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발칸으로
2017. 5. 24(수) 출발 전날., 집→인천공항.
아내의 부은 검지관절을 치료하기 위해 한의원과 정형외과엘 다녀왔다. 그리고 저녁때는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집을 지키고 있던 화분들, 제주도에 가있느라고 관심을 받지 못하여 힘을 잃은 화초들을 싱싱한 것만 남기고 비워내고 있었다.
밤 9시 40분경 아내가 급하게 전화를 받는다. 아직 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오는 전화. 며칠 전 예약한 긴급모객 발칸여행 가이드에게서 온 전화였다. 우리 부부는 내일 인천공항에서 만나는 것으로 잘못 알고, 태연하게 집안일을 하는 중이었다.
다급하게 짐을 챙겼다. 그리고 친구 재철이에게 택시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후다닥 준비하여 밤 10시쯤 집 앞에서 택시를 탔다. 인천공항으로 내비게이션을 조종한 택시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언제 도착하느냐고 가이드에게서 온 전화가 자꾸 독촉을 한다.
밤 11시경 공항에 도착하여 가이드를 만났다. 바로 발권을 하고 수하물을 부쳤다. 입국수속을 마치니, 자정쯤이다. 아내는 미처 챙기지 못한 메이크업을 급하게 구입한다.
2017. 5. 25(목) 첫째 날, 인천→도하→부크레시티→브란→브라브쇼.
카타르 항공 QR859기, 새벽 1시 20분 비행기에 오른다. 아랍어로 비행기 탑승 시 안전수칙이 흘러나온다. 이륙 예정시간이 30분 연장된다. 밤하늘 속으로 일행이 빨려 들어간다. 서해로 빠져나간 비행기는 잠시 후 북서로 방향을 틀어 발해만의 밤을 관통한다.
중국의 야경이 눈을 자극한다. 피곤한 몸이다, 잠을 청한다. 비행기는 우리들을 재우며 깨우며 티벳, 히말라야를 지나 남서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이란, 걸프만에 그림자를 남기며 중간 기착지 카타르의 Doha Hamad공항에 사람들을 토해낸다.
이른 새벽 사막 위의 공항.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다. 먼지 속의 빌딩들, 푸른 하늘, 뿌연 대기, 메마른 바람만 가득한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는가?
와이파이가 작동하지 않는다. 아라비아인들의 흰옷이 구름처럼 펄럭인다. 맨발에 검은 옷은 장막처럼 느껴진다. 곁의 외국인과 이야기 하다가 보니, 수단 사람이다. 몇 년 전 남수단에서 사제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이 생각났다.
앗, 인천공항에서 받은 전자항공권과 여행 시 사용해야할 수신기 가방이 통째로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것인가? 가이드는 배상해야 한다고 한다.
어쩌거나 우리 일행은 6시 50분 출발하는 루마니아로 가는 QR 221기에 다시 몸을 싣는다. 이동 중 공항버스에서 인디아 남자와 잠시 대화를 하였다. 서울에 2번 왔었단다. 불고기, 김치, 떡볶이가 맛있었다나. 비행기가 이륙하니, 카타르가 내 눈에 들어온다. 사막이다, 퇴색한 갈색의 산이 보인다. 먼 옛날의 강줄기가 코브라 뱀처럼 기어간다. 그래도 산골짜기엔 가끔 나무가 보인다. 드문드문 마을이 보이고, 초록의 점들이 힐끔힐끔 고개를 내민다.
아라비아 승무원들의 서빙을 받는다. 일행은 북서쪽 하늘을 계속 비행 중. 티그리스강을 넘고, 이란/이라크 국경 근방을 난다. 터키 동부의 구름, 푸른 호수들, 구불구불한 도로, 만년설, 그리고 반짝이는 집들이 잠을 깨운다.
검푸른 흑해를 내려다본다. 루마니아의 부쿠레시티가 가까워졌다는 승무원의 음성이 귀청을 울린다. 멀리 보이는 구름도 그룹을 이뤄 점점이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그리스를 통과하고 잠시 후, 첫 번째 방문지 루마니아가 우리를 맞이한다. 옅은 안개에 잠긴 도시가 분위기를 잡고 있다. 잘 정비된 농토, 평야지대의 푸른 삼림이 당당하다. 강도 내려다보이고, 자동차들이 바삐 오간다.
이곳 시간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부쿠레시티에 발을 디딘다. 비 내리는 공항, 12시 35분쯤 버스가 우리를 싣는다. 드디어 5천 km의 버스여행의 시작이다. 반쯤 대머리인 이후찬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한다.
드디어 유럽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발칸의 12일간 여정이다.
버스는 드라큘라로 유명한 브란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가이드는 루마니아를 유명하게 하는 세 사람이 있다고 한다. 좋은 사람 코마네치, 나쁜 사람 차우세스크, 이상한 사람 드라큘라. 루마니아인 2천만 명 중 2백만 명 정도가 집시(주로 해외파)란다. 소매치기에 대비하여 가방을 앞으로 메란다. 화폐는 레이화인데, 이곳에선 유로화를 사용하지 못한단다.
정식 명칭은 Romania, 로마인의 언어로 ‘사람과 토지’라는 의미. 국토는 한반도의 1.1배, 기후는 전체적으로 대륙성기후, 문맹률은 0인 나라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멋모르고 소련 편에 섰다가 공산화가 되었던 나라, 1965년 니콜라이 차우세스쿠가 집권하였다. 그는 1989년 12월 유혈혁명으로 아내와 함께 무참하게 총살당하였다. 2007년 EU에 가입한 이 나라. 2천m가 넘는 산이 3개나 되며 태양광/수력/풍력발전을 통하여 환경친화적 전력이 풍부하다. 덧붙여 산유국이란다.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 와서 살고 있다는 가이드, 2003년에 2만 달러에 산 집이 10년 만에 20만 달러가 되었단다.
