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을 다녀오다.
2015. 5. 26(화) 아시아대륙 위를 날다.
저녁식사를 하고, 밤 8시 20분경 기산리의 소사고개, 말머리고개를 넘어 송추로 차를 몬다. 하천 변에 차를 세워놓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는 바로 서울외관순환도로를 달려 나와 아내를 금방 인천공항까지 데려다 내려놓는다. 동유럽여행을 함께 할 31명의 일행과 만난다. 며느리의 전화인사가 예쁘게 들려온다. 큰아들 남인이의 카카오톡이 온다. 부산에서 왔다는 70세 부부를 만난다. 고희를 기념하여 자식들이 효도여행을 보내준 것이란다.
새벽 1시 20분발 카타르항공에 오른다. 비행기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다. 여자승무원이 우리를 눈여겨봤는지 아내 옆에 한참 머무르면서 속닥속닥 이야기를 꺼낸다. 이륙한 비행기는 서해바다 위 밤의 터널 속으로 파고든다. 고비사막을 거쳐 남쪽으로 칭짱열차길을 바라보며 비행기는 서녘을 날고, 또 난다. 페르시아만을 통과할 때 쯤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이 비행기의 창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다에서 석유 채굴선의 불빛이 중동의 황금을 퍼낸다며, 손을 흔드는 것 같다. 도하의 일출이 눈에 들어온다. 사막이라지만 페르시아만의 물결은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출렁인다.
카타르 수도 도하의 하마드공항, 후끈한 공기가 뺨을 스친다. 누런 하늘이 이곳이 사막지역임을 알린다. 히잡을 쓴 여인들이 지나가고,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내 눈을 흥미롭게 만든다.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인줄 알고 들어가니, 기도하는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부부, 친구, 시누와 올케, 모자, 부녀, 그리고 젊은 대학생 등 다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2015. 5. 27(수) 유럽에 진입하다.
현지시간 08시 20분 도하를 출발한 비행기는 독일의 뮌헨으로 향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막의 도시에서는 야자나무 가로수가 보이고, 산맥들이 손등에서 올라오는 정맥처럼 내 눈을 파고든다. 청남색의 하늘 아래 솜사탕처럼 떠있는 구름, 산맥 위의 하얀 눈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며 내 잠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내에서 점심식사가 나온다. 나는 레드와인과 함께 아내와 하늘의 성찬을 즐긴다. 아시아의 서녘 아라비아 승무원의 서빙을 받으니 기분이 좋다. 사막을 넘어 터키의 상공을 지나면서 다시 눈 덮인 산맥이 보인다. 이란의 우르미아호, 터키의 반호가 눈에 들어온다. 흑해 위를 지날 때부터는 나는 잠의 커튼 속으로 들락날락한다. 독일 상공이다. 푸른 하늘, 순백의 융단구름이 비행기의 날개에 슥슥 베어진다.
비행기가 캡슐내시경이 되어 하늘을 검진하는 것 같다. 독일의 드넓은 벌판이 연두색 이불을 쓰고 우리를 맞이한다. 비행기는 녹색마을 위로 저공항진을 한다. 초여름의 빛깔로 덧칠된 뮌헨의 초록 물결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산꼭대기 오밀조밀 붉은 기와집 마을이 손짓을 한다. 공항에 착륙할 때쯤에 노란 들꽃 무리가 작디작은 웃음을 연신 짓고 있었다.
현지시각 오후 2시 14분이지만, 썸머타임으로 시계는 오후 1시 14분을 가리키고 있다. 지나가는 아가씨와 말을 걸었다. 쿠웨이트에서 왔다고 고백한다. 뮌헨의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로 들어온다. 서양의 풍경이 여기저기 펼쳐진다. 거리엔 BMW, 아우디, 폭스바겐, 푸조, 도요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대, 기아자동차가 전조등을 밝히고 줄을 잇고 있었다.
