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말레이시아 연수(2011년)
2011. 10. 31(월)
2011학년도 중등교장 자격연수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나는 베트남-말레이시아로 배정되었다.
05:30 아내의 승용차를 타고 대화역에서 내려 3300번 인천공항행 버스를 탔다. 하지만 잠시 후 집에 들른 아내로부터 급한 전화가 온다. 여권이 든 가방을 놓고 갔다고… 나는 즉시 마두역에서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디 가기를 바라며 아내의 흰색 승용차를 기다린다.
재빨리 가방을 가지고 달려온 아내, 나는 아내와 자리를 바꿔 차의 운전대를 잡고 일단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잘 있으라고 손을 내밀고 인천공항행 전철에 올랐다. 급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인천공항의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일행의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오전 9시, 가을의 은은한 햇살이 가득 깔린 공항 탑승구, 베트남 호치민행 비행기가 출발한다. 고도 9천 미터, 시속 8백km로 구름 위를 나는 새가 된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을 귀에 꽂는다. 창밖 저 아래에 게딱지처럼 바닷가에 붙어있는 집들, 그 위에 흰 눈을 덮어놓은 것 같은 구름, 그리고 그 아래 수면에 새겨진 구름그림자가 환등기의 사진처럼 내 눈에 들어온다. 기내식이다. 닭고기와 밥, 아이스크림, 커피. 아침 햇살 눈부신 바다를 덮고 있는 구름이 눈밭을 갈아엎은 것처럼 줄을 맞추고 있다.
‘물’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빠져 미래에 닥치게 될 홍수와 가뭄에 대하여 그리고 수자원확보의 심각성을 생각해본다. 황해를 지나 동중국해, 타이완, 그리고 남중국해, 드디어 첫 번째 방문국가 베트남의 상공이다. 중부의 정글지대가 온통 녹색이다.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가 이슬비처럼 뿌려졌을 때, 더위에 지친 한국군 병사들이 시원하다며 땀에 젖은 몸을 적셨다는 그곳. 하지만 종전 30여년이 훨씬 넘은 지금, 그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12시 35분(한국시간 14시 35분), 드디어 호치민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의 문이 열렸다. 열대지방의 후끈한 공기의 터널로 들어간다. 재빨리 오리털 점퍼를 벗어 트렁크에 넣고 반팔 차림이다.
정식 국가이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8천8백만 명의 인구, 3천4백km의 S자 모양의 해안선을 가진 좁고 긴 나라. 미국을 우습게 보는 나라, 남사군도 문제로 중국에게 전쟁 한번 붙어보자는 겁 없는 나라, 하지만 한국만은 유독 무서워하는 나라.
전쟁 전 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었던 이곳은 1975년 베트남 통일 후, 주변의 위성도시를 병합하여 호치민특별시로 개칭한 현재 베트남 경제의 중심지이다. 삼백여 만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는 사람이 아니라 하루 종일 오토바이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 오토바이도 에쿠스급도 있고, 마티즈급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최고 높은 건물은 현대건설이 지은 68층 빌딩이다. 지반이 석회암층으로 되어있어서 고층건물을 건축하기 어렵다고 한다.
국민소득 1천2백 달러, 회사원의 월급이 150 달러 정도, 1달러이면 아침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이 나라. 신분상승은 거의 불가능하고, 빈부격차까지 심하다고 한다. 이곳도 역시 서민의 삶은 팍팍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음이 착한 이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행복표’ 웃음을 짓는다.
쌀 생산 세계 2위인 이 나라는 이 알랑미를 먹어서 그런지 날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커피로 유명한 나라. 그 중에서도 다람쥐똥 커피가 인기 1위를 차지한다나. 일방통행 도로가 많은 나라. 1년 내내 30℃를 유지하는 열대지방. 하지만 오토바이를 운행 시 자외선 벽을 쌓기 위해 마스크, 털장갑, 후드티에 헬멧을 쓰고 다니는 젊은이들. 그래서 하얀 피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 해만 떨어지면 다양한 색깔의 옷으로 패션으로 바뀌는 나라. 공원, 거리의 나무마다 번호를 달고 있어 그것으로 주소지를 파악한단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5∼6명씩 모여서 도시생활을 해야 하는 아직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이다.
TUDO라는 레스토랑에서 베트남 코스요리 점심이다. 6여 년 전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여행할 때 먹어본 오랜만에 다시 월남 쌈이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했기에 서먹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그 사실은 지워버리고, 한국과 친해져야 한다고, 그들은 한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우리와의 이웃이 되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베트남 신부 살해사건을 보고, 한국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왁자한 오토바이 행렬. 어떤 사람들은 로터리에 멈췄을 때, 얼른 문자메시지를 들여다보고 또, 답장 메시지를 날린다. 버스에서 손을 흔들면, 올려다보면서 하얀 이를 보여주는 사람들. 한낮에조차 오토바이가 파도처럼 밀려다니는 호치민은 우리나라의 80년대 중반과 21세기의 모습을 이중주로 보여주고 있었다.
호치민한국학교를 방문하였다.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씀. 베트남은 날씨가 좋고 정감이 있는 나라이다. 날씨가 따뜻하여 관절염이 거의 없단다. 이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으며 총 41학급, 1천백여명이 재학 중이란다.
평균수명이 60세가 조금 넘는다는 이 나라 사람들은 구정 때는 사람들이 귀향하여 여러 날을 머물다 오기 때문에 회사는 물론 식당조차 열 수 없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시는 심야만 빼고 온통 오토바이 배기가스로 코가 매캐하다. 베트남에서는 오토바이에 탄 남녀의 모습을 보고 연애의 진척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뒤에서 여자가 껴안고 몸이 붙어있으면 4개월, 앞의 남자 허벅지에 손이 올라가 있으면 3년, 뒤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팔짱을 끼고 있으면 헤어지기 직전이란다.
