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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백산시 조선족학교에 가다

by 광적 2011. 8. 20.

 

중국 백산시 조선족학교에 가다

 

 

2011. 7. 27(수) 지린성 백산학교 도착

   여름방학이다. 방과후학교 참가 교사들을 격려하고, 공문서를 챙겼다.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책도 읽었다. 오후엔 시간적으로 느슨해지면 색소폰을 잠깐씩 불기도 하며 일주일간 교무실을 지켰다. 드디어 오늘, 중국의 지린성 백산시조선족학교로 연수를 떠난다.

   경기도예절교육원에서 연수 중이던 아내가 나를 배웅한다고 어제 밤에 먼 길을 달려왔다. 식사도, 기후도 낯선 곳에 가는데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며, 아프면 안 된다고 기를 살려준다. 착한 아내를 보면 늘 고맙고, 기분이 따뜻해진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고양교육청으로 향하는 새벽길에도 폭우가 점령하였다.

   05:20 세찬 빗줄기를 가르며 인천공항으로 버스가 질주한다. 장항습지를 품고 있는 한강이 온통 황토 빛이다. 창문에 흐르는 물기의 흐름이 정맥 핏줄처럼 보인다. 날씨가 흐린지라 유리창의 습기를 손으로 닦으며 밖으로 시선을 내보낸다.

   주머니 속에서 전화가 울린다. 지금도 나를 가장 생각하시는 아버님이시다. 환갑이 다 된 자식이 걱정되어 여든이 넘으신 어르신이 먼저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아버님께 잘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우리학교 김봉선 부장, 호국중학교 김은영 선생, 장성중학교 강무진 부장 등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고양교육청 김경순 장학사가 배웅 나와 인사를 하고 내린다. 버스는 김포대교를 지나 공항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소나기 소리에 짙은 안개가 덧칠된 아스팔트길 위, 비상등을 켠 자동차들이 거북이가 되어 엉금엉금 긴다.

   07:50 중국 선양행 KAL(KE831)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펼쳐든 신문에서는 춘천 산사태, 포천에서의 차량침수 소식이 내 시선을 끌어들인다. 비행기는 금방 구름을 뚫고 올라가 안정을 취한다. 뭉게구름 위 남빛 하늘로 아침햇살이 뿌려진다. 고도 9,800m, 시속 800km의 비행, 지상엔 폭우가 난동을 부려도 구름 위 하늘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중국의 랴오닝성의 성도 선양에 발을 딛는다. 우리 일행을 태울 버스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 타보는 중국 버스는 좌석의 앞뒤가 좁았다. 빡빡머리 중국 기사에게 몸을 맡기고, 낯선 하늘 아래 고속도로를 달린다. 노천탄광으로 유명하다는 푸순시가 눈에 들어온다. 버스는 지린성 백산시를 향해서 쉬지 않고 피스톤을 움직인다.

   푸순시 신빈현에 차가 멈춘다.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조상 묘, ‘淸永陵’ 글자가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60만 명의 조선인을 끌어다가 모진 고생을 시킨 일당들. 열린 대문 사이로 그들의 정체를 들여다본다.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 밭 사이로 붉은 기와지붕의 집들이 거의 규격화 된 모습으로 서있다. 아직 사회주의 국가 냄새가 풍긴다. 철강회사의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가 주위를 살피지 않고 뿜어져 나온다.

   버스는 계속 전진이다. 백산시로 가는 랴오닝성의 찻길은 엉망이다. 포장도 되는 둥 마는 둥이었다. 버스만이 아니라 다른 차들도 덩달아 속도를 내지 못하고 털털거린다. 연료를 아끼기 위한 이유도 있단다. 지린성 쪽은 포장이 잘 되어 있는데… 랴오닝성에서는 도로포장이 급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드디어 버스가 지린성(吉林省)에 진입한다. 통화시가 나타난다. 일도강, 이도강, 삼도강, …, 팔도강으로 강의 이름이 바뀐다. 백산시에 거의 도착할 무렵 백산학교 교장, 교감선생님이 마중을 나왔다. 우리는 백산학교 일행의 차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연수자 일행

   우선 이주일 동안 우리가 묵을 통따삥관(通達賓館)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목적지 백산시조선족학교의 교문에 들어선다. 아직은 우리 일행끼리도 서로의 얼굴을 잘 모른다. 중국에서 보는 우리 조선족 동포들의 학교, 우리말이 모여 있는 학교다. 운동장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더위를 뿜어내는 것 같다. 1층 건물과 3층 건물. 농구대가 덜렁 운동장 가운데 놓여있다. 방학이라 그런지 아이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 백산(白山-중국어로 바이산)시는 중국 지린성 남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옌볜 조선족 자치주, 서쪽은 퉁화, 북쪽은 지린, 남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해 있다. 백산은 장백산(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창바이산이라 함)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훈장시(渾江市)였으나, 1994년 1월 31일에 백산(중국말로 바이산)으로 개칭했다.

   중국에서의 첫 번째 식사자리, 선양시 발해대학교 후원회 김용규 비서실장이 온 가족과 함께 이번 연수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그의 사모님은 우리 일행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방장이 되었고, 아들 김성원은 통역을 맡아주었다.

   38도짜리 백산 빠이주(白酒), 그리고 11도짜리 삐주(麥酒)가 나온다. 식사 후 컴컴한 밤, 여자선생님들은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남자들은 거리의 포장마차로 향한다. 여기에서도 독한 술이다. 꼬치로 만든 안주, 꽈리 등도 그 옆에 자리를 차지한다.

   포장마차 곁, 공원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첫날밤을 위하여 밤 11시가 넘어서 술로 곤드레만드레 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들어온다. 한국에서 시작한 비가 여기에도 밤새 내린다. 빗소리가 드럼이 되어 밤새 유리창을 두드린다.

 

2011. 7. 28(목) 중국어 첫 연수

   눈을 뜨니, 물기 가득한 중국이 눈에 들어온다. 호텔의 창밖은 버스 주차장이었다. 먼저 아내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연수단 환영식

   아침 식사 후 백산조선족학교 본관 4층의 다목적실로 간다. 우리 연수단 환영식이다. 1958년 설립된 이 학교는 현재 김광석 교장선생님, 손룡철 부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교직원 46명, 학생수는 유치부․소학교․중학교 합쳐서 총 150여명이란다.

   대다수의 조선족 학생들은 도시로 나가고, 또 교육여건이 훨씬 좋은 한족학교로 가기 때문에 이 학교는 폐교 직전이란다. 한국에서 가져간 선물을 전달한다. 나는 우리나라 중학교 교과서를 직접 전달하였다.

