발을 깨끗이 씻겼다. 등도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아들이 엄마를 정성스럽게 간병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母子間의 정이 모세혈관 속의 따뜻한 피처럼 붉게붉게, 끈끈하게 흐르고 있었다. 시골에서 혼자되신 아버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어미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신 것이었다. 나는 어미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남인이도 왕십리 원룸으로 갔다. 나는 아내의 침대에 함께 앉아 야윈 등을 쓰다듬었다. 까칠한 다리도 주물렀다. 그리고 아내의 병이 빨리 완쾌되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있었다. 블라인더가 닫힌 병실은 다시 적막과 함께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2006. 11. 26(일)
어제 아침에 보았던 청명한 도시의 풍경은 어디로 가고, 스모그에 찌든 연탄재빛 일요일 아침이 창문을 열고 있었다. 빈혈증상이 있는 아내에게 어제 저녁부터 A형 혈액이 들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혈뇨가 나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생리까지 시작되어 아내의 증상이 복잡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본 아내는 어지러움에다가 열이 오르는지 계속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몸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 있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아내는 이대로 죽는 것 아니냐고 또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아침식사도 생각이 없다고 했다. 막내처제가 보내온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말아 주니, 몇 숟가락 뜨다만다. 다른 날 병실 복도를 돌며 하던 운동도 오늘은 하기 싫다고 한다.
간호사에게 연락을 하였다. 인턴의사가 들어와 상태를 본다. 그리고 수혈을 하면 남의 피가 내 몸에 들어오기 때문에 일종의 거부반응으로서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기다려보라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 나가버린다. 잠시 후 강현종 선생님이 들어와서 아내를 살폈다. 소변검사를 한 다음 비뇨기과에 의뢰해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했다. 오늘은 풍동중학교 최돈규 교감선생님 영애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러나 갈 수가 없었다. 전화로 축하한다고,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였다.
아내의 상태가 나쁘고, 기분이 좋지 않으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우울하다. 안산에 사는 막내동생이 아버님께 가기 전에 병원을 들렀다. 형수의 상태를 본 동생과 제수씨도 어두운 얼굴이었다. 남진이도 함께 왔다. 여자병실에서 간병을 하다 보니, 화장실 사용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매일 화장실에 가서 세면을 하였다. 잠시 휴게실에 들러 밖을 내다보니, 봉은사 뒷산의 단풍은 이미 퇴색하고, 초겨울이 여기저기 앉아있는 것이었다. 점심때쯤 큰 아들이 왔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점심도 누룽지 불린 것을 조금밖에 못 먹은 아내는 하루 종일 운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면서 낮과는 달리 상태가 많이 좋아진 느낌이었다. 아내는 아들이 깎은 과일을 병실의 환자들에게 직접 가져다 주기까지 하였다. 눈빛도 많이 맑게 보였다. 그러나 아직 혈뇨는 변화가 없는 것 같아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2006. 11. 28(화)
오늘도 아내의 상태는 완전히 흐림이다. 먹구름이 짙게 병실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 3층 현관에서 강현종 선생님들 만났다. 수술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회복이 되고, 호전이 되어서 퇴원도 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해서 걱정이라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CT사진을 찍어볼 계획이라고 했다. 의사가 걱정을 하니, 내 근심은 두 배가 되었다. 병실에 들어가니, 아내는 운동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저녁식사도 거의 못 했다고 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고 했다. 옆구리의 복막액을 빼내던 호스는 오늘 이우정교수가 제거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부분이 아픈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담즙이 나오는 곳도 배에 관이 박혀 있어서 그런지 많이 아픈 것 같았다. 큰아들 남인이가 가고 나서도 계속 아내는 숨을 쉬기가 힘들다고 하였다. 막내동생 정기한테서도 형수가 궁금하다면서 전화가 왔다. 내 가라앉은 목소리는 바로 아내의 상태가 되어 전화선을 타고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간호사에게 아내의 호흡의 곤란을 얘기하니, 산소호흡기를 공급해 준다. 내가 잠 들었다가 깨면, 아내는 잠도 못자고 열이 나는지 계속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호전되는 듯하면, 기분이 좋아지다가 상태가 안 좋아지면 금방 기분이 어두워진다. 어서 아내의 병마가 말끔히 씻겨 나가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내일은 아내의 상태가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아내의 침대 밑 간이침대에서 오늘도 잠자리에 들었다.
2006. 12. 8(금)
나는 퇴근하여 아내가 먹을 과일(사과, 바나나, 토마토 등)을 홈플러스에 가서 샀다. 저녁을 먹을 땐, 기분도 그렇고 해서 소주를 한 잔 했다. 그리고 얼른 병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소주 때문인지 몰라도 버스에서 눈을 떴을 땐, 신촌을 훨씬 지나 광화문이 보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서울역을 돌아 다시 신촌의 명물거리에서 내렸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서 병원에 도착하였다. 버스 안에서 받은 전화는 막내동생 정기였다. 형수가 궁금하여 전화를 한 것이었다. 형수의 피검사 결과를 남인이에게 들은대로 좋다고 전해주었다.
계속 혈액의 적혈구 수치가 불안하여 걱정을 하고 있던 차였다. 병실에 도착하여 초저녁에 본 아내는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큰아들 남인이는 월요일부터 시험이라고 했다. 아들은 토요일, 일요일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엄마한테 올 수가 없다고 했다. 아들은 엄마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학기말시험 때문에 왕십리의 원룸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아내와 함께 병실에서 밤을 맞이한다. 오늘도 병실 창으로 보이는 시내의 야경만 눈부시게 창문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2006. 12. 9(토)
아침에 강현종 선생님이 담즙관 소독을 하였다. 비타민K가 들어가는 주사는 너무 아파서 아침에는 맞지 않았다. 아내의 조반은 장모님께서 만들어 보내주신 추어탕이었다. 얼린 상태로 냉동실에 보관한 추어탕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상에 올려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것을 조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수저를 놓았다. 점심 때부터는 아내의 체온이 또 자꾸만 올라갔다. 아내는 운동도 못하였다. 몸은 엿가락처럼 완전이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얼마나 힘이 들면 아내가 저렇게 하고 있을까.
이상하게 내가 아내의 옆에 있으면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간병을 제대로 못하는 것인지 반성을 하게 된다. 저녁때는 체온이 39℃를 넘어 해열제가 링거액을 통하여 투여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얼음팩을 채워서 옆구리에 끼고 아내는 누워 있었다. 저녁 때는 목에도 베개 대신 얼음주머니를 받쳐주었다. 다행이 해열제를 투여한 후 조금 열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2006. 12. 10(일)
아침엔 또 혈액검사를 하느라 ,주사기의 바늘이 아내의 피부를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아내의 양팔은 온통 주사바늘 자국이었다. 숙달된 간호사들이라지만 아내의 혈관은 숨어들어가 찾기 힘든 것이었다. 아침에도 세 군데를 찌르고 나서야 간호사는 채혈을 하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좀더 실력이 좋은 간호사가 왔으면 좋겠다.
10시쯤 김준영 선생님과 강현종선생님의 회진이 있었다. 아내가 오늘도 계속 불편하다고 하니까, 의사는 배를 여기저기 눌러본다. 혈액검사의 결과는 적혈구의 수치가 지난 금요일보다 낮게 나왔다고 하였다. 다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리고 내일은 영상의학과에서 담즙의 흐름을 보는 담관촬영(Cholangiography)을 한다고 했다..
아침부터 항생제가 투여되었다. 의사선생님이 나가고 조금 있다가 오후에 CT촬영이 있을 예정이라고 한다. 점심때가 조금 안 되어 다시 비타민K 주사를 놓는다. 아내는 너무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나는 아내의 엉덩이를 내 팔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문지른다. 안산에 사는 막내동생 정기가 제수씨와 함께 왔다. 죽을 사가지고… 항생제를 맞아서 그런지 아내의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 점심식사 후부터 아내는 다시 금식이었다. 오후 5시쯤 아내는 휠체어를 타고 영상의학과로 가서 CT촬영을 하였다.
그래도 저녁때 아내가 운동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걱정을 많이 하신다. 아내의 회복과 함께 내 건강까지 걱정을 하신다. 어서 아내가 병마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 모든 걱정이 풀렸으면 참 좋겠다.
2006. 12. 23(토)
아내가 드디어 퇴원하는 날이다. 며칠 전 아내는 가슴의 간 절제수술을 한 자리에서 나오고 있는 담즙을 밖으로 뽑아내는 시술을 하였다. 그리고 항생제를 계속 투입하면서 몸의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산의 집에 가서 승용차를 몰고 달려왔다. 자유로에서는 신나게 자동차의 가속기를 밟았다. 차는 성산대교를 뒤로 하고 마포구청 쪽으로 나와 어느새 병원에 도착하였다.
아내도 기분이 참 좋은 것 같았다. 아마 처녀 때처럼 가슴이 발랑발랑 뛰는 것 같았다.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아내는 어제, 큰아들 남인이를 시켜서 화려한 넥타이를 하나 사놓았다. 거의 매일 병실에 와서 자신에게 설명해 주고, 돌보아준 강현종 선생님께 드릴 선물이란다.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보살핌을 받았던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웃음을 섞어서 고맙다면서 고급 케이크를 전해 준다. 또한 191병도 간호사 선생님들께도 빼놓지 않고 선물을 전한다.
사랑하는 아내는 집으로 가는 것이 그렇게도 고맙고, 좋은가보다. 여고시절 소녀처럼 설레는가 보다. 나는 보험회사에 제출할 진단서, 의무기록 사본, 입/퇴원 확인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은행에 가서 치료비 잔액을 결재하였다. 아내의 각종 검사결과 사진의 CD는 다음 번에 찾으러 오기로 하였다. 아내는 두 달 반 동안 입었던 환자복을 벗어놓았다. 겨울옷으로 예쁘게 갈아입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백합 같은 웃음을 계속 보낸다. 병실의 환자들, 그리고 보호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한다. 빨리 나아서 퇴원하시길 기원한다고 얘기하면서…. 병동의 장현진 간호사는 다음 번의 예약, 그리고 집에 가서 지켜야 될 것들에 대하여 얘기해 준다. 이제 간호사 선생님들과 인사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아내와 함께 집에 도착하였다. 조금 있으니까, 장모님과 처남도 집에 오고 있었다. 장모님께서는 당신의 몸의 일부인 딸을 간병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밤에는 퇴원기념으로 케이크도 잘랐다. 부디 우리 아내 완쾌하길 바라고, 바라면서...
2006. 12. 28(목)
아내가 퇴원하고 첫 번째로 병원에 가는 날이다. 장모님 혼자 집을 지키시고, 아내와 큰아들과 함께 병원으로 향한다. 자유로를 달릴 때, 자동차의 떨림이 아내의 배에 호스가 들어간 부위를 자극했다. 아내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강변북로를 지나서 사천교 부근 고가차도에 진입하니, 길이 막힌다. 여기까지 오느라 걸린 시간보다 고가에서부터 세브란스병원까지의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여 진료실에 들어가니, 이우정 선생님과 강현종 선생님이 보인다. 반갑다. 마음이 따뜻한 아내는 그동안 잘 치료해 주어 고마웠다고 고급양주를 선물로 주치의 선생님께 전해 드린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문진을 하고, 담즙배액관을 보고는, 강현종선생님께 치료해 주라고 한다. 아내가 처치실에 가서 누우니, 잠시 후 주치의 선생님이 왔다. 그리고 직접 주사기로 생리식염수를 이용하여 배액관을 시원하게 뚫어 놓았다. 이제 담즙이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1월 2일날 와서 자르고, 4일쯤 뽑을 예정이라고 말해 주었다.
다른 약도 없이 시술부위의 소독만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아내의 회복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어디 바닷가에라도 놀러 온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항상 기분이 이랬으면…
2007. 1. 2(화)
어제는 속초의 지연이, 지희, 지석이, 익산의 승재, 수정이가 외삼촌과 함께 우리 집에 왔다. 미리 서울에 와서 롯데월드에 가서 놀다가 이모가 힘들까봐 이제 온 것이다. 새해가 오고, 아내는 오늘 병원진료를 받으러 가는 것이다. 가슴에서 나오는 담즙관을 다리에 매고, 한강변을 힘차게 달린다. 담즙이 지난번에 처치를 받고 더 많이 나온다. 오늘 과연 자를 수 있을까?
진료실에서 주치의와 김준영 선생님이 반겨준다. 주치의 선생님은 담즙 배출량을 보더니, 잘 나오니까 좋은 거라며 다음 주(1/9)에 자르겠다고 하였다. 처치실에서 김준영 선생님으로부터 소독을 받는다. 아내는 궁금한 것이 많은가보다. 어떻게 복막염 수술을 했는지, 복막염 수술 때 장을 어떻게 씻어내는 지 궁금한 것이었다. 어떻게 복강경 수술로 뱃 속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너무 여러 가지를 자세히 물어본다고 생각했는지, 의사선생님 曰, 그런 것들은 우리 밥벌이인데 너무 일일이 다 물어보지 말라고 농담을 한다.
남인이는 집에 오자마자 속초에서 온 조카들과 함께 속초로 휙 떠났다. 동생인 남규가 강원도 고성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는데 내일이 제대하는 날이라고 가서 직접 데리고 온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떠난 집은 절간처럼 조용하였다.
2007. 2. 6(화)
아내는 집에 와서 한 달 이상을 그런대로 잘 지내왔다. 그런데 체온이 오늘따라 급격히 오른다. 37, 37.5, 38, 38.5℃…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아이들과 잠깐 상의했다. 그리고 아내를 급히 차에 태우고 식구들과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릴 수 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응급실에 우선 입원을 하였다. 권혜연 선생님이 담즙관 이리게이션을 하고, 병리검사실에서는 이런저런 검사를 한다. 다시 입원을 해야 한단다, 병실로 올라가야 한단다.
2007. 2. 12(월)
입원한 지 거의 두 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다시 퇴원하는 날이다. 퇴원 서류와 아내가 먹을 약인 후라질, 오젝스, 우루사, 고덱스, 르와콜 등을 처방 받았다. 일산의 우리 가족의 따뜻한 둥지, 집으로 향한다. 기분이 좋다. 아내도 즐거워 한다. 이제는 정말 아내가 다시 입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병원에 가는 것이 진짜 싫다. 사랑하는 아내야! 우리 힘냅시다. 그까짓 병 확 밀어냅시다.
2007. 2. 24(토)
또 아내의 몸이 불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눈을 보니, 황달도 왔다, 다시 두 아들과 함께 아내를 차에 태워 세브란스병원의 응급실로 또 달려갔다. 담즙관이 좁아져서 황달이 온 것 같다. 왜 자꾸만 열이 나고, 입원을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저 순수한 아내는 힘이 들까, 겁이 날까. 나는 그저 아내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아내와 함께 병원에서 밤을 지샌다. 아내의 병을 깨끗이 씻어내길 빌고 또 빌면서. 매일 아내와 세브란스병원에 있다보니, 여기가 우리 집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2007. 2. 28(수)
오전에 나온 혈액검사의 결과는 정상으로 판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상의학과에서 찍힌 CT판독결과, 영상의학과의 교수는 재발 가능성의 소견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내의 주치의 이우정 교수는 같은 CT판독결과를 염증소견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제발 주치의의 소견대로 아내 뱃속의 증상이 염증의 소견이길 바라고, 또 바란다.