남편은 버려도 아이와는 헤어지지 못하는 모성이 강한 아줌마들. 독한 술보다는, 시원한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시내교통은 오토바이가 주를 이루지만, 시외의 경우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이곳 호치민시 근처에도 한국의 퇴직자들이 많이 거주한다. 시내에서 1시간 거리쯤에 운전기사(월150불)와 가정부를 두고 겨울을 나며, 나머지 기간은 한국에서 여유를 즐긴다고 한다. XOBOP CHAN ARIRANG에서 전신마사지를 받는다. 남방의 나라 월남아가씨의 정성스런 서비스에 눈이 감긴다.
11월 1일(화)
일찍 기상, 호텔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한다. 거리마다 오토바이 떼가 바쁘게 움직인다. 그 들의 빠른 심장박동이 도시가 활기찬 모습이다.
오전은 메콩강 탐방. 버스가 남으로 달린다. 편도 2차선 차도의 중앙분리대가 연못이다. 그곳에는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답게 연꽃이 피어 있다. 열대의 가로수들은 하늘이 높다고 키를 쭉쭉 키우고 있다. 아오자이를 입은 날씬한 여인들이 보인다. 원래 식민시대에 입던 이 옷은 주머니가 없어 동전 하나 숨길 수 없는 구조이다. 외설적이라고 생각하여 한때는 꺼렸다지만, 지금은 대학교수, 호텔 안내인이 입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복장이다. 결혼식은 물론 중요한 행사에 입는 예절복이란다. 일부 학교에서는 교복으로 흰색 아오자이를 입는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베트남의 남부는 끝없는 평야지대. 3모작까지 할 수 있다는 논이 바둑판을 연속 붙여놓은 것처럼 이어진다. 그 논 가운데 마을이 있고, 집이 있다. 또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 저승에서 거주하는 석관묘가 바로 그곳에 있다. 우리나라의 소보다 마르고 뿔이 긴 열대의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 아래 오리 떼가 바글바글 모여 헤엄치는 모습도 보인다.
물의 나라, 야자의 나라, 오토바이의 나라, 아오자이의 나라, 불교의 나라, 과일의 나라. 혹독한 전쟁을 치렀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하는 청년기의 나라이다.
09:50 메콩강 유람선에 오른다. 멀리 히말라야, 티벳고원에서 발원하여 중국,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을 거쳐 보르네오해에서 바다의 품에 안기는 강. 미국의 미시시피강보다도 더 길다는 2천6백마일의 황토빛깔의 강. 세계에서 메기가 가장 많다는 메콩강. 베트남어로 츄롱이라 하여 ‘9마리의 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기인 5월부터 강물이 불기 시작하여 9월에 수면이 가장 높아진다. 이곳에 130km쯤 남으로 내려가면 바다이다. 강물 위에 물고기처럼 떠다니는 부레옥잠. 그곳 사람들은 그 줄기를 말려 의자 등 공예품을 만든다.
배는 메콩델타지역에 퇴적층으로 만들어진 유니콘섬으로 향한다. 푸른색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가 베트남어로 열심히 안내를 한다. 물론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1.5km 쯤 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강변에는 바다에도 사는 맹그로브나무가 물속에 몸을 잠그고 있다. 바나나나무가 주렁주렁 먹을거리가 달고, 열대의 풍성함을 알려주고 있다. 가정집 대문 위에 개 모형이 양쪽을 지키고 있다. 어떤 집에는 사자모형이다. 수호신이란다.
용안이라는 과일, 파인애플, 망고, 그리고 비타민 C가 귤보다 5배나 많다는 구아바가 나온다. 로얄제리, 녹차, 땅콩을 꺼내놓고 먹어보라며, 지갑을 유혹하고 있다. 베트남 여자아이와 아줌마들이 노래를 부른다. 그 뒤에서 청년 3명이서 현악기로 즉석연주를 한다. 공연을 보고 사람들은 1달러씩 아이의 주머니에 용돈을 넣어주기도 한다.
다음 상점에서는 아나콘다라는 뱀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새끼라지만, 유치원생 아이의 다리 굵기에 1.5m 이상 되는 징그러운 얼룩무늬 뱀이었다. 절대 물지 않는다고, 독이 없다고 베트남 남자가 스스로 목에 거는 시범을 보이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우리 보고 한번 해보란다. 뱀을 만지지 못하는 나, 용기를 내어 아나콘다를 목에 두른다. 묵직한 뱀, 주둥이 아래쪽을 바치며 사진을 찍는다. 목에 걸린 뱀의 감촉이 부드러운 플라스틱을 만지는 느낌, 기분이 서늘하였다.
잠시 후 드레곤섬으로 향한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하여 먼저 식당으로 향한다. 코끼리생선, 월남쌈, 닭튀김, 녹차, 그리고 알랑미로 만든 쌀떡을 魚간장에 찍어서 먹는다. 몸매 날씬한 월남아가씨들이 음식을 정성스레 나른다.
다시 배에 오른다. 그리고 선상에서 코코넛에 빨대를 꽂고 시원함을 마신다. 내 룸메이트인 대구교육청 장학사의 즉석 공연 산타루치아가 울려 퍼진다. 일행의 박수소리가 물결을 이룬다. 구름이 해를 가려 에어컨의 미풍 곁에 있는 것 같다.
조그만 목선을 타고 야자수의 틈 사이를 비집는다. 베트남전 때 베트콩 게릴라들이 전투에 사용했던 배. 이것을 이용하여 엄청난 화력, 초현대적 무기를 가진 미군들을 지혜롭게 제압했단다. 베트남 편 임진왜란이라고 해도 될까?