한국 교과서 전달 모습

   첫 번째 중국어연수 시간, 강사는 조선족 김봉련, 방방 선생님. 반갑게 시선을 이으며 인사를 한다. 천상 북한사람과 외모와 말씨를 닮은 김봉련 선생님, 한족의 모습인 멋쟁이 방방 선생님. 그들은 분명 우리와 핏줄을 나눈 조선족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귀가 시끄럽다. 놀랜 표정을 지으며 무슨 소리인가 하고 뒤를 돌아다본다. 학교 근처 시내에서 나는 폭죽소리. 그것은 중국 사람들이 경사스러운 날 행사의 일종이란다. 개업식이나, 결혼식…등 기분을 내면서 하는 액막이 장면이란다. 창밖에서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오성홍기가 펄럭인다, 여기는 중국 땅이라고.

   점심식사 후 쉬는 시간, 나는 일행과 마사지 집으로 간다. 거리의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활보한다. 만주족들이 남성을 과시하기 위한 풍습이란다. 마사지실에는 5개의 마사지대가 있었다. 나도 옷을 입은 상태로 엎드려 낯선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상체를 열심히 누르고, 주무른다. 마사지사의 손길이 바쁘다. 중국 사람으로부터 서비스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즐긴다. 요금은 단도 20위안(한화 3500원).

   다시 백산학교의 3층 끝에 있는 컴퓨터실에 들렀다. 한국에서는 폭우로 중부지방 48명 사상, 아시아나항공 화물기 추락 등의 안 좋은 소식이 화면을 장식한다. 걱정이 앞선다.

   오후 역사시간. 고구려의 옛 도읍지 중국 지명 지안(집안), 환런(환인)에 대하여 듣는다. 그리고 백두산의 정계비, 국경선 문제 등을 다룬다.

   만주족, 몽고족, 회족… 등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들이 모두 말과 글을 잃어버렸단다. 하지만, 우리 조선족만은 아직 우리말을 지키고 있다. 자랑스럽다. 이곳은 옛 우리의 고구려 땅, 발해 땅이었다. 만주벌판을 간도라고 한다. 랴오닝성은 서간도, 지린성은 동간도, 헤이룽장성은 북간도이다.

   토문강을 경계로 중국과 조선을 나눈다고 되어 있단다. 그렇다면 통일 되었을 때, 우리의 영토가 간도지방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문강을 두고, 중국은 두만강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고 한다. 국가 간의 정의는 결국 힘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녁식사 후 호텔 앞 하천을 따라 강 건너 공원까지 다녀온다. 정리되지 않은 거리는 어수선하였다. 사람들은 목욕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았다. 옷은 세탁을 제대로 못 해서 그런지 남루하였다. 인천공항에서 로밍을 했지만, 휴대폰에 도달된 mms문자는 수신이 되지 않는다.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하늘은 다시 수도꼭지를 열었는지, 또 비를 뿌린다.

 

7. 29(금) 송화석박물관에 가다

   일찍 일어나 새벽 산책을 하며, 중국의 공기를 마신다. 스모그 자욱한 도시. 사람들이, 자동차가, 오토바이가 혈관의 피처럼 움직인다.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짐차가 지나간다. 노인이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있다. 비석을 만드는 돌공장도 보인다.

   백산시 제8소학교가 보인다. 여기도 역시 아스팔트 운동장이었다. 모터소리 내는 자동차가 검은 연기를 폴폴 뿜는다. 공장의 굴뚝에서는 우리나라 70년대의 검은 숨이 뿜어져 나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화장장이란다. 다시 백산시청, 백화점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우리나라의 엘란트라, 산타페가 가끔 보일뿐, 대부분은 중국에서 조립한 외제차가 거리를 누빈다.

   오후, 일행 모두는 30km쯤 떨어진 백산시 江源區에 위치한 松花石 박물관을 찾았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쑹화강의 퇴적암을 가공하여 만든 작품들이란다. 곰 사슴 코끼리 등 각종 동물모양의 조각품들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송화석 벼루가 유명하단다. 안내원 아가씨의 설명을 백산학교 문건 선생님이 우리에게 다시 통역을 한다.

   실내는 더워 땀이 줄줄 흐른다. 백산학교 김광석 교장선생님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는 입춘 전날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글을 써서 대문에 붙이는데, 중국에서도 그런 것을 하느냐고, 내가 묻는다. 김 교장선생님의 대답은 중국에서는 주로 ‘福, 喜, 壽’자를 두 자씩, 때로는 거꾸로 붙인단다.

송화석박물관에서 잠시 붓을 잡고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써보다

   마침 붓글씨를 쓰는 장소가 있다고 김 교장선생님이 내 손을 끈다. 그리고 내게 실력 한번 발휘해 보란다.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나는 송화석 벼루에 붓을 찍어 화선지에 글자를 쓴다. 첫 번째는 ‘花中君子’ 그 다음은 ‘淸淨無爲’ 그리고 한글로 ‘대한민국 김춘기, 백산학교 방문’이라는 글씨를 썼다. 별로 잘 쓰는 글씨도 아닌데, 사람들이 와~ 소리를 내며 박수를 쳐줘 쑥스러웠다.

   어제 마신 독한 술로 인해 오전까지도 내려앉아 있던 컨디션이 회복되고 있었다. 휴대폰에는 아내가 경기도예절교육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다음 주엔 다시 경인교육대학교에서 다문화연수를 받는단다. 참 부지런하고 속이 꽉 찬 아내이다. 서울의 폭우소식, 우면산의 산사태 등이 걱정스러웠다. 오늘도 나는 글라스로 마시는 중국술에 취해 만주 땅의 밤에 빠져든다.

 

7. 30(토) 중국문화 강좌 듣다

   아침 일찍 우리 방 룸메이트 최경연 장학사와 강 건너 산책이다. 개천 옆을 따라 아침시장이 펼쳐졌다. 리어카에서 돼지고기를 판다. 짐차에 염소를 싣고 와 그 자리에서 젖을 짜서 판다. 오이, 가지, 참외, 수박, 콩, 고수, 샐러리, 두부…등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이 길바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어린 시절 시장에 간 것처럼 그 모습이 재미있다.

