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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詩

죽변, 아침 바다<공무원 문예대전 우수상, 행정자치부장관상>

by 광적 2010. 5. 1.

죽변, 아침 바다 / 김춘기

 

바다가 출산중이다

어둠의 주름을 열며 에밀레종처럼 머리를 내미는 해

붉은 양수가 비릿하다

탯줄을 끊고도 바다는 계속 괄약근을 조이고 푼다

물의 부드러운 근육을 겹겹 쌓아올린 산맥이

바람을 앞세우며, 달려온다

파도가 자세를 낮추자

늙은 선장의 심박동이 빨라진다

어부의 투박한 손이 일제히 그물코에서

대나무 가지처럼 곧은 게의 다리를 풀어낸다

붉은 해도 함께 줄줄이 건져 올린다

만선의 깃발이 오르자, 바다는 다시 숨이 가쁘다

 

파도소리를 가득 싣고 온 배들이

항구에 짐을 푼다, 스티로폼 상자가 하얗게 쌓인다

붉은 피부를 접고 펴는 게들의 몸짓

그 광경을 서로 응시하는 깨알 눈빛

태양을 숭배하던 울진대게

다리의 마디마디 힘을 압축한 집게로

허공의 뒤꿈치를 물고 있다

경매사의 음성이 한 옥타브씩 높아진다

갈 길이 정해진 게들이 트럭에 실린다

제 몸을 공양하기 위해 기도하는 울진대게

그 모습이 숙연하다

바다는 하늘을 몇 만평씩 하역하여 다시 물밭을 경작한다

파도의 등성이마다 물꽃이 만개하는 바다

물밭의 깊은 골마다 어부의 심장소리가 푸르다

 

<제13회 공무원문예대전 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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