다시 원래 타고 왔던 배에 올라 부두로 향한다. 카메라를 들고 강 건너 풍광을, 지나가는 유람선을, 황토물 위에 떠다니는 부레옥잠과 메콩의 풍광을 찍는다. 배에서 내려 버스에 오른다. 호치민에서 75km쯤 떨어진 구찌터널로 방향을 튼다. 길가엔 수백만평의 고무나무가 집단으로 다가와 우리를 맞이한다. 이곳에서 채취한 고무액은 라텍스공장으로 가고, 많은 양이 컨테이너에 실려 해외로 팔려 베트남의 부를 챙긴다.
총 길이 240km의 구찌터널. 원래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인도차이나 전쟁 때 파기 시작한 땅굴을 베트남 전쟁 때 200km 이상 더 굴착한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뚫은 깊이 30m, 지하 3층 인공터널. 베트콩은 한 손에 총, 그리고 다른 손에 호미를 들고 낮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게릴라활동으로 나라를 위해 싸웠다고 한다. 터널 안에는 주방, 응접실, 휴게실, 공연장, 학습장, 그리고 시장까지 있다. 그야말로 지하 요새이며, 도시였던 것이다.
이들은 구찌전선을 온통 함정과 덫으로 만들어 미군 병사들을 사살보다는 부상병으로 만들어 전투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켰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틀을 만들었던 것이다. 캄캄한 지하의 길고 긴 터널, 이곳에 공기를 통하게 하기 위하여 지상의 개미집을 환풍구로 사용하였다. 게릴라들은 1분대에 남자 4명, 여자 1명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중 2명은 작전준비, 2명은 휴식을 취하며 전투를 했다. 여성은 주로 보초를 서고, 때로는 남자 병사들의 위안부 역할까지 했단다. 이들의 전투식량인 짜이콰이라는 것의 맛을 보았다.
구찌유격대는 적군의 대규모 공격 때는 은신하여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기나긴 전쟁에서도 끊기 있게 버텨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미군들이 느끼기에 베트콩은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나 게릴라들이 다 있다고 생각하였단다. 미국은 구찌 유격대에게 완패하고, 철군하여 결국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것이 베트남이 미국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이다.
쌍둥이가든이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손재주가 뛰어나다. 그들은 네일아트는 세계 최고이다. 출산율의 경우 농업이 주업인 시골은 8명 정도, 호치민과 같은 대도시는 1명쯤이다. 초저녁 시내에 들어오니, 불빛이 비추는 거리의 간판에 도마뱀이 여기저기 모자이크처럼 붙어있었다.
19:10에 호텔에 도착하였다. 텔레비전을 트니, KBS World 9시 뉴스가 나온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꼭 맞는 단어이다, 타국에서 우리 방송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니. 밖이 궁금한 나, 양치질을 하고 다시 거리로 나갔다. 오토바이의 물결 때문에 길을 건너기가 겁난다. 야시장을 찾다가 실패하고, 호텔 뒤의 공원에 발을 들여놓는다.
더위를 먹은 상현달이 지켜보는 열대의 밤, 남방의 음악에 젖어 춤을 추는 주민들의 몸짓이 낭만적이었다. 브루스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남녀. 왈츠, 고고리듬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다양한 모양을 만든다. 그 곁에는 구경꾼들의 시선이 그 모습에 빠져있었다. 동양인, 서양의 관광객들이 조화를 이룬다.
저쪽에서는 어린이공원이었다. 부모와 함께 아이들이 놀고 있다. 그네를 태우고, 아이들과 함께 뛰고. 건너 편 벤치에서는 젊은이 둘이 밀착하여 사랑의 불꽃을 태워 밤의 열기를 올린다. 역시 베트남은 살아 움직이는 나라. 행복지수가 아주 높은 나라로 평가하고 싶다.
11월 2일 (수)
오늘도 일찍 일어나 산책이다. 거리는 아직 오토바이도 몇 대 없어 한산하다. 호텔 뒤쪽으로 200m쯤 걸어 로터리에서 다시 길을 건너 계속 걷는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공원이 보인다. 나도 그곳으로 들어간다. 아침 운동, 그리고 산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삼십 미터쯤은 되는 나무들이 하늘을 찌른다. 보도블록 위에 임시로 네트를 걸어놓고 배드민턴을 하는 사람,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 氣체조를 하는 사람, 파워워킹을 하는 사람들. ‘우리 한국에서도 매일 저렇게 여유부리며 살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순간 든다.
6시쯤이 지나면서 차도로 나오니, 그새 오토바이가 거리를 메웠다. 방금 왔던 길로 되돌아 걷는다. 길가에서 아침을 사먹는 사람들. 빵, 국수, 과일, 과자를 파는 사람들, 그리고 도로변에 서있는 특이한 건물들을 연신 찍는다. 베트남은 사람들은 길가에 집을 짓고 싶어 한단다. 해결책으로 도로 쪽의 건물은 좁게 그리고 뒤쪽으로 길게 집을 짓도록 했단다.
호텔로 향해 열심히 걷던 나. 그러나 생각없이 앞으로 향하다가 주위를 살피니, 왔던 길과 다른 풍광이었다. 조금 더 전진하며 방향을 탐색했지만, 그 길이 아니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아침 산책하러 나온 나의 주머니에는 여권도, 돈이 든 지갑도 없었다. 거리엔 아직 택시도 다니지 않았다.
우선 호텔에 있을 가이드에게 전화를 하였다. 길 건너 Equatorial Hotel을 쳐다보며, 우리가 묵은 뉴월드호텔을 어떻게 가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가이드도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택시를 타야할 것이라는 목소리만 보내왔다. 그러나 거리를 다 살펴도 아직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붕 소리와 함께 중년의 남성이 곁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오토바이에 타란다. 내가 뉴월드호텔을 아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재빨리 오토바이에 오른다. 그가 여분의 안전모를 내게 준다. 나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호치민 거리의 물결이 되었다. 바람이 귓전을 스친다. 베트남 사람 기분을 낸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멈춰 섰다가 또 달린다. 다른 일행들은 경험하지 못한 이런 것을 나만 누리게 되었다고 겉으로 즐거워하며 호치민의 거리를 누빈다.