거리의 아침 운동 중인 사람들

   거리에서 혈압을 재어주며 돈을 받는다. 이동식 병원도 아니고, 신기하다. 개울에서 아줌마들이 빨래를 한다. 어릴 적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 옆에서 세차하는 풍경도 보인다. 마침 산책중인 김봉선, 김은영 선생님을 만난다. 장검을 가지고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오후엔 북한 억양을 쓰는 문건 선생님이 중국문화에 대하여 강의를 한다. 문건 선생님 얘기로는 조선족들에게 1948년 중국의 수상 주은래가 북한말을 표준말로 쓰라고 지시했단다. 그러한 이유로 조선족들은 아직도 두음법칙에 대하여 부자유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1996년 한․중 수교 후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그는 백산시의 다른 곳에 있는 조선족학교 교장이었단다. 그런데 학생 수 감소로 폐교되고, 이 학교 조선어 선생님으로 노조위원장으로 근무 중으로 여기 선생님들은 그를 주석이라고 부른다.

   중국에는 공산당 이외에도 민주당 등 10여개의 정당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산당 이외의 나머지 정당들은 정권을 잡을 수 없을 뿐더러 공산당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허수아비 집단이란다.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빨간색은 태양․피․불을 상징하며 악귀를 물리친단다.

   저녁식사는 파오차이(중국식 배추김치-발효향이 특이함)를 곁들여 밥을 먹는다. 식사 후 나 혼자만의 백화점 견학이다. 음식, 보석, 전자제품, 옷가게 등이 보인다. 보석점에서 셔터를 눌러대자, 중국 보안원이 나를 제지한다.

   다시 야시장엘 들른다. 옷, 신발, 그리고 음식 파는 가게가 보인다. 가는 길에 나보고 어딜 가느냐고 영어로 묻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 없다. 장백산엘 갈 거냐고, 남한 사람이냐는 얘기까지만 들린다. 이곳 백산시는 외국인들이 거의 오지 않아 그런지, 중국어 외에 다른 말은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음식거리를 지난다. 그러나 먹고 싶은 음식이 없다. 눈으로 보기에 위생상태가 불결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우리나라 정도의 국민소득이 된다면 세계의 자원이 다 이곳으로 빨려 들어오지 않을까, 환경문제는 또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하늘은 오늘도 밤새도록 비를 뿌리고 있었다.

 

7. 31(일) 석회암동굴 탐방

   비를 핑계로 아침 운동은 생략한 체 늦잠에 빠졌다. 일요일이라고 식사 후 오전 일과도 없었다. 일행과 강 건너 야트막한 산에 마련된 공원을 오른다. 잣나무, 낙엽송, 소나무 등 우리나라의 공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산 넘어 龍山寺라는 절이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어떤 아줌마가 뛰어와 뭐라고 야단이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돈을 내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절의 입구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꽤난 굵다. 종교가 없다는 중국에도 절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오후 일정은 통화시에 있는 만수산 雲霞동굴 탐방. 6~7억 년 전 바다 밑에서 만들어진 석회암층이 융기하여 만들어진 산이 지하수의 용식작용으로 동굴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수산 雲霞동굴 입구

  종유석, 석순, 석주가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내 눈을 자극한다. 5개월 전에 개장한 동굴인지라 종유석의 흰 빛깔은 깨끗하고, 신선하였다. 해설자는 주로 종유석의 생성기원보다는 모양을 가지고 설명을 한다. 통역은 문건 선생님.

   잠깐 내가 연수단에게 석회암동굴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였다. 바람막이 옷을 입었어도 동굴 내부의 기온이 차다. 계속 계단을 따라 수직으로 내려가는 동굴이었다.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와 강 건너 산을 본다. 우리나라의 충청도 어느 마을의 강변 같았다.

   저녁식사 후 커피점(내부는 술집)에 들러 2차, 3차 맥주를 거푸 마신다. 긴장이 풀어진 나는 중국의 밤을 연속 마시며, 맘껏 취한다. 가게에서 나왔을 때, 점원인 예쁜 아가씨가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조선족이란다. 다정하게 사진도 한판 찍었다.

 

8. 1(월) 백산시 교육국 부국장 만남

   드디어 중국에서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모처럼 아침 하늘이 화창하다. 사람들만 지나다니는 무지개다리를 지나 강 건너 새벽시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늘도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모습이 애절하다. 옛날 우리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오전엔 중국어 공부시간이다. 오후엔 동북 삼성 중 랴오닝성, 지린성에서의 조선족 역사를 배운다. 강의는 김용규 실장님. 나는 역사에 문외한이라는 핑계로 겉핥기로 듣는다.

백산시청 교육국 부국장과의 만남

   저녁식사는 백산시청 교육국 부국장과의 만남이다. 조선족 狗肉店(개고기집)에서 만찬이다. 맛으로만 보면, 한국보다 못하였다. 향후 경기도고양교육장의 방문으로 고양시교육청과 백산시 교육국의 MOU체결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참석자는 김광석 백산학교장과 손용철 부교장, 김용규 실장, 우리 측에서는 나, 최경연 장학사, 강무진 부장이었다. 부국장의 인상이 밝았다. 우리 한국 사람을 만난 것처럼 부담 없이 즐거웠다. 부국장을 보내고, 자리를 옮겨 2차는 중국의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신다. 대륙의 분위기를 즐겨본다.

 

8. 2(화) 린장시 압록강에 가다

   중국에 머무는 시간이 귀중한 나는 새벽 5시부터 룸메이트 최장학사를 충동하여 강 건너 쪽으로 산책을 나선다. 그제 통화시에 소재한 운하동굴을 탐방하고 돌아올 때, 버스 밖으로 본 만주족 민속박물관 쪽으로 간다. 내부의 모습을 보지는 못 했지만, 야외의 벽에 새긴 그들이 돌에 새긴 조각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도 이런 박물관 하나쯤 있다면 참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전 중국어연수 후, 오후 일정은 린장(린강) 탐방이다. 12:30 버스에 오른다. 에어컨도 없는 버스, 앞뒤 자리가 너무 좁은 버스다. 더위를 흠뻑 마신 아스팔트길을 지나 공사 중인 찻길을 지난다. 덜컹덜컹 우리나라 70년대의 먼지가 날린다. 달리는 버스 곁의 산과 들판은 함께 춤을 춘다. 후덥지근한 오후이다.