리무진버스에 짐을 싣는다. 뮌헨올림픽경기장을 지나 옥토버페스티발, 맥주투어 등의 문구가 보인다. 프랑크푸르트 태생인 괴테를 낳은 독일, 1년 중 50일 정도만 날씨가 좋다는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 국민소득 4만7천 달러로 바이첸맥주가 유명하다. 축구의 강국이라고 잔디밭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옛 서독의 수도였던 인구 130만 명의 뮌헨은 베를린, 함브르크에 이어 독일 3번째의 도시이다. 하이델베르그와 함께 독일의 문화도시로 손꼽힌다. BMW본사, 막스 플랑크연구소가 있고, 45개의 박물관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뮌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속도제한이 없다던 아우토반을 달린다. 이태리 AI고속도로를 보고 만들었다는 이 도로. 우리나라의 첫 고속도로인 경인, 경부고속도로의 모델이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를 향해 달리는 버스, 독일 바이에른주의 킴제호수가 오스트리아 등 인근 국가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화려한 여름 꽃을 피운다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내 귀를 자극한다. 자작나무 군락이 우리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든다. 드디어 버스는 독일을 내려놓고 오스트리아의 품에 안긴다. 나라는 다르다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
도시가 소금마을을 의미하는 짤쯔부르크, 땅굴을 뚫는 기술이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오스트리아. 북한이 파내려온 남침용 땅굴도 이 나라의 기술이 도입되었을지 모른다나? 수많은 외제 자동차의 홍수 속에 현대자동차 대리점이 내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가로등이 도로의 중앙에 연속으로 걸려있다. 유럽 사람들의 개인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겨울에 폭설이 잦은 오스트리아, 길옆에 늘어선 하얀 봉은 눈 덮인 도로를 안내하는 것이란다.
저녁식사가 나온다. 중국 레스토랑이지만, 쌀밥이 나오고 중국요리가 나온다. 짤쯔부르그 시내를 벗어나 시골마을의 송네호프 펜션에 여장을 푼다. 투박한 문, 무거운 열쇠, TV는 장식용일 뿐이다. 화장실, 샤워기도 투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유럽에서의 첫날밤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눈을 뜨니, 자정쯤이다. 다시 밤 속으로 진입한다.
2015. 5. 28(목) 짤쯔부르크에서 알프스를 보다.
새벽 5시 반쯤 깨어 호텔 밖으로 나간다. 아내는 날씨가 차다고 한다. 마을의 짙푸른 산책길, 알프스가 멀리 눈에 들어온다. 개울가의 아름드리 전나무 숲이 울울창창하다. 유럽의 청명한 새소리, 계곡의 물소리가 내 귓바퀴를 뱅글뱅글 돌린다. 숲 속에서 알프스의 소녀가 아침 인사를 하러 나올 것 같다. 얼룩백이 황소가 내 눈 속으로 들어오고, 농가 3층 베란다에서는 공작새가 국국 소리를 내며, 날개를 펴려고 한다. 시골이라지만, 가끔씩 나타나는 자동차가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위협한다. 노란색, 흰색 들꽃들이 아침을 알리고 있다.
짤츠캄머굿의 오전, 날씨가 하늘을 말끔하게 닦은 것처럼 청명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이기도한 이곳, 볼프강호수와 주변을 둘러싼 여름산의 경치가 빼어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우리 일행과 함께 유람선을 타고 호수가 된다.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과 함께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호수가 산을 흔들고, 산이 호수를 흔든다. 유람선이 지나가고, 수상스키가 화살표처럼 나아간다.
하선 후 이동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쯔벨호른으로 날아오른다. 볼프강호수가 하강하고 있다. 멀리 만년설이 덮인 알프스가 카메라의 사진처럼 내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십자가가 우뚝 서있다. 아내와 함께 연신 디카의 셔터를 누른다. 내가 아내와 함께 알프스의 배경이 되어본다.