그러나 내가 탄 오토바이가 가는 길은 일정한 루트가 아닌 것 같았다. 앞의 베트남 중년의 기사는 길을 가다가 사람들에게 뭔가 자꾸 묻는다. 오토바이 기사가 목적지를 모르고 이곳저곳으로 헤매는 것이었다. 오토바이가 시의 외곽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순간 불안한 마음이 나를 엄습해왔다. ‘완전히 베트남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 어디로 아무도 모르는 정글로 팔려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친다. 이제는 호텔로 가는 길을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때 길 건너에 택시가 보인다. 나는 즉시 내렸다.
그리고 오토바이 기사에게 눈을 부라리고는 택시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돈을 달라는 것도 무시하면서… 당신이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지 못했기 때문에 돈을 줄 수 없다고 손짓으로 내 뜻을 전했다. 오토바이 기사는 택시에까지 와서 요금을 달란다. 오토바이와 택시기사는 서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한다. 택시기사도 난감한 표정이다. 나는 오토바이 기사에게 지갑조차 없어 돈을 줄 수 없다고 하며, 문을 꽝 닫아버렸다.
택시를 타니, 마음이 불안 속에서도 푸근해졌다. 잠시 후 눈에 익은 거리가 나오고, 기사는 나를 뉴월드호텔에 정확이 데려다 주었다. 반가운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베트남 돈으로 19만5천동이 나왔다. 호텔 로비에 들어가 일행에게 얼른 1달러를 빌려 택시기사에게 주었다. 등에서 땀이 나는 아찔한 이국의 아침이었다.
09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호치민 한국문화원으로 간다. 강사는 오덕 원장. ‘베트남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 한국을 떠나 18년째 베트남에서 살고 있다는 원장님. 형님 세분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단다. 베트남은 한이 많고 정이 많은 문화란다. 우리와 여러 가지로 닮은 민족이란다. 마음씨 겸손한 사람들. 섬김·봉사·사랑을 실천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 낭만·여유·친절·미소, 거기에다 인간미까지 넘치는 중국 문명권의 나라란다. 베트남 곁의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는 인도문명권이다.
그들은 아직 우리나라 60~80년대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사는 맛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을 존중하고,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우리나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교육에도 많은 투자를 하는 나라이다. 20년 만에 땅값이 이천 배나 상승한 이 나라의 오토바이 물결을 보면, 무질서 속에 질서를 가진 국가라고 생각이 된다.
원래 한국보다 잘 살았던 이 나라. 우리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14만 4천여 명을 죽게 하여 원죄를 지은 이 나라. 베트남전쟁 특수로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산업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나라이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다문화가족이 현재 5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우리 돈 4천 원 정도면 아이들 한 달 학비가 된다고 한다. 천 달러만 가지면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국민소득 천오백 달러 정도의 개발도상국이다.
하지만 부자도 많은 베트남. 그들은 절대 굶어죽지도 않고, 얼어 죽는 사람이 없는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이다. 결혼식, 장례식 때 기둥뿌리가 휘어지도록 한껏 쓰고 보는 나라. 호치민을 국부로 삼고, 모든 도로를 영웅의 이름으로 지어 사용하고 있었다. 호치민 거리는 중앙로만 전선줄 하나 없이 잘 정리되어 있고, 바로 옆 골목부터는 거미줄처럼 전선이 엉켜 있었다.
6개월은 우기, 6개월 건기인 이 나라도 여느 나라처럼 북부의 하노이, 중부의 다낭, 남부의 호치민 간에 지역갈등이 심하단다. 강물처럼 거리를 누비는 오토바이가 이들에게는 재산 1호이다. 오토바이를 알아야 베트남이 보인단다. 거리엔 정신병자와 외국인만 걸어 다닌단다나. 국민 4명 중 1명이 오토바이 소유한 이 나라, 우리나라에서 중형급 자동차만큼 소중한 것 같다. 자물쇠, 모르쇠, 구두쇠를 베트남의 3쇠라고 한다. 소매치기, 도둑놈이 많고, 남의 일에 대해서는 참견을 안 하고, 근검절약정신이 강하다는 것이겠지.
베트남 전통모자 농라는 강한 자외선을 막아주고, 장바구니가 되며, 우산의 역할을 한다. 일반 사회에서 사람을 가족관계로 이모, 고모 등으로 호칭하는 情이 많은 문화. 일보다는 관계가 중심인 나라. 그리고 恨 문화 또한 우리와 비슷하다. 또한 반도의 나라, 예의를 지키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제압한 살아있는 전쟁영웅 보 구엔 지압장군, 그분은 올해 100세로 지금도 건재하시다.
프랑스 통치시대인 1886년부터 1891년에 걸쳐 지어진 중앙우체국을 방문하였다. 호치민의 초상화가 근엄하게 벽에 붙어있었다. 우편·전화·팩스 등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쇼핑시설도 함께 있어 호치민의 명물로 대접을 받는다. 바로 곁의 노틀담성당엘 간다. 이것도 19세기 프랑스 식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자재를 프랑스에서 들여와 건립한 것이다. 신로마네스크양식으로 빛바랜 적색벽돌 끝으로 두 개의 첨탑이 나란히 뻗어있어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점심식사 후 'Saigon Square'라는 짝퉁시장엘 들른다. 좁은 통로의 양쪽에 한 평쯤 되는 가게마다 옷, 양말, 잡화, 전기제품 등을 파는 그야말로 서민들의 시장이었다.