   버스가 드디어 린장시에 다다른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이 진격하여 눈앞에 보이던 압록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강 건너가 바로 우리의 북녘 땅이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대한민국의 빼앗긴 국토를 본다. 그곳의 완만한 산등성이에는 나무가 별로 없다. 자세히 보니, 대부분 나무를 베어내고 밭으로 개간한 것이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선전구호와 사람 없는 별장들

   강가에서 첨벙첨벙 목욕하는 아이들, 그 곁엔 쭈그리고 앉아 빨래하는 아줌마가 보인다. 버스를 세우고,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북한 땅. 눈앞에 펼쳐진 그곳은 그들 고급공무원의 별장이란다. ‘우리나라 사회주의 만세’라는 대형 구호가 혼자 강을 향해 서있다. ‘3.5 청년광산’ 안내판 아래 규격화된 집들이 서있다. 인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 올라 잠시 후 선착장에서 압록강 유람 보트에 오른다. 더운 날씨에 구명 복을 걸쳤더니, 겹으로 여름을 한 꺼풀 더 입은 느낌  이다. 한국에서는 계속 비가 온다는데, 오늘 이곳의 여름 햇살은 종일 쏟아지며 이곳 중국은 물론 강 건너 북한 땅에까지 가득 찬 옥수수를 키우고 있었다. 광합성에 여념이 없는 여름 볕은 황소의 등처럼 완만한 산자락에 푸른 물감을 더욱 진하게 풀고, 그렇지 않아도 검은 내 얼굴에 멜라닌색소를 침전시키고 있었다.

   배가 움직인다. 중국인 뱃사람이 강물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노를 젓는다. 내 눈 바로 100m에 북한이 다가온다. 북한 동포들의 모습 속으로 내 시선이 이동한다. 목욕하러 나온 새카맣게 그을린 개구쟁이들, 그 아이들이 물싸움을 한다. 그 모습은 내 어릴 적 여름날의 복사판이었다. 우리 일행이 손을 흔들자, 그들도 힘차게 우리에게 손을 들어 소리 없는 메시지를 보낸다.

   한 남자가 여유롭게 낚시질을 한다. 압록강에서 바라보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머리 감는 아줌마, 그 위의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아무리 힘든 공산주의 세상이라지만, 거기에서도 여유로움이 보인다. 나무 아래에서는 황소가 동화책의 그림처럼 풀을 뜯는다. 강변에 돼지가 풀밭에서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거기에서는 돼지도 방목하는가 보다.

   우리가 탄 보트의 왼쪽은 북한 땅, 오른쪽은 중국 땅이다. 한쪽은 60년대의 우리 모습, 또 한쪽은 90년대쯤의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한낮 햇살에 달구어진 두 장면이 압록강에 반사되면서 물결 위에서 흔들린다.

중국과 북한을 잇는 철교

  중국과 북한을 잇는 철교가 보트 쪽으로 다가온다. 이곳 다리를 통해서도 중국과 북한 사이에 무역이 많이 이루어진단다. 우리 보트가 그 철교 밑을 지난다. 다리 위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짐을 가득 실은 트럭 3대가 통관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카메라 속에 그 장면을 열심히 담는다. 경의선 철도를 통하여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압록강 건너 북한의 낡은 아파트와 베란다에 걸린 빨래들

   나의 시선은 계속 강 건너 북한의 마을 풍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줌렌즈를 당기자, 벽이 시커먼 3층 아파트의 허름한 집에 빨래를 넌 모습이 보인다. 어떻게 하여 저렇게 살고 있는지, 가슴 한켠이 아프다. 저 강을 잠깐 건너가 북의 동포들을 보듬어주고 그들과 마음 속 얘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들의 온기를 넣어주고 싶었다.

압록강변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한 컷

  목적지에 닿았다. 보트에서 내린 우리들은 그들이 준비한 차에 실려 출발할 때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강가에는 중․조 국경선이라는 붉은 글자가 화강암에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오늘이 이번 연수의 첫 번째 클라이맥스이리라. 중국 군인이 훈련하는 모습도 본다. 분대병력쯤 되는 군인들이 민간인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것이 훈련이란다. 저렇게 하고도 제대로 된 군인이 될 수 있을까?

   항일운동에 젊음을 받쳤다고 조선족들에게 여전히 존경을 받는 김일성과 함께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중국 독립투사의 검은색 동상이 중국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중국인답게 제작된 엄청나게 거대한 조각품이었다. 순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면, 과연 우리나라는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런 역사는 상상하기도 싫다.

   6.25 동란 때, 참전한 중국 팔로군의 90% 이상이 조선족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당시 조선족들은 대부분 환국을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워낙 가난하여 고국으로 돌아오려는 조선족들의 요구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거절하게 되자, 그들은 남쪽으로 오기 위한 방편으로 스스로 한국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소리.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그것은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비극적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가슴 아픈 얘기였다.

   강바람을 타고 건너 온 북한 사람들의 애잔함을 놓아두고, 다시 백산으로 향한다. 옥수수 밭 사이로 난 국도를 따라 잠에 빠진 일행을 실은 버스는 달리고 달려 저녁 6시쯤 백산에 도착하였다.

   저녁식사는 야외 파티, 백산 빠이주가 또 나온다. 이제는 내 몸이 독주에도 적응되고 있었다. 우리 곁에서는 숯불에 고기가 익고 있다. 술과 함께 안주로 출출한 배를 채운다. 쇠고기가 우리나라 육포처럼 질기다. 그들 이야기는 늙은 소를 잡아서 그렇단다. 차라리 돼지고기가 더 입에 당겼다.

 

8. 3(수) 조선족 노인회 방문

   아침부터 또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고, 그 위에 우산을 더 쓰고 강 건너 아침 시장엘 또 간다. 비에 흠뻑 젖은 채,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허름한 우비를 입은 사람, 살이 부러진 우산을 그대로 쓴 사람. 내 유년시절 우리들의 부모님,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남루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조반은 순두부와 빵으로 대신하였다. 중국어 연수를 준비 중인 오전 강의실에서는 등리쥔의 노래 옐라이샹이 빗소리와 함께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오후에는 배성매 선생님의 중국의 차문화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다.

   茶가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 한다는 중국 사람들. 중국차는 색깔에 따라 녹차 황차 백차 청차 홍차 흑차로 나뉜다. 중국 10대 명차의 하나인 서호용정차는 항주 호포천의 물로 재배되었단다. 그것은 난의 향기를 지녔으며, 차를 우리면 어린 차의 싹과 여린 찻잎이 하나하나 피어서 나부끼는 깃발과 같다고 한다.

백산시 훈장구 조선족노인회 방문 모습

   저녁에는 미리 시간을 잡은 데로 백산시 훈장구 조선족노인회를 방문하였다. 회관은 학교 옆, 파출소 위에 있었다. 노인회관 대문에 들어서니, 우리의 악기 장구가 보인다. 북도 그 옆에 놓여있다. 노인들의 소일거리 마작도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칠판 앞에 ‘찔래꽃’이라는 노래가사가 하얀 종이에 괘도처럼 걸려 있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나왔다. 일행이 모두 합창으로 분위기를 달궜다.

