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이야기 / 김춘기
고요마저 출가한 외양간, 황소 울음도 지워진 빈 것만 가득한 집. 주말 대청에서 아버지와 겸상 차렸습니다. 상추에 풋고추에 봉일천 누이동생이 끓여놓고 간 아욱국에 내 마음 가득 말았습니다. 봉당에서 꼬리치는 흰둥이와 시선 주고받습니다.
밥 한술 뜨는 순간, 안마당 나팔꽃 사이로 어머니가 보입니다. 개울 건너 감자밭에서 돌아와 저녁밥 뜸 드는 사이 달빛에서 손톱을 깎아 주시네요.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침 삼키고요.
쌀밥 콩밥 팥밥 차조밥 수수밥 기장밥, 가끔은 참기름 고소한 김치볶음밥, 생일날 미역국, 대보름날 윤기 흐르는 오곡밥을 그리면서 식구들은 무릎 맞대고 하루 두어 끼 보리밥이거나 밀수제비였지요.
당신은 내게 섣달에도 몸이 덥다고 무 메밀 연근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오붓하게 상을 차려주고 싶다고, 손발 찬 누이동생에게는 밤 대추 호두 닭고기에 매실을 먹이고 싶다고 하셨죠.
어느 날인가는 부잣집 수양딸로라도 보내야 하냐며, 꿈속에서 그렇게 우셨고요. ‘한 달에 단 한 번이라도 쌀밥에 고깃국 한 사발씩이면 너희들이 미루나무처럼 키가 쑥쑥 클 텐데…’ 노래를 하셨지요, 어머니
압력솥 콧바람 치카치카, 거실 가득합니다. 도마질하는 아내의 앞치마가 환합니다. 이야기 가득한 대청마루, 온 가족 숟가락 부딪히던 때의 환히 웃고 계신 어머니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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