우리 가족 모두는 영상의학과 고흥규 교수보다 주치의 이우정 선생님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나도, 아내도, 아들도… 그리고 영상의학과 교수를 불신하고 싶었다. 오늘 아내의 배에 꽂혀있는 PTBD 배액관은 굵은 것(FR 10.2)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식사는 점심부터 일반식으로 바뀌어 나오고 있었다. 내일, 모래면 나는 새 학교의 교감으로 승진하여 출근한다. 아내만 나아서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아내가 투병에 성공하길 기원해 본다.
2007. 3. 2(금)
병원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일산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덕양중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아 첫 출근하는 날이다. 병상의 아내는 병실을 나서는 나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덤덤한 척 했지만, 나도 가슴이 아팠다. 집에서 깨끗이 샤워를 하고 생식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며칠 전 내가 잘 다려놓은 와이셔츠를 차려입었다. 아내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성원을 듬뿍 담아 교감이 되어 첫 출근을 한다. 힘이 나지 않지만, 힘차게 출근한다.
서울 쪽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학교인지라 출근길이 꽉 막힌다. 첫 출근 날이지만, 교장선생님이 수술 후 치료 때문에 출근을 하시지 못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교장선생님을 대신하여 입학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출근길이 계속 막히고 있다. 덕양중학교는 총 6학급의 소규모 학교이다. 소강당에서는 180명의 학생들과 11명의 교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표학생으로부터 입학선서를 받고, 학교장의 환영인사도 내가 했다.
나는 선생님들을 위하여 본교에 부임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위하여 여기에 근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새 학교에서 새로운 학생들과 새로운 선생님들과 만나서 새롭게 교직생활을 펼쳐 나가는 것이었다. 아내만 건강해지면 참 좋겠다, 정말 원이 없겠다. 오늘도 아내의 회복을 빌며, 빌며 교감으로서의 첫날을 보낸다.
2007. 3. 15(목)
드디어 아내가 다시 퇴원하는 날이다. 새가 되어 날아가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사랑하는 아내야 기분 좋지. 이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마누라의 병이 분명히 낫는 거겠지. 아내와 나, 그리고 두 아들을 실은 승용차가 신나게, 신나게 자유로를 달린다. 아내의 배에 박혀있는 담즙관은 앞으로 6개월간 관 꽂고, 매달 1번씩 외래에서 관을 조금씩 굵은 것으로 교체해야 한단다. 양성협착일 경우엔 이 치료로 80%는 완치될 수 있단다. 그러나 20%는 재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치의의 소견은 분명히 염증일 것이라고 했다. 긍정적으로 보자고 했다. 이젠 우리 가족에게, 아내에게 좋은 일만 있겠지. 승용차가 집에 도착하고 뭐처럼 우리 가족들은 집에서 대화의 만찬을 나누며 새로운 하루를 정말 뜻 깊게 보내고 있었다.
2007. 3. 31(토)
오늘은 기분이 좋다. 작년에 아내가 발병한 후 바로 사 놓았던 차가버섯, 그것을 아내가 드디어 복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자작나무에서 채취했다는 그것, 몸의 면역력을 높여서 암 발생을 막을 수 있다는 차가버섯을 말이다. 그렇게 안 먹겠다고 하던 것을 아내가 먹고 꼭 낫겠다고 하니,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밖에 없었다. 아내의 병이 다 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가버섯은 한 번에 1g씩 아침, 점심, 저녁식전, 취침 전 하루에 4번씩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야, 아침에는 내가 타서 줄테니까, 정성스럽게 마셔서 꼭 암세포가 다시는 우리 집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자.
2007. 4. 29(일)
잔인한 달이라는 4월 마지막 일요일의 날씨가 참 화창하다. 역시 봄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뭐처럼 아내와 운동을 가기로 하였다. 남인이, 남규와 함께 식구들이 모두 성저공원엘 갔다. 나무의 초록색 이파리들이 바람에 찰랑거린다. 성저공원에 도착하여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는다. 아내가 여러개 찾았다. 남인이도 찾았다. 남규도 찾았다. 나도 네잎 클로버를 찾았다. 우리 가족에게 행운의 메시지가 오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아내의 얼굴이 유난이 예뻐 보였다, 꽃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아내의 웃는 모습은 백합보다도 더 눈부시게 보였다. 아내의 병이 이제는 저 멀리로 도망간 것 같다.
요즘처럼 아내가 고봉산엘 오르고, 정발산길을 걷고, 등촌칼국수집엘, 원당의 두부고을에 다녀오고, 라페스타를 갔다오고, 덕이동 로데오거리에 가서 아이들 옷을 사주고, 친구들과 롯데시네마극장 영화를 보러다니고…. 와! 정말 날아갈 것 같다. 사랑하는 아내야! 정말 좋다, 좋아. 참말로 이 세상이 우리 가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우. "그제처럼, 어제처럼, 오늘처럼…" 우리가족 늘 봄날의 꽃이 되어, 노랑나비가 되어, 너른 벌판을 가득 채운 푸른 들풀이 되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활짝 활짝 웃음꽃을 피우면서 살아갔으면 참 좋겠다. 나는 기원하고, 또 기원하였다.
2007. 5. 17(목)
계절의 여왕이라지만, 오늘따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조퇴를 하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실어 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아내는 내가 도착 후 조금 있다가 나타났다. 그래도 아내가 버스를 타고 병원엘 온 것이다. 지난번에 CT사진을 찍은 것을 보고 의사는 암의 재발을 의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5월 10일 MRI를 5월 14일엔 PET사진을 찍었다. 그 결과들을 오늘 보러 간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아내는 밤에 통증을 호소하면서 잠을 설치고 있었다. 가족들 모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처남 셋이 간호사의 호명에 따라 15:30쯤 진료실에 들어가 주치의 이우정 박사의 앞에 앉았다. 옆에는 최기홍 펠로우와 또 두 분의 의사가 있었다. 컴퓨터의 모니터를 주시하던 주치의는 결과가 좋지 않다고 말한다. PET사진과 MRI사진을 보여주면서 지난번 수술했던 자리의 아래 쪽으로 암세포가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빨리 암이 재발할 것을 예상 못했다고 했다. 주치의의 말로는 1990년 진료를 시작하여 이와 같은 경우는 처음 본다는 것이었다.
지난 주에는 힘이 들겠지만, 수술의 가능성을 말하였었다. 그러나 오늘 MRI와 PET의 영상결과를 보고는 수술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암이 자리한 곳으로 대동맥과 대정맥이 지나기 때문에 메스를 댈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아쉽게도 수술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부분이라 수술을 할 수 없다고, 사진의 판독결과를 얘기하는 의사의 그 소리가 내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찢는 것 같았다. 항암치료도 10% 정도밖에 성공 확률이 없다고 한다. 집에 가서 항암치료 여부를 잘 상의해서 알려달라고 한다. 항암치료를 하게 되면 송시영 박사가 한다고 했다. 그래도 아내는 또렷또렷하게 궁금한 것을 질문한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는다. 주치의는 1~2년을 보고 있었다. 앞으로 통증이 오면 진통제를 쓴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반 진통제, 다음으로는 마약성 진통제, 나중에는 신경을 차단하는 처치를 해야 한단다.
진료가 끝나고 처치실에 들어갔다. 최기홍 선생님이 들어왔다. 담관배액장치에 소독을 하면서 그래도 항암치료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얘기하고 있었다. 아내도 나도 무슨 답변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어깨를 침묵이 바위처럼 누르고 있었다. 방사선과으로 갔다. 아내의 담도에 꽂혀 있는 담관배액 장치를 교체하기 위하여 예약을 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 주 월요일(5/21)로 날짜가 잡혔다. 지난 월요일 교체 예정이었으나, PET를 찍느라 연기된 것이었다. 담즙배액장치는 끝까지 한 달에 한번 정도씩 교체해야 된다고 이우정 교수는 말하였다.
예약이 끝나고 다시 이우정 교수방으로 갔다. 며칠 전부터 아내의 오른 쪽 턱 아래쪽에서 식사 중에 볼록하게 튀어 나오는 것이 궁금했었다. 아까 진료 때는 미쳐 그것을 물어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시 진료실로 가서 아내를 주치의에게 보였다. 주치의는 침샘 때문인 것 같다고, 괜찮다고 하였다. 더 이상이 있으면 나중에 이비인후과에 진료하도록 조치한단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부터 아내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아 많이 고민을 해왔다. 아내의 병이 재발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그런데 오늘 재발이라고 하는 얘기를 주치의로부터 듣게 되었다. 다시 세찬 풍랑을 만난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남인이 남규가 있는데 이놈들을 장가보내고, 취직도 시켜야 하는데… 희망을 가지고 투병하던 아내에게 우리 가족에게 다시 절망적인 얘기가 전해진 것이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 아내의 병세가 호전되는 것 같아서 조금씩 마음을 놓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벼락인가. 왜 다시 이런 소식을 들어야만 하는가? ., 우리 가족은 다시 캄캄한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쩌나, 정말 어떻게 하나. 우리 가족이 다시 깊이를 모를 벼랑이 놓인 것이다. 생각하기 싫은 시련이 또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 소파에서는 막내 남규가 엄마의 등을 정성을 다해 쓰다듬고, 두드리고 있다. 막내동생 정기에게서 전화가 온다. 처제한테서도 온다. 아버지께서도 전화를 하신다. 좋은 결과를 말씀드릴 수 없으니, 가슴이 콱 막힌 것 같다.
아내는 처제와 담담하게 전화를 한다. 오히려 주치의가 자매 분들 간 검사를 해 보란다는 얘기를 했다며, 오히려 동생들 걱정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막내아들과 대화 중인 아내의 속마음은 어떨까? 아무래도 내가 속을 썩여서 아내가 병이 생긴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어떻게 하나.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헤쳐 나가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어제는 경기도교육청 제2청사에서 성보호 관련 교감연수를 받았다. 늦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헤치며 시골의 집에 갔었다. 아버님께서 상추, 머위, 돌나물을 뜯어 놓으시고, 또 겨우살이를 주셨다. 참나무 겨우살이와 밤나무 겨우살이를 내 놓으신다. 더 좋다고 하시는 참나무 겨우살이를 가져왔다. 아내는 차가버섯을 공복 시에 타 주는데 자꾸만 먹기 힘들다고 요즘엔 더욱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래도 나는 아내가 이것을 끈기 있게 마셔서 악마 같은 병이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내야! 사랑하는 내 아들의 엄마야! 우리 가정의 맏며느리야! 친정에서의 맏딸아! 기적을 만들자, 정말로 기적을 만듭시다. 부디 마음 궂게 먹고 못된 암을 이겨 나갑시다.
2007. 5. 27(일)
아내와 두 아들을 동반하고 정발산에 올랐다. 5월의 산이 푸르게, 푸르게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산에 오르니, 더욱 기분이 좋다. 정상의 평심루에서 내려다보니, 한강이 자유로를 따라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신도시의 아파트들이 봄을 만끽하면서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배가 아픈 아내가 힘들지만 함께 천천이 산에 오른다. 아내도 기분이 좋다고 하였다. 정상 근처에서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우리 가족의 사랑를 나눈다. 오늘따라 아내가 더욱 예쁘게 보인다, 꽃보다 더 사랑스럽게 보인다. 앞으로 자주 아내와 함께 정발산에도, 고봉산에도, 호수공원에도 가야겠다. 더 이상은 아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아내가 어서 투병에 성공하여 마음 놓고 산으로 바다로 갈 수 있어야 할텐데…
2007. 6. 2(토)
나는 두 아들과 함께 '아내의 병을 낫게 할 다른 방도가 없을까?' 생각해 왔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마음 먹었던 BRM이라는 것을 선택하기로 하고 오늘부터 아내에게 복용하도록 권하였다. 효모액티브, 알로에베라, 다린 물, 거기에다가 질경이, 민들레, 돌나물, 신선초, 케일 등을 함께 넣어서 만든 녹즙을 마시는 것이다. 서울 논현동의 비알엠연구소에 가서 처방을 받아온 것이었다. 아내도 함께 연구소를 다녀왔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먹고 꼭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우리 식구들은 함께 힘을 모았다, 정성을 모았다. 비알엠연구소의 박양호 실장은 담도암, 간암 정도는 쉽게 고칠 수 있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다. 여기 연구소 옆에도 담도암을 고친 할머니가 있다고, 직접 가서 뵙고 가라고 확신을 주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고향에서 혼자 사시는 늙으신 아버지도 며느리의 병을 고치시겠다고 질경이와 민들레를 직접 채취하러 다니고 계셨다. 나도 일산의 변두리 지역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열심히 민들레와 질경이를 뜯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엔 4시에 일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녹즙을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내에게 정성을 다해 먹이고, 또 먹였다. 아내에게 녹즙을 전할 때는 "감사합니다, 꼭 나으세요"를 설탕처럼 얹어서 준다. 아내도 역시 "감사합니다."로 대답을 하면서... 아내와 함께 나도 녹즙을 한 잔씩 먹기도 하였다. 아내는 힘들지만 정성스럽게 녹즙과 함께 식이요법을 하면서 병마와 싸우고, 또 싸워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야! 이 세상 모두보다 더 소중한 내 아내 유리새야! 당신 꼭 낫는 거지. 우리 힘내자고 녹즙을 내려서 건네줄 때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아내도 열심히 투병하여 뱃속에서 나온 우리 두 아들 직접 며느리 얻어 장가보내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2007. 7. 18(수)
오늘은 큰아들이 주는 녹즙, 액티브효모, 알로에베라, 다린물과 콩즙을 점심의 식전, 식후엔 들지 못하고 아침, 저녁에만 복용하고 있다. 아버지가 주신 겨우살이도 큰 아들이 우려서 엄마에게 들게 하였다. 어제 밤부터 배가 많이 빵빵하고 딱딱한 느낌이 든다. 오후부터는 배에 가스가 많이 차서 그런지 방귀를 자꾸만 끼고 있었다. 그리고 트림도 많이 했다. 그리고 어제 밤부터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다고 아내는 얘기한다. 약간 환각상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내는 점심식사 후 설거지도 하고, 저녁때는 아이들에게 제육볶음까지 해주고 있었다. 저런 몸으로 움직이며, 가족들을 위해 뭔가 하려고 하는 마음, 저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모정이리라.
2007. 7. 19(목)
오늘이 벌써 BRM 식이요법 48일째이다. 아내는 오늘도 콩즙을 제외하고는 녹즙, 효모액티브, 알로에베라 등을 모두 복용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우려 준 겨우살이도 두 잔이나 마셨다. 아침에는 배가 아주 홀쭉하고 말랑말랑하였다. 얼마 전 항암치료 준비를 위하여 찍은 영상사진에서는 아내의 병 진행상태가 좋지 않게 나왔다. 그래서 오늘은 미리 예약한대로 조퇴를 하고, 큰아들과 함께 서울 논현동에 있는 BRM연구소를 다시 찾았다. 맨 먼저 도착하여 1번 대기표를 받았다. 시간이 되어 첫 번째로 박양호 실장과 면담을 할 수 있었다.