   식사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개고기집이다. 회장님(69세)은 여자 분으로 연변대학교 조선어과를 나와 교사생활을 하셨단다. 부회장은 남자와 여자 각 1분씩이었다. 남자 부회장님은 큰아들이 한국에 살며, 세 번이나 한국을 방문(서울, 통영, 공주)하였단다.

   그분의 말씀이 모택동이 돼지고기를 제일 좋아했단다. 그들이 존경하는 중국의 정치가는 개혁개방을 하여 중국의 오늘을 있게 한 등소평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 북한의 김일성은 존경하지만,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그의 아들 김정일은 무슨 이유로 정권을 계속 잡고 있는지 못 마땅하단다. 북한도 빨리 개방을 해야 잘 살게 될 것 아니냐고…

   술잔이 오가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다. 나도 조선족의 마음이 되어 어깨동무하고 노래도 부르며, 동포의 훈훈한 정을 나누었다. 끝날 때쯤엔 모두 38도짜리 중국술에 온몸이 절어 있었다.

 

8. 4(목) 조선족 노인회장단과 오찬

   한국에서 비가 계속 온다더니, 여기도 자꾸 비가 온다. 비를 핑계 삼아 오늘은 아침운동을 빼먹고 휴식이 보약이라 위안하며, 계속 잠에 빠졌다.

   오늘로 중국어 기초과정연수가 끝나는 날이다. 동양의 가수로는 미국 뉴욕에서 공연을 처음 했다는 대만 가수, 15년 전 태국 여행 도중 치앙마이에서 세상을 떠난 鄧麗君의 夜來香이라는 노래를 배웠다. 김봉련, 방방 선생님이 선창을 하였다. 한국에서부터 미리 듣던 노래라 그런지 쉽게 따라 불렀다.

조선족 노인회장단과 오찬중

   점심식사는 조선족노인회에서 어제 저녁식사의 답례. 장소는 양고기집이다. 회족(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돼지를 조상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피하고 되새김질하는 고기만 먹는단다. 그중에서도 양고기를 제일 좋아한다나. 역시 오늘도 술로 몸을 달군다. 매일 체온이 1도씩은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아리랑을 선창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옛 가요도 연이어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한낮이지만,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중국에서 우리민족의 핏줄을 이었다. 술잔이 계속 움직인다. 어서 통일이 되어서 우리 이렇게 매일 함께 하자고, 악수를 하며 약속도 하였다. 모처럼 조선족 어르신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심정이 되어보았다. 통일이 빨리 되어 압록강에 수많은 다리를 놓고, 그 다리 위로 마음이 오갔으면 좋겠다.

   오후 늦게 백산학교의 식당에 도착하니, 요리강좌였다. 중국요리는 북경․상해․ 쓰촨․광동의 요리가 대표적이란다. 오늘은 중국 만두를 빚는다. 나도 몇 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저녁은 그 만두로 뱃속에 소화시킬 업무를 주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중학교에 근무한다는 분의 가족이 왔다. 딸이 중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고, 가족이 백두산을 구경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김용규 실장을 아는 분 같았다. 저녁에도 술, 오늘도 뱃속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8. 5(금)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경배

   오늘은 압록강 변에 위치한 고구려 제2의 도읍지 지안(集安)을 탐방하는 날, 아침 여섯시 반쯤, 버스에 오른다. 며칠 전 지났던 통화시를 지나자, 다시 넓은 옥수수 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휴게소에 버스가 멈춘다. 천일식품이라는 우리나라 기업이 운영하는 공장의 전시장이었다. 배가 두둑하게 나온 한국인 사장이 꼭 중국 사람처럼 보였다.

   오늘도 8월의 태양이 온통 산에서 들에서 광합성작용을 하느라 바쁜 여름이다. 길은 구불구불 중국의 아리랑고개를 넘고 넘는다. 콩밭 아래로 시냇물의 맑은 소리가 들린다. 터널을 자꾸 지난다. 중국의 터널은 전등이 거의 없다. 버스까지 답답하게 실내등을 켜지 않는다.

고구려 공원 표지석에서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이었던 지안에 닿았다. 커다랗게 세워진 누런색 돌에 새겨진 고구려공원이라는 붉은 글자가 보인다. 점심식사 장소를 확인한 후, 얼른 버스의 차창으로 본 공원으로 갔다. 재빠르게 사진을 몇 장 찍는다. 그곳은 고구려 유물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대대적으로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아무 흔적을 찾지 못하고 공원으로 만들었다는 곳이다.

장군총

  드디어 역사책에서 보던 동양의 피라미드,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장군총이 다. 높이 12.4m, 1100여개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유물,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도 웅장한 기개를 어깨에 짊어지고 만주벌판을 지키고 서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정부에서 방치하고 있는지, 귀퉁이가 붕괴되고 있었다. 올라가는 철제계단이 있으나, 지금은 출입금지. 그 곁에는 고인돌처럼 보이는 배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를 본다. 그 중 무용총 수렵도가 가장 눈에 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사슴, 호랑이를 향하여 활을 당기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유리 속에 갇혀 있는 광개토대왕비

  중국에서는 호태왕이라고 부르는 광개토대왕의 비가 유리 속에 갇혀 있었다. 높이 6.39m, 1775자가 새겨져 있다. 그 옛날 만주벌판을 호령하였던 위대한 우리의 대왕. 그의 정식 이름은 국광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께서는 그 뜻을 반도 펴지 못하고, 39세에 요절하였다. 하지만, 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왕으로 존경하고 싶다. 그 분께서 7, 80세까지 왕위를 지키셨다면, 중국의 동북삼성이 모두 우리의 국토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국토의 면적으로도 대국인 지금과 전혀 다른 위대한 대한민국을 상상해본다.

   ‘우리 역사를 빛낸 저 유물을 우리 손으로 직접 관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념사진을 몇 컷 찍는다. 잠시 상점에 들러 북한 지폐를 기념품으로 산다.

   지난번 린강에 이어 오늘 또 중국과 우리나라의 국경선, 압록강에 다시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본 북한의 모습도 비슷하였다.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드느라 여기도 산언저리에 나무가 거의 없다. 광산인지 뭔지 높은 굴뚝이 산중턱에 있고, 그 곳에서 연기가 계속 나온다. 중국 땅에 있는 압록강 표지석이 우리 땅으로 착각하면서 얼싸안고 사진을 찍는다.