흑해로 가는 고속도로가 공산당 간부들의 알박기로 인하여 어렵사리 건설 중이라고 한다. 현재 15000불의 소득이 고속도로만 완성되면 3, 4만불 달성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나라. 현재는 일자리 때문에로 해외로 수출되는 인력이 유럽에서 가장 많단다.
해바라기밭, 유채밭, 옥수수밭 그 너머 아득한 지평선이 내 눈을 끌어드린다. 저기 숲속의 집들이 내 집이었으면… 겨울엔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리는 나라, 대부분 양철로 된 지붕들의 경사가 급하다.
한라산 5.16도로 같은 숲길, 크로아티아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 속에서 3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카르파티아산맥의 북쪽 기슭 브라쇼브 주에 위치하는 브란성. 소설 드라큘라의 배경이 된 유럽 최고의 관광지인 이 성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공민왕 때쯤 건축된 것이다. 성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민들레꽃 무리가 우리에게 노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성 아래 상점에서는 드라큘라 모양의 목각인형, 헝겊인형 등 기념품들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던 브란지역은 터키제국의 트란실바니아의 관할구역에 포함되었다가 18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외침을 겪다가 1차 대전 후, 오늘날의 루마니아 땅이 된 것이다.
1시간쯤 버스를 달려 숙소, Avelux 호텔이다. 저녁식사 후 초여름 유럽의 비를 맞으며, 일행 부부와 함께 산책한다. 검은 색의 개들이 정말로 사납게 짖어댄다. 내가 펄쩍 뛰었더니, 더욱 달려들 태세이다. 철 울타리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2017. 5. 26(금) 둘째 날, 브라쇼브→시나이아→부크레시티→벨리코트르노브
새벽 4시쯤 잠이 깬다. 샤워 후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슬비 때문에 아침산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호텔 앞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출근버스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도시의 잠을 깨우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빵, 치즈, 잼, 토마토, 파프리카, 달걀 등이 아침밥을 대신한다. 외국에 나올수록 입맛은 더욱 당긴다, 식사시간이 즐겁다. 아내도 마찬가지.
버스에 몸을 싣는다. 발칸사람들은 피부가 흰 것을 싫어한다. 건조한 날씨에 자외선이 강하여 피부 노화가 심한 그들. 동양인에 비해 10살쯤은 늙어 보인다. 루마니아 인사말 ‘부너’를 머릿속에 넣는다.
1시간 반쯤 달려 ‘카르파티아의 진주’라는 시나이아 지방의 펠레슈성에 발자국을 찍는다. 이 성은 400명 정도의 조각가들이 30년간 만들었단다. 나무로 만든 건물의 정교한 외관은 물론 내부 그리고 주변까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성 안의 170여개의 방은 금․은으로 만든 접시, 도자기, 크리스탈 샹들리에, 조각품, 창문, 가구들까지 호화로움을 뽐내고 있었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가이드가 코마네치 얘기를 꺼낸다.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에서 10점 만점 금메달로 여자체조의 영웅. 파란만장한 인생의 부침을 겪고, 현재 미국의 오클라호마에서 체조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그녀.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중년이 지난 코마네치의 성공과 좌절, 그리고 망명 일대기를 쏟아낸다.
2시간쯤 지나 루마니아의 수도 제2의 파리라는 다뉴브강의 지류인 딤보비차강변의 부크레시티 시내가 모습을 보인다.,
맨 먼저 차우세스쿠 궁전. 아내와 멋진 포즈를 만들며 사진을 찍는다.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김일성 주석궁을 보고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지었다는 장엄한 건물, 앞으로도 루마니아의 명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혁명광장을 보고, 구 공산당 본부를 둘러본다.
그리고 루마니아정교회의 하나인 빅토리아거리에 위치한 크레출레스쿠교회. 1720년부터 1722년까지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레출레스쿠와 그의 아내 사프타가 세운 건물에 100여년이 지나 타나레스쿠가 내부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버스에 올라 4시간을 달려 불가리아의 벨리코투르노브의 인터호텔 Veliko Tarnovo에 여장을 푼다. 저녁 8시쯤이었다. 식사에 송어가 나왔다. 잠시 후 아내와 함께 샛강 건너 전쟁기념비를 보았다. 그리고 곁의 미술관은 잠겨있어 겉만 둘러보았다. 호텔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꺼냈다. 이낙연 국무총리의 청문보고서가 실패했다는 소식, U20월드컵축구에서 한국이 영국이 1:0으로 패했다는 뉴스가 보인다.
2017. 5. 27(토) 셋째 날, 벨리코투르노브→아르바나시→릴라→소피아.
제2차 불가리아왕국의 수도였으며, 불가리아의 아테네로 불리는 벨리코투르노브로 간다. 인구 8만 정도, 종합대학이 4개나 있는 교육도시, 인문학의 도시란다.
시간이 멈춘 역사도시 벨리코투르노브의 거대한 요새. 그곳에 올라와 보니, 숨이 탁 트인다. 요새를 중심으로 교회왕궁터, 수도원, 성문, 타워 등이 우리를 쳐다본다.
우리를 안내하는 오한별 현지 가이드는 37세, 젊은 나이로 이곳에서 무역업을 한단다. 인구 8만의 도시인 벨리코투르노브엔 교민 8가정이 살고 있단다.
잠깐 버스를 타니, 불가리아의 전통 건축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는 아르바나시이다. 탄생교회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며, 벽과 천장에 예수탄생에 대한 프레스코벽화가 인상적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릴라산으로 간다. 눈 쌓인 산의 계곡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3단 폭포가 눈길을 끈다. 양떼가 풀을 뜯는다. 나는 잠시 루마니아의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양을 모는 테우리가 되고 싶어졌다.
