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일기

백두산 천지에 오르다.

by 광적 2011. 8. 30.

 

 

백두산 천지에 오르다

 

김춘기(현산중학교 교감)

    호기심 가득 실은 버스가 새벽길을 달린다. 길림성 백산시조선족학교에서 출발, 산굽이 빙글빙글 경적을 울리며 속도를 낸다. 여기는 만주 땅, 버스는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 사이를 질주한다. 동으로 자꾸 갈수록 컴컴한 터널이, 계곡을 이어주는 다리가 백두산이 가까워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공사로 얼룩진 국도의 곳곳은 정체와 서행의 반복이었다. 그저 바쁜 것이 없는 중국 땅, 우리 한국 사람들만 마음이 급하다.

    ‘天下秘境 長白山’(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함)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멈춘다. 북한에서 백두산의 삼지연 공항을 완성하기 전 먼저 장백산 공항을 확장하려는 중국, 앞으로 국제선까지 띄우겠다는 그곳이다.

    백두산 스키장 건설에 맞춰 리조트의 분양광고가 요란하다. 중국에서도 부동산 바람이 분 것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바람을 일으키는 것일까? 안내원들은 붉은 쇼핑백에 분양광고물을 담아주기에 바쁘다.

    다시 백두산 서파 쪽으로 달린다. 구불구불 산길마다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울창한 늦여름 숲, 내 몸은 좌우로 노를 젓는다. 가문비나무가 지나간다. 잣나무가 떼로 그 뒤를 따른다. 소나무 숲도 동행이다. 몸이 기울어지면서 멀미가 스친다.

    푸른 햇살 가득 머금은 침엽수․활엽수의 이파리가 반짝인다. 태초의 하늘이 숲을 빨아올린다. 길가에는 바람의 발자국을 따라다니는 난쟁이 꽃들이 재잘거리고, 노루가 뛰는 그 뒤엔 원시림이 빽빽이 모여 자연다큐멘터리를 보여주고 있다.

    드디어 천지행 셔틀버스 주차장, 인파의 숲속에서 나오는 중국어가 내 귀를 들락거린다. 그 사이 다국적 언어도 한 몫씩 낀다. 주말의 그곳은 人山人海, ‘Changbai Mountain'을 머리에 붙이고, 버스는 드맑은 공기 가득한 숲을 가른다. 길가의 망초는 백의민족의 후예라고 하얀 꽃밭을 일구고 있다. 참나무․오리나무․은사시나무․소나무․낙엽송․잣나무․가문비나무가 길가에 도열해 손을 흔든다.

    하늘엔 조가비구름․양탄자구름이 마치 어머니가 뜨신 하얀 목도리처럼 걸려있다. 계곡의 시냇물소리가 청명하다. 공룡의 갈비뼈 같은 수삼나무 고사목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버스는 방향을 자꾸 틀면서 비탈길을 오른다. 롯데월드의 아틀란티스에 오른 기분이다.

    이제부터는 침엽수림대가 떼를 이룬다. 그 위쪽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다. 길가에 나온 들풀들이 일제히 춤을 춘다. 다시 자작나무 숲이다. 그 곁, 수삼나무가 하늘에 침을 놓는다.

    넘어지고 허리가 꺾이고, 또 하늘로 고개를 쳐든 고사목, 그리고 등뼈로 하늘을 받치고 있는 고사목들이 제각기 고유의 품새를 취하고 있다. 구름에 머리를 들이미는 봉우리, 하얀 등으로 엎드린 산의 능선이 여기가 백두산임을 알린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태양에 가까워져 그런지 햇살이 더욱 강렬하다. 흰색의 구절초가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린다. 산의 정상을 향해 돌격 자세를 취하는 나무들이 일제히 높은 포복중이다.

    드디어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서 휴식에 든다. 그곳부터는 끝없이 긴 계단이 우리들 앞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봉우리를 향해 물감 칠한 담쟁이덩굴처럼 사람들이 줄지어 오른다. 옛날 우리 땅이었던 여기가 중국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자작나무․사스레나무, 그 곁에 조선 백성들처럼 바위와 들풀들이 모여 비폭력시위중이다.

    꽃잎이 하얀 범의꼬리 바위구절초 박새꽃, 노란빛깔의 구름미나리아재비 금매화 두메양귀비, 새색시 연지빛깔의 좀참꽃 분홍바늘꽃, 그리고 보랏빛 물결 오랑캐장구채 하늘매발톱꽃이 초원 위에 수를 놓은 이곳은 들꽃의 천국이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구름 사이의 하늘은 1급수의 호수처럼 푸르다. 등에 땀이 흥건할 즈음, 함성이 들린다. 드디어 1,236계단의 끝, 나는 세상의 꼭대기에 우뚝 선 것이다.

    천지, 그곳은 양수 가득한 하늘의 자궁이었다. 눈 아래 펼쳐진 저 호수는 우리민족의 발상지. 성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 나의 두근거림은 멈출 수 없었다. 온몸이 백두의 푸른 정기에 흠뻑 젖어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데라호 천지는 서기 900년쯤 화산폭발 후, 함몰에 의해 만들어진 하늘 아래 첫 호수. 동서거리 3.51㎞, 남북이 4.5㎞, 가장 깊은 곳은 384m로 압록강․두만강․쑹화강 줄기의 시원을 이룬다. 한 20억 톤쯤 된다는 저 양수를 반쯤 퍼다 한라산 백록담에도 부어주고 싶다.