   땀으로 범벅이 된 나는 계속 옛 우리의 고구려 땅에 발을 디디며 감회에 젖는다. 중국은 고구려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동북공정에 정신이 없다. 우리 땅을 남에게 빼앗기고 이제 와서 아쉬워하는 내 마음,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속이 시커먼 저 중국 놈들이 그 일을 하는 최종 목표는 북한을 손에 넣는 것이리라.

   다시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온 길을 되돌아 백산시로 향한다. 내일은 우리가 그렇게 기대하는 백두산을 탐방하는 날이다. 05:30 식사, 06:00 버스에 승차란다. 어서 밤이 지나가길 바란다.

 

8. 6(토) 백두산 천지에 오르다

   호기심 가득 실은 버스가 새벽길을 달린다. 길림성 백산시조선족학교에서 출발, 산굽이 빙글빙글 경적을 울리며 속도를 낸다. 여기는 만주 땅, 버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 사이를 질주한다. 동으로 자꾸 갈수록 컴컴한 터널이, 계곡을 이어주는 다리가 백두산이 가까워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공사로 얼룩진 국도의 곳곳은 정체와 서행의 반복이었다. 그저 바쁜 것이 없는 중국 땅, 우리 한국 사람들만 마음이 급하다.

백두산 입구(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름)

   ‘天下秘境 長白山’(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함)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멈춘다. 북한에서 백두산의 삼지연 공항을 완성하기 전 먼저 장백산 공항을 확장하려는 중국, 앞으로 국제선까지 띄우겠다는 그곳이다.

   백두산 스키장 건설에 맞춰 리조트의 분양광고가 요란하다. 중국에서도 부동산 바람이 분 것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바람을 일으키는 것일까? 안내원들은 붉은 쇼핑백에 분양광고물을 담아주기에 바쁘다.

   다시 백두산 서파 쪽으로 달린다. 구불구불 산길마다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울창한 늦여름 숲, 내 몸은 좌우로 노를 젓는다. 가문비나무가 지나간다. 잣나무가 떼로 그 뒤를 따른다. 소나무 숲도 동행이다. 몸이 기울어지면서 멀미가 스친다.

   푸른 햇살 가득 머금은 침엽수․활엽수의 이파리가 반짝인다. 태초의 하늘이 숲을 빨아올린다. 길가에는 바람의 발자국을 따라다니는 난쟁이 꽃들이 재잘거리고, 노루가 뛰는 그 뒤엔 원시림이 빽빽이 모여 자연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천지행 셔틀버스 주차장, 인파의 숲속에서 나오는 중국어가 내 귀를 들락거린다. 그 사이 다국적 언어도 한 몫씩 낀다. 주말의 그곳은 人山人海, ‘Changbai Mountain'을 머리에 붙이고, 버스는 드맑은 공기 가득한 숲을 가른다. 길가의 망초는 백의민족의 후예라고 하얀 꽃밭을 일구고 있다. 참나무․오리나무․은사시나무․소나무․낙엽송․잣나무․가문비나무가 길가에 도열해 손을 흔든다.

   하늘엔 조가비구름․양탄자구름이 마치 어머니가 뜨신 하얀 목도리처럼 걸려있다. 계곡의 시냇물소리가 청명하다. 공룡의 갈비뼈 같은 수삼나무 고사목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버스는 방향을 자꾸 틀면서 비탈길을 오른다. 롯데월드의 아틀란티스에 오른 기분이다.

   이제부터는 침엽수림대가 떼를 이룬다. 그 위쪽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다. 길가에 나온 들풀들이 일제히 춤을 춘다. 다시 자작나무 숲이다. 그 곁, 수삼나무가 하늘에 침을 놓는다.

   넘어지고 허리가 꺾이고, 또 하늘로 고개를 쳐든 고사목, 그리고 등뼈로 하늘을 받치고 있는 고사목들이 제각기 고유의 품새를 취하고 있다. 구름에 머리를 들이미는 봉우리, 하얀 등으로 엎드린 산의 능선이 여기가 백두산임을 알린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태양에 가까워져 그런지 햇살이 더욱 강렬하다. 흰색의 구절초가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린다. 산의 정상을 향해 돌격 자세를 취하는 나무들이 일제히 높은 포복중이다.

백두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드디어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서 휴식에 든다. 그곳부터는 끝없이 긴 계단이 우리들 앞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봉우리를 향해 물감 칠한 담쟁이덩굴처럼 사람들이 줄지어 오른다. 옛날 우리 땅이었던 여기가 중국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자작나무․사스레나무, 그 곁에 조선 백성들처럼 바위와 들풀들이 모여 비폭력시위중이다.

   꽃잎이 하얀 범의꼬리 바위구절초 박새꽃, 노란빛깔의 구름미나리아재비 금매화 두메양귀비, 새색시 연지빛깔의 좀참꽃 분홍바늘꽃, 그리고 보랏빛 물결 오랑캐장구채 하늘매발톱꽃이 초원 위에 수를 놓은 이곳은 들꽃의 천국이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구름 사이의 하늘은 1급수의 호수처럼 푸르다. 등에 땀이 흥건할 즈음, 함성이 들린다. 드디어 1,236계단의 끝, 나는 세상의 꼭대기에 우뚝 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발상지, 백두산 천지

   천지, 그곳은 양수 가득한 하늘의 자궁이었다. 눈 아래 펼쳐진 저 호수는 우리민족의 발상지. 성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나의 두근거림은 멈출 수 없었다. 온몸이 백두의 푸른 정기에 흠뻑 젖어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데라호 천지는 서기 900년쯤 화산폭발 후, 함몰에 의해 만들어진 하늘 아래 첫 호수. 동서거리 3.51㎞, 남북이 4.5㎞, 가장 깊은 곳은 384m로 압록강․두만강․쑹화강 줄기의 시원을 이룬다. 한 20억 톤쯤 된다는 저 양수를 반쯤 퍼다 한라산 백록담에도 부어주고 싶다.

   또다시 분출하면 동아시아 전체에 재앙을 부를 것이라는 천지. 만주족들도 자신들의 발상지 설화를 만들어놓고 숭배하는 그곳은 바로 경이로움의 정수리이었다. 조선․중국을 알리는 붉은빛 국경표시 글자가 내 눈을 자극한다. 나의 시선은 연신 분주하다.

   건너 편 봉우리들이 호수에 잠겨 흔들린다. 카메라는 이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천지의 물빛을 담고, 바람을 담고, 구름을 담고, 하늘의 잔잔함까지 다 담는다. 괴물 출현소식이 가끔 들리는 물의 나라, 혹시 내 눈에도 무엇이 들어오지 않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호수를 응시한다. ‘월경금지’ 경고문구가 보인다. 총을 든 군인들이 국경선을 넘지 말라고, 사람들을 중국 쪽을 몬다.