짤쯔부르크는 볼프강호수를 비롯한 아터·트라운·몬트·할슈테터 등 30개가 넘는 호수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곳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오스트리아의 ‘호수지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의 가장 높은 지대인 다흐슈타인 산군은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최고 높이는 2,995m에 달한다. 이곳은 토테스 산군 및 바르셰네크와 더불어 석회암 단층지괴들이다. '소금갱 영지'를 뜻하는 이 지역의 지명은 철기시대부터 채광되어온 할슈타트·바트이슐·바트아우세의 광염매장지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지방은 목재가 매우 풍부하여 건물건축·제지·섬유제조 등을 위하여 좋은 삼림자원이 되고 있다. 낙농업, 수력발전, 시멘트산업, 그리고 도자기산업이 이곳의 경제를 이끄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관광부문으로서 그문덴·바트이슐·장크트볼프강·바트아우세 등의 휴양지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양모산업이 발달한 오스트리아는 남한보다 조금 작다. 인구는 서울 인구 정도란다. 오스트리아인 92%, 터키/그리스인이 각각 2% 정도. GNP는 독일보다 많은 5만천달러 정도, 개신교 5%, 이슬람교 4% 정도인 영세중립국으로 2천5백여 명의 한인들 중 천여 명이 음악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국명 이호순으로 불렸던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많은 사람들이 호주 댁이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국이 이곳 오스트리아이기 때문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독일의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인이라는 것이다. 소금도시로 이동한다. 스피커에서는 ‘Time to say Goodbye'가 흘러나온다.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인들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단다. 중국 사람들은 시끄럽단다. 녹차 통을 들고 다니고, 집단으로 노란색 모자를 쓰기도 하고. 일본 사람들은 너무나 조용하여 운전기사가 자기 혼자인 줄로 착각하기도 한단다. 한국 사람들은 빨․주․노․초․파․남․보 부대, 팔에 토시하기, 양산부대로서 귀족처럼 보인단다. 요즘은 중국이 한국을 따라 하느라 빠쁘기도 하다나?
호수를 끼고 버스가 달린다. 산이 호수에 잠기고, 하늘까지 호수에 잠겨있다. 슬로바키아 사람인 마이클이 운전하는 버스는 잠깐 멈춰서 그 풍광을 보지도 않고, 야속하게 앞으로만 달린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힐긋힐긋 우리를 쳐다본다. 아내와 손을 잡고, 음악을 따라 흥얼거린다.
오후 7시 30분경 체코로 들어간다. 자동차에는 노란별이 그려진 유로기에 CZ라고 쓴 자동차들이 달린다. 코루나라는 화폐단위를 쓰는 체코, 1유로가 24코루나라고 한다. 독일보다 맥주를 더 소비한다는 체코의 VISA호텔에 투숙한다.
2015. 5. 29(금) 체스키크롬노프에 빠지다.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거리 산책이다. 거리 곳곳 젊은이들이 담배연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삶이 팍팍한 것일까, 아직 사회주의의 피곤함이 남아서일까? 잠시 호텔로 가는 길을 잃고, 아내와 신경전을 벌였다. 호텔을 나올 때, 건너편에서 지붕을 수리하는 인부들의 모습을 보고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버스가 우리를 싣고, 18세기 이전의 건물이 그대로 존재하는 유네스코 유산인 체코의 남부에 위치하는 체스키크롬노프(CeskyKrumlov)에 도착한다. 체스키크룸로프의 '체스키'는 체코를 뜻하며 '크룸로프'는 구불구불한 길을 의미하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체스키크룸로프는 구불구불한 블타바강 줄기를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14~16세기에 수공업과 상업으로 번성기를 누렸으며, 13세기에 건설된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중세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또한 블타바강변을 따라 형성된 건축물들과 붉은색 지붕의 집들이 유화를 펼쳐놓은 것처럼 정겹다.