우리 일행은 호치민의 마지막 눈요기를 하고 공항으로 달린다. 16:40 드디어 두 번째 방문하는 나라,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행 비행기에 오른다. 큰 눈, 갈색피부의 말레이시아 스튜어디스가 또 다른 나라임을 알린다. 석양을 뒤로하고 다시 구름 속으로 잠입한다. 모루구름, 바위구름, 양떼구름. 그 사이 허공이 뚫려있다. 잠시 후, 구름 아래 베트남의 끝없는 남부평야가 아나콘다처럼 기어가는 메콩강을 휘감으며 어둠의 옷을 입는다.
저녁 하늘에서 내려다본 보르네오해. 그 위에 떠있는 구름이 마치 빙하처럼 보인다. 하늘에 뿌려진 구름은 새떼가 날아가는 것처럼 내 눈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시간 반쯤 지나자, 쿠알라룸푸르 상공. 창밖에서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야경이 별빛 같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공항에 대기 중인 다국적 항공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릴 때가 된 것 같아 안전벨트에 손이 가는 순간, 우리가 탄 비행기는 다시 고도를 높이고 있다. 기상상황 때문인지, 공항사정 때문인지 외곽으로 나가는 것 같아 승객들끼리 수군거린다. 나도 약간 불안에 빠진다. 암흑 속을 운행하던 비행기가 30여분 지났을까, 드디어 비행기가 일백육십만 명이 거주하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우리를 쏟아놓는다.
말레이시아는 태국과 국경을 이루며 말레이반도의 남부에 해당하는 서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와 맞닿은 보르네오섬 북서부의 사라와크 및 사바로 이루어지는 동말레이시아로 나누어진다. 인구는 약 2천5백만 명, 국민소득은 약 1만5천 달러 정도로 아시아에서는 비교적 수준이 높은 나라이다.
종족은 말레이인 50%, 중국인 25% 정도, 그리고 원주민, 인도인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이다. 국교는 이슬람교, 어느 것을 가리키거나 방향을 알려줄 때는 검지가 아닌 엄지손가락을 사용한단다. 이슬람의 영향으로 환락문화가 거의 없는 차분한 나라. 일본처럼 좌측차선으로 자동차가 차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왕이 있는 나라가 대부분 이와 같은 차선을 유지한다고 한다. 로얄 출란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1월 3일(목)
여기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 ‘진흙의 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시내를 흐르는 켈랑강과 곰박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를 잡아 붙여진 이름이다.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열대 정글이었던 이곳은 당시 주석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열강들의 침략과 함께 국제적 자본이 모여들면서 거대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말레이시아의 상징, 페트로나스 트윈타워가 보인다. 카메라를 들고, 호텔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한다. 눈이 큰 사람들, 피부가 갈색이거나 검다. 베트남에서 쏘다니던 오토바이는 자취를 감췄다. 이슬람문화의 문화 속으로 들어와 그런지 도시의 분위기까지 차분해진 것 같다.
식당에 들어가 조반 음식을 고른다. 메뉴도 그렇거니와 어제 기내식, 그리고 공항에서 또 저녁을 먹은지라 생각이 없다. 간단하게 커피와 함께 빵 두어 조각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아랍여인이 검은 천을 두르고 식사를 한다. 눈과 손만 남기고 모두 천을 두른 히잡 여인, 음식을 먹을 때는 입을 가린 천을 들추고 음식을 넣는다. 방에 들어와 창문을 열고 다시 트윈타워로 내 시선을 보낸다. 머리 부분에 구름이 내려앉았다.
‘나이를 먹으면 어렸을 때 먹던 음식으로 회귀한다. 즉 어려서의 음식습관이 중요하다.’는 가이드의 말이 귀에 머무른다. 한국인 관광객은 거의 없고, 사우디와 유럽인들이 많이 오는 말레이시아는 1961년 내전 끝으로 1963년 13개주의 말레이시아 연방 탄생하였다. 그중 9개 주에 왕이 있다고 한다.
MALAYSIA의 의미는 “Malay-말레이, S-시라와크, I-인도, A-아시아"를 나타낸다. 중국계인 싱가포르는 내전의 패배로 본토에서 쫓겨나서 조그만 돌섬에 터를 잡은 나라이다. 물론 지금은 오히려 훨씬 잘 살고 있지만 말이다.
전 세계 팜유, 팜나무의 93%를 가지고 있다는 말레이시아. 엄청 많은 고무나무를 가지고 있는 나라, 그리고 정유시설을 갖춘 산유국에다 주석 매장량 세계 1위, 또한 카카오가 전 세계 5위인 자원 부국이다. 만약 이 땅을 우리나라에 몇 년간 대여해 준다면, ‘단기간에 세계 경제를 제패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한국교민 1만8천여 명, 인도어 말레이어 중국어 아랍어 영어가 통용되는 교육수준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 3개의 나라말 정도를 기본으로 하는 미래가 환한 나라가 말레이시아이다. 마하티르 수상이 집권한 후, 급속히 발전하여 현재의 말레이시아가 되어 동남아시아의 모범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 5번 기도를 한다. 매주 금요일 이슬람사원 방문하는 휴일이 많은 나라. 중국, 말레이, 인도의 명절이 모두 휴일이고, 7명인 왕의 생일도 다 공휴일이라는 이 나라는 한낮에 자주 스콜이 내려 대지를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오전에 현지 학교(SMK USJ) 방문하였다. 영국식 교육제도를 축으로 하여 미국식 교육제도와 이슬람적 배경이 혼합된 톡특한 교육제도를 펼치는 이 나라. 현관 앞에서부터 원색 옷을 입은 남녀학생들이 춤을 추며 환영한다. SELAMAT DATANG= Welcome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소강당에서 환영식을 하고 질의응답시간을 갖는다. 중국계 학생이 한국말 통역을 한다. K-Pop에 빠져 한국말을 배웠단다. 대단해 보였다. 중국계 학생 70%, 말레이계 20%, 인도계 10%인 이 학교는 수학, 과학교과를 영어로 가르친다고 한다. 한국 학생은 재학하지 않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2002년부터 마하티르 전 총리의 강력한 의지로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하고, 이 나라를 허브로 2010년까지 10만 명의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는 국제학교 개방정책을 펼치고 있다. 간단하게 다과파티를 하고, 학교를 순회한다. 학생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본다. 어떤 학급에 들어가 사진을 찍자고 하니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V자를 그리며 활짝 웃는다. 어떤 학생은 내게 다가와 영어를 할 줄 아느냐며, 말을 걸어온다. 아이들의 심성이 참 푸른 하늘처럼 맑게 느껴진다. 도서관에 들러서 서가에 꽂힌 책을 본다. 교실로 둘러싸인 마당에 내려가 건물을 올려다본다. 마치 리조트에 온 느낌이다. 입시에 찌들지 않은 아이들, 그리고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학교이다.