천지를 배경으로 한 컷

  왼쪽 산봉우리의 벼랑으로 활강하던 검은 구름이 일시 동작을 멈춘다. 하늘이 훌쩍 내려앉은 천지, 내 마음 모두 호수에 빠져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어서 통일이 되어서 휴전선을 밟고 개성, 함흥을 거쳐 이곳에 와 남북이 함께 얼굴을 씻을 날을 백두의 흰 봉우리를 바라보며, 기원해본다.

   이제는 다시 내려가야 할 시간.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니, 산 아래 풍광이 정지된 화면처럼 펼쳐진다. 백두는 열차처럼 이어지는 사람의 띠를 연속 끌어올리고 있었다. 순간 구름이 천지를 잠식한다. 안개를 뚫고, 얼굴 검게 탄 인부가 사각 철제빔을 메고 올라온다. 할머니가 가마에 실려 그 뒤를 따른다. 아버지의 등에 엎인 아이도 바람을 붙들고 계단을 오른다. 나는 얼른 계단 곁에서 솟는 천연 암반수를 병에 가득 담는다. 그리고 내 생애 최고의 청량감을 마신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바람을 거스르며 지그재그 내리막을 달린다. 겁 없는 버스는 속도를 아끼지 않는다. 들꽃 전시장을 바라보며, 짙푸른 숲의 한복판을 따라 하향곡선을 줄줄이 긋는다. 순간 버스가 브레이크를 잡는다.

금강대협곡

   금강대협곡이다. 백두산이 폭발을 일으키고 용암이 흘러내린 자리, 그곳이 차별침식을 받아 만들어진 험준한 골짜기이다. 깊이 약 80m, 폭 120m, 길이는 대략 70km. 계곡의 능선이 공룡의 갈비뼈라면 협곡은 그의 가슴속이었다. 그 아래 물소리만 가끔 올려 보내는 깊은 바닥은 수천만 년을 간직한 시간의 금고였다. 아니, 그곳 땅속 깊은 곳에는 우리조상들의 온기가 식지 않은 지하박물관이 함께 있을 것만 같았다.

   몇 개의 고사목이 골짜기를 향하여 거꾸로 서있다. 칼질을 당한 벼랑이 바람의 칼날을 세운다. 내 마음은 모두 협곡의 맨 밑바닥에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시선은 절벽의 모서리를 타고 오르내렸다. 아마 그곳 제일 깊은 곳에 백두의 심장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해가 서산을 넘고 있다. 예정시간보다 늦게 버스는 다시 호텔이 있는 백산시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에도 역시 먼지 뽀얀 도로공사, 버스는 또 정체를 반복한다. 녹슨 오토바이 짐칸의 남루한 인부들이 경찰의 지시를 받고, 내려서 걸어간다.

   사람들이 차에서 나와 담배연기를 뿜는다. 두런두런 이야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숲속으로 들어가 일을 본다. 우리나라 1960년대의 필름을 다시 보는 것이다. 시간 반쯤 멈췄던 자동차 행렬이 잠에서 깬 벌레처럼 다시 꿈틀거린다.

   버스는 무송을 지나 밤길을 달린다. 낯선 길, 어둠만 남아있는 길, 가끔씩 마을의 불빛만 몇 개씩 흔들리는 길…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의 국도는 적막 속에 갇혀 있다. 창밖에는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등 같은 별빛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불빛 희미한 주유소 어귀에 차가 섰다. 소낙비를 뿌린 하늘이 별자리를 본격적으로 연다. 백조자리의 데네브, 거문고자리의 직녀성, 독수리자리의 견우성을 여름밤의 대삼각형이라고 한다며, 그리고 오늘이 칠월칠석날이라 견우․직녀가 만나면서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 것이라면서.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호텔에 돌아왔다. 사람들이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직도 호기심 가득 찬 가슴으로 천지 그 위에 머물러 있었다.

 

8. 7(일) 고구려 제1도읍지 환런

   07:00 고구려의 제1 도읍지, 환런(桓因)으로 출발한다. 버스는 통화를 거쳐 산길, 들길을 따라 주위를 기웃거리며 달린다. 작렬하는 햇살이 눈부시다. 여기 저기 낮은 산이 엎드려있지만, 그 곁은 넓은 벌판이 받치고 있다. 옛 우리의 땅 만주벌판, 지금은 온통 옥수수 밭으로 출렁인다. 구절양장 계곡의 길을 따라 버스는 간다. 맑은 시냇물이 거울처럼 빛을 반사한다. 눈에 들어오는 길가의 풍광은 우리의 산하를 닮았다.

오녀산성 표지석

  고구려 제1도읍지, 졸본성으로 부르던 환런에 차를 주차하고, 오녀산성에 오른다. 五女山에 우뚝 선 이 성의 원래 이름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다.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은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한 고구려 특유의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붙인 마음에 들지 않는 산성의 이름. 셔틀버스에서 내려 돌계단을 오른다. 싱그러운 숲 사이로 난 길, 습기를 머금은 돌이 미끄럽다. 45도쯤의 경사를 따라 계속 발걸음을 올려놓는다. 거대한 수직바위로 이루어진 天昌門을 지나 정상에 닿는다. 그곳은 자연으로 이루어진 천연 요새였다.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오녀산성 정상에서 본 랴오닝성  제1경

발아래 펼쳐진 풍광은 랴오닝성 제1경이다. 강을 막아 만든 물빛 가득한 댐이었다. 마을이 수몰되어 산봉우리들이 점점이 섬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역사유적들이 무수히 수몰되어 있으리라 예상되는 그곳, 하지만 호수 위에 펼쳐진 세상은 하늘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물기에 축축한 바람이 불어와 내 얼굴에 들러붙는다. 요새 위에 서있는 소나무들이 마치 고구려의 장수들 같았다.

오녀산성의 이곳저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중국인들에게 도교의 일종이라는 무속풍경이 보인다. 뜨거운 햇살이 내 얼굴과 팔뚝을 열심히 태운다. 다시 계단을 내려온다. 물기 묻은 돌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옮긴다.

   한여름 햇살이 가득 깔린 시내의 한낮은 눈이 부셨다. 하얀 빛깔을 건물들, 중국 같지 않은 아파트 단지. 태양은 내 머리를 데우지만, 나는 거리의 풍광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이제 우리의 중국 연수 일정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점심을 먹고, 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멀리 오녀산성이 곧추서서 우리를 배웅한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고구려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우고 나라를 지켰던 그곳을 중국 사람들에게 맡기고 버스는 달린다. 일행 대부분은 꿈속을 향하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창밖을 연신 바라본다. 통화를 지나 버스는 다시 백산에 와서 시동을 끈다.