지난번과 식이요법은 거의 그대로 하고, 달인물의 재료만 약간 변경하는 것이었다. 복수나 배가 빵빵한 것은 생강을 진하게 달여서 꿀과 함께 복용하면 좋다고 하였다. 박 실장은 아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오늘도 희망을 주고 있었다. 일산의 BRM연구소에 가서 식이요법을 위한 다린물을 다시 주문하였다. 먼저의 다린물은 많이 남아 있었다. 집에 와서 아내의 상태를 보니 오후부터는 배가 다시 빵빵하였다. 그러나 어제보다는 덜 한 것 같았다. 저녁때는 대변을 많이 보았다. 소변 색깔은 진하게 보였다. 진통제를 복용하고 말이 조금 많아진 듯 했으나 거의 정상으로 보였다. 저녁 때 아이들이 비파잎 찜질을 해 주고 있었다. 아내는 찜질 부위가 따갑고 아프다고 얘기했다.
아내는 저녁식사도 최근에 본 것 중, 많이 한 편이었다. 눈동자에는 황달도 부종도 없었다. 저녁을 먹은 아내는 욕조에 들어가 혼자서 팔, 다리를 목욕타월로 밀면서 몸을 닦는다. 나는 등만 밀어 주었다. 아내는 힘들지만 머리도 스스로 감고 있었다. 몸이 아파도 한 여자로서 깨끗하게 하려고 저렇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에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TV 시청도 하였다. 그러면서 다행하게도 어제보다 컨디션이 좋은 편이라고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2007. 7. 21(토)
토요일 오후 늦게 소파에서 낮잠에 빠져 있는 중, 비몽사몽 중에 안방에서 남규의 급박한 소리가 들린다. 얼른 뛰어가 보니, 실신한 아내를 막내 남규가 붙들고 있는 것이었다. 침대에서 남규와 함께 있다가 화장실에 간다더니 쓰러진 것이었다. 허겁지겁 119를 불렀다. 그 사이 정신이 든 아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피를 토하고 있었다. 사이렌소리와 함께 달려온 구급차에 아내를 옮기니, 잠깐 다시 실신을 하였다가 깨어난다. 경황이 없는 우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국립암센터로 구급차와 함께 갔다.
응급실에 들어가니, 이 병원에 다녔느냐, 다른 병원을 다니던 환자는 입원이 안 되느니 하면서 우리 일행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도 접수를 하고 처치를 받았다. 응급실 의사가 위장의 출혈이 의심된다며 코에 호스를 넣고, 산소를 공급하면서 위 세척을 하고 있었다. 소변 줄도 달고… 그러나 수혈을 해야 하는데, 피가 도착하려면 한 시간은 더 지나야 한다면서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권유한다. 상황이 안 좋다며 가다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주의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는 암센터에서 인턴 한 사람을 동행시켜 주었다. 129 앰블런스를 불러 나는 아들 둘, 그리고 의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으로 흐린 날, 초저녁의 어둠을 사이렌소리로 가르며 달려갔다.
세브란스병원에서는 Irrigatilon(위장의 내용물을 희석해서 밖으로 배출시키기)을 하고, X-ray를 찍는다. 이 병원은 현재 파업 중이다. 따라서 입원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이 응급실은 정상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내과의사는 위장, 또는 십이지장의 출혈을 의심하고 있었다. 위장 내시경을 해보고, 지혈을 한다던지, 조치를 취해야 한단다. 우선 적혈구 수치가 5정도로 떨어졌다며, 바로 수혈을 시작하였다. 혈압은 아주 낮았다. 맥박은 128회로 높게 가리키고 있었다. 심전도를 가리키는 파동이 계속 그려지고 있었다. 또다시 아내의 몸에는 해열제, 수액, 영양제 등을 공급하는 호스들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은 다시 푸석해 지고, 배는 부풀어 올랐다. 표정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토요일 밤에 네 식구가 병원에서 보냈다. 집에서처럼 두 아들은 엄마 옆에 꼭 붙어서 수발을 한다.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나보다 훨씬 낫다.
나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열 한 시쯤에 3층의 소파에 가서 눈을 붙였다. 에스컬레이터의 안내하는 소리와 모기소리가 귀 주위에서 얼씬거렸다. 잠을 청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2007. 7. 22(일)
새벽 3시쯤 다시 아내가 있는 응급실로 오니, 아들 둘은 엄마 곁에서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아내는 고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신음 중이고, 3부자는 의자에서 눈을 붙이면서 밤을 지샌다. 아침이 되었지만, 응급실엔 환자도 많지 않고, 적막만이 천천히 흐른다. 파업의 영향이라고 보여진다. 아이들은 아침을 먹으라고 해도 싫단다. 아내의 코에는 아직도 위장에서 나오는 액체가 나오다 멈췄다를 반복한다.
우리 네 가족은 졸다, 깼다를 되풀이한다. 점심때가 지나 잔소리를 하여 두 아들을 식당으로 보냈다. 잠시 후 처남이 왔다. 아이들이 오고 나서 나도 식당에 갔다. 뭣처럼 먹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내는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데 그래도 살겠다고 밥을 먹는 내가 측은하다.
저녁때가 되어 나는 일산으로 왔다. 국립암센터에 내려서 차를 꺼내고, 풍동의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를 잔뜩 넣었다. 그리고 아파트의 문을 연다. 냉장고에는 먼저 막내동생 정기가 사온 복숭아가 검게 변하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토요일날 사온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하여 원당의 올 터두부고을이라는 음식점에서 사다 놓은 두부전골이 기다리다 못하여 퀘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집안엔 여러 가지 옷들이 허전함과 함께 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있었다. 아시안컵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연장전까지 치르고도 득점이 없어 승부차기 끝에 힘겹게 이란을 누르고 4강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남인이한테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려주니, 병원에서도 사람들의 환호소리에 바로 알고 있다고 했다.
2007. 7. 23(월)
아침에 일찍 병원으로 출발했다. 9706번 버스를 탔는데 사람들이 많아 오랜만에 서서 서울엘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내는 푸석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두 아들은 어제 밤도 아내와 함께 했다. 아이들이 내가 할 일을 다 한다. 처남도 일찍 와 있었다.
아침에 온 내과의사는 오늘 위 내시경과 영상의학과 진료를 받는다고 하였다. 나는 간호사가 내준 동의서에 서명을 하였다. 불상사가 생기면 환자가 책임진다는 얘기들이다. 하다못해 수혈을 할 때도 간염 또는 에이즈의 감염 위험까지 동의를 구하라고 한다.
오전에 4층으로 가서 위장 내시경을 한다. 1층 본관에서는 파업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권영길이라는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놈이 와서 선동을 하는 것이었다. 아픈 사람들 목숨의 희미한 불꽃이 바람 앞에서 나풀거리는데 저자들은 자기들의 생존권을 달라고 병원에서 모든 것을 제쳐놓고,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후 1시가 넘어서 나는 학교로 왔다. 아내는 2시부터 영상의학과에 가서 담관에 박힌 관의 상태를 진찰받는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아내는 내시경으로 십이지장에 있는 출혈흔적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상의학과에서 실시한 담관 부분은 잘 내려가고 있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야! 오전 침대에서 아내를 포함 우리 가족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우리 두 아들 짝은 붙이고 떠나야하지 않겠느냐고. 정말로 당연한 얘기이다. 어미로서의 기본 의무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내야! 제발 투병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우리가족이 재기하게 만들어다오. 매주 일요일 정발산 꼭대기에서 햇님에게 달님에게 기도하던 그 마음대로 꼭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엄마 옆에서 열심히 간병하는 두 아들의 정성을 봐서라도 꼭 일어나 주길 바란다오. 내 아내여, 여왕님이여! 사랑한다우.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7. 7. 24(화)
세브란스병원으로 버스와 함께 퇴근하였다. 아내가 응급실에서 1666호 병실로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다. 어제 십이지장의 출혈이 잡힌 아내의 상태도 차차 나아져 내일부터는 미음을 먹을 거라고 의사가 말한다. 아내에게 새롭게 복용시키려고 주문했던 비알엠의 다린물은 가져오지도 못하고 돈만 송금하였다.
밖에는 막바지 장맛비가 병실의 유리 창문을 세게, 세게 때리고 있었다. 병실에는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들 남인이, 남규, 그리고 처남이 지키고 있었다. 저녁식사 후 처남은 보내고 우리 네 식구가 병실이 남아있었다. 2인실이라지만, 세브란스병원이 파업 중이어서 1인실이 되고 말았다. 16층 병동도 우리가 있는 쪽만 환자들이 있고, 건너 쪽은 컴컴하였다. 간호사들의 자리는 침대시트로 덮여있었다. 환자들이 있는 병실도 빈 침대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병실에서 함께 자고 싶다는 내 얘기를 들은 아내는 내게 일산 집으로 가란다. 9시가 넘어서 나는 식구들을 놔두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바로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2007. 7. 25(수)
새벽 2시가 좀 넘어서 잠에 빠졌다가 잠깐 화장실을 가려는데 전화벨이 세게 울렸다. 그러나 얼른 전화기를 들자 바로 끊어졌다. 화장실에 다녀오고서 다시 벨이 울린다. 남인이의 다급한 전화였다. 엄마가 다시 소화기에서 출혈이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소리와 함께 빨리 아빠인 나를 찾는다. 아내의 생명이 위태로운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 속에 나는 콜택시를 즉시 불렀다. 그러나 통화가 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일산3동사무소 옆 육교를 건너서 급히 택시에 올라탔다. 서울택시가 일산의 손님을 태워다주고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택시는 수색로를 따라 신호를 적당히 무시하면서 하나의 불빛으로 선을 그리면서 달린다.
새벽 3시 반쯤 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하여 아내의 손을 잡으니, 너무 차가웠다. 얼굴은 창백하여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거의 의사 표시도 없다시피 하였다. 의사는 코줄을 통하여 위장 속의 혈액을 씻어내고 있었다. 두 아들의 가슴과 함께 내 마음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내의 모습은 정말 응급상황이었다. 우리 가정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간호사들이 들락날락하고, 의사들이 위장으로 연결된 코줄에 멸균증류수를 주사기로 넣고 빼내면서 교대로 위장에 고인 혈액을 이리게이션(세정, 洗淨) 한다. 아내는 계속 춥다고 한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눈물도 자꾸만 나왔다.
의사는 위장의 세정이 잘 되고 어느 정도 출혈이 멈추면, 아침에 내시경을 통하여 지혈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출혈이 심할 경우엔 응급으로 지혈을 하는 수도 있다고 한다. 위장 세정을 계속 하면서 아침이 되었다. 호스를 통하여 나오는 액체도 어느 정도 말간 것이 진정이 된 듯 하였다.
아침 8시가 좀 넘어서 주치의 송시영교수가 잠깐 회진을 왔다. 잠시 후 내시경을 통하여 지혈을 한다는 말만을 남기고 급히 발길을 옮긴다. 잠시 후 아내는 대변이 마렵다고 하였다. 기저귀를 채우고 잠깐 있다가 보니, 대변이 아니라 피를 쏟는 것이었다. 침대는 붉은 피로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능숙하게 잘 처리하였다.
10시쯤 이동식 침대가 오고, 그 위에 아내는 옮겨졌다. 4층의 소화기 내시경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와 아들들의 잘 하고 오라는 소리와 함께… 입구에서 두 아들과 나는 초조하게 기다린다. 매점에서 사온 빵을 주면서 요기라도 하라니, 아이들은 싫단다. 남인이는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한다. 남규도 고개를 숙이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한 시간도 더 지나서 황세나 선생님이 나오면서 잘 끝났다고 한다. 잠시 후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열을 가득 안고 불안이 가득한 채로 가족들과 만났다.
아내는 다시 병실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조금 있다가 처남도 왔다. 두 아들은 오늘도 정성을 다하여 엄마를 간병한다. 나는 아내 곁에 있다지만, 완전히 엉터리이다. 나는방학 중 근무조를 핑계로 오후 1시 반쯤 학교로 향했다. 문서결재를 하고는 다시 이 글을 쓴다. 정말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저 기적이 일어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사랑하는 내 아내야!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기만 바랍니다.l
2007. 7. 29(일)
아침에 아내와 두 아들을 병원에 남겨두고 일산의 집으로 왔다. 버스를 타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밖을 쳐다보니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우중충하였다. 이마트에 가서 아내에게 줄 복숭아와 아이들이 먹을 반찬, 과자, 라면, 스낵류 등을 사왔다. 집에 오자마자 밥을 한 솥 하였다. 아이들이 병원에서 먹을 수 있도록 공기로 양을 재어서 비닐팩에 담았다. 냉장고에서 부추김치도 담았다. 점심 식사 후 한잠을 자고, 다시 밥을 한 솥 더 하였다. 아이들이 병원의 식당에서 사먹는 밥이 영 먹기 힘들다고 하여 내가 해가지고 가려는 것이었다.
저녁식사를 라면으로 때우고 배낭에 병원으로 가져갈 물건을 넣는다. 밥, 반찬(오징어무침, 부추김치, 깻잎, 메추리알), 복숭아, 파인애플, 아몬드, 스낵류, 컵라면… 9706버스를 타고 신촌으로 향한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내와 아이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얼른 밥을 꺼내니, 아들 둘이 맛있게 먹는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아내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내는 마약으로 된 옥시콘틴 진통제를 중단하고, 몰핀으로 만들어진 수액을 조금씩 투여 받고 있었다. 아내는 부른 배 때문에 계속 불편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주 보는 변의 색깔은 지난번 출혈 때문인지 겉은 검은색이고, 속은 담즙에 의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아내의 오른쪽 허벅지 위쪽을 통하여 혈관으로 들어가는 수액이 새는 것 같았다. 의사가 와서 보더니, 수액이 들어가는 부분을 실로 꿰매어 관을 고정해야겠다고 한다. 아내는 우선 소독만 하고 다시 보자고 하였다.
아내가 속이 메스껍다고 하면 혹시 출혈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어서 회복하여 미음을, 죽을 그리고 밥을 먹고 힘이 생겨서 침대를 내려오고, 그리고 운동을 하여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 사랑하는 아내야! 힘냅시다.
오늘도 두 아들은 병실의 밖에 거의 안 나가고, 제 어미를 간병하고 있었다. 우리 두 아들을 보아서도 당신은 병을 이겨야 합니다.
2007. 7. 30(월)
아침에 황세나 선생님이 들르고, 김승업 선생님이 와서 아내의 상태를 보았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얼른 회복하여 식사를 하고, 집에 가서 몸을 만든 다음 와서 항암치료를 하는 것이 1차 목표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치의인 송시영 교수가 다녀갔다. 환자에게 빨리 회복하라는 말과 함께 '가족들이 매일 다 와 계시군요.'라는 말을 남기고 나간다.
나는 9시쯤 학교로 출근을 하였다. 생활지도부장이 근무조였다. 1-2반 아이들이 나와서 청소를 하였다. 옥상에서는 방수공사를 하느라 시끄러웠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고양시 중학교 교감단 회장인 백신중학교 김만규 교감과 총무인 호곡중학교 최병국 교감이 우리학교를 방문하였다. 지난 7월 26~27일 고양시 교감단의 방학중 연수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줄 조그만 선물을 들고 온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점심 대접도 못하고 보내드려서 미안하였다.
퇴근 후 병원으로 가니, 처남이 와있었다. 아내는 미음 대신 죽을 먹고 있었다. 차차 나아져서 퇴원도 하고, 항암치료도 받고, 비알엠 식이요법도 하여 꼭 낫자. 내 아내야, 내 사랑 내 사람아!
아이들 속옷을 세탁하기 위하여 가방에 집어넣고 일산으로 향한다. 버스 안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초등학교 때 친구 승훈이다. 8월 1일쯤 학수엄마와 친구들이 병실로 오겠단다. 오지 말래도 오겠단다. 집에 와서 세탁기를 돌린다. 아직도 세탁기 다루는 것조차 서투른 한심한 놈… 아내의 친구 영숙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인 아내의 상태가 어떠냐고 문병을 오고 싶다고, 그러나 아내가 아직은 불편하다고, 사양한다고 얘기하였다.