1598년에 세워진 부데요비체문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도미니코 베네디토(DomenicoBenedett)에 의해 설계 되었으며, 북 이탈리아 요새의 건축스타일과 비슷하고 문 안쪽은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 중세의 건물인 상점들의 전시대 위에선이 곳에서만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제 액세서리와 지갑, 가방 및 각종 기념품들이 여행자들의 눈길을 유혹한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지나면서 마을의 가장 큰 볼거리인 체스키크룸로프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난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은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성 내부는 고딕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13세기 전반에 영주 크룸로프에 의해 최초로 체스키크룸로프 성이 세워져 14세기 보헤미아의 귀족 로젠베르카가의 소유가 된 후 서쪽을 향해 계속 증축돼 대중전이 되었다고 한다. 성으로 올라가는 넓은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면 중세 영화에 나올 것과 같은 다리가 성과 연결되어 있다. 강물이 검게 보이는 것은 강바닥의 빛깔 때문이지 실제는 맑은 물이란다. 나는 아내와 번갈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다시 체코의 문지방을 뜻한다는 수도 프라하로 향한다. TV에서는 영화‘Sound of music’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 유채꽃이 심어진 밭이 연속으로 지나가며 출렁인다. 여기저기 한라산의 비자림 같은 숲이 모여 이곳이 유럽의 평원임을 알린다. 자작나무, 조팝나무가 지나간다. 멀리 산맥 위로 구름이 솟아오르고, 밀밭이 바람에 흔들린다. 장미 꽃밭이 눈에 들어오고, 우리를 실은 버스는 다시 숲의 터널을 끌어당긴다. 공장이 보이는가 하더니, 이젠 숲이 자취를 감춘다. 호수가 버스를 맞이한다. 아내는 영화를 자세히 보고 싶은지, 앞자리로 이동한다.
드디어 인구 120만의 체코의 수도 프라하이다. 한 해 동안 13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천년의 역사도시, 카프카의 고향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도시이다. 프라하의 젊은이들은 요즘 삼성 갤럭시 스마트폰을 가장 갖고 싶어 한단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파리와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로 손꼽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 중세시대를 풍미했던 건축물과 블타바강이 어우러진 이 도시의 풍경은 오랜 시간 기억될 것이다.
틴 성모교회는 14세기 프라하 구시가지 시청사 인근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교회로 성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프라하에서 손꼽히는 종교 건축물이다. 높이 80m의 쌍둥이 첨탑이 멀리서도 돋보인다. 황금 성배를 녹여 부착한 첨탑의 성모마리아상과 더불어 북쪽 벽에 있는 로코코 양식의 제단과 아름다운 동북쪽 출입문으로도 유명하다.
천문시계탑은 프리하 구시가 광장에 위치한 구시청사와 연결된 탑으로 15세기 설치된 이 시계탑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시계에는 천동설에 바탕을 둔 12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수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매시 정각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마다 천문시계의 12사도와 조각들이 움직이는 진기한 모습이 이곳을 지나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눈길을 모으고 있다.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카를교. 14세기 카를 4세 때 건설되어 강 서쪽의 성과 동쪽의 상인거주지를 잇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리 양쪽에는 탑이 있다. 다리 위에서는 많은 화가들이 인물화, 풍경화를 그리고 있고, 악기를 연주하고, 특산품을 흔들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었다.
바츨라프 광장이다. 프라하 최대의 번화가이자 상업·교통·문화의 중심으로 드넓기 그지없다. 1950년대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자유화 운동 시기,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100여 명이 희생당한 장소로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한 곳이다.
호텔 GOLF에 여장을 푼다.
2015. 5. 30(토) 아우슈비츠의 만행
아침 일찍 폴란드로 출발한다. 바웬사가 생각난다. 폴란드의 노동운동가이며 공산 폴란드 최초의 연대자유노조의 의장으로서 초대 직선 대통령(1990~95)을 지냈던 그. 국내외에서 수백만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이끄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인정되어 1983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내가 존경하는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엔 붉은색, 흰색의 해당화가 정겹다. 버스에서는 KBS에서 방영된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나왔던 프라하 편이 흘러나온다. 오후 3시경 체코의 국경을 넘어 대평원의 나라 폴란드로 들어간다. 우리는 산악지역이 많은 남부로 들어갔다. 폴란드는 호밀, 감자, 그리고 감자로 만든 보드카가 유명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폴란드를 폴스카라고 부른다. 한반도의 1.5배 정도의 면적을 갖는 폴란드는 국민소득 2만3천불 정도로서 국민의 75%가 해발 200m 이내에 거주하며, 유럽의 곡창지대를 이루기도 한다.