   저녁식사는 샤브샤브. 개인의 자리마다 등처럼 생긴 자그마한 그릇에 불이 켜지고, 양념을 넣은 육수가 끓는다. 얇게 썬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를 거기에 넣는다. 채소도 함께 넣어 익힌다. 더운 날씨인지라 땀이 시냇물처럼 흐른다. 에어컨을 포기하고, 창문을 모두 열어젖힌다. 이국의 처음 보는 문화와 함께하는 진득한 만찬이었다.

 

8. 8(월) 환송연, 밤을 흔들다

   내일이면 고국으로 간다. 하루가 더 아쉬워 아침 일찍 일어나 강 건너로 산책을 갔다. 함께 모여 체조를 하는 사람들. 오늘도 열려있는 아침 시장의 풍경. 여기가 중국이라며 흐르는 도시의 오물을 싣고 흐르는 강. 나는 그 장면, 장면에 어느 정도 정들었다. 혼자 나간지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아침 식사 후, 버스를 타고 쇼핑몰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김봉련, 방방 선생님이 안내를 맡았다. 버스비는 1위안. 여러 가지 약제를 파는 가게에는 사슴의 머리표본이 벽에 붙어있었다. 집집 산삼이 전시되어 있었다. 잡화를 파는 가게들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를 타고 되돌아오던 길, 내 옆에 앉은 아가씨와 손바닥에 글씨를 써가며 통하지 않는 대화를 한다. 그녀도 외국사람인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내가 손을 뻗어 같이 셀카도 한방 찍었다. 헤어질 땐, 악수도 하고 그녀가 손을 흔들어준다.

   이어서 백화점 근방의 지하상가에 들렀다. 여자선생님들은 옷도 사고, 선물도 샀다. 나도 아내에게 줄 화려한 모자를 샀다. 백화점에도 들러 아이쇼핑을 하였다.

   일행에서 빠져나온 나, 다시 시장엘 들렀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더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음식, 과일, 채소를 파는 집들을 지나며, 중국을 살핀다. 가금류를 파는 가게에 눈이 끌려 머물렀다. 식용 비둘기, 참새, 까치,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철사로 만든 우리 안에 갇혀있었다. 말이 통하면 무슨 새인지 물어보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환송연에서 방방 선생님과 한 곡조 뽑는 모습

   저녁식사는 환송연이었다. 백산 빠이주가 돌아가고, SNOW 맥주가 나온다. 온몸이 함께 취한다. 작별의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술잔도 바쁘다. 멀리 중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동포들. 젊은 사람들일수록 도시로 진출하면서 자꾸 우리말을 지워가고 있다. 앞으로 몇 십 년이 지나도 조선족들이 계속 대를 이어갈까?

   김광석 교장선생님의 환송인사, 속 깊은 말을 다 하고 싶어 중국말로 한다. 통역은 역시 문건 선생님. 그리고 내가 우리 측을 대표하여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다시 만나자고, 이국땅에서 우리의 피를 이으며 힘차게 살아가야 한다고 축복을 보냈다. 이제 우리 고양시와 백산학교의 혈관이 이어져 앞으로 더 많은 교류가 피가 흘러야 한다고 몇 마디 하였다.

   준비된 노래방이 펼쳐졌다. 중국 땅에서 우리 노래가 나온다. 한잔씩 술도 들어간지라, 흥겨움이 넘실거린다. 백산조선족학교 문건 선생님, 이현택 선생님의 한국노래 실력은 우리보다 출중했다. 나도 목이 터지도록 몇 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은 흘러가고 있었다.

 

8. 9(화) 귀국길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식사 후 버스에 올랐다. 중국으로 오는 날에 이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에도 하늘은 잊지 않고 비를 뿌린다. 인터넷에 한국에 비 피해가 많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2주 동안 정들었던 백산시 훈장구 백산시조선족학교, 다시 이별이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버스는 통화를 지나 신빈에 잠시 멈춘다. 철없이 주룩주룩 내리는 비, 올 때 들렀던 청나라 누루하치의 흔적이 있는 영릉이다.

   점심을 먹고 버스는 또, 빗속을 달린다. 중국의 들판이 산을 엎고서 계속 뒤쪽으로 달린다. 지린성, 랴오닝성은 온통 옥수수 밭, 이따금씩 보이는 논은 그 옛날 조선족 사람들이 일군 것이란다. 이따금씩 보이는 공장의 굴뚝에서는 쿨쿨 매연이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정없이 뿜어댄다. 랴오닝성에 들어오면서 산의 등성이가 자꾸 낮아진다.

   노천탄광으로 유명한 푸순을 지나 버스는 선양에 진입한다. 여기는 랴오닝성의 성도. 단장된 모습의 세련된 건물들을 차창에 보여주며, 내 눈에 다시 들어왔다. 창밖을 지나는 축구장에서는 지난 북경올림픽 때 축구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버스는 드디어 선양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우리를 내려놓는다.

   공항 면세점에서 중국술을 두병 사서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러 병을 사서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전하련만, 공항에서 통과시켜주지 않는다.

   16:30 인천공항행 비행기가 비가 가득한 구름을 향하여 이륙한다. 구름 위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을 쏟아내고 있었다. 저녁 기내식은 우리나라 음식에 가까워 올 때보다 먹기 좋았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따렌의 상공을 지나 보하이만을 내려다보며 영종도 상공을 선회하다가 인천국제공항에 우리를 풀어놓는다.

   중국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가는 시간을 맞춘다. 그리고 고양교육지원청에서 온 버스에 오른다. 잠시 후 버스는 영종대교를 빠져나와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지나 일산에 진입한다. 아직도 마음은 지린성 백산시에 있었다. 내 차는 알아서 중산마을 우리 아파트로 향한다.

   초인종과 함께 하얀 장미처럼 마음이 순결한 아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계명성처럼 눈이 맑은 그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새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빛깔을 가진 여자, 나와 남은 인생길을 동행할 내 반려자, 소중한 아내이다. 그녀와 진한 포옹을 한다. 고개를 드니, 벽에는 보고 싶었던 신랑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색 풍선과 함께 벽에 붙어 있었다. 아내의 맘씨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조선족의 몸에 흐르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대하여, 북한 동포들이 처한 시대적 안타까움에 대하여, 백두산 천지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새롭게 느낀 여행이었다. 그리고 중국어에도 입문하는 뜻있는 연수였다. 이 연수를 지원해주신 고양시와 고양교육지원청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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