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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산문

좀생이 선생

by 광적 2012. 5. 14.

좀생이 선생

 

김춘기

 

   굽이굽이 흐르던 북한강이 속도를 잠시 늦추는 곳, 명지산이 철마다 명품 옷을 갈아입으며 자태를 뽐내는 곳, 그곳에 가평이 있다. 사계절 사람들이 몰려와 산그늘 아래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냇물 소리에 도시의 찌든 때를 벗기고 가는 곳이다. 나는 오래 전 그곳의 가평고교에서 제자들을 키웠다.

   요즘이야 학교마다 보안장치를 하고, 숙직전담원을 배치하여 선생하기가 얼마나 쉬워졌는지 모른다. 그 시절, 한 달이면 두세 번씩 숙직이 돌아왔다. “남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다녀왔는데, 우리만 숙직까지도 해야 되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새 학교에 부임하면 우선 “이 학교에는 남교사가 몇 명이나 될까?”하는 궁금증이 앞섰다. 평일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밤이 이슥해지면, 불야성을 이루던 교실들은 적막에 잠긴다. 그리고 학교에는 숙직교사와 행정실의 기사만 단둘이 남는다.

   그날도 난 H씨와 숙직이었다. 그가 먼저 순찰을 돌며, 문단속을 했다. 나는 자정쯤 손전등을 앞세우고, 학교를 살폈다. 숙직실과 연결된 본관 1층의 복도에는 중앙과 양쪽 끝에 계단이 있었다. 야간이면, 아래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마다 방범셔터가 내려진다. 이 학교는 1층만 살피면 되기에 다른 학교에 비해 숙직하기에 한결 수월했다.

   운동장 건너 체육관의 입구에도 순찰함이 있었다. 그 옆의 나지막한 건물은 카누부, 수상스키부의 숙소였다. 순찰 중 아이들은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지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운다. 나는 "얘들아! 내일도 일찍부터 공부하고, 운동연습도 해야 하지? 어서 자거라."하며 숙직실로 돌아왔다.

   피곤한지 고개가 한쪽으로 기운 채, 숙직실 벽에 등을 기대고 "푸-우 푸" 코를 골던 H씨. 내가 창문을 잠깐 여는 소리에 펄쩍 눈을 뜨며, “벌써 한 바퀴 도셨어요?”한다. 나는 H씨에게 “두어 시간 눈 좀 붙일게요.” 하고, 맨바닥에 누웠다. H씨는 벽에 참매미처럼 붙어있는 전등의 스위치를 눌러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FM라디오 소리가 방안 가득한 어둠과 섞이며 적막을 이룬다.

   금방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쾅쾅 창문이 깨질 것 같은 울림. 퍼뜩 정신을 차리니, “김 선생님! 보일러실에서 불이….”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나는 튕겨져 나갔다. H씨가 보일러실 곁의 연못에서 양동이에 물을 퍼 담아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보일러에 물을 확 끼얹었다. 그러나 불이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성을 내며, 거세게 위로 치솟는다.

   나는 즉시 손전등을 들고 현관 쪽으로 뛰었다. 암흑의 복도에서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소화기를 얼른 집었다. 보일러실로 달려온 나는 소화기의 호스를 불을 향하여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거품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당황하여 안전핀을 뽑는 것도 잊고 방아쇠를 당겼으니, 소화기가 작동될 리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나. 얼른 안전핀을 뽑아내고, 타오르는 불을 향해 다시 집중공격을 가하였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몇 번 눈을 끔벅거리더니, 금방 멎는 것이었다. 나는 “휴우”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잠시 후 보일러에서 "푹"소리가 나고는 다시 불길이 치솟는 게 아닌가.

   나는 “H씨! 소화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복도 뒷문 쪽, 교무실 입구, 서무실 앞…” 내 말소리가 빨라진다. H씨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나는 H씨가 가져온 소화기의 방아쇠를 당겨 불길을 향해 분말을 퍼부었다. 드디어 불이 다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H씨는 소화기를 계속 나른다. 나는 열심히 방아쇠를 당긴다. 발사 중간에 먹통 소화기는 즉시 내동댕이치면서, 또 다른 소화기로 분말을 쏘며, 불을 다 잡았다고 마음을 놓아가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또다시 불길이 "훅"하며, 더 높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소화기만으로는 이 불을 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H씨에게는 “계속 불을 끄고 계세요.”소리를 남기고는 숙직실 전화박스를 향해 달렸다.

검정색 다이얼식 전화기의 숨구멍에 손가락을 넣는다. “드르륵 드르륵.” 다이얼은 왜 이렇게 천천히 도는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대뜸 “여보세요. 소방서지요? 여기 가평고인데요. 불났어요, 불.” 숙직실이 날아갈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전화기에서는 “어디요? 좀 작게 말씀하세요.”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가평고교입니다, 가평고. 불이 났어요. 보일러실에요.” 전화기에서는 “예, 바로 출동하겠습니다. 딸그락.”