바르샤바에서 약 300km쯤 떨어진 세계 제2차 대전의 비극현장인 오쉬비엥침(독일어로 아우슈비츠)로 이동한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 주는 강제 수용소이다. 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풀꽃이 눈인사를 한다. 이렇게 평화스러운 곳에서 인류 최초로 산업적인 수단을 이용한 인종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히틀러가 주도했던 독일의 파시즘 정당 나치스는 유대인을 비롯하여 나치스에 반대했던 지식인과 정치인, 예술인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까지 강제로 이곳에 수용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마저 받아 보지 못하고 강제 노동 중에 세상을 떠나거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30개 나라에서 강제로 끌려온 4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가장 잘 보여 주는 곳. 온 인류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런 참혹한 당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폴란드 의회는 독일 나치스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존할 것을 결정하였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참혹하게 희생시킨 아우슈비츠.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을 강제로 수용소에 가두고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희망이란 아우슈비츠를 찾는 방문객 중 독일 청소년들이 특히 많다는 사실이다. 이곳을 찾은 독일 청소년들은 나치스의 만행에 대한 내용을 가슴깊이 세기고,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엄숙하게 기도한다. 아우슈비츠는 진정한 평화가 어떤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준 감동적인 장소이다.
그곳에는 과장하여 작은 산더미만큼 쌓여있는 7톤이나 된다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그 당시 희생자들의 뼈처럼 남아있는 엄청난 양의 안경테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나치 그 악당들은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카펫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경복궁 명성황후 시해현장을 관람하며 히죽대기도 하고, 2차 대전 우리나라의 젊은 여자들을 끌어다 몹쓸 짓을 수없이 저지르고도 사과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본 놈들은 이곳에 와서 참회하며 기도하는 독일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다음은 크라쿠프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 우산을 펼쳐야만 했다. 이 곳은 1038년부터 1596년까지 폴란드 왕실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크라쿠프의 사교장 역할을 했던 이곳은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넓이가 유럽에서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이 1등 그리고 이곳이 2등이라고 한다. 주위에 옛 귀족들의 저택과 젊음이 넘치는 노천카페에서 공연 중인 악사들의 흥겨운 가락이 빗줄기의 연주에 무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아내와 함께 지켜보던 내가 더 젊어지는 것 같았다.
광장 중앙의 직물회관은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1층에는 많은 기념품 가게들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폴란드의 특산물이 호박으로 만든 목걸이, 반지, 팔찌 등이 눈에 띤다.
2015. 5. 31(일) 폴란드의 소금광산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비엘리츠카로 이동한다. 폴란드 광산과학대학교 본관 앞에는 광부동상이 있다. 폴란드는 광산학이 매우 발달했단다. 비엘리츠카 소금동굴은 길이가 총 300km, 7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200만 년 전에 바다였던 곳으로 융기하여 일만 오천 년 동안 바닷물이 증발하여 만들어진 암염광산으로 1250년경부터 소금을 채굴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소금광산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3유로를 내고 가슴에 노란 스티커를 붙였다. 예전에는 폴란드 왕궁 전체 수입의 1/3 정도가 이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광산 노동자들은 소금 광산에 한 번 들어가면 일주일에서 한 달 동안 이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지하에서 오랜 세월 일하면서 많은 예술품들을 만들었는데 그것들을 모아놓은 방이 무려 3천여 개나 되며, 이들 중 현재는 20여 개만 공개하고 있다. 특히 소금으로 만든 샹들리에와 다양한 성화들이 조각되어 있다.