점심 식사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Mr. Lim이라는 곳에서 입맛을 돋운다. 길 건너 건물에 ‘총각네, 엄마손, 하나교회, 한의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한국인들이 모여서 장사를 하는 곳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자리를 차지하고 뿌리를 깊게 내리는 한국인이 자랑스럽다.
말레이시아 관광청을 방문한다. ‘Malaysia Truly Asia'라는 관광브랜드를 내세워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를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 인종들이 펼쳐내는 문화와 말레이시아만의 독특한 볼거리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공연 후 배우들과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눈부신 의상과 신나는 율동에 우리들의 눈이 빨려 들어갔다.
이어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 탐방, 입구에서 구관조 같은 새를 들고 사진을 찍는 풍경이 눈에 띈다. 물론 돈을 받고 하는 것이지만. 붉은 지붕에 하얀 벽의 말레이아식 건물이다. 입구는 왼쪽에 말레이시아 각지의 풍속을, 오른쪽에는 건국 이래의 역사를 이탈리아제 타일을 써서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해 놓았다. 내부는 4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와양쿨리트(그림자놀이)의 꼭두각시 컬렉션이 유명하다. 부지 안에는 말레이식 민가와 생활도구, 말라카의 중국식 가옥, 초기 주석 운반용 증기기관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저녁식사는 하카레스토랑에서 샤브샤브이다. 일행이 가져온 참이슬 소주를 보약이라고 생각하며 마신다. 식사 후 일행과 함께 야시장을 기웃거리고, 패트로나스 트윈타워로 향한다. 건물의 숲에 싸여 방향을 감지하기 어려웠다. 마침 지나가는 말쑥한 차림의 신사에게 길을 물었다. 일본에서 근무한다는 사람이다. 나에게 일본사람이냐고 묻는다. 서툰 영어로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는다. 내게 명함을 내밀고, 그가 직접 트윈타워 입구까지 동행하여 트윈타워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이 사람 하나로 말레이시아는 친절한 나라로 내게 인정을 받는다.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18개의 높은 빌딩 중 가장 높은 빌딩. 연면적 6만5천여 평에 지하 6층, 지상 88층으로 전체 높이가 452m. 1974년 완공된 시카고의 시어스타워보다 100m나 높다. 현재는 세계 6위의 고층빌딩. 소유주는 말레이시아의 국영 석유회사의 페트로나스와 쿠알라룸푸르 시티센터로 빌딩의 이름도 이 석유회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국의 삼성건설과 극동건설이 한쪽을 시공하였고, 다른 한쪽은 일본회사가 시공하였다. 일본에 비해 35일 늦게 착공하였지만, 6일 먼저 완공하여 한국의 건설실력을 과시하였다. 지상 175m 높이의 41층과 42층에 걸쳐 두 빌딩 사이를 하늘다리로 연결하였다. 양쪽 건물의 흔들림이 없도록 한 이 공사도 다른 나라의 건설사들이 모두 할 수 없다고 수주를 포기한 것을 우리나라의 건설회사가 성공적으로 완성했다. 대단한 한국, 자부심을 가져야한다.
11월 4일(금)
새벽부터 소나기가 내린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는 비를 맞으며 구름 속에 머리를 디밀고 있었다. 소나기가 그치고 거리 말끔해졌다. 버스에 올랐다. ‘통깟알리’라는 사포닌이 많이 함유된 말레이시아의 건강식품을 하나씩 먹고 힘을 낸다.
말레이시아 교육연수원을 향하여 버스가 달린다. 굽이굽이 정글 속으로 뚫린 산악 고속도로이다. 멀리 산꼭대기에 위치한 Genting High Land를 올려다보며, 구름의 도시를 생각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유일하게 카지노가 개설 되었다는 그곳. 정글을 파헤쳐 도로를 내야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불가능하다고 대들지 못한 이 공사를 현대건설이 밀림을 걷어내며 길을 내었다는 것이다. 도로변에는 냉대림에서 주로 자라는 소나무 몇 그루가 이곳에 와서 귀한 대접을 받는 가로수가 되어있다.
드디어 산중턱에 소재한 말레이시아 교육연수원(IAB-Institut Aminuddin Baki)에 도착하였다. 시작은 부원장의 환영사이다. 이들도 한국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지 위에 치마를 두른 남자 직원들의 복장이 특이하다. 현재 라오스, 베트남의 교사들이 2주의 코스로 이곳에서 연수중이란다.
건물 밖에 나와 열대림 사이로 눈을 돌리니, 남동쪽 산 정상에 Genting High Land가 구름 속에 우뚝 솟아있다. 그곳을 배경으로 카메라의 구도를 잡아본다. 그리고 정글 속의 나무들을 카메라 속에 담는다. 폐 깊숙이 열대림에서 뿜어낸 산소가 채워진다. 점심식사는 Little Korea라는 음식점이다. 김치찌개에 소주가 군침을 삼키게 했다.