버스에 오른 지 4시간쯤 흘러 1983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가리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다는 릴라수도원이다.
릴라산의 협곡에 요새처럼 앉아있는 건물은 보는 이에게 위압감과 함께 편안함을 준다. 마당을 중심으로 사각으로 지어진 건물에 수많은 방이 있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시원하게 휘몰아치는 개울물소리가 내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어준다. 털보사제님과 사진도 한 컷 찍었다.
이 교회는 10세기경 동방정교회의 성자 반열에 오른 릴라의 성 요한이 설립하였다. 19세기 초 화재로 훼손된 뒤 다시 건축되어 19세기의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녁 7시쯤 Novotel 호텔에 도착, 저녁식사로 쇠고기, 감자요리가 나온다. 인천공항에서 만났던 모두투어 발칸행 팀과 다시 얼굴을 마주친다. 아내는 현지 가이드에게 불가리스 1년 분을 예약한다.
저녁식사 후 아내와 거리산책. 호텔의 동쪽 큰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육교에 올라 사진을 찍는다. 대형 쇼핑몰에 들러 아이쇼핑을 한다. 낯익은 SUMSUNG을 비롯하여 눈에 익은 브랜드들이 진열되어 있다. 돌아오는 길가 마트에서 요구르트 2병을 샀다.
2017. 5. 28(일) 넷째 날, 소피아→베오그라드.
5시 반쯤 기상, 변의 색깔이 황금빛이다. 불가리스의 효능이리라. 발칸의 동쪽 흑해와 맞닿은 나라, 장미의 나라, 유산균 불가리스의 나라, 녹색으로 시작하여 녹색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나라.
불가리아를 안내하던 현지가이드가 태권도 사범으로 이곳에 정착했다는 박상현 님으로 바뀐다. 어제의 오한별 가이드는 아이가 아파서 못 나온단다. 따라서 어제 아내가 예약했던 불가리스 대금도 환불이 되었다.
1877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불가리아. 수도는 소피아, 화폐단위는 레프, 국가의 상징은 사자이다.
전기세가 비싼 나라, 겨울에 눈이 많기에 제설작업의 노하우가 확실한 나라. 물건 값은 저렴하여 체리는 10kg에 2만원, 삼겹살은 1kg에 6천 원 정도. 음식마다 마늘이 들어가 한국인도 살기 좋을 것이라고 가이드가 적극 추천하는 나라. 흑해연안 스몰리아 지역에는 일본인 은퇴마을이 있고 췌장암, 대장암, 치아 질병이 드물다는 장수의 나라 불가리아를 내가 밟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4천만 명을 앗아간 페스트를 막기 위한 예방으로 독수리 동상이 곳곳에 서있는 나라, 시내 곳곳에 온천수가 펑펑 쏟아지는 나라. 창가의 해충의 방지를 위하여 심은 제라늄 화분들이 눈길을 끈다. 길가엔 사약의 원료로 썼다는 유도화가 붉은색, 흰색으로 얼굴을 내민다. 유도화의 식재는 두더지에 의한 도로의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포도밭 앞에는 장미를 심어 해충을 막는다.
불가리아의 물은 최고, 특히 시내의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온천수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집시들에겐 이만한 시설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이곳에 우리나라 대전에서 본 족욕시설이라도 갖췄으면 환상일텐데…
비토샤산 계곡에 위치하는 아름다운 도시 소피아에 계속 비가 내린다. 아내는 노란색 비옷을 입고 패션을 뽐내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인 소피아. 시내 곳곳에는 이슬람사원과 그리스정교 사원이 서있다. 공산주의를 보여주는 레닌광장이 옛 자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불가리아에서는 슬라브족의 보드카가 유명하다. 해산물을 먹지 못해 갑상선암이 많다는 그들. 화장실에 가면 남자들 소변기가 작고 높게 달려있어 불편스럽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예전엔 소금이 중요하여 salt 에서 유래한 Salary는 단어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란다.
발칸의 하늘이 청명하다지만 오늘은 계속 비가 내린다 원시림으로 우거진 도시 속으로 버스가 달린다. 완만한 구릉을 지나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향한다.
일행 중의 재미있는 유머를 들었다. 우리 모두 서러워서 매일 우는 대학이 서울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대학은 하버드대, 동네 경로당에나 가서 앉아있는 동경대엔 가지 말고, 연금도 받고 세금도 내는 연세대로 가자고 한다. 옛날 김영삼 대통령이 연설했다는 '남자의 자질을 키우고, 여자의 질을 향상시켜 강간도시를 만들자'고 했다는 얄미운 유머에 웃음을 보냈다.
해발고도가 높은지라 날씨 변화가 심하다. 불가리아는 노예 검객들의 후예가 많단다. 그들의 직업은 싸움, 싸워서 살면 장애자가 되어 결국 감옥으로 가고, 죽으면 단지 쓰레기로 처리되는 노예의 가엾은 자손들.
금년 추석 연휴엔 740만원 정도할 것이라는 발칸여행, 나와 아내는 개인당, 단 200만원도 안 주고 긴급모객으로 온 것이다. 와인은 와인 잔으로 마셔야 제 맛이란다. 그리고 안주는 김밥이 최고라고, 한국에서 동행한 조시형 가이드가 알려준다.
6시간 반을 버스에 실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한다. 붉은 기와집 군락이 수채화로 그린 풍경화 같다. 오후 6시쯤 호텔 Majdan에 여장을 푼다. 마침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참았다.
잠시 후 아내와 마을 산책을 한다. 가까운 곳에서 독일인 노인을 만났다. 그러나 영어가 통하지 않는 그들과 더 이상은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들 가정까지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쉬웠다. 서산을 넘기 전, 햇살이 뜨거웠다. 구글에서 지도를 다운받아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는 일행들과 함께 마트를 찾았다. 그리고 생수와 요구르트를 샀다.