2007. 7. 31(화)
아침에 의사가 회진을 돌더니, 아내의 피검사 결과 황달수치가 올라갔다고 한다. 그래서 CT사진을 오후에 찍는다고 9시부터 금식이란다. 주치의 송시영 교수는 밥 잘 먹고 좀 더 보자고 하였다.
잠시 후 외과에 있을 때의 주치의 이우정 교수가 다른 의사 2명과 함께 왔다. 아내의 상태를 보더니, 복수가 찬 것 같다고 하며 밖으로 나오란다. 암이 너무 빨리 번진다고, 외과적으로 별 방법이 없다고 한다. 다시 출혈이 생기면 곤란할 것 같다고 얘기한다. 앞으로 한,두 달 정도가 한계 같다고 내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이 병은 젊은 여자에게서는 나타나기 힘든 병이라면서, 가족 중에 형제자매가 있으면 검사를 꼭 해보라고 지난번에 얘기 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사실을 아내에게 얘기할 수도 없다. 아내에게도 정리할 시간을 주긴 해야 할텐데…
가슴이 먹먹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나는 아내에게 이우정 교수가 별 얘기 안 했다고 얘기하였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고, 출근하였다. 학교에서 병실로 전화를 하니,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고 한다.
2007. 8. 2(목)
어제 퇴근하니, 아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얼굴에는 황달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저녁도 먹지 않고 아내 곁을 두 아들과 함께 지킨다. 밤 9시쯤 아버지, 울산의 동생 가족, 안산의 막내동생 가족이 병문안을 왔다. 동생들은 낮에 들렀다가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온 것이었다. 낮에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한 옥수수를 동생이 들고 왔다.
아버지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내의 손을 꼭 잡으셨다. 그리고 '얘야! 왜 이렇게 못 일어나니. 어서 힘내어 일어나거라.' 하신다. 잠시 후 가족들은 안산의 막내동생네 집으로 떠났다. 식구들이 떠나고 아내에게 옥수수를 먹어보라니까, 오늘은 못 먹겠단다. 내일 먹는다고 한 개만 냉장고에 넣어 놓으라면서… 나머지 3식구가 옥수수를 허겁지겁 먹는다. 허기가 겹친터라 금방 다 해치운다. 몇 개는 간호사님들에게 드리고.
오늘 새벽 2쯤 아내가 대변이 보고 싶다고 한다. 변의 색깔을 보니 피가 섞여 있었다. 즉시 의사선생님에게 얘기하니, 확인하고 피검사를 한다. 결과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7정도로 낮게 나왔다.
다시 며칠 전의 십이지장 출혈로 생각하고, 코줄을 넣는다. 그리고 소변줄도 넣는다. 목 아래 어깨 근처엔 수혈을 위하여 국소마취가 이루어지고 혈관을 찾는다. 아내는 또 괴로워한다. 그리고 위장, 십이지장 내의 혈액을 코줄을 통하여 증류수를 넣어 주사기로 씻어낸다. 300~500cc 정도의 증류수를 넣으면 배가 부푼다. 그리고 이것을 주사기로 빼내는 것이다.
오늘도 수혈이 이루어진다. 항생제가 들어가고, 진통제가 들어가고, 구토억제제가 들어가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액체가 투명한 줄을 통하여 아내의 혈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의사들은 교대로 아내의 위장을 씻어낸다. 수혈이 계속 이루어지고, 혈액검사가 계속 이루어진다. 체온은 높은데, 아내의 손발이 차다, 나는 아들과 함께 손발을 주무른다. 다행이 아내의 손발의 온도가 올라가 준다.
아침에 김승업 내과선생님으로부터 면담요청을 받는다. 혈액검사 결과 헤모글로빈 수치는 떨어지고, 황달수치는 오른다고 한다. 둘 다 안 좋은 쪽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예후가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항암치료는 힘들 것 같다고도 한다. 나는 의사선생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밖엔 할 말이 없었다. 주치의 송시영 선생님도 아내의 상태가 불안하다고 한다.
눈물이 자꾸만 난다. 아내로부터 마지막 말을 받아놓고 싶어진다. 어차피 우리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는 것, 조금 일찍 가고, 늦게 가는 것 차이뿐이 아니던가. 아내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일러준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자고 하였다.
아내가 말문을 연다. 두 아들에게 '얘들아! 엄마가 너희들 제대로 돌봐주지 못 하고 일찍 가게 되서 미안하다.'고 한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나도, 아들도 눈물이 난다. 나는 열심히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그리고 두 아들을 이만큼 키워놓았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얘기해준다.
나와 잠시 헤어졌다가 내가 죽으면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야! 오늘은 아침에 출근을 하지 못 하였다. 오늘 영상의학과와 상의하여 십이지장의 출혈을 멈추게 하기 위하여 지난번처럼 내시경이 아닌 색전술을 검토해 본단다. 그리고 황달수치 증가 문제도 영상의학과와 상의해야 한단다.
아이들은 아침도 걸렀다. 부지런히 의사들, 간호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아내를 처치한다. 어느 정도 아내의 상태가 안정되고 두 아들에게 점심을 먹고 오라고 하였다. 얘들은 밥도 먹기 싫은가보다. 아빠인 내가 좀 화난 표정으로 아이들을 식당으로 보냈다. 아이들이 올라오고 나도 점심을 먹었다. 차가네식당에서 건강두부비빔밥이라는 메뉴로… 물 한 모금 넘기지 못 하게 된 아내를 두고 배가 터지도록 점심을 먹었다.
간호사실에 물어보니, 오후의 영상의학과 스케줄이 없다고 한다. 오늘은 관찰만 한다고 하였다. 나는 아내의 상태가 좀 안정되었다고 보고 늦었지만, 출근을 하였다. 학교에 오니, 교장선생님께서 나와 계셨다. 문서 결재를 하고 있으니,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영상의학과에서 아내의 색전술을 했다고 한다. 출혈이 일어나는 혈관을 찾아 성공하였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이제부터는 출혈과 수혈의 고통없이 투병합시다.
사랑하는 아내야! 남인이 남규 엄마야! 부디 투병에 성공하여 다시 우리 가족의 행복의 전원을 만들어 봅시다. 일산 집을 들러서 아이들 옷과 몇 가지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병원으로 가니, 아내가 힘든 얼굴로 누워 있었다. 힘들지만 색전술을 통하여 일단 지혈에 성공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2007. 8. 3(금)
새벽에 눈을 뜨니, 아내가 대변을 보고 싶어 한다. 남규와 함께 대변을 보게 하니, 포도색깔에 약간 피가 보이는 것 같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간호사에게 보여주니, 바로 코줄을 꽂고 심전도 모니터를 설치한다. 그리고 다시 출혈이 의심된다며, 위장, 십이지장 세정을 한다. 그리고 혈액검사를 한다고 피를 뽑는다.
엉겁결에 조치를 받는 아내의 입가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나도 놀래고, 두 아들도 놀래고… 그러나 잠시 후 하던 조치를 멈춘다. 위장에서 피 성분도 안 나오고, 혈액검사 결과도 괜찮게 나왔다고 코줄도 빼고, 모니터도 철수를 한다.
아침에 주치의의 회진이 있었다. 앞으로도 또 출혈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아내의 병소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아내도, 나도, 아들도 또 걱정을 하게 된다. 정말 시간 가는 것이 두렵다. 아내야! 어떻게든 치료하여 기적을 만들자, 기적을… 그래도 아침 혈액검사 결과 혈색소 수치는 9정도로 유지되고, 황달수치도 괜찮아지고 있다고 한다. 일단 긍정적인 신호이다.
아침에 안산에 사는 막내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보다 호전된 아내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어제는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잡았단다. 그래서 조개를 스티로폼에 포장하여 울산의 동생식구들이 내려가는 편에 보냈다고 한다. 오늘은 아버지를 시골로 모셔다 드린단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동생들이 다 한다. 어서 아내가 병을 씻고 일어나 나도 큰아들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다.
병원으로 퇴근하니, 두 아들과 처남이 있었다. 나는 처남과 두 아들에게 오랜만에 신촌에 나가서 영양보충을 하라고 했다. 8시가 넘어서 두 아들이 들어왔다. 아내가 대변을 보았다. 피가 섞여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아내가 자꾸 배가 아프다고 한다. 번갈아 아내의 배를 쓸어주었다.
다시 십이지장에서 출혈이 생긴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급히 혈액검사를 하니, 헤모글로빈 수치가 어제보다 1정도 떨어졌다고 한다. 젊은 의사(김대현)이 와서 진찰을 한다. 나는 아들과 아내를 두고 자리에 누웠다.
2007. 8. 4(토)
새벽에 눈을 뜨니, 큰 아들이 아내 옆에 앉아 있다. 밤새 엄마는 잘 잤다고 한다. 그러나 아침에 혈액검사 결과 피수치가 어제보다 더 떨어졌다고 한다. 혹시 십이지장 출혈을 확인한다고 다시 코줄을 넣는다. 그리고 위와 십이지장 세정을 했으나 맑은 물만 나왔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의사는 잠시 후 코줄을 제거하였다. 십이지장 궤양일 때, 소량일 경우엔 위 세정으로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피수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수혈을 두 팩 하겠다고 한다. 오늘은 토요일 나는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였다.
2007. 8. 7(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아내의 배를 쓸어주니, 뭐처럼 잠을 잘 잔다. 옆에선 아내의 곁을 지킨 남규와 남인이도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제부터 아내의 올라간 황달수치가 잘 떨어지지 않는다. 눈동자가 노래진다. 피부도 노란 기운이 돈다.
아침 9시경 예고도 없이 영상의학과에서 사람이 와서 아내를 데려가려고 한다. 담도의 혈관조영술을 하기 위해서란다. 응급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밖에 없다고 한다. 아내는 엉겁결에 침대에 실려 엘리베이터로 가고, 엇박자를 이룬 주치의는 병실로 들어온다.
주치의는 그 사실을 알고, 잘 하고 오라는 한마디와 함께 옆 병실로 갔다. 나는 아내를 시술실로 들여보내고, 4층 혈관투영실 앞에서 대기하였다. 두 아들과 함께…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서 아내가 나온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나온다.
왼쪽에 원래 달고 있던 바일팩만 교체 하는 줄 알고, 들어갔는데 아내의 오른쪽 배에 다시 구멍을 뚫고 바일팩을 달고 나왔다. 병실에 와서 아내를 안정시키고 나니, 나도 눈물이 나왔다. 미음 몇 숟가락 밖에 먹지 못하는 환자가 두개의 담즙배액관을 달고 있는 것이었다. 목 아래의 정맥을 통해서는 항생제, 진통제, 제산제, 알부민, 영양제… 등이 지속적으로 투여된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혈액검사를 하기 위해 피를 뽑아간다. 목 아래의 정맥을 통해 들어가는 수액도 고농도의 영양제를 지속적으로 투여하기 위해서는 시술을 해야 한단다. 아내도 걱정이고, 가족들 모두가 걱정만 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거의 되어서 처갓집 식구들이 왔다. 장모님, 처남, 속초의 처제와 조카 지석이, 익산의 체제부부, 조카 승재, 수정이 남매… 장모님은 들어오시자마자 아내를 붙들고 우신다. 처제들도 훌쩍거린다. 나도 눈물이 난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하느님이 기적을 만들어 주시길 바랄 뿐이었다. 처갓집 식구들에게 점심으로 아이들은 돈가스를, 어른들은 피자를 간단히 시켜주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처갓집 식구들이 떠난다. 점점 안 좋아지는 아내의 몸, 모두 다 헤어지기가 아쉬운 것이다. 그래도 눈물을 훔치면서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속초의 처제는 내일 다시 병실을 들러서 내려가겠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 세상에서 계속 만나야할 피붙이들인데…
다시 병실에는 우리 네 식구들만 남았다. 아내의 손을 붙들고, 가족의 정을 나눈다. 어서 나아서 우리 행복하게 살자고 얘기한다. 오늘 연세의료원 파업사태가 끝났다고 한다. 그 동안 2인실을 우리가족이 1인실처럼 사용하였다. 이제 옆 침대에도 어떤 환자가 들어올 것이다. 그동안 우리 가족 4식구가 모두 매일 밤낮을 함께 했지만 다른 환자가 들어오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간호사 얘기로는 아마 오늘은 환자가 안 들어올 것이란다.
2007. 8. 8(수)
하늘은 아침부터 격렬하게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작달비라고 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니, 남인이가 엄마 옆에 앉아서 밤을 새고 있었다. 어제 밤에 시술한 부위가 욱신욱신거린다고 한다. 간호사에게 얘기하여 진통제를 한대 맞으니 잠을 잔다. 모르핀이 계속 정맥을 통하여 들어가는데 거기에 더 강한 진통제를 맞는 것이다. 나는 아내 곁에 앉아서 졸면서 손을 만진다. 사랑한다고 얘기한다. 내 말을 알아들은 예쁜 아내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날은 새벽 5시 반이면 피를 뽑아가더니, 오늘은 6시 반이나 돼서야 피를 빼간다. 나중에 알아보니, 오늘은 헤모글로빈 수치는 체크하지 않는다고 한다. 헤모글로빈 수치는 앞으로 이틀에 한 번씩 체크한다고 한다.
청소아줌마가 왔다갔다 하고 두 아들도 잠이 깨어 엄마 옆으로 다가온다. 아내는 두 아들을 사랑한다고, 한 명씩 손을 꼭 잡아준다. 자신의 뱃 속에서 나온 새끼들!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침에 시술이 있다고 간호사가 동의서를 가져온다. 아내에게 투여되는 수액을 영양제를 포함하여 장기간 사용하기 위해서는 피부 아래에 시술을 해야 혈관에 무리를 적게 준다고 한다. 그러나 어제 아내는 담즘배액술을 하나 더 한 상태였다. 그래서 의사에게 얘기하여 며칠 더 지나고 시술하자고 하였다.
오늘은 학교에 출근하였다. 비가 억세게 온다. 학교에 도착하여 큰 아들에게 전화를 거니, 속초의 처제가 처남과 함께 왔다고 한다. 오늘 다시 한계령을 넘어서 속초까지 가야하는데…
비가 오락가락하여 날씨는 비교적 시원하다. 오늘이 벌써 입추이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것인데, 국지성 호우는 계속된다. 비가 그치면 더워질테고, 작년 8월말에 아내의 몸에 이상이 왔다. 그리고 입원과 수술, 그리고 퇴원을 거듭하면서 아내는 벌써 투병을 시작한 지 한 해를 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태가 이렇게 안 좋으니, 정말 기분이 바닥을 긴다. 시간 가는 것이 무섭다. 사랑하는 아내야 어서 일어나서 집으로 갑시다. 우리도 남들처럼 자동차를 몰고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등촌칼국수도 먹으러 가고,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2007. 8. 16(목)
오늘 고양교육청에 공무원행동강령 담당자 출장을 다녀오려고 어제 밤에 집에 와서 잤다.
아내는 며칠 사이에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 황달이 심한 지 눈이 계속 노랗다. 얼굴도 자꾸만 노래져간다. 배는 자꾸만 불러진다. 배가 부르니까, 미음도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밤낮으로 열이 38, 9도로 치솟아 해열제를 계속 쓴다.