오후엔 바투동굴 탐방이다. 달리는 버스에서 본 하얀 빛깔로 깎인 것처럼 보이던 산, 그곳에 동굴이 있었다. 이 동굴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힌두교의 축제 "타이푸삼"이 이곳에서 열리면서이다.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에 황금색의 큰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거대한 석회암의 산이 버티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바투 동굴이다. 이 동굴은 내부로 들어가 고개를 들면 하늘이다. 그곳에는 동굴벽화와 예배를 드리는 단이 있고 야생 원숭이가 살고 있었다.
타이푸삼은 타이와 푸삼의 합성어로, 타이는 타밀(Tamil)력(曆)의 10번째 달인 신성한 한 달을 나타낸다.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의 기간이 바로 타이푸삼이다. 푸삼은 축제 기간 중 가장 높게 뜨는 별을 의미한다. 타이푸삼이 되면 참배를 위해 수만 명의 힌두교 신도들이 이곳의 272계단을 올라 노천에서 밤새우며 기도를 한다. 해마다 말레이시아는 물론 외국인까지 백만 명 이상의 참배객이 이곳을 다녀간다. 고행자들은 자신의 뺨과 혀에 긴 바늘을 꽂거나 등에는 맨 피부에 낚시 바늘을 꽂아 오렌지를 매달고 계단을 오른다.
힌두교에서는 유독 코끼리와 팔이 여러 개 달린 상을 많이 볼 수 있다. 힌두교의 신은 아주 많은데, 그 중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는 신이 번영과 지성의 신, 가네쉬라고 한다. 이 동굴에 서식하는 원숭이는 일명 ‘미친 원숭이’라고 불릴 정도로 음식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순간 뛰어들어 사람의 손을 물기도 하고, 놀라게 한다.
날씨가 워낙 덥고, 습도가 높아 땀으로 목욕을 하고서 동굴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서 우리 일행의 곁을 지나는 이슬람교도의 남자를 본다. 검은 히잡을 둘러쓴 4명의 부인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이곳을 유람하는 모습이 내게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호기심에 견딜 수 없는 나는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사진 한번 같이 찍자고. 순간 호의적인 그는 나와 둘이 찍는 거냐고 묻는다. 나는 ‘아니, 그것이 아니라구, 당신의 부인 등 가족 모두와 함께 찍고 싶다.’고 제의하였다.
내 말을 알아들은 그는 좋다고, OK 사인이었다. 7~8명이 함께 우아하게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는 인천 모 고교에 근무하는 교감에게 셔터를 눌러달라고 부탁하였다. 좋은 작품을 한 컷 찍은 나는 아라비아 남자에게 고맙다고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몇 걸음 가서 사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황당하였다. 사진이 찍히지 않은 것이다. 셔터를 제대로 누르지 못했는지, 그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것이다. 참 아쉬웠다. 그와 같은 장면을 또 만들 수 있을까?
버스가 남으로 달려 말레이시아의 신행정수도 푸트라자야(제1대 국왕명)로 간다. 팜농장이었던 이곳, 2001년 2월 포화상태에 달한 쿠알라룸푸르를 대신하여 연방정부의 행정수도로 개발하는 곳이다. 마하티르 전 수상이 취임한 직후부터 추진한 국가적 사업. 1996년 착공하여 2010년 완공 예정이었지만, 금융위기로 인해 아직도 진행 중이다. 2002년엔 이곳과 쿠알라룸푸르가 연결되는 초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 말레이시아 총리실의 청사인 페르다나푸트라, 이슬람사원 푸트라 모스크, 푸트라자야 독립광장, 연방 사법부청사 등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푸트라자야 호수, 내가 평소 세계적인 명소라고 자부하던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비견되는 일산호수공원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풍광이다. 유람선을 타고 그곳에서 부러움을 가득 싣고, 그래도 나만의 여유를 즐기며, 열대 도시의 아름다움을 관망하던 생각의 여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1월 6일 (토)
말레이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하늘이 짙게 흐려서 아침산책은 호텔근처에 머물렀다. 빵과 열대과일로 아침을 대신하였다. 그리고 짐 정리를 하였다. 09:30 체크아웃이다.
먼저 들른 곳은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왕궁이다. 말을 타고 정문을 지키는 붉은색 옷차림 근위병의 곁에 서서 자세를 취해 본다. 그리고 길 저쪽에 히잡을 쓴 이슬람복장의 일행이 보인다. 엄마와 딸들이었다. 그렇게 좋은 장면은 아니지만, 지난번 바투동굴 앞에서의 건수를 만회하려고 그들과 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말레이시아 국가기념비 탐방, 1950년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젊은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966년 건립된 것이다. 7인의 동상이라고도 불리는 15.54m 높이의 청동상이 우뚝 서있다. 말레이시아 군인의 전투화에 밟힌 군인이 자위대 병사라고 짐작한 일본이 맹렬한 항의를 했단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본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도 없었다. 한국과 외교 51주년, 북한과 57주년인 말레이시아. 어떻게 보면 북한과의 우정이 더 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스는 우리를 푸른 잔디로 단장된 메르데카광장에 내려놓았다. 쿠알라룸푸르의 비공식적인 중심부이라고 일컫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광장이다. 이곳은 영국 통치에서 벗어난 1957년 8월 31일 처음으로 말레이시아 국기가 100m 높이의 게양대에 오른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 같은 장소이다. 메르데카는 말레이어로 ‘독립’이라는 뜻이란다. 옛날 6~70년대 말레이시아와 라이벌 관계로 경기를 벌였던 메르데카배 축구대회가 언뜻 머리를 스친다.