식사 후에도 어둠을 밀어내며 다시 마을을 산책하였다. 세르비아 아이들을 만났다. 워낙 수줍어하는 아이들. 사진을 찍자니까, 어떤 아이는 울기까지 한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우리에게 사진을 찍자고 액정화면이 깨진 스마트폰을 들이댄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마을의 젊은 남자들과 어울려 춤까지 추웠다. 아내의 춤동작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2017. 5. 29(월) 다섯째 날, 베오그라드→스코프예.
새벽, 아내는 몸단장을 하고, 나는 아침 일찍 어제 갔던 마트 근방까지 산책을 하였다. 밖의 공기가 한국의 가을처럼 선선하였다.
아침식사 후 승차하기 전 동행하는 여인들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어제 주민들과 어울린 동영상을 일행들에게 보여주니, 어떻게 그런 것을 찍었느냐고 부러워하였다. 시내 아파트들은 부스럼처럼 겉 부분이 떨어져 나가있었다.
오전 8시 반쯤 출발예정이었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후진하던 우리 버스가 뒤편의 승용차와 접촉사고를 낸 것이다. 1시간쯤 지나 버스는 출발하였으나, 운전기사는 우리 일행이 시내투어를 할 동안 경찰서에 다녀와야 한단다.
유고 내전의 주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눈에 넣는다. 사바강이 다뉴브강에게 목숨을 넘겨주며 생을 끝내는 이 도시. 크로아티아어로 ‘하얀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동로마제국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인들이 흰 벽돌로 성벽을 둘러쌓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란다.
늘 발칸의 도시들은 내전으로 폐허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고풍스러움과 푸르름을 간직한 자연환경이 남아있었다. 세계의 유수의 기업들과 종합대학과 300여개의 학교들, 과학예술아카데미와 각종 박물관, 미술관이 있어 문화도시로 발돋움하는 베오그라드.
터키인이 경영하는 이스탄불 레스토랑에서 쇼핑도 하고, 휴식을 취한다. 그 사이 정차중인 캠핑카를 발견하였다. 말을 걸어본다. 그들은 나와 아내를 캠핑카의 내부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나도 평소에 캠핑카를 구입하여 아내와 여행을 하고 싶다고, 가까운 장래희망을 아내에게 말하곤 했다.
식사 후 경찰서에 간 운전기사 때문에 오후 3시 반경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벌금으로 1500유로를 내게 생겼단다. 아마 한 달 월급쯤은 날아 갈을 것이다. 마음이 착하고, 늘 이타적으로 살아온 아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개인당 10유로씩 모아 기사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해주자는 제안을 한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아내는 한사람, 한사람 일대일로 설득하여 모금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났다. 나는 아내에게 그냥 돌려주자고 하였다.
아내는 버스에서 졸음은 제쳐놓고,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눈을 떠보니, 아내가 쓴 시 형식의 글을 보여준다. 때마침 가이드는 다음 여행지인 테레사 수녀의 고향인 마케도니아를 소개하면서 덩달아 마더 테네사의 기도문을 낭독해주었다. 낭독이 끝나자 아내는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데레사 수녀의 기도문 중 일부를 소개하고는 방금 전에 내게 보여준 글을 낭독한다. 일행 중 많은 사람들이 힘차게 박수를 친다.
“우리 곁에 누군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에게 도울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십시일반/ 한 숟가락의 밥이 모여 그득한 한 공기의 밥이 되어/ 허기진 그 사람의 한 끼라도 / 채워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우리와 함께 했던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해 일하다가/ 순간의 실수로 한 달의 급여가/ 날아갔다면,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척 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라면/ 초지일관 그 마음 변치 말고 유종의 미를 거둡시다./ 오늘 우리의 작은 배려가/ 무심한 강물처럼 흘러갈지라도/ 어느 날/ 큰 바다에서 만나게 되는 날/ 커다란 사랑의 배를 띄우게 될 것입니다.“
아내는 똑부러진 음성으로 참여하고 싶지 않은 분들에겐 돌려드리겠다고 하였다. 남자 한 사람이 불참하겠다고 바로 나왔다. 그리고 또 두 분이 응하지 않았다. 그 결과 220유로를 가이드를 통하여 기사에게 바로 전달하였다. 운전기사는 바로 “Thank so much everybody"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아마 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아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음이 가라앉아 홀가분해진 아내의 눈엔 이슬이 그렁하였다.
마케도니아에 가까워지면서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자연 풍광이 산악으로 바뀐다. 그리고 산사면마다 마을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면서 무지개가 보인다. 그것도 쌍무지개였다. 카메라가 창문마다 눈을 내민다.
아내의 좋은 일을 하늘이 격려해주는 것이리라. 밭에서 괭이질하는 농부가 보인다. 농약을 뿌리고, 비닐에 수확물을 담는 것도 내 눈에 들어온다.
밤 9시 반경 마케도니아의 Bellevue 호텔에 짐을 내려놓았다. 피곤에 눌린 몸, 저녁식사를 하고는 바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2017. 5. 30(화) 여섯째 날, 스코프예→오흐리드→티라나.
여기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프예. 아침에 커튼을 여니, 멋진 연못이 보인다. 그리고 새소리가 피아노의 왈츠처럼 들려온다. 샤워 후 아내를 재촉하여 밖으로 나갔다. 호수 물오리의 유영, 칠면조, 거위가 아침운동을 하고 있다.