혹시 십이지장에서 출혈이 있을까봐 계속 혈액검사를 한다. 밤중에도 아내의 체온이 오르면 바로 해열제를 투여하고 염증을 의심하여 항생제를 계속 투여한다. 적혈구 수치가 내릴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다. 황달수치가 오를 때마다 심장이 더 뛴다. 어제는 다행이 황달수치가 조금 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가족 모두와 함께 안도하는 마음을 가져보았다.
지금도 두 아들 남인이와 남규는 병원에서 엄마를 굳게 지키고 있다.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은 6월 중순에 여름방학을 하고부터 지금까지 엄마 곁을 지키느라 집에서는 대문 밖에도 안 나갔다. 또 병원에서는 병원 밖을 나가보지 않고 병상의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 효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내 아내 유리새야! 두 아들을 보아서라도 꼭 일어나길 바랍니다. 아내도 계속 아들 결혼시킬 때까지 만이라도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한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에 가 볼 수 있겠냐고 하는 내 아내, 정말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담즙배액관을 3개나 달고 있는 아내, 코로 산소를 공급받는 사랑하는 내 아내, 영양제 항생제 해열제 알부민 칼륨제제 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아내,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내 아내야! 병원에서는 더 조치를 해 줄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느님, 제발 우리 아내 좀 살려주십시오. 기적을 만들어주십시오. 50살도 넘기지 못한 젊디젊은 아내입니다. 우리 남인이, 남규의 첫번째 소망입니다. 우리 집에 하나 밖에 없는 여자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2007. 8. 17(금)
아내의 배가 가스가 찼는지, 복수 때문인지 흥부네 큰 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루에 세 번도 먹기 힘든 미음조차 소화시킬 공간도 없는 것 같았다. 의사선생님은 움직이고 운동도 하라고 하는데 아내의 기력이 그렇질 않아 안타깝다.
의사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가스관장을 하였다. 액체를 뒤로 넣고 5분에서 10분 정도 참았다가 변을 보라고 하는데 2분 정도 밖에 못 참는다. 대부분 물 상태의 변 중 혈액이 보인다. 나는 피만 보이면 가슴이 조여온다. 혹시 출혈이 생기면 안 되는데. 의사선생님과 함께 치질일거라고 생각해 본다. 저녁때 인턴 이진형선생님이 와서 항문검사를 한다. 괜찮을 거라고 한다.
황세나 선생님이 아내의 폐에 물이 찬 것 같다하여 엑스레이 촬영을 하였다. 오늘은 큰 아들이 엄마 곁에서 밤을 지샌다. 나는 내일 출근을 핑계로 일찍 잠자리에 든다. 마침 옆 병상의 환자가 5인실로 이동하여 뭐처럼 독실을 우리 가족이 차지하였다.
2007. 8. 18(금)
새벽 6시 반쯤 오늘도 혈액을 채취해 갔다.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아침에 의사선생님의 회진이 있었다. 주치의 송시영선생님은 허리디스크 때문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대신 그제는 방승민 선생님이, 어제와 오늘은 박정엽선생님이 병실에 회진을 왔다. 아내의 담즙배액관을 보고는 너무 많아 정리를 해야겠다는 말을 하고 나갔다.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다. 밤에 찍은 엑스레이 결과 폐에 물이 찬 게 맞는 것 같다고 한다. 오늘도 이뇨제를 투여한다.
학교에 출근하기 전 아내에게 오늘은 아들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도 다녀오고, 휠체어를 타고 병실 밖에도 나가보자고 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야! 힘내자고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병원을 나와 일산행 버스를 탔다.
2007. 8. 20(월)
휴게실에서 자다가 새벽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깼다. 휴게실에서 젊은 여자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01시쯤 병실에 들어가 남인이한테 물어보니, 옆 병실의 아저씨가 별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분의 딸이 하도 원통하여 그런 행동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코드블루를 방송으로 외친다. 코드블루란 심폐기능이 정지했다고, 가까운 의사가 어서 와서 심폐소생술을 하라는 응급을 알리는 방송인 것이다. 오늘도 또 한 생명이 그렇게 마감을 고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맞고서야 잠을 자는 것이다. 오늘은 큰아들이 엄마 옆에서 쪼그리고 자고 있다. 잠시 휴게실에 가서 눈을 붙이고 오니, 새벽 5시 반쯤 되었다. 아내의 손을 만지니 좋다고 한다. 열이 나는지라 차가운 내 손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간호사, 청소아줌마가 들락날락거리고 또 혈액검사를 한다고 피를 뽑아간다.
8시쯤 박정엽선생님의 회진이 끝나고 학교로 출근하였다. 급히 나오면서 휴대폰을 안 가지고 왔다. 항공대 입구에 내려서 큰아들의 등록금을 냈다. 올해는 큰아들 120여만원, 작은 아들 300여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저렇게 엄마가 아픈 악조건에서도 두 아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생이 되었다. 참으로 장한 내 두 아들이다.
출근하여 병원으로 전화를 해보니, 아내의 황달수치가 16대에서 17.7로 올랐다고 한다. 눈동자가 노란 내 아내, 피부가 자꾸만 참외빛으로 변하는 내 아내, 어떻게 해야될 지 모르겠다. 정말 기적은 안 일어나는 것인가?
2007. 8. 29(수)
지난 월요일날 개학을 하였다. 어제는 퇴근 후 병원에 들렀다가 일산으로 갔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ATM에 들어가서 통장정리를 했다. 그리고 아내가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하여 홈플러스에 가서 수박 반 통을 샀다. 차를 학교에다 두고 온 바람에 이것저것 사서 들고 걸어왔다.
아침 일찍 병원에 들르니, 아내가 반갑게 맞아준다. 얼굴이 노랗다. 황달수치가 그제는 22.2에서 21.9로 약간 떨어졌다. 남인이가 어제 회진한 기록을 보니, 황달수치가 떨어지더라도 간기능이 안 좋기 때문에 언제든지 혼수상태가 올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며칠 전 머리를 감은 아내의 얼굴이 참 예뻐 보였다. 아내의 손을 잡으니, 내 손이 차가워서 오늘도 좋다고 한다. 나는 아내에게 힘내라고, 미음 열심히 먹으라고 한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고 얘기한다. 저금통장의 자동이체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한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아내의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주치의 선생님의 회진도 보지 못하고, 학교로 출근한다. 정말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 아내의 생명의 촛불이 꺼져가고 있는 것인가. 답답하다. 학교에 출근해서도 아내 생각만 하게 된다. 우리 두 아들은 오늘도 제 어미 곁을 지키고 있다. 사랑합니다. 내 아내 유리새야! 사랑한다, 내 아들 남인아, 남규야! 오늘도 아내가 힘을 내면서 하루를 견뎌주기 바란다.
학교에서 오전 근무 중에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려왔다. 엄마의 혈액검사 결과 황달수치는 좋아졌으나 헤모글로빈 수치가 7.7 정도로 다시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수혈을 한단다.
퇴근은 마포에 사는 민선희 선생님이 세브란스병원 입구까지 태워다줘서 편하게 왔다. 아내는 노란 얼굴로 수혈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컨디션은 좋은 것 같았다. 저녁식사로 나온 죽도 2/3 정도는 먹고, 복숭아도 조금 먹는다. 작년에 191병동에 아내가 입원해 있을 때, 치료를 해주었던 김창우 선생님이 보였다. 서로 눈인사를 하고 여기에 입원했느냐고 묻는다. 잠시 후 아내의 병실에 들어온 의사선생님과 아내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진다. 아내의 눈물이 글썽해진다.
2007. 9. 3(월)
지난 금요일 점심 식사 후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의사선생님에게 보이니, 배를 눌러 보고는 복막염일지 모른다고 한단다. 바로 조퇴를 하여 병원으로 달려갔다. 즉시 CT사진, 엑스레이를 찍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다행하게도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어제 밤에도 또 엑스레이를 찍었다. 계속 열이 난다고 세균 검사를 해야 한다고 30분 간격으로 혈액을 채취해 갔다. 그래도 토요일, 일요일을 지나면서 아내의 상태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제 낮에는 안산에 사는 막내동생 정기 내외가 다녀갔다. 거봉 포도를 사와서 맛있게 잘 먹었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는 잘 계신다고 한다.
아내는 요즘에는 뼈가 자꾸만 아프다고 한다. 열도 자주 난다. 의사선생님 말로는 원래 가지고 있는 암은 계속 진행된다고 한다. 따라서 열이 나면 해열제와 항생제로, 통증엔 진통제로, 음식을 못 먹으면 영양제와 알부민으로, 전해질이 떨어지면 칼륨 수액으로 계속 처방한다고 한다.
다리를 주무를 때도 근육부분이 아닌 뼈 부분을 주무른다. 아내는 자꾸 우울한가보다.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마음을 약하게 먹기 때문이라고 엄마에게 불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아내는 하느님께 꼭 살려달라고 기도한다. 기원한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길 나도 바라고, 또 바란다. 우리 아내 유스티나가 꼭 나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길 기원한다.
백학에 사시는 큰이모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지난 봄에 수술하고 다 나은 줄 아셨단다. 토요일날 연천 이모님과 부평 막내 이모님이 병원을 다녀가시고 소식을 들으셨나보다. 꼭 낫길 축원한다고 하신다.
어제 밤에는 병원에서 꿀잠을 잤다. 월요일 아침 출근이라 일찍 샤워를 하였다. 샤워를 하고도 또 휴게실에서 졸았다. 레지던트 김송이 선생님이 아침에 병실에 와서 어제 밤에 불편하지 않았냐고 아내에게 물어본다. 오늘은 또 피검사를 한단다.
아침에 옷을 차려 입고 아내에게 오늘 하루 잘 보내라고 하였다. 아내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내 바지의 먼지를 털어준다. 그리고 지갑은 넣었냐고 물어본다. 아픈 와중에도 남편인 나를 챙겨준다. 몹쓸 병을 짊어진 가여운 아내, 너무 고맙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내 아내 유리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맑은 날이다. 오늘은 애국조회를 하려고 했으나, 운동장에 물이 빠지지 않아 내일로 연기하였다. 2학기부터는 교장선생님께서 학사업무를 교감인 나에게 전부 맡기셨다. 따라서 오늘 직원조회에도 참석하지 않으셨다.
2007. 9. 7(금)
어제는 경기도교육청 제2청사에서 실시하는 고객만족도 마인드 함양연수가 있어서 참가하였다. 주룩주룩 내리면 가을비 속을 달렸다. 병원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잤다. 두 아들만 믿고 그냥 집에서 잠을 자는 남편이라는 놈이 제대로 된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가을이 왔나보다, 이불장에 얇은 이불을 넣고 조금 두꺼운 이불을 꺼냈다.
출근하는 아침은 맑게 개었다. 병원으로 전화를 해보니, 아내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져서 관찰 중이고, 다른 것은 그런대로 안정된 것 같다고 했다. 오늘도 남인이, 남규는 엄마의 병상을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야! 우리 아들들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일어서야 하지 않습니까.
병원으로 퇴근하였다. 아내는 운동을 하지 못해 배에는 가스가 차고 복수 때문에 수박처럼 배가 부르다. 뱃속의 암세포는 자꾸만 퍼지는지 배의 오른쪽 부분이 자꾸만 아프다고 한다. 그렇다고 몰핀의 양을 올리자고 하면 습관성이 될까봐 싫다고 한다.
나는 잠시 휴게실의 의자에 가서 눈을 붙인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아내의 얼굴이 내 위에서 확대되어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두 아들과 함께 보조기구를 붙들고 아내가 운동을 나온 것이었다. 정말로 아내가 대단하게 보였다. 내일은 우리학교의 목경호 선생님이 결혼하는 날이다. 아침 10시에 신능중학교에서 버스가 출발한단다. 병원의 휴게실에서 잠이 들었다.
2007. 9. 10(월)
토요일엔 대전에서 있는 결혼식을 다녀왔다. 목경호 선생님과 신능중학교로 전근 간 장세연 선생님과의 결혼이다. 아내의 간병이 우선이지만, 교감이라는 직책상 참석하였다. 연세대학교 앞에서 7728번을 타고 무원고등학교 앞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아침 10시가 조금 넘어서 신능중학교에서 출발하였으나 고속도로가 정체되어 결혼식 시작시간인 14:00을 30분이나 넘어서 도착하였다.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버스가 여의도에 잠시 정차 하길래 내려서 시내버스를 타고 바로 세브란스병원으로 왔다.
아내는 여전히 기운이 없어서 두 아들의 간병을 받으며 누워있었다. 내일이 장인어른 제삿날이라고 큰 처제 내외가 병원부터 들렀다. 언니가 아프다고 배를 마사지해 주면서 늦게까지 병원에 머물러 있었다. 밤 11시쯤 처제내외가 가고 나도 휴게실에서 잠을 청하였다. 오늘도 두 아들은 밤새워 엄마를 간병한다.
일요일엔 점심때쯤 집에 가서 낮잠도 자고, 빨래도 했다. 막내동생 정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일요일날 어머니,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했다고 했다. 7월달에 사촌형님이 했다지만, 잔디가 또 자라서 다시 한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간병 핑계로 금년에 벌초하는데 가지 않았다. 큰아들로서 할 노릇도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정기한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월요일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출근하였다. 아침에 전화를 걸어보니, 여전히 아내는 기운이 없다고 한다. 오늘은 수혈도 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아내야! 아내야!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07. 9. 12(수)
어제는 고양교육청에 출장을 가느라 집에서 잤다. 저녁 8시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오랜만에 호수공원으로 운동을 다녀왔다. 퇴근하여 저녁때 병원에 가니, 아내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이제 두 달이 되어가는데 병원 규칙 상 3차병원이 아닌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내의 병을 이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항암치료도 할 수 없고 통증과 황달 완화치료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내는 그 말을 듣고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된다는 것이냐는 것이다. 아내는 자꾸 눈물을 흘린다. 인생이 불쌍하다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가 기도를 하라고 하면, 이제 그 기도는 해서 뭣하냐고 한다.
나도 남편으로서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그저 '지금 우리 가족이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라고 생각하자고 했다. 정말 아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도 눈물이 자꾸만 난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했다. 사랑하는 아내야! 그래도 희망을 가집시다. 왜 이런 위기가 우리 가족에게 와있는지 정말 원망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이 위기에서 탈출할 수는 없을까?
2007. 9. 20(목)
아내는 그제 담즙관을 교체했다. 그래서 그런지 황달수치가 20점대에서 18점대로 내려갔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헤모글로빈 수치가 6점대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어제는 수혈을 두 팩이나 받았다. 어제 퇴근하니, 자원봉사자로부터 머리도 감았다고 한다. 오늘따라 아내의 모습이 참 예쁘게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합처럼 새하얀 우리 아내.
그제, 어제엔 병원에서 잤다. 우리 두 아들은 아내가 입원한 이후 계속 병원에서 엄마의 곁을 지키고 있다. 참 대견하다. 한쪽으로는 내가 아버지의 역할을 잘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였다.
태풍 나리에 이어 위파에 의해 계속 비가 온다. 아내는 병이 계속 깊어지는지 옆구리가 아프다고 한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진통제 처방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아프다고 밥도 안 먹는 것 같다. 내가 왜 밥을 안 먹느냐고 하면, 아이들은 대답한다. ‘엄마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어요?’ 정말 아내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2007. 9. 27(목)
한가위 연휴를 병원에서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했다. 연휴기간에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져서 수혈도 두 팩씩 이틀이나 했다. 아내는 출혈이 의심되어 연휴기간 동안 금식을 하고 있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하였다. 아내를 생각하면 정말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미안할 따름이었다. 24일엔 아버지, 울산 동생네 식구들, 그리고 막내동생이 병실에 들렀다. 그 전날엔 송서방도 다녀갔다. 송서방 형님도 아내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고 갔다.