계단 수백여 개를 밟고 지하 백 미터 아래로 내려간다. 여기서는 꼭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한다. 미로 같은 동굴에서 길을 잃으면 자칫 못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이곳의 킹가성당은 킹가공주를 기리는 성당이다. 킹가공주는 소금 광산의 수호성인이었다고 한다. 헝가리에서 폴란드로 시집오면서 예물로 반지를 받았는데 그 반지를 비엘리츠카 근처에 던졌고, 그 곳을 파보니 반지와 소금덩어리가 함께 나와서 그 이후 소금광산으로 개발했다는 것이다. 길이 55mㆍ폭 18mㆍ높이 12m의 공간은 제단과 촛대, 예수 십자가상, 최후의 심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서의 주요한 장면을 묘사한 부조와 기독교 성인들 조각상 등, 지상의 다른 성당과 똑같다고 한다.
이곳 소금광산은 내부자체가 관광자원으로서 연간 8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하루 2억 원 이상의 입장료를 거둬들이고 있다고 한다. 소금광산에서 나오니, 날씨가 봄날처럼 쾌청하다.
헝가리로 향하는 길, 슬로바키아로 들어간다. 폴란드와 슬로바키아의 국경인 타트라 산맥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산맥 위엔 만년설인지 하얗다. 길가의 집들은 대부분 3층으로 지붕의 경사가 심하다. 겨울 폭설에 대비한 것이리라. 슬로바키아는 겨울스포츠가 발달하고, 휴양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란다. 우리 버스기사 마이클의 나라이기도 하다.
점심식사를 위하여 슬로바키아의 반스카비스트리차라는 도시에 버스가 멈춘다. 아침식사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때만 나타나는 허기진 배를 음식으로 다스린다. 이 식당은 과거 와인을 숙성시키던 토굴을 개조하여 만들었단다. 식사 후 도시의 광장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여유를 부려본다.
슬로바키아 중심부에 위치하는 이곳은 광산으로 발전한 슬로바키아에서 6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 가운데 드넓은 광장(SNP광장)과 오벨리스크 기념탑, 성당과 고풍스런 건물들이 그럴듯하였다. 또한 이곳 SNP광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반대해 민중봉기가 일어난 곳으로 슬로바키아의 민족성지나 다름이 없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좀 더 보고 싶은 슬로바키아를 돌아보며, 버스는 헝가리로 향한다. 비타민 C의 원산지라는 나라 헝가리, 배고픈(헝그리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 같은 이미지의 헝가리. 전봇대가 중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이 신기했다.
버스는 우리 일행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내려놓는다. 2백만 명 정도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는 우리 교민이 2천 명 정도, 그중 800명이 유학생이란다. 우리 일행 중에도 이곳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유학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부다페스트는 의학으로 유명한 곳이란다. 학비가 저렴하여 유학생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부다페스트의 다뉴브강(오스트리아에서는 도나우강으로 부름) 야경을 본다. 보석처럼 빛나는 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프랑스의 세느강, 체코 프라하와 함께 유럽 3대 야경으로 손꼽힌다. 다뉴브강은 화려하지만, 은은함을 뽐내며 강물 속에 잠긴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부다페스트. 강물이 노을을 끌어당기며 내게 다가왔다. 강둑을 밟고, 성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을 배경으로 중세 건축물들이 화려한 불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부의 요새는 분가루를 바른 것 같은 외관으로 밤의 은은한 옷으로 단장하여 야경의 격조를 높이고 있었다. 특히 어부의 요새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야경의 백미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멀리 바라보이는 부다페스트 시내는 수많은 불빛과 별빛과 탄성이 어우러져 축제를 펼치고 있었다. 다뉴브강 유람선에서 본 야경은 내게 젊은 날 금강 변에서 아내와 함께하던 낭만의 시간과 겹치면서 또 다른 기분을 만들어주었다. 아내와 함께 와인이라도 한 잔 했다면, 그냥 취해서 잠들었을 것이다.