호텔 부지 내에 캠핑카들이 모여 있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집시들. 우리나라도 남북이 통일되었더라면 나도 저들처럼 만주, 시베리아벌판을 거쳐 유럽까지도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7시 45분 출발, 현지가이드 강진필님이 얼굴을 내민다. 마케도니아는 쿠바, 시리아와 함께 우리나라와 수교가 되지 않은 나라중의 하나. 우리가 수교 중인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와의 관계 때문이라는데, 주권국가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코소보와 15분 거리에 있는 마케도니아는 인구 200만, 수도 스코프예는 60만 인구를 가지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 스코프예는 바르다르강 상류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중부 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1963년 대지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현대 도시로 성장하였다. 스코프예는 특히 많은 동상을 건립하여 관광산업을 키우고 있었다. 또한 테레사수녀와 알렉산더대왕의 고향이며, 키릴문자로 유명한 국립 키릴대학이 이곳에 있어 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시내 투어에 몇 마리의 개들이 귀에 명찰을 달고, 우리 일행을 따라다닌다. 무덤의 비석들이 놓인 공동묘지가 보인다. 흰색은 무슬림, 검은색은 정교라고 한다.
속이 안 좋은지 아내가 토했다. 힘들어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다.
엘바산(1300m 정도) 바라보는 마케도니아, 자연 풍광이 빼어난 마케도니아. 바르다르강 위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가르는 15세기 터키식 돌다리를 건너며 얼굴을 남긴다.발칸반도 최대의 터키탕인 피샤 목욕탕을 스쳐 지난다. 그리고 유럽시장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전통의 동방시장에 들렀다. 일행들이 싱싱한 체리, 살구 등 각종 과일들을 보며 일행이 흥정을 한다.
3시간 정도 버스에 몸을 실으니,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호수가 나타난다. 4백만년 전쯤 모습을 갖춘 이 호수. 2/3는 마케도니아, 1/3은 알바니아 소속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그곳은 바다처럼 보였다. 호수 초입에서 갈대숲이 보이고, 멀리 언덕의 붉은색 기와집들이 오스트리아를 옮겨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의 포즈에 셔터를 누른다. 배 타는 곳을 지나 사뮤엘 유적이 있는 언덕 위의 유적지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원형경기장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깐 사이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아내와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 본다. 또다시 원형경기장 근처에 오니, 젊은 외국인 남녀 한 쌍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에게 한국 단체관광객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젊은 남자는 자기들을 따라오란다. 그들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한국 관광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성당 근처에서 머물러 있는 우리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은 우리의 메시아’라며,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터키에서 온 여행객임을 알고 사진까지 함께 찍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라고 생각하며 뛰어가 보니,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모습의 중국인들이었다. 나와 아내는 신경이 곤두섰다. 허겁지겁 원래 우리가 지나온 배가 모여 있는 곳으로 뛰었다. 나보다 더 초조해진 아내, 배를 타는 곳의 부스에서 한국인 그룹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모른다’였다. 와이파이도 되지 않아 가이드에게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점심 먹었던 호텔 근처에 있는 버스 쪽으로 가본단다. 고집을 세우고 가는 아내를 나는 말리지 않았다. 아내가 멀리 뛰어간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 일행이 유람선을 타러 올 것이라 추측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동안 지나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내가 궁금한 나는 우선 점심을 먹은 호텔로 가보았다. 그리고 여기 빨간 바지를 입은 한국 여자가 다녀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들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버스가 서있던 곳 근처를 서성거려도 버스조차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배가 머물러 있는 쪽으로 돌릴 때쯤, 이어폰을 통하여 연락이 온다. 아내가 왔다는 것이다. 나는 가고, 아내가 돌아와야 하는 길. 어째서 중간에 만날 수 없었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오는 길, 중간쯤 가이드와 아내가 보인다. 걱정이 스르르 풀렸다. 나는 아내를 크게 불렀다. 그녀는 화가 났는지 대답이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택시를 타고 왔단다. 나는 걷어서 아내를 찾으러 갔고, 아내는 내가 찾으러 간 것도 모르고 차를 타고 오고…
해외 여행길에서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할 실수. 그래도 마무리가 잘 되어 다행이었다. 호수의 유람선도 타지 못한 채, 목은 타들어가고, 가쁜 숨만 몰려왔다. 물을 사서 벌컥벌컥 마셨다. 기행문 거리가 생겼다고 위안을 삼았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로 간다. 오호리드호수가 계속 우리를 따라온다.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산사면 여기저기 토치카가 보인다.
40년 넘게 군림한 알바니아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1908~1985)의 이야기가 가이드의 입에서 쏟아진다. 빨치산운동에 뛰어든 호자는 권력을 잡은 후, 옛 친구들을 하나 둘씩 죄다 처형하였다. 말년에 기행을 일삼으며, 외적 특히 소련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국 곳곳에 70만개의 벙커를 축조하였다. 알바니아의 인구가 300만 명이었는데. 요즘엔 그 벙커를 해체하는 직업까지 생겼다나.
70년대 우리나라 모습의 알바니아. 국민의 1/10이 극빈자, 유럽의 최빈국이다. 날이 저문다. 운전기사가 길을 못 찾아 왔던 길로 되돌아오기도 하며, 길을 헤맨다. 해가 졌는데 도시는 어두웠다. 시내에 들어오니, 편도 1차선 차들이 꽉 막힌다. 못 사는 나라인데도, 어떻게 저렇게 차들이 많을까? 어둠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밤을 헤치며 오간다. 정말 전등을 못 켜서 그런 건지 등화관제를 하는 것인지, 의문부호를 붙여본다.
가이드는 절대 밤에 호텔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밤 9시가 넘어서 Stella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이 나라의 수준에 비하여 괜찮은 편이었다.
2017. 5. 31(수) 일곱째 날, 티라나→코토르→헤르체그노비
유럽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는 정말 어떨까? 아침 5시 조금 넘어 일어난 나는 얼른 샤워를 하였다. 그리고 호기심을 안고 아침 호텔 근처를 오가며, 그 실상을 살폈다. 하지만 어제 밤의 불빛만 보며 상상했던 낡은 도시와는 달랐다. 그저 건물만 조금 칙칙할까, 그 차이를 이웃나라와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산책하는 길, 날씨가 선선하여 몸이 가볍다.