아내는 시간만 나면 살려달라고 두 손 모으고 기도한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달려달라고, 두 아들 장가는 보내고 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린다. 정말 하느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셨으면 하고 나도 함께 기도 한다. 정말 아내의 목숨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내 아내의 딱 한 벌뿐인 생인데, 이게 뭔가, 지금 아내의 따뜻한 손을 잡고 있는 것이 그저 꿈만 갔다. 아내의 불룩 나온 배지만 쓰다듬어 줄 수 있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해 본다. 아내의 뺨을 만져볼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통통 부은 아내의 발을 주물러 줄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영원히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
아내의 눈이 붉다. 내 눈에서도 자꾸만 눈물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 두 아들은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마음에 상처가 생길까봐 참고 있는 저 두 아들이다.
지난 목요일 송시영 교수와 면담을 하였다. 7월 달에 입원하여 십이지장에서 출혈이 있었고, 황달이 나타났을 때, 주치의는 2~3주 정도를 한계로 보았다고 말한다. 지금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 자체도 다행이라고 한다. 의학적인 힘에 의하여 생명이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병원의 규정이 있으니, 호전될 가망이 없는 환자의 경우 두 달 이상은 계속 입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타 병원으로 가야된다고 하였다.
나, 그리고 아내, 우리 두 아들은 모두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는데 의사들은 실망시키는 말만 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아들과 통화하였다. 이제 세브란스병원에서 자꾸만 나가라고 하는데 어떻해야 하나.
오늘 오후에 일산병원과 통화하고, 서정훈 교수에게 예약을 잡아 놓았다. 어제 오후엔 집에 와서 긴 와이셔츠들을 다렸다. 이 일들을 아내는 25년 동안 남편을 위해서 묵묵히 해온 것이다. 직접 내가 해 보니, 항상 덤덤하게 봐 온 이런 일이 아내의 정성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느껴보게 된다. 가슴이 찡하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고부터는 집에 들어와도 적적하기만 하다.
사랑하는 아내야! 어서 병을 털고 일어나 퇴원해서 함께 재미나게 살아야지. 정말 잘 해 줄게요. 정말 나의 이 소망이, 우리 두 아들의 간절한 이 바램이 실현되길 기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느님, 하느님!
2007. 10. 2(화)
아내의 상태는 그런대로 안정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배가 부르고,열이 나고 황달이 있는 것 외에는 최근의 상태로 보아선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얼마 전부터 서운해 하던 날이 왔다.작년부터1년 이상 진료를 받고,투병하였던 세브란스병원을 떠나 오늘은 일산병원으로 아내가 이사 가는 날이다.오늘 아내의 병원 이동에 따라 병원에서 쓰던 물건을 함께 가져가기 위해 승용차를 이용하여 출근하였다.그렇지만 출근길이 많이 막힌다.아내는 며칠 전부터 병원 이동 얘기를 듣고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는데….아침에 일산병원에 확인해 보니,오후3시 반에서4시 반 사이에 입원하라고 했다.
학교에서 오늘 할 일들을 서둘러 처리하고,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점심식사를 한 다음,세브란스병원으로 차를 몰았다.그리고 퇴원준비가 어떻게 되는지 얼른 보기 위해서였다.병원엔 이미 처남도 와 있었다.두 아들은 벌써 짐을 거의 다 싸놓고 있었다.눈물을 글썽이는 내 아내.서운한가보다,불안한가보다.
가장 웃음이 많았던 서은별 간호사도 아내를 보면서 눈물을 닦는다.하루라도 빨리 병마를 밀어내고 퇴원하여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지만. 그 병원까지도 살다보니까,그 동안 정이 들었나보다.세브란스병원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미리 내 차에 싣고,나는 먼저 처남과 함께 일산병원으로 향했다.
일산병원에 가니, 아내의 병실이 정해져 있었다. 953병실이었다.아내의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없어서,그런 상태로 먼저 병원에서 입원기간이 두 달이 넘어서 병원을 옮기는 것이었다.그래도 다행히 여기 일산병원의 의사들은 대부분 세브란스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간호사로부터 병실 안내를 받았다.정수기,화장실,휴게실,오물처리실,병실 사용법 등을 듣는다. 그리고 간호사는 환자의 인적사항,먼저 병원의 투병생활에 대하여 등 여러 가지 사항을 내게 묻었다.
아내의 도착 시간이 되어 엘리베이터에 가서 서 있었다.드디어 오후4시쯤 문이 열리면서 침대에 실려오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병이 깊은 아내가 구급차를 타고 자유로를 달려서 힘들게 온 것이었다.아내의 병실 복도 쪽으로 여자 레지던트 선생님이 왔다.그리고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져온 진료기록을 보고는 말을 꺼낸다.
환자의 상태가 말기 암이기 때문에 특별한 치료를 하기는 힘들다고.피검사도 너무 자주 하지 않겠단다.만약에 십이지장에서 출혈이 다시 생기더라도 내시경을 하지 않고 수혈로 하겠다.심장이 멈추거나 호흡이 곤란해지면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호흡기 삽관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등.나는 속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내가 고통을 덜 받는 것이라고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였다.
의사가 가고,병실에 들어가 있었다.조금 있다가 큰 아들이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한다.그리고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나는 아들을 비상구 계단이 있는 창가로 데리고 갔다.무슨 할 얘기가 있느냐고 물었다.그러나 아들은 첫 마디가 아빠한테 실망했다고 하였다.어떻게 아빠가 의사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어떻게든 엄마를 살리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해야지.그렇게 소극적인 치료방법을 말하는데,고개를 끄덕이냐고…
그러나 나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아!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면 네가 알게 될 것이라고만 하였다. 다른 얘기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한계를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나도 가슴이 아팠다.
아이들이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아갔다. 아내와 나 둘이만 병실에 남았다. 2인실이라지만 아내만 들어와 있어 1인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말을 꺼낸다. ‘나 이 얘기를 애들에게는 할 수 없고 당신한테만 할 게’ ‘여보, 나 집에 정말 못 갈 거 같아. 이제 그만 가고 싶어. 여보, 편하게 나 보내줘, 나 좀 가게 해 줘…’ 아내가 이별을 할 때가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정말 아내의 생이 얼마 안 남은 것인가, 이렇게 고생만 하다가 불쌍하게 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된다. 나는 아내가 얼마 전에 나에게 얘기 했던 것처럼 잠자다가 조용히 이별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내가 스스로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도 모르고 저 아이들은 아빠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빠가 어떻게 엄마를 저렇게 하나, 아빠는 엄마를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는 것 같았다. 얘들아 너희들도 어른이 되어서 이런 상황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겠니? 그 때가 되면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꺼다. 아빠는 속이 미어터진단다. 남인아, 남규야! 그러면서도 나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해 본다. 그리고는 ‘그래도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2007. 10. 4(목)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찍 병원에 들렀다. 일산병원에 와서 오늘이 처음으로 주치의 서정훈 교수님의 회진이 있는 날이다. 학교에서는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나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겠다고 해 놓았다. 그리고 병원에서 주치의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쯤 주치의 선생님이 레지던트와 병실에 들어왔다. 주치의는 아내에게 잘 잤느냐고 묻는다. 또 어디가 불편하냐고 묻는다. 아내는 별 얘기가 없었다. 주치의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가서 아내의 상태를 묻는다. 의사는 ‘아시지요. 말기라는 것, 특별한 치료 방법은 없고, 진통 조절하고 환자를 편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됩니다.’라고….
나는 담관조영술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주치의는 담도의 많은 가지 중에 작은 한 가닥에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지금 환자의 상태에서는 무의미하다고 한다. 나는 보호자로서 의료진에게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주치의가 회진을 끝내고 간 다음, 큰아들 남인이를 불렀다. 그리고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들아! 이제 엄마의 생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목이 메려는 것을 참고, 참으며 현재의 상황을 말해 주었다. 이제 우리가 그 동안 그렇게 소망했던 희망은 버릴 수 밖에 없다고, 마지막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하는 엄마를 얼마 동안이라도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아빠는 안단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엄마를 살리려고 하는 자식의 그 마음, 그 간절함. 그러나 지금 엄마의 상태가 그런 것이 아니란다. 치료를 위해 엄마에게 손을 쓰면 쓸수록 엄마는 힘들다는 것을…. 그런데도 너희들은 계속 엄마가 힘들어도 자꾸만 움직여라, 무엇 먹어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강요하지 않느냐고. 어떤 때는 짜증까지 섞어가지고…‘라고 했다.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에게 엄마가 원하는 것이 뭔지 찾아서 해줘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너희들 눈치를 보지 않도록 하라.’고 얘기해 줬다. 엄마와 영원한 이별하기 전에 너희들이 할 얘기들 모두 다 해야 한다고 했다. 또 엄마한테 듣고 싶은 얘기도 모두 말하라고도 했다. 그리고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힘내라고, 마음 편히 먹으라고, 자꾸 얘기해 드리라고 했다. 아들도 그제야 알아듣는 것 같았다.
학교에 출근하여 중간고사 진행상황을 살폈다. 오후엔 교직원들 연수일정을 잡았다. 강화도로 가는 것이다. 학생들의 점심급식이 끝나고, 하교한 다음 오후 1시가 넘어서 출발하였다. 원래는 석모도까지 일정을 잡았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강화도만 들르기로 하였다. 동막해수욕장에서 잠깐 바람을 쐬고, 대명포구로 향하였다.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두 번째 다리 초지대교 앞에 다다르니, 김포반도의 한쪽에 배들이 닻을 댄 포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난전을 들렀다. 새우젓, 황새기젓…등이 보였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아마 내가 서양 사람이었다면 생선 썩는 냄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이 밀물과 썰물의 조차가 가장 적은 '조금(소조)' 때라 그런지 생선들이 거의 없다고 장사하는 아줌마가 얘기해 주었다. 그래도 횟집을 정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저녁 7시 반쯤 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아내가 있는 일산병원으로 향했다.
아내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젠 말소리도 또렷하지 않다. 아내는 정신이 약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여보! 사랑해, 힘들었지.’라고 하였다. 아내는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앞으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소리를 얼마나 더 해 줄 수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야! 백년 내 사랑 유리새야!
오늘 낮에 배액이 되지 않는 오른쪽의 담즙관 하나를 제거하였다. 냉장고 옆에는 아내의 뱃속에서 나온 구부러진 가느다란 관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아내의 뱃속 간에 박혀서 쓸모도 없이 내 아내를 힘들게 했구나.
아내가 자꾸 땀을 흘린다. 얼굴에 부채를 부쳐달라고 한다. 11시 반 정도까지 계속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두 아들은 깊은 잠의 골짜기에서 빠져 있었다. 아내가 없으면 나와 저 두 아들 셋이서 살아가야 하는데…. 사랑하는 아내야, 왜 저렇게 착한 아이들을 두고 먼저 떠나려고 하는가,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지금도 아내와 생이별을 해야 할 생각을 하니,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왜 하느님은 우리 가족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모르겠다.
2007. 10. 5(금)
새벽에 눈을 떠보니 막내 남규가 엄마 옆에 앉아서 열심히 얼굴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두 아들이 교대로 매일 밤을 지샌다. 아내는 자꾸 어깨가 아프다고 하였다. 앞에 걸려있는 링거액이 왜 저렇게 많으냐고도 했다. 아내의 눈이 초점이 흐려져 이중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아침 7시쯤 레지던트 선생님이 들렀다. 괜찮으냐고 묻는다. 아내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이 없이 선생님은 나갔다. 출근하여 9시가 넘어서 큰아들에게 전화해 보았다. 주치의가 다녀갔다고 했다. 어제 오른쪽 담즙관을 뺀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남인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번 주말에 이모들을 오시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엄마가 그래도 말을 할 수 있을 때 와서 얘기라도 해봐야 되지 않느냐고…
점심식사 중에는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다. 오늘도 어미는 어떠냐고 하셨다. 나는 이제 어미가 얼마 살지 못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신다. 그리고 너희들 건강도 챙기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아내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글을 쓰면서도 청승맞은 그 놈의 눈물 때문에 글자가 잘 안 보이려고 하였다. 교무실 남쪽 창문을 통하여 가을 햇살은 왜 이렇게 귀찮도록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낮에 남인이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엄마가 오늘은 엄마가 혀가 굳어지고, 꼬여서 그런지 말을 잘 못 한다고 했다. 그래도 소변은 두 아들의 부축을 받아 억지로 앉아서 본다고 하였다. 정말 답답하다, 막막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내의 짧은 생의 날개가 힘을 다하였는가, 그 날개를 접고 추락하고 있는 것인가? 저 젊은 나이에… 어떻게 해야하다, 정말 분하다.
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병원으로 갔다. 오늘은 피검사를 했는데 적혈구 수치가 7점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의 가슴 위에 박힌 관을 통하여 빨간 피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계속 누워있기만 한 아내는 엉덩이 꼬리뼈 부분 욕창이 생기고 있었다. 상분씨, 정민이 엄마가 병원에 왔다가 갔다고 한다.
아내는 친구들이 홍시를 가져왔다고, 그것을 아빠에게 드리라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아들한테 얘기한다. 저렇게 아픈 중에도 남편인 나를 챙기는 것이다. 나는 아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나를 보고 자기가 하는 소리도 못 듣는다고 ‘당신은 바보야’라고 부정확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먹는 약을 아침햇살 음료와 함께 억지로 삼킨다. 이제는 아내가 하는 말은 몇 번씩 다시 들어봐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내야! 정말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그래도 아내는 발음이 어눌하지만 식구들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남인아 사랑한다. 남규야 사랑한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라고 했다.
아내를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온다, 콧물까지 나온다. 내가 콧물을 닦으려고 티슈를 찾으니, 막둥이 남규는 ‘아빠 얼른 감기약 드세요’ 한다. 어제 우리 아들이 감기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규의 콧물도 눈물이었나 보다. 어떻든 남규는 감기약을 먹었더니, 떨어졌다고 했다. 오늘도 난 무심하게 아내를 두 아들에게 맡기고 혼자 꿈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2007. 10. 6(토)
아내의 발음이 점점 흐트러진다. 말이 또렷하지 않아 듣기도 힘들어지고 있다. 정말 당신의 날개가 반쯤은 접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자꾸 저만치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밤중에 식구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아내가 힘들게 소변을 보고 있었다. 누워서도 계속 배가 아픈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분명히 암세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아보고, 이마를 만져주고, 배를 만져볼 뿐이었다.
새벽의 여명과 함께 일어나 아내의 따뜻한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오늘도 엄마와 하루 잘 보내라고 말해주고서 병실을 나섰다, 출근한다는 그 이유로 또 아내 곁을 떠나는 것이었다. TV에서는 내일 비가 온다고 하였다. 태풍이 분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얘기들이 귀에 잘 안 들어오지 않았다. ‘내 아내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하는 쓸데없는 망상만 반복적으로 하고 있었다.