   나는 다시 보일러실로 날아갔다. H씨는 정신없이 불꽃과 1:1 전투 중이었다. 나를 확인한 H씨. “이젠 소화기도 다 떨어졌는데요. 어쩌죠? 큰일예요, 큰일.” 비명이 심야의 적막을 가른다. 여전히 불은 소화기를 쏠 땐 멎었다가 혓바닥을 점점 길게 빼며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젠 소화기마저 동이 났는데, 어떻게 하지? 미치겠네.” 내 입에선 어린 시절 꿈속에서 짚가리가 훨훨 타며, 불길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은 절규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H씨와 야생마처럼 날뛰는 불꽃 앞에서 그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야만 했다. 보일러실의 플라스틱 물건들이 지글지글 녹아내리며, 새파란 불꽃이 치솟다. 그것은 정말 마귀의 눈빛이었다. 매캐한 냄새로 숨은 탁탁 막혔다. 이젠 불길이 후끈 달아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용광로가 따로 없었다. 곧바로 좁아빠진 보일러실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애앵 애오, 애오… 번쩍 번쩍”하며, 소방차가 교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순간, 낭떠러지기 아래로 구르다가 나무의 그루터기를 간신히 잡고 멈춰서는 느낌이었다. 소방차의 도착과 함께 소방대원들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둘둘 말린 호스를 주루루 빼더니, 폭포수처럼 물을 내뿜기 시작했다. 나를 잡아먹을 듯이 이글거리던 보일러실의 불길은 순식간에 KO되고 말았다.

   경적소리에 잠에서 깬 선수아이들이 동그란 눈을 달고, 뛰어왔다. 아이들은 “선생님, 저희들은 왜 안 부르셨어요?” 나는 “아참…” 하며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정신이 없이 뛰다가 넋이 나가버린 나, 젊은 소방대원에게 “이제 괜찮은 겁니까? 후우!” 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는 보일러의 과열로 불이 난 것 같다며, 확인서에 서명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소방차는 부웅 시동을 걸며, 횅하니 교문을 빠져나갔다.

   아이들도 모두 숙소로 되돌아갔다. 나와 H씨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현관 옆의 가로등이 멋쩍은 듯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손전등으로 보일러실을 비춰보니, 타고남은 잔해와 소화기들이 전장에서 쓰러진 시신들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물에 잠긴 보일러실 바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이 든 나는 S교장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지만, 결례를 무릅쓰고. “교장선생님,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교사 K인데요.” 그리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금방 교장선생님께서 택시와 함께 나타나셨다. 그리고 얘기를 들으시더니, "김선생, 수고했어요. H씨도 혼났구먼."하고 되돌아 가셨다.

   나는 H씨와 다시 숙직실에 들어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 있음을 이제야 느꼈다. 등에선 흐르던 땀이 식으며, 으스스 한기가 밀려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날이 밝았다.

   숙직실과 바로 벽이 달라붙어있는 발간실로 가서 천장을 살폈다. 그을음 자국이 보일러실에서 발간실 쪽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마치 신부의 순백색 블라우스에 먹이 묻은 것처럼. 나는 발간실과 보일러실의 천장이 미세한 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때 발견하였다. 그리고 발간실은 다시 복도와 이어진 구조라는 것도 알았다.

   내 가슴은 다시 허공에서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소방차가 조금만 늦게 와서 저 불길이 발간실로 새어나가고, 거기에 그득히 쌓인 종이 더미를 태웠으면, 어떻게 되었겠나? 그러면 그 불길은 다시 복도로, 그리고 교실로, 학교 전체로…. 생각도 하기 싫었다. 내가 잠깐 단잠에 빠졌을 때, H씨까지 깨어있지 않았으면 또 어떻게 되었겠는가? 끔찍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 이후, 나는 화재안전에 대하여 유별나게 예민한 습관이 생겼다. 퇴근하기 전 교실의 전원 내리기, 겨울엔 난로점검, 휴지통 꼭 확인. 집안은 물론 자동차의 트렁크에도 소화기 비치, 도시가스의 중간밸브의 잠금은 내가 반드시 확인, 그리고 우리 아파트에도 직장 때문에 떨어져 있는 아내가 사는 원룸의 출입문 안쪽에도 “오늘도 전기, 가스 확실히 점검했나요?”라는 고딕체 붉은 글씨를 붙여놓고, 이들을 다시 확인하고야 집을 나서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특히 소나기눈이라도 펑펑 내리는 겨울이면, 조·종례시간마다 불조심에 대해 유독 잔소리가 많은 좀생이 선생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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