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가 나는 밀밭* / 임채성
-‘오베르’**에서 보내온 고흐의 편지
윤오월 밑그림은 늘, 눅눅한 먹빛이다
노란 물감 풀린 들녘 이랑마다 눈부신데
그 많던 사이프러스 다 어디로 가 버렸나
소리가 죽은 귀엔 바람조차 머물지 않고
갸웃한 이젤 틈에 이따금 걸리는 햇살
더께 진 무채색 삶은 덧칠로도 감출 수 없네
폭풍이 오려는가, 무겁게 드리운 하늘
까마귀도 버거운지 몸 낮춰 날고 있다
화판 속 길은 세 줄기, 또 발목이 저려온다
모든 것이 떠나든 남든 내겐 아직 붓이 있고
하늘갓 지평 끝에 흰 구름 막을 걷을 때
비로소 소실점 너머 한뉘가 새로 열린다
*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유화그림.
** 오베르 쉬르 와즈 : 파리 북쪽의 시골마을. ‘생레미’의 정신병원을 퇴원한 고흐가 약 두 달간 살다가 죽은 마지막 정착지로 그의 무덤이 있다.
<2008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