일찍 퇴근하고 있는 나는 집에 들러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다. 배추잎사귀, 계란, 고춧가루를 넣어서 얼큰하게 끓였다. 그리고 마트에서 사다놓은 김치와 곁들여 먹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밤에 만나서 나에게 무엇인가 얘기하는 아내의 말은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두 아들, 아내가 가장 사랑으로 자라서 청년이 되어 있는 남인이, 남규가 오늘도 열심히 엄마 간병을 하고 있었다.
2007. 10. 7(일)
오늘은 일요일이라 주치의 서정훈 선생님의 회진도 없었다. 밖엔 비가 와서 그런지 거리가 축축하였다. 아내는 거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 없이 혈관을 통해 들어가는 영양제로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약도 입으로는 먹지 못 한다. 변을 한번 보려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야 하는데, 버티기에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두 아들과 나에게 완전히 몸을 맡기고 서야 가능하니 말이다.
점심때쯤 되어서 안산의 막내동생 식구들이 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봉일천에 사는 누이동생이 조카 정아와 소영이를 데리고 왔다. 환자가 힘들어 견디기 힘들어 한다고, 동생식구들에게 조금 있다가 가라고 하였다. 친가 식구들이 가고 처갓집 식구들이 왔다. 장모님, 처남, 속초의 큰처제 내외, 익산의 막내처제 내외, 그리고 창원에 사는 4촌 처남이 왔다.
아내의 모습을 보고 눈마다 이슬이 맺히고 있다. 아쉬워하는 소리, 불쌍해서 어떻게 하느냐는 소리 이외에는 모두 말이 없었다. 장모님은 내가 먼저 가야되는데 어떻게 하냐고 하시며, 당신 큰 딸의 손을 놓지 못 하신다. 병실을 나가 주차장까지 배웅을 갔다. 큰 처제는 이제 언니를 몇 번 더 볼 수 있느냐고 하였다. 나는 이제 끝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오후 문병객들을 배웅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내의 담즙배액을 도와주던 인턴 김요섭 의사선생님이 보였다. 한 달 간, 여기 일산병원에 파견된 것이라고 하였다, 반가웠다. 병실에 잠깐 들렀다가 나와서 나는 병실 밖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큰아들 남인이가 내게로 왔다. 나는 남인이에게 얘기하였다. 엄마의 영정사진도 이미 찍어 놓았다고,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 여기 일산병원에서 장례식을 치루고 벽제승화원에서 화장을 하련다. 그리고 엄마를 자유로청아공원 납골당에 모실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다음에 아빠까지 세상을 떠나면 엄마와 아빠의 유골을 합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고 하였다. 남인이도 이제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부자 사이엔 잠시 동안 침묵만이 오가고 있었다.
문병객들이 모두 돌아간 병실엔 우리 네 식구만 남았다. 아내도 우리 식구끼리만 있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아내는 오늘도 남인이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한다. 막둥이 남규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나한테도 똑같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너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그리고 너희들이 두 번째로 예쁘다고 하였다. 완전히 풀어진 발음으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엄마 얼굴에 부채질을 하고, 나는 아내의 발을 쓰다듬었다. 아내는 발이 아프다고 한다. 이젠 주무르지도 못 하고 슬슬 쓸어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은 남인이가 밤을 지새우며 엄마를 간병한다. 남규와 나는 옆에서 자고… 내일은 아내의 상태를 보아서 출근여부를 생각해 봐야 하겠다.
2007. 10. 10(수)
새벽에 아내가 소변을 본단다. 아내가 기운이 없어 나와 두 아들이 함께 아내를 부축해야만 용변을 볼 수가 있었다. 변기 위에 앉은 아내는 막둥이의 어깨에 온몸을 맡긴다. 소변 색깔은 짙었다. 함께 나온 검은 변이 흩어져 있었다. 먹은 것이 없어 거의 담즙이 뭉친 것으로 보인다.
어둠을 가르며 집에 들러 얼른 샤워를 하고, 생식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출근하였다. 라디오를 듣다가 테이프의 노래를 틀어보니, 사나이 눈물이라는 현철의 노래가 나온다. 우울한 내 기분을 더욱 내려앉게 하며, 마음이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라디오 방송으로 돌려버렸다.
출근하여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답답하다며 내 보직인 교무부장 문제를 교장실에서 얘기를 하고 올라왔다. 병원에 있는 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아내의 적혈구 수치가 7점대로 내려가 수혈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규는 엄마가 입 안이 뜨거워한다고, 먹는 얼음을 구하기 위하여 병원 근처의 마트를 뒤지고 있다고 하였다.
어제 밤에 병실에서 아내에게 말을 시켜보았다. ‘여보! 남인이 남규를 사랑해’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하였다. 나도 사랑하느냐고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당신은 밉다고 하였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그래도 나는 좋다. 지금 아내와 눈을 맞출 수 있고, 숨도 함께 쉴 수 있다. 그리고 심장이 씩씩하게 뛰고 있다. 나는 아내의 따뜻한 손을 잡으며 내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내고 있다. 다리도 쓸어줄 수 있다. 나에게는 이 자체가 행복이다. 사랑하는 아내야! 당신이 병을 털고 일어나 우리 가족 네 식구가 원앙가족처럼 행복하게 살아볼 기회를 다시 갖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바로 내게, 아주 작은 것에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체험해 보는 것이 조그만 소원입니다.
2007. 10. 12(금)
어제도 퇴근 후 병원에 가서 아내부터 보았다. 그런데 아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뭐처럼 아내에게 기운이 생긴 것 같았다. 기분이 참 좋았다. 소변을 볼 때도 훨씬 몸을 잘 가누고 있었다. 말소리도 많이 나아졌다. 드디어 아내는 나한테 잔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소변을 볼 때도 상태가 많이 괜찮아져 있었다. 아내가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았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기적이 우리 가족에게 나타나길 매일 기원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 마지막에 가서 기운이 조금 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면서도 그렇지 않길 바라고, 또 바라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근무하는 덕양중학교 아이들이 소풍가는 날이다. 학교엔 교장, 교감인 나, 행정실직원, 교무실의 정선희 선생님, 김희경씨만 근무하였다. 낮에는 학교운영위원장이 왔다. 우리학교 교장선생님과의 생각이 다른지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기에 학교가 시끄러웠다. 교장선생님과 운영위원장 두 사람 모두 문제가 있는 분들인 것이었다. 운영위원장이 이 문제를 교육청을 거쳐 청와대에 까지 투서를 했다고 하였다. 교감으로서 교장선생님과 운영위원장 사이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내가 위원장을 부른 것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가며 대화를 해보았으나, 그렇게 쉽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도 끈기 있게 노력해 보고자 한다. 병원으로 전화를 해보니, 아내는 기운을 차리고 잘 있다고 했다. 아픈 아내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데, 이런 문제까지 생겨 기분이 좋지 않았다.
2007. 10. 15(월)
그제는 토요휴업일, 어제는 일요일.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연휴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병원을 내 집 삼아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그래도 아내의 상태가 지난 일요일보다는 훨씬 좋아졌다. 지난 일요일엔 아내가 너무 힘들어 하기여 많은 걱정을 했었는데…. 참 다행이다. 아내는 소변을 볼 때도 훨씬 쉽게 일으킬 수 있었다. 오늘도 두 아들이 아내를 간병한다.. 나는 그냥 병실에서 같이 있을 뿐이었다. 아내도 자신의 몸을 자리에 뉘고 일으킬 때, 두 아들에게 해달라고 한다. 나보다 자식이 더 편한가 보다.
나는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았다. 휴일 동안 보조침대에서 거의 잠만 자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오늘 밤에도 교대로 엄마 곁에서 밤을 지새우며 간병을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병원을 나서기 전에 아내에게 얘기했다. ‘여보! 내가 제대로 못해줘서 미안해, 힘들지’ 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래도 당신이 있으니까 좋아!’라고 하였다. 가슴이 찡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야! 반드시 기적을 만들자, 꼭 나아 우리 행복하게 살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함께 공원길을 걸어보자고 나는 아내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오후엔 고양교육청에서 학업성취도평가를 위한 교감회의에 참석하였다. 저녁때는 병원에서 다시 아내를 만났다. 어제보다 아내의 발음이 훨씬 좋아졌다. 날 사랑하느냐니까, 아니란다. 반어법을 엄청 잘 쓰는 새침데기 아내 유리새야. 아내가 수혈을 하고서 힘이 좀 생긴 걸까, 그렇지만 두 발은 여전히 퉁퉁 부어있었다. 아내는 낮에는 계속 깨어있었다더니, 피곤한지 초저녁부터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오늘은 아내가 낮에 머리도 감았다고 한다. 어쩐지 아내의 얼굴이 더 상큼해 보였다. 여기 일산병원에서는 봉사자들이 아내의 머리도 감겨주고, 칫솔질을 하지 못 한다고 입안도 깨끗이 닦아주곤 하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아내의 발을, 얼굴을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정말 행복하다. 사랑하는 아내야! 영원히 우리 가족 곁에 있어줘요…
2007. 10. 19(금)
어제는 교장실에서 교장선생님과 운영위원장, 그리고 내가 만났다. 그동안 교장선생님과 운영위원장 사이의 기싸움 때문에 방치되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경기도교육청까지 비화되었던 그 문제,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던 소문들, 고양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겠다고 신고까지 했다는 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이도 교장선생님이 운영위원장에게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운영위원장도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드디어 머리가 맑게 개인 것 같았다.
오늘은 아내에게 자꾸 환청, 환시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누워서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리다가 물어보면 대답을 하기도 하였다. 매일 24시간, 수개월 동안 투여되는 저 모르핀, 항생제, 해열제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의 말대로 암세포가 뇌까지 전이되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발이 너무 부었다. 하마의 발이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아내의 배도 수박처럼 부풀어 있다.
저런 몸을 이끌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굳게 붙들고 있는 가엾은 내 아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25년을 함께 살아온 내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으니 어찌해야 될까? 안타깝게 시간만 간다. 내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너무 힘없는 존재임을 자책해 본다. 이젠 두 아들에게만 의지하여 침상에서 소변 한번 보기도 너무 힘에 부치는 아내이다. 어제는 아내가 영상의학과에 가서 오른쪽의 담즙배관이 잘 되어 있는지 위치 확인만 하였다. 그 결과 이상이 없어서 그냥 놔두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이런 병에 걸리게 해 놓은 나쁜 사람, 마음 한번 편하게 해 주지도 못한 자식, 병을 낫게 하지도 못하는 이 능력 없는 병신 김춘기, 나! 눈물만 자꾸 쏟아진다. 그래도 바라보면 내 눈으로 들어오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내 아내, 우주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가족을 뒷바라지 했던 아내. 그 아내가 중병을 짊어지고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으로 내 앞에 있으니, 너무나 가슴 아프다. 마음이 벼랑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매일 사리 때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허전하다. 24시간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 저런 두 아들을 효자를 둔 아픈 아내가 그래도 복을 조금이라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아침에 오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이제 가을이 깊어진 것이다. 그래도 눈부신 태양을 보며, 아내의 깨끗한 회복하여 다시 일어나길, 아니 기적을 또 기원해 본다. 그리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아빠로서의 눈물겹도록 고마움을 전해 주고 싶다.
2007. 10. 20(토)
어제는 짙은 고등색 변을 보았다. 오늘 새벽에도 여러번 변을 보았다. 검정색이었다. 혈액의 흔적도 보인다. 막둥이에게 기댄 채, 마지막 힘을 다해 아내가 변을 본다. 불룩해야 할 엉덩이는 오히려 들어가 있었고 그 옆 부분이 더 부어있었다. 아내는 무엇인가 자꾸 말을 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영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두 아들을 낳았던 자신의 아래 부분도 모두 자식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우리 아들 둘이 이 세상으로 온 그 길, 고향을 말이다.
그런 아내를 두고 나는 아침에 다시 병원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출근하여 아침에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아내가 자고 있다고 했다. 차라리 이런 상태에서는 잠에 빠지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두 아들은 밤낮 눈도 붙이지 못하고 엄마 곁을 지키며 엄마의 쾌유를 빌며 정성스럽게 간병을 하고 있었다.
2007. 10. 24(수)
아내의 병이 바다의 가장 깊은 골짜기보다 더 깊어진 것 같다. 이젠 얼굴에 대고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다. 여보, 여보, 불러도 소용이 없다. 아내는 일부러 그냥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뱃속의 십이지장쯤에서 계속 출혈이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매일 수혈을 하고 있었다. 어제도 혈액응고를 위한 혈장과 혈소판이 투명 호스를 통하여 몸속으로 계속 투입되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이도 오랜만에 수혈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추가 풀어져 드러난 늑골 사이 아내의 심장은 마라톤 풀코스를 주파한 청년처럼 심하게 뛰고 있다.
아내는 이제 변도 누워서조차 볼 수 없다. 그녀가 우리 두 아들이 젖먹이일 때 채워주었던 그 기저귀를 이젠 어미가 차고 있는 것이었다. 아기가 되어버린 내 아내. 두 아들은 쉴 새 없이 엄마의 기저귀를 갈아준다. 그리고 그곳을 물티슈로 말끔하게 닦아주고, 닦아준다. 딸이라도 하나 낳아 키워놓았으면 조금은 덜 쑥스러웠으련만…
간호사들은 계속 병실을 들락날락하며 혈압을 재고, 또 체온을 잰다. 나도 자꾸만 한의사처럼 아내의 손목에 내 엄지와 검지, 중지 손가락을 짚으며 맥박을 재본다. 그제는 속초의 처제가 왔다가 갔다. 오늘은 익산의 막내처제가 왔다. 이제 피를 나눈 가족들과의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출근하여 일을 하려고 해도 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아내가 돌릴 수 없는 병마의 깊은 골짜기에 빠졌는데도 가을햇살은 철도 없이 교무실의 유리 창문에 엉겨붙어 미소를 띠고 있다. 주렁주렁 달린 가을나무의 열매들은 연신 투신중이다. 은행나무 잎사귀들은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느라 노란 손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교정의 감나무는 가을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등불처럼 모두 꺼내어 달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야! 오늘도 가족과 함께 해주어 고맙습니다.
2007. 10. 26(금)
아내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이젠 전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내의 눈은 애기똥풀꽃처럼 노랗게 되었다. 실핏줄이 그어진 두 눈을 아내는 계속 뜨고 있었다. 아내는 그래도 세상에 아쉬운 것이 많은가보다. 동공이 쑥 들어가고 흰자위가 올라와 있다. 눈의 초점은 이미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내의 혈압이 심하게 불안해진다. 혈압이 높은 산의 협곡 아래로 하강하고 있는 것 같았다. 120/70, 118/20, 119/50… 정말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의사에게 수혈도 그만 하자고 하였다. 피검사도 더 이상 하지 말자고 하였다. 더 이상 치료 자체가 아내에게 고통만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가해지는 치료조차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두 아들의 입술을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홍수에 붉은 강물이 내 앞으로 가득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2007. 10. 28(일)
그래도 어제는 아내의 상태가 다시 안정되는 듯이 보였다. 혈압도 110/60 정도의 안정을 되찾아 놓고 있었다. 아내의 숨소리도 불안하지만 그런대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극도로 몸 상태가 나빠져 주위 사람들을 인식하지 못 하였던 아내가 어제는 눈을 또렷하게 뜨고 가족들을 한 사람씩 쳐다본다, 그리고 맑은 눈동자를 만들어 말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 동안 행복했다고, 세상에서 우리 가족을 가장 사랑했다고, 그렇지만 너무 일찍 머나먼 길로 떠나게 되어 정말 미안하다고…'
아내는 먼저 나에게 시선을 한참 또렷하게 보냈다.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내의 입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내가 입술을 떼자, 아내는 눈동자를 돌려서 큰아들과 눈을 정확하게 맞춘다. 잠시 후 아내는 엄마로서 가장 사랑을 많이 주었던 막둥이에게로 꽤 오랫동안 시선을 보내며 소리없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두 아들도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잊은 채, 엄마와 침묵의 입맞춤을 하였다.