2015. 6. 1(월) 다뉴브강에서의 낭만
천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자신만의 문화를 지켜온 곳이 있다. 아침식사 후 들른 곳은 헝가리 14인의 영웅을 상징하는 부다페스트의 영웅광장이다. 헝가리인인 마자르족은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비로소 현재 헝가리 지역에 정착하며 1001년 통일국가를 완성하였다. 헝가리는 동유럽 중에서 가장 먼저 개방 정책을 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헝가리의 수도는 부다페스트로 연일 끊이지 않는 여행객이 몰려드는 관광지이다. 로마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고,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곳이다. 그만큼 부다페스트에는 많은 문화 역사적 흔적이 곳곳에 존재한다. 어부의 요새는 1902년 건립된 백색의 요새이다. 중세시대 어부들이 무리지어 조직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어시장이 열리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보는 부다페스트의 전경은 아름다움의 꼭대기이다. 이곳에서는 다뉴브강과 국회의사당,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어부의 요새 근처에는 역사를 껴안고 오랜 시간 지내온 건축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마차시교회이다. 이 교회는 13세기 건립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14세기 때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당시 마차시교회를 지을 것을 명령했던 마차시 왕의 이름을 따 마차시교회로 불리게 됐다. 실제 마차시왕의 결혼식이 거행됐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역대 헝가리 왕들의 위관식이 치러진 곳이다.
영웅광장은 부다페스트의 문화거리인 안드라시거리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원래의 이름은 밀레니엄 기념광장이었으나, 1932년부터 영웅광장으로 불리게 됐다. 헝가리 건국 천년을 기념해 1896년부터 1926년에 걸쳐 조성된 영웅광장은 오랜 역사를 기리는 장소이니만큼 안에 위치한 볼거리도 가득하다.
영웅광장 둘레에는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 기둥 사이마다 총 14개 청동 입상이 위치해 있는데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7개씩 줄지어 있다. 위엄 있게 서 있는 청동상을 보고 있으면 그 늠름한 자태에 압도된다. 청동상은 오랜 세월 탓에 거뭇한 때를 덧대어 입고 있지만, 그 모습마저 기품 있어 보인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밀레니엄 기념탑이 그곳을 지키고 서 있다. 밀레니엄 기념탑은 36m 높이로 그 주위를 청동 기마상이 지키고 있고 맨 꼭대기에는 대천사 가브리엘 상이 날아갈 듯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다. 대통령궁을 지키는 근위대의 교대식이 우리의 눈길을 한참이나 끌고 있었다.
아시아인인 마자르족의 후손인 헝가리인들은 뭔가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여유로움 속에 행복을 느끼며, 생활 속에서 음악과 함께 하며 살아가는 멋진 사람들이다. 거리엔 부다페스트의 붉은빛 시티투어버스가 보인다. 나도 시간을 내어 이 버스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짬을 잠시 내어 버스 안내원과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점심식사는 한국관에서 비빔밥을 먹고, 산유국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향한다. 오후 4시가 좀 넘어 오스트리아로 넘어간다. 국경을 통과하고 나니, 바람을 불러 모으는 풍력발전기들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보라색, 붉은 빛깔의 꽃밭들이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2015. 6. 2(화) 비엔나 속으로 들어가다.
오늘은 비엔나 관광이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도시 자체가 하나의 주 단위로 분류되어 있다. 이곳은 베토벤과 모차르트 등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 도시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는 슈테판성당과 합스부르크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쉔부른궁전, 비엔나시립공원 등이 유명하다. 이곳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ZE), 국제원자력기구(IAEA)등과 같은 중요한 국제기구들의 본부가 위치해 있다.
슈테판성당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를 다시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고 한다. 성당의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기도 하며, 비엔나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고 한다.
프랑스에 베르샤유 궁전이 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쉔부른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비엔나를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쉔부른궁전은 비엔나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고 있다. 1569년 착공하여 1700년에 완공되었으며 합스브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었다. 궁전 곳곳은 짙은 황금색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좋아하던 색이었다고 한다. 1805~1809 년에는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정복한 후 사령부로 이용하기도 했다. 궁전의 내부는 1441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45개의 방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특히 프란시스 요셉이 사용하던 침실과 모차르트가 6살 때 콘서트를 했던 거울의 방이 유명하다. 크리스마스 때는 궁전 앞 광장에서 대규모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고 한다.