마하티르 수상이 스스로 임상실험 대상자로 참여했다는 명약 ‘통캇 알리(Tong Kat Ali)’ 판매점에 들른다. ‘신의 지팡이’를 의미한다는 신비의 건강식품. 아니 명약처럼 효능을 설명하는 한국인 점원의 달변에 일행의 대부분이 수백 달러씩을 투자한다. 氣의 活性化, 테스토스테론의 증가, 당뇨에 좋다나. 건강이라며 누구나 판단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상점에는 코코넛오일, 또 관절염에 좋다는 연고도 있었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더욱 곱게 만들기 위하여 코코넛오일과 연고를 샀다. 나 또한 왜 그렇게 귀가 얇은지…
궁정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오후의 첫 일정은 국립미술관이다. 쿠알라룸푸르역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중세의 다양한 그림이나 동상 외에도 많은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은 국내외 예술인들의 미술품 전시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말레이시아 예술의 보고이다. 건물의 중심부에는 1층에서 3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는 나선형의 복도가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로얄셀랑고르이다. 19세기 후반 중국에서 건너온 젊은 주석 공예가 용쿤이 1885년에 혼자서 백랍공장을 세웠다. 그는 이곳에서 촛대와 와인잔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로얄셀랑고르의 시초이다. 일용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석으로 제작한 높이 10m 이상의 트윈타워모형이 눈길을 끈다. 현재 말레이시아에 수십 개의 전시관과 200여 개 판매망을 가지고 있단다. 입구에 서있는 사람 키보다 큰 주석으로 만든 컵에서 사진도 한방 찍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상징,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에 간다. 지난번 야간에 산책 삼아 갔다가 오늘 공식 일정으로 탐방하는 것이다. 원래 경마장 부지였던 곳에 건설된 이 건축물은 말레이사아가 2020년에 선진국에 합류한다는 비전 2020계획을 상징하는 야심작이다. 콘크리트 건물이라지만, 외부는 스테인리스 철강과 유리로 거대하게 세워진 두 개의 은빛고층건축물이 머리에 피뢰침을 이고 드높은 하늘을 찌른다.
히잡을 쓴 여인, 수염을 기른 이슬람인, 가짜 시계를 사라는 백인청년, 담배를 피우는 문제 학생들… 등 많은 인파들이 나도 하늘을 찌르고 싶다면서 이곳에 모여서 사진을 찍고, 또 그들만의 개성 있는 포즈를 취한다. 트윈타워의 두 건축물 중 일본이 건설한 빌딩 곁에는 나중에 지어진 고층건물이 많고, 한국에서 지은 빌딩 곁에는 고층건물이 적게 배치되어 있다. 당시 말레이시아인들은 한국의 건설실력을 의심하여 그랬으리라. 하지만, 장차 우리 건축기술의 세계적인 능력을 이들이 알게 되리라. 그리하여 한국이 지은 빌딩 쪽의 땅이 금싸라기 땅으로 변하여 더 높은 빌딩들이 세워지리라. 어둠을 빨아드린 거리는 어느새 가로등 불빛으로 변하였다. 버스는 고려원이라는 한국인 식당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는다. 동남아 여정의 마지막 식사이다.
드디어 말레이시아에서의 일정의 마지막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식사 후 공항으로 가는 길에 푸트라자야에서 다시 내린다. 말레이시아의 행정수도, 그곳의 야경은 얼마나 화려할까? 푸트라자양의 눈부심에 취해보려 다시 온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상상했던 장면보다 훨씬 실망을 하고 말았다. 말레이시아의 전기세가 싸다는데… 어쩐 일일까? 이 나라도 예산을 아끼려는가보다 에둘러 생각하며 이슬람사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버스는 다시 남으로 달려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잠시 공항서점의 문을 연다. 아시아 각국을 소개하는 여행서적 책꽂이에 눈을 고정시킨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태국, 미얀마, 일본, 네팔 등 다양한 나라를 소개하는 책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 나라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Korea였다. 하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그건 없었다. 내가 외국어 실력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멋지게 알리는 홍보책자를 만들어 꽂아놓고 싶었다. 영어, 불어, 독어, 중국어, 일본어, 말레이어판으로 말이다. 우리나라 관광공사에서는 무얼 하는지, 순간 마음이 가을 들판의 쭉정이 곡식처럼 초라해졌다.
자정쯤 대한항공에 탑승, 잠을 청한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어둠을 헤치며 다시 보르네오해, 남지나해, 타이완, 동지나해, 남해, 황해를 지나 인천공항으로 우리를 나른다. 눈을 감았지만, 내 귀에는 파도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비행기의 날개를 스치는 구름떼, 바람떼였다. 그것들이 선잠을 연속 깨우고 있었다.
어느덧 새벽 황해, 구름 위에서 일출을 맞는다. 드디어 Made In Korea, 인천공항이다. 공기가 차다. 얼른 오리털파카를 입는다. 시간을 다시 1시간 빨리 돌려놓는다. 그리고 버스를 기다린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려니, 선수를 친 아내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차를 몰고 공항으로 오겠다고. 하지만, 내가 버스를 타고 간다고, 아내에게 참으라고 하였다.
3300번 버스에 오른다. 잠을 설친 나는 비몽사몽 다시 졸음에 빠진다. 어느 새 버스는 신공항고속도로와 외곽순환고속도로를 지나 김포대교 위를 지나고 있었다. 내 코에 익숙한 일산의 공기가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시내버스를 타고 아파트 앞에 내린다. 아내가 버스정류장에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아내와의 만남이다. 웃음을 날려보내며, 손을 내민다. 집의 대문을 열었다. 거실 벽에는 신랑을 환영한다는 노란색 바탕에 분홍색의 글씨 ‘여보! 어서 오셔요.’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역시 아내는 ‘나의 반려자, 내가 영원히 사랑해야 할 여자’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퇴직하고, 자유인이 되어 아내와 함께 세상을 누비는 삶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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