그리고 아내는 다시 나와 한 번 더 눈을 맞춘다. 두 아들도 엄마와 포옹을 하고 엄마와 입을 맞추며 사랑을 교감한다. 번갈아 가족들과 눈을 맞추던 아내의 눈빛이 다시 흐려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밤부터 아내의 상태가 다시 흔들린다. 자꾸만 변을 보고 있었다. 두 아들과 나는 계속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내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나중엔 끈끈하고 검은 녹색을 띄는 투명한 액체가 나왔다. 막둥이 남규가 엄마의 몸 아랫부분에 묻은 변을 정성스럽게, 깔끔하게 닦아준다. 이 일은 우리 집 청결왕 남규가 전담하였다. 그 동안 몸속에 머물렀던 통증들이 바이러스들이 암세포들이 마지막으로 밀려 나오는 것 같았다. 병실엔 적막만이 불빛 속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내의 입엔 산소마스크가 씌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까지 마르고 갈라졌던 입술이 촉촉해졌다. 10시가 넘어가면서 아내의 혈압은 다시 불규칙해진다. 그리고 혈압의 수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110/70, 100/ 75, 95/60, 70/40, 69/38, 70/41, 60/35, 50/25… 그리고 심전도의 그래프가 점점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고 있었다. 여보! 우리 가족의 고민, 아픔, 고통들은 남김없이 당신이 다 가지고 가라고,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두 아들 남인이, 남규를 끝까지 지켜봐 달라고, 나는 아내의 따스한 손 꼭 붙들고, 내 소원을 전했다.
아내는 더욱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혈압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숨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맥박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간호사실을 통하여 급히 의사를 불렀다. 잠시 후, 의사가 달려와 청진기를 댄다. 그리고 아내가 운명했다는 사실을 아무 표정도 없이 내게 알리고 있었다.
의사는 아내의 배에 박혀 담즙을 배출하는 플라스틱관을 핀셋으로 빼낸다. 눈을 감고서야 몸에 붙은 인공호스들이 그동안 견뎌왔던 아픔들이 제거되는 것이었다. 아내의 표정이 그제야 평안해고 있었다. 아픔이 깨끗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아내는 손과 발, 그리고 몸은 체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따뜻함을 간직한 얼굴로 나에게 영원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전해주고 있었다.
2007. 11. 1(목)
사랑하는 아내가 수의 한 벌만 입고, 빈 손으로 떠났다. 아기 별들이 모여 사는 머나먼 은하수 나라로 훨훨 날아갔다. 그녀는 하얀 머리 날리며 나와 함께 호수공원을, 정발산길을 거닐자고 손 걸었던 우리 둘 사이의 약속까지도 모두 가지고 떠나 버렸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영원히 건너 간 것이었다. 따스한 사랑의 정만 강물처럼 내 가슴에 가득 채워놓고 그렇게 갔다.
5월의 백합처럼 언제나 화사했던 사람, 목소리가 꾀꼬리 같았던 사람, 손맛을 담아 만든 음식이 내 입에 착착 감겼던 여자, 남편 좀 잘 되라고 조롱박을 박박 긁었던 그 천사, 내가 퇴직하면 함께 세계 여행이나 하며 인생 후반을 즐기자며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던 여자. 그녀가 떠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나갔다.
두 아들에게 너희들 결혼도 못 시키고 가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던 아내, 꼭 10년만 더 살아서 엄마로서의 최소한의 할 일을 마무리 짓고 가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도하던 아내, 나에게는 ‘당신 아프지 말라고, 당신이 아프면 우리 집안 망한다.’고 당부해 주던 아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 사랑하는 아내, 하루 안 보면 두 배로 보고 싶었던 아내, 그 여자가 다른 세상 사람이 된 것이었다.
10월 30일 아침 일찍 정발산 성당에서 가족들의 슬픔과 함께 장례미사를 치뤘다. 그리고 아내는 벽제승화원에서 하얀 뼈 몇 조각으로 환생하였다. 그녀의 유골은 다리, 무릎, 허벅지, 배, 가슴, 머리 순으로 조그만 함에 담겨졌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둥근 머리뼈가 몸 위에 씌워졌다. 그 위에 뚜껑이 덮여진 유골함에는 "고 윤여숙 유스티나"라는 이름표를 초등학생처럼 예쁘게 달고 있었다. 아내의 유골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내달라고 했던 자유로청아공원의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아주 조그만 칸에 소담하게 자리를 잡았다. 여보! 정말 당신이 가고 싶은 나라가 거기였쑤?
2007. 11. 4(일)
그제는 일산3동 사무소에 가서 아내의 사망신고를 하였다. 1958년 9월 26일(음) 경남 밀양시 초등면 검암리 출생, 1982년 3월 26일 김춘기와 결혼, 두 아들 김남인, 김남규 낳고, 2007년 10월 28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일산병원에서 잠들다. 윤여숙.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그 여자를 이 세상 사람에서 지워달라고 서류를 낸 것이었다.
오늘은 그녀 남겨 놓고 간, 그래서 집에 쓸쓸히 남아 주인을 찾고 있는 옷들을 챙겼다. 예쁜 속옷, 헬스장에서 땀흘리며 입었던 추리닝, 그렇게 아꼈던 주름치마, 쫄쫄이바지, 그녀가 남대문시장에서 주로 샀지만 반짝이 무늬가 눈에 선명한 티셔츠, 그리고 색상이 아름다운 겉옷들… 그 옷들을 처음 아내와 만나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기 위해 갔던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으로 가져갔다.
어릴 적 아버지 발자국만 따라다녔던 수작골 우리 땅에 가서 아버지께 말씀도 못 드리고, 아내가 남겨놓고 간 그 옷들을 태웠다. 두 아들도 함께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그녀의 몸과 같은 그 옷들을 태웠다. 우리 가족의 아픔을 다 태운 것이었다. 슬픔도 함께 태웠다. 25년 동안 이 세상에서 가꾸었던 그녀와의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자물쇠 같은 인연마저도 모두 활활 태운 것이었다. 차를 돌려 아버님 혼자 강아지들과 살고 계신 고향집에 도착하엿다. 아버님께 인사를 하였다. 남인이, 남규도 할아버님께 꾸벅꾸벅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님께, 할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님도 그러신가 보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냥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땅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마음속에서 쓸쓸함을, 아픔만을 그냥 삭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초겨울 저녁의 퇴색된 내가 태어난 고향을 둘러싼 산골의 나무들도, 논밭의 들풀들도 모두 할 말이 없는 듯 침묵과 함께 그냥 그자리에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2007. 11. 5(월)
오늘은 이 세상에서 이름이 지워진 내 아내의 첫 번째 생일날이다. 두 아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미역국, 추어탕, 나물무침, 쌀밥, 그리고 과일들을 챙겨서 우리 세 식구와 처남도 함께 청아공원에 사는 아내에게로 갔다. 그리고 조촐하게 제사를 지냈다. 케이크도 자르고, 생일축하 노래도 불렀다.
아픈 사람 하나도 없는 나라, 행복의 꽃이 계절 따라 빛깔 다르게 피는 나라에서 근심없이 살아갈 아내를 생각하며, 오늘부터 웃으려고 한다. 그러나 왜 자꾸만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랑하는 두 아들이 남인이, 남규가 있어서 힘을 내야겠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두 아들을 낳아 살갑게 키워서 듬직한 청년으로 만들어 놓고 간 당신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여보! 이제부터 울지 않을 께. 두 아들 사랑해 주면서, 당신 매일매일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게… 홀아비 소리 듣지 않도록 옷도 매일 깨끗하게, 깨끗한 것으로 멋지게 입고 출근할 께. 여보! 당신도 오월의 벌판처럼 늘 푸른 그 나라에서 우리 두 아들에게 기도 많이 해줘야 돼, 그리고 나와의 아쉬움, 그리움 빨리 접고, 당신의 나라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줘…. 나 당신과 다시 만날 때까지 이제 외눈박이 물고기가 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네. 사랑해 여보.
2007. 11. 18(일)
오늘은 내 생일날이다. 아내 없이 두 아들과 맞이한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어제 밤부터 남인이는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휴일 아침에 빠른 걸음으로 호수공원, 정발산을 돌아 운동을 하고 왔다. 큰 아들은 벌써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 대신 아들이 차려준 생일날 아침밥을 먹었다. 미역국에 두부조림에, 계란말이에… 마음이 좀 그랬다.
아침식사 후 아이들이 색깔 있는 종이에 펜으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전해 준다. 두 아들이 각각 써서 아빠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가슴이 짠하였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아이들 몰래 눈물을 닦았다. 아내 대신 남인이, 남규가 아빠인 나를 걱정해 그렇게 주는 것이었다. 아빠 건강하라고, 몸 관리 잘 하라고, 자기들은 이만큼 엄마, 아빠가 키워 놓았으니까, 이제 걱정 말라고,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능력을 키워 아빠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 참 든든하다.
두 아들에게 재촉하여 파주의 월롱산엘 갔다. 가을 단풍이 쏟아져 내려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가 사진도 찍었다. 월롱산성, 용주사, 약수터를 지나며 뭐처럼 가족과 함께 했다. 그러나 아내가 함께 하지 못한 외출은 뭔가 속이 텅 빈 강정이었다.
보리밥쌈밥 부페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밤엔 케이크를 자르고, 맥주를 마시며 아이들과 차분하게 생일의 밤을 보냈다. 허전한 마음을 촛불로 뜨겁게 태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었다,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오늘도 신발장에 당신을 따라가지 않은 신발들이, 장농에 남아 있는 옷가지들이, 당신의 영정사진과 함께 우리 주인은 어디 갔느냐고 궁금해 하며 쓸쓸히,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우
2007. 12. 15(토)
오늘은 아내 49제이다. 어제 두 아들, 그리고 처남과 함께 경북 문경에 있는 金龍寺라는 사찰로 향한다. 부산에 살던 4촌 처남이 20여년 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법명은 정업이다. 현재 김용사의 주지스님인 것이다. 아내는 정업스님의 4촌 누나이다. 스님은 아내가 세상을 뜬 것을 알고, 그 날부터 절에서 천도제를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49제를 봉헌해 주는 것이었다.
어제 오후 3시가 좀 안 되어 일산에서 출발하였다. 강변북로를 지나 한남대교를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따라서 남으로 향했다. 오후 햇살이 차창으로 들어와 내 옆에 앉은 큰 아들은 얼굴이 뜨겁다고 했다. 신갈인터체인지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방향을 바꾸고, 다시 여주 JC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렸다.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달리는지라 손에서 땀이 조금씩 났다. 충주휴계소에 내려서 용변을 보고, 속초의 처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진입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충주휴계소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속초 처제내외를 만났다. 날씨는 이미 어둠 속에 빠져 있었다.
처제 내외의 차를 따라 고속도로에 다시 진입했다. 잠시 후 점촌 IC에 진입하니, 익산에 사는 막내처제네 식구들과 장모님, 그리고 김용사 주지인 정업스님이 함께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손을 잡으며 인사를 하고, 빠르게 밤길을 다시 달린다. 맨 앞에서 달리는 정업스님의 차가 과속을 하고 있었다. 맨 뒤에서 따라가는 나는 열심히 가속기를 밟으로 앞의 차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절에 도착하니, 몇 마리의 개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있었다. 인터넷에도 알려진 불심이 있는 개들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보면 일단 짖어대지만, 절대로 물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짐을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하였다. 절밥이었다. 백김치, 시금치, 청국장, 김, 콩자반 등의 반찬이 있었다. 마늘과 파 등이 들어가지 않은 절밥, 20여년만에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지만, 맛이 참 좋았다.
우리는 주지스님의 내실에 들어가 녹차를 마시게 되었다. 일반인들은 누구도 들어가기 힘든 주지스님의 내실이었다. 우리는 주지스님이 따라주는 녹차를 한 사람 당 네, 댓 잔씩은 마신 것 같았다. 그리고 스님인 처남이 세속에서 있을 때에서부터 출가하기까지의 여러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절간에서 맞이하는 첫밤이었다. 겨울밤 하늘을 수놓은 오리온자리, 황소자리, 마차부자리, 카시오페아자리 등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과 절과 산, 그리고 별자리들만 소곤거리는 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조용하던 산사에 하얗게 눈이 내렸다. 깊은 산 속의 눈이 저 세상 아내가 입고 있는 옷처럼 소복히 쌓여 있었다. 아침에 鮮憂所에 가서 근심을 풀고 왔다. 해우소에서 두 다리 아래로 느리게 떨어지는 변을 보며 자유낙하운동을 생각했다. 시원했다.
드디어 제사가 시작되었다. 음식은 미리 차려져 있었다. 주지스님과 보좌스님이 우리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천수경을 스님과 함께 우리 가족들도 따라 읽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불경들을 따라 하며 스님의 여러가지 독경이 계속되었다. 우리들도 계속 책을 보면서 열심히 따라 하였다. 두어 시간 동안 진행되는 경건한 의식에서 스님은 숨을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계속 독경을 하고 있었다. 책에 나오는 독경의 내용은 마음을 정갈하게 씻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열반에 이르라는 내용들이었다. 날씨가 추운 날 대웅전에서 지내는 제사인지라 몸이 으시시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내는 스님의 정성에 감복하여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야! 당신이 소천한지 벌써 49일이 되었구려. 당신이 가고 우리 두 아들은 나에게 어찌나 잘 하는지 눈물겹구려. 당신과 나 두 사람에게 하던 효도를 나에게 모아서 하는 것 같습디다. 제사가 끝나니 또다시 아내 생각이 난다. 눈물도 나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제사 후 점심식사를 하였다. 벌써 세끼니 째 먹는 절 음식이지만, 오랜만에 음식의 참맛을 보았다. 스님들은 이런 정갈한 음식을 먹고, 좋은 공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니,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정업스님과 같이 찍기도 하고, 가족들과 모여서 또 정다운 모습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다시 작별을 하였다. 스님은 다음에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오라고 아쉬워 하였다.
우리 차에는 우리 세식구, 장모님, 처남이 함께 했다. 그리고 한 대는 속초로, 또 한 대는 익산으로 향하였다. 귀경하는 영동고속도로는 정체상태였다.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장모님과 처남의 짐도 있고하여 우리는 신림동의 처가에 들러서 가기로 하였다. 아이들만 짐을 들고 외가집에 들르고, 나는 차에서 기다렸다. 아이들이 차에 오르니, 우리 세 식구만 남게 되었다. 자동차는 남부순환도로를 거쳐서 서부간선도로에 진입하였다. 그런데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 나는 방향을 틀어 목동의 둑방길로 방향을 바꿨다. 다행이 그곳은 자동차의 소통이 잘 되고 있었다.
일산에 진입한 나는 집에 들르지 못하고 바로 성당으로 향하였다. 아내는 내가 종교를 갖길 소원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오늘 마지막으로 교리를 배우러 가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는 갔지만, 우리 식구는 또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세끼 밥을 먹고, 잠자고, 출근하고, 홀로 되신 아버지 생각하면서 두 아들 남인이, 남규와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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