알바니아. 국민소득 6천불, 한반도의 1/8 정도의 국토를 가지고 있다. 수도는 티라나, 백색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침 러시아워에도 길이 온통 막혔다.
국기 속의 쌍 독수리가 인상적이다. 그것은 ‘아테네와 베네치아를 잇는다.’는 의미. 가난하지만, 먹고 입고 잠 잘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는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알바니아. 여기엔 한국인이 단, 2명만 살고 있단다.
티라나는 18세기 실크, 면직물, 가죽, 도자기, 은그릇으로 유명한 교역도시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알바니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도시 중심부에는 스칸데베르그 광장이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광장 동쪽의 문화관에서는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 시계탑, 모스크, 오페라극장, 박물관, 콘서트홀 등 시내관광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몬테네그로로 향한다. 코소보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아직도 내전으로 불안한 날을 보내고 있는 그곳에 가면 어떨까?
버스에서 각자 발칸반도 여행을 오게 된 동기를 발표하게 되었다. 부부, 자매, 친구, 총각 등이 모여 발칸여행 일원이 되었다. 다들 여행의 베테랑이었다. 알바니아 제3의 도시 슈코타르를 지난다. 그곳의 슈코타르호수는 총연장 48km로 몬테네그로에 2/3, 알바니아에 1/3이 해당된다.
경운기에 퇴비를 싣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밭에서 직접 일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말이 달구지를 끌고 간다. 짓다만 집들이 많이 여기저기 우리들을 쳐다본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알바니아에선 집을 완공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잠시 휴게소에 들른다. 소풍 나온 알바니아 아이들의 맑은 눈빛이 우리를 반긴다. 한국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V자를 그리며 모여드는 아이들. 나와 아내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사진을 찍고 눈을 맞췄다.
알바니아에서 나가는 국경에 도달한다. 알바니아인들이 다른 나라로 나가는 것은 엄청 보안검사가 심하다. 트렁크, 가방을 모두 열고 소지품 검사를 받는다. 혹시 마약이나 밀수품이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가 뇌물을 먹였다. 그리고는 간단히 여권검사만 받고, 그들을 추월하여 국경을 넘는다. 약소국의 설움을 지켜보며, 70년대쯤의 우리나라를 생각해본다.
뭔가 아기자기할 것 같은 나라, 몬테네그로가 우리를 맞이한다. 반쯤은 건조한 벌판이 깔려있다. 산 능선이 버스를 둘러싼다. 얼룩무늬의 산사면, 아가씨의 유방 같은 산봉우리, 풀을 뜯는 얼룩소, 메마른 개울바닥, 노란 꽃무늬, 산중턱의 집들, 들판에 건초들 묶음이 줄을 맞춰 누워 있었다. 바다가 보인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까지 연결되어 있는 8번 국도를 계속 달린다.
4시간을 달린 우리는 드디어 코토르에 닿는다. 해안선이 굽이굽이를 25번을 돌아간다는 그곳, 스칸디나비아와는 다르지만 여기도 피오르드해안이라고 부른단다. 그 옛날 육지가 침강하여 바닷물이 들어와 만들어진 것. 중세 세르비아 네만리치 왕가에 의해 지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베네치아공화국의 오랜 지배를 받아 도시 곳곳에서 이 시대를 반영한 건축물이 보인다.
머리를 들자, 병풍처럼 펼쳐진 이반산의 가파른 경사면이 보인다. 그곳에 축조된 4.5km에 달하는 코토르 요새, 계단의 연속이다. 발칸의 따가운 햇살이 어깨를 짓누른다. 나는 아내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오르고 또 오른다. 맨 꼭대기에서 몬테네그로의 국기가 펄럭인다. 시간이 촉박한 우리는 성당을 조금 지나는 중턱까지만 오른다. 발아래의 도시와 바다를 조망한다. 눈부신 해안이 도시와 함께 빛나고 있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몬테네그로는 육지와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이룬다.’고 하였다. 자연을 빼고 몬테네그로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코토르에서 해안선을 따라 20분 정도를 달리면 닿은 작은 항구마을 Perast, 이 마을이 유명한 것은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인공섬 때문이다. 우린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탔다. 5분 정도 지나자 섬이 우리를 받아 안는다.
인공섬을 조성하기 전 이 자리에는 암초가 하나 있었단다. 어부형제가 이곳에서 성모화를 발견했단다. 이를 신의 계시로 여긴 주민들은 육지에서 돌을 날라 암초 주변에 쌓아 섬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섬 위에 바로크양식의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바다와 육지의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이곳에서 아드리아해의 공기를 마시며, 더위를 시킨다. 아내와 멋지게 포즈를 취하며 사진도 찍는다.
다시 1시간 반 정도 이동, 몬테네그로의 남동쪽에 위치한 헤르체그노비의 Ellena 호텔에서 여장을 푼다. 저녁식사에 와인 두 잔을 마시며, 함께한 일행 양현정님(남자)과 담소를 나눈다. 물 2병을 운전기사에게 사고 나서 잠깐 산책을 한다.
아내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그 유명한 크로아티아로 간다.
2017. 6. 1(목) 여덟째 날, 헤르체르노비→두브로브니크→메주고리예.
아침 7시 반 버스에 오른다. 오늘은 크로아티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두브로브니크로가 우리를 부른다. 1시간 반 정도 걸려 도착한 달마티안 해변에 있는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이곳 구시가지는 걷기여행에 안성맞춤이다. 골목을 지나다 보면, 오전에 들어서는 과일시장이나 정육점들을 마주치게 된다.