비엔나시립공원은 연중 비엔나 시민과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요한 스트라우스2세의 황금동상과 계절 따라 꽃의 장식이 달라지는 꽃시계가 방문객들이 즐겨 사진 찍는 포토 존이다. 그리고 슈베르트를 비롯하여 수많은 기념동상과 조각품들이 공원을 장식하고 있다.
6월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는 락페스티벌, 공연축제 등 다채로운 축제가 열려 여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우선 락 페스티벌 ‘락 인 비엔나(Rock in Vienna)’가 6월 4일부터 6일까지 비엔나 도나우섬에서 열려 흥겨움이 넘친다. 인큐버스(Incubus), 림프 비즈킷(Limp Bizkit) 등 내놓으라 하는 뮤지션들이 대거 출현해 비엔나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축제. 캠핑존에서는 캠핑도 함께 즐길 수 있어 온 몸으로 비엔나 락 페스티벌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매년 3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드는 뮤직 페스티벌 ‘도나우섬 페스티벌’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열린다. 유럽에서 열리는 가장 큰 야외축제로 꼽히는 이 축제에서 2천여 명의 넘는 아티스트들이 재즈, 팝 음악을 선보인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식들도 함께 판매해 최고의 축제를 만끽할 수 있다.
드디어 동유럽여행의 종지부를 찍고 비엔나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을 만났다. 아빠, 엄마, 아들 2, 딸 1명으로 구성된 가족이다. 내가 그 집 막내아이에게 반갑다고 손짓을 하니, 아빠가 나와 막내아이의 사진을 찍는다. 나도 그 가족 일행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후 4시 5분 카타르항공이 우리를 싣고 이륙을 시도한다. 비행기는 비엔나, 부다페스트, 부쿠레스트, 흑해, 앙카라, 반호수, 타비즈호수, 그리고 페르시아만을 거쳐 카타르의 수도 도하로 실어 나른다. 도하의 공항에서 꽃처럼 예쁘게 장식된 캔디를 보고, Quiet room이라고 된 곳이 궁금하여 문을 열어보니, 잠시 눈을 붙이며 쉬는 곳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잠깐 쉬며, 여행 이야기를 정리하였다.
2015. 6. 3(화)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내려다보다.
다시 한국으로 가기 위해 새벽 1시가 넘어 카타르 항공 비행기에 오른다. 터키의 북쪽 흑해 위를 날며, 기내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화이트와인에 비프음식, 아내는 치킨에 맥주를 시켰다. 비행기에서 아내의 옆자리에는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우크라이나 여자가 타고 있었다. 아내가 소곤소곤 계속 얘기를 한다.
그 사이 비행기는 카불, 이슬라마바드 상공을 지나 샤케로 날고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얼른 창을 열었다. 만년설이 쌓인 히말라야산맥 서부의 절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카라코람산맥 부근이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어 유리창 밖의 만년설을 촬영하였다. 내가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동안 비행기는 타클라마칸, 고비사막, 바오토우, Hohhot, 베이징의 상공을 난다. 드디어 내 눈에 보하이만이 들어온다. 비행기는 칭다오, 따렌 사이를 지나 황해로 접어든다. 무역선, 여객선이 물의 꼬리를 하얗게 달고 여유있게 오가고 있었다.
산둥반도가 뒤로 가고, 비행기는 북한을 피해 남으로 향하여 태안반도쯤에서 다시 북쪽으로 기수를 돌린다. 평택항, 안산의 시화방조제, 인천대교 등이 보인다. 자동차들이 개미새끼 떼처럼 오가고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에서 내리니, 고국의 푸근한 공기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표준시에 맞춰 6시간을 다시 앞으로 돌리니, 오후 4시가 넘어있었다. 지난번 라오스 여행 시 아내가 사주었던 기념품은 하자가 있어서 반품하였다.
공항버스로 송추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백석의 내 차를 이용하여 집에 도착하니, 저녁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내와 함께 한 6박 8일간의 강행군이었지만, 알찬 여행으로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