    또다시 분출하면 동아시아 전체에 재앙을 부를 것이라는 천지. 만주족들도 자신들의 발상지 설화를 만들어놓고 숭배하는 그곳은 바로 경이로움의 정수리이었다. 조선․중국을 알리는 붉은빛 국경표시 글자가 내 눈을 자극한다. 나의 시선은 연신 분주하다.

    건너 편 봉우리들이 호수에 잠겨 흔들린다. 카메라는 이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천지의 물빛을 담고, 바람을 담고, 구름을 담고, 하늘의 잔잔함까지 다 담는다. 괴물 출현소식이 가끔 들리는 물의 나라, 혹시 내 눈에도 무엇이 들어오지 않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호수를 응시한다. ‘월경금지’ 경고문구가 보인다. 총을 든 중국군인들이 국경선을 넘지 말라고, 사람들을 중국 쪽을 몬다.

    왼쪽 산봉우리의 벼랑으로 활강하던 검은 구름이 일시 동작을 멈춘다. 하늘이 훌쩍 내려앉은 천지, 내 마음 모두 호수에 빠져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어서 통일이 되어서 휴전선을 밟고 개성, 함흥을 거쳐 이곳에 와 남북이 함께 얼굴을 씻을 날을 백두의 흰 봉우리를 바라보며, 기원해본다.

    이제는 다시 내려가야 할 시간.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니, 산 아래 풍광이 정지된 화면처럼 펼쳐진다. 백두는 열차처럼 이어지는 사람의 띠를 연속 끌어올리고 있었다. 순간 구름이 천지를 잠식한다. 안개를 뚫고, 얼굴 검게 탄 인부가 사각 철제빔을 메고 올라온다. 할머니가 가마에 실려 그 뒤를 따른다. 아버지의 등에 엎인 아이도 바람을 붙들고 계단을 오른다. 나는 얼른 계단 곁에서 솟는 천연 암반수를 병에 가득 담는다. 그리고 내 생애 최고의 청량감을 마신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바람을 거스르며 지그재그 내리막을 달린다. 겁 없는 버스는 속도를 아끼지 않는다. 들꽃 전시장을 바라보며, 짙푸른 숲의 한복판을 따라 하향곡선을 줄줄이 긋는다. 순간 버스가 브레이크를 잡는다.

    금강대협곡이다. 백두산이 폭발을 일으키고 용암이 흘러내린 자리, 그곳이 차별침식을 받아 만들어진 험준한 골짜기이다. 깊이 약 80m, 폭 120m, 길이는 대략 70km. 계곡의 능선이 공룡의 갈비뼈라면 협곡은 그의 가슴속이었다. 그 아래 물소리만 가끔 올려 보내는 깊은 바닥은 수천만 년을 간직한 시간의 금고였다. 아니, 그곳 땅속 깊은 곳에는 우리조상들의 온기가 식지 않은 지하박물관이 함께 있을 것만 같았다.

    몇 개의 고사목이 골짜기를 향하여 거꾸로 서있다. 칼질을 당한 벼랑이 바람의 칼날을 세운다. 내 마음은 모두 협곡의 맨 밑바닥에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시선은 절벽의 모서리를 타고 오르내렸다. 아마 그곳 제일 깊은 곳에 백두의 심장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해가 서산을 넘고 있다. 예정시간보다 늦게 버스는 다시 호텔이 있는 백산시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에도 역시 먼지 뽀얀 도로공사, 버스는 또 정체를 반복한다. 녹슨 오토바이 짐칸의 남루한 인부들이 경찰의 지시를 받고, 내려서 걸어간다.

    사람들이 차에서 나와 담배연기를 뿜는다. 두런두런 이야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숲속으로 들어가 일을 본다. 우리나라 1960년대의 필름을 다시 보는 것이다. 시간 반쯤 멈췄던 자동차 행렬이 잠에서 깬 벌레처럼 다시 꿈틀거린다.

    버스는 무송을 지나 밤길을 달린다. 낯선 길, 어둠만 남아있는 길, 가끔씩 마을의 불빛만 몇 개씩 흔들리는 길…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의 국도는 적막 속에 갇혀 있다. 창밖에는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등 같은 별빛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불빛 희미한 주유소 어귀에 차가 섰다. 소낙비를 뿌린 하늘이 별자리를 본격적으로 연다. 백조자리의 데네브, 거문고자리의 직녀성, 독수리자리의 견우성을 여름밤의 대삼각형이라고 한다며, 그리고 오늘이 칠월칠석날이라 견우․직녀가 만나면서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 것이라면서.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호텔에 돌아왔다. 사람들이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직도 호기심 가득 찬 가슴으로 천지 그 위에 머물러 있었다.

 

 

 

백두산 천지에 오르다.hwp

 

 
백두산 천지에 오르다.hwp
0.0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