1667년 대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딕양식의 건축물, 르네상스와 바로크양식 교회 수도원 궁전과 분수가 다행스럽게도 잘 보존되어 있다. 1990년대 내전으로 또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유네스코의 주관으로 복원이 잘 되고 있었다.
시내투어를 마치고, 버스에 오니, 우리 버스에서 일본인들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여행기록을 하고 있던 수첩이 안 보인다. 다른 분들 중에도 물건이 없다는 사람이 있었다. 운전기사 마오리가 당황한 눈빛으로 물건들을 찾는다. 다행이 선반에서 물건들이 나왔다. 내 수첩도 되돌아왔다. 천만다행이었다.
재작년 중국 태항산 여행 중엔 여행을 메모한 수첩을 분실하였다. 그 당시 기행문을 쓰지 못한 불상사가 또 닥치는 것 같아 순간 기분이 낭떠러지기로 꽂히고 있었다. 가이드도 화가 많이 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모스타르로 이동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였으며, 보스니아 내전의 상흔이 생생한 이 도시. 2시간 반 정도의 여정이다.
잠시 국경을 통과하여 네움이라는 곳에 버스가 멈춘다. 네움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아드리아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해안지대이며, 단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항구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아드리아해로 통하는 약 21km의 좁은 해안선을 확보하였기에 내륙국에서 간신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브로브니크는 네움 때문에 본토 크로아티아와 떨어져있는 외톨이인 월경지가 된 것이다.
크로아티아에 비하여 물가가 훨씬 싸기 때문에 이곳은 쇼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우리 일행도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 물건을 샀다. 나는 아내와 물, 요구르트, 커피를 샀다. 가격은 6유로. 그리고 이곳 전망대에서 셔터를 눌렀다.
오후 3시 45분, 다시 보스니아 국경을 통과하여 크로아티아로 들어갔다가 다시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서남부에 위치한 슬라브어로 메주고리예(산과 산 사이라는 뜻)라는 곳으로 간다.
해발 200m의 산악, 이곳엔 약 430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교구교회가 처음 들어선 것은 1897년이었다. 지진에 의해 무너진 것을 2차 대전 후 짓기 시작하여 1969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이곳의 여섯 아이들이 크르니카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는 성모 발현 기적이 여러 번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로 교통조차 불편한 이곳까지 로마 교황님께서 직접 방문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세계의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성지가 되었다.
그 유명한 치유의 청동 예수님상이 보인다. 예수님의 무릎에서는 성수가 계속 나온다. 순례자들이 정갈한 손수건으로 이것을 묻혀 환자들에게 씻기면 병이 낫는다고 전해진다. 오늘도 수많은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이 긴 줄을 만들어 차례차례 성수를 닦아내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그 곁에서 소원을 빌며 기도를 하였다.
성당 아래 운동장에서는 수 천 명의 순례자들이 초여름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미사를 올리고 있었다. 야외 미사 참석가능인원이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운동장은 자리가 거의 메워져 나무 밑까지 사람이 가득한 상태. 엄숙함의 물결이었다, 그저 성스러움뿐이었다. 나도 아내와 미사에 동참하며,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도 남겼다. 오늘의 메주고리예 탐방은 이번 여행의 또 다른 느낌을 채워주었다.
다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서부 모르타르로 간다. 발칸산맥의 만년설이 보인다. 보스니아의 집들이 산중턱에 점점이 찍혀있다. 모스타르는 '오래된 다리'라는 뚯을 가지고 있다.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강 연안에 위치한 스타리모스트 다리, 1993년 내전의 폭격으로 파괴된 다리를 헝가리의 잠수부들이 강물에 매몰된 파편들을 건져 올렸다.
그것을 터키의 건축가들이 2088개의 돌을 재배치하여 완공하였다. 이 다리는 2004년 재건에 성공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리 초입에는 'Don't forget 1993'이라는 표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자리에서 사진도 찍고 내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옛 시가지를 탐방한다. 전쟁의 잔해인 총알로 만든 볼펜, 비행기 모형, 목걸이, 그리고 손재주 넘치는 수제품들에게 우리의 시선이 매몰되었다. 다리 곁 상점에 들른다. 현지인 아가씨가 한국말을 하며, 반겨준다. 그렇다고 한국에 온 것도 아니란다. 그 아가씨와 기념사진도 찍었다.
1시간 정도 버스에 실려 다시 메주고리예로 달려와 Brotnjo 호텔에 짐을 푼다. 그대로 잠 속으로 빠져든다.
2017. 6. 2(금) 아홉째 날, 메주고리예→스플리트→플리트비체→라스토케→카를로바츠.
오늘도 새벽 산책이다. 아내는 오늘도 짐정리와 몸 단장을 하느라 바쁘다. 은행, 병원이 보이고 새소리가 들린다. 허브향이 코앞에서 나를 유혹한다. 우리 일행들의 아침운동 모습도 보인다.
메주고리예를 출발하여 스플리트로 가는 길, 다시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가는 국경을 통과한다. 국경의 건물 지붕에는 강남에 갔던 제비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늘씬하게 뻗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산을 넘으면 아드리아해, 산중턱으로 고속도로가 기어오른다. 바위산, 터널이 나오고 숲이 도열하여 우리 일행에게 손짓을 한다.
2007년 개통했다는 고속도로가 시원하다. 국토가 척박한 크로아티아라지만 갖가지 들꽃, 수많은 약초들이 이곳을 유럽의 한약방으로 만들었다. 마을은 주로 고속도로 주변에 분포한다. 우리가 가는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에서 예쁜 여자들이 다 모여 사는 미인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곳에 부는 보라(Bora)라고 하는 바람이 북미 대륙의 토네이도처럼 무섭다고 한다.
2시간 반쯤을 달려 도착한 스플리트는 드넓은 아드리아해가 펼쳐진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해안 도시. 수도인 자그레브와 항공기, 열차, 버스로 연결이 가능한 제2의 도시이다. 이탈리아와 연결되는 페리 편으로 인하여 교통이 요지이자 휴양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먼저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으로 간다. 로마 황제였던 디오클라티아누스가 그의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건축한 궁전으로 아드리아해 동부의 해안지역에서 가장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옛 시가지로 들어간다. 신하와 하인들이 거주하던 궁전 안에는 200여개 집터가 남아 상점, 카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곳은 미로처럼 뻗어있어 골목골목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재래시장엘 들른다. 붉은빛 파라솔 아래 아드리아해의 체리, 살구, 마늘, 고수, 오이를 비롯한 각종 채소, 과일들이 화려하다. 나는 아내와 체리를 샀다.
배가 출출할 때쯤 버스가 음식점 Spot에 우리를 내려준다. 그곳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직접 만들었다는 체리주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근처에 약수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손을 대니, 엄청 차가웠다.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기나긴 여행길에 혹시 몰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바다 오르간으로 유명하다는 자다르를 지난다. 멀리 디나르알프스산맥을 바라보며 3시간 정도 버스는 달려 1979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국립공원 플리트비체에 도착한다.
제2입구로 들어간다. 삼나무를 비롯한 갖가지 나무와 들풀, 그리고 다양한 색깔로 우리를 유혹한다. 오묘한 물빛, 송어 떼가 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곳 16개의 호수와 아기자기한 폭포들이 경쟁하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호수를 지나 작은 폭포들을 눈에 담으며, 감탄사를 연발 쏟는다. 이슬비가 사선을 그으며 흩뿌린다. 드디어 이곳에서 가장 큰 78m 규모의 벨리키슬랍폭포에 압도당한다. 이젠 소나기로 돌변하여 우리의 앞길을 막는 비, 그것도 우박과 함께 말이다. 잠시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쉬움이 또 다른 폭포가 되어 쏟아진다. 질척이는 발로 계단을 오르며, 그래도 눈은 뒤를 돌아 폭포를 다시 보아야했다. 숲길을 통과하고, 뛰다가, 걷다가 우리는 드디어 제1입구에 도착하여 비를 피하고 있었다. 몸은 이미 물 범벅이 되었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를 향해 뛴다. 질척이는 몸을 이끌고 차에 올라 아쉬움의 숨을 고른다. 배낭을 열어보니, 여행 메모수첩까지 젖어있었다. 어쩐다냐?
다시 플리트비체에서 약 1시간 거리인 라스토케로 간다.‘천사의 머릿결’이라는 뜻을 지닌 라스토케, 그곳은 크로아티아의 슬루니지방에 있는 물의 요정들이 살 것만 같은 동화 속의 마을이다. 라스토케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코리나강 물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으며, ‘플리트비체의 작은 호수’라 불리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이곳은 물빛은 에메랄드빛이었다. 다리를 건너자 마을을 허리를 휘감으며 내려오는 작디작은 폭포들이 마을의 옛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어떤 폭포는 가정집의 아래를 통과하여 쏟아진다. 어떤 작가가 쓴 동화보다도 더 동화 같은 마을이었다.
1시간 정도 더 달려 카를로바츠 마을의 Europa 호텔에서 하루의 피로를 녹인다. 오늘도 그냥 꿈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2017. 6. 3(토) 열흘째 날, 카를로바츠→자르레브→블레드→류블랴나
5시 10분에 일어나 아침산책을 한다. 오늘도 맛있게 이국의 식사를 한다.
오늘부터 버스와 기사가 바뀌었다. 가이드가 송로버섯 이야기를 한다. 프랑스의 3대 진미인 거위의 간 푸아그라, 철갑상어의 젖 캐비어에 앞서 최고로 치는 송로버섯은 kg당 3백 오십만에서 7백만원 정도라고 한다. 떡갈나무, 너도밤나무의 뿌리가 있는 깊은 땅속에서 자라는 이 버섯은 육안으로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훈련된 개를 이용하여 채취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축구로 알려진 나라, 크로아티아로 다시 간다. 인구 80만의 도시 자그레브는 과거 중세적 느낌과 동유럽 고유의 분위를 간직하면서도 현대적 세련미를 갖춘 도시이다.
한때는 유럽의 화약고로 불렸던 자그레브, 중부유럽 교통이 요충지로서 동유럽의 주요 도시인 비엔나, 부다페스트, 류블라냐, 뮌헨, 베네치아 등 많은 도시들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시내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다뉴브강 지류인 사바강과 도심을 감싼 메드베드니카산이 흡사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을 떠올리게 한다.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네오고딕 양식의 첨탑이 이색적인 자르레브 성당, 키릴문자의 원본이 걸려 있는 슈테판성당, 화려한 색채의 모자이크 지붕이 인상적인 성 미르코 교회, 크로아티아의 영웅인 반 예라치치의 동상이 있는 옐라치치광장, 그리고 노천시장이 우리를 부른다.
한진관광, 노랑풍선을 통하여 이곳에 온 한국인들이 보인다. 시내투어 중 내 눈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상점의 입구에 전시된 거대한 붉은 격자무늬 넥타이 모형이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세상의 남성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넥타이의 본고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슬로베니아로 간다. 자그레브에서 1시간 반쯤 떨어져있는 작지만 발칸에서 가장 강한 나라, 유고연방의 위대한 대통령 티토의 고국인 그곳으로 간다. 발칸반도 북서부에 있는 슬로베니아는 2차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되었지만, 1991년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해체와 함께 내전을 거쳐 독립한 국가이다.
알프스산맥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슬로베이아 최고의 휴양도시 블레드, 유럽인들에게 최고의 결혼식 장소와 휴양소로서 인기를 누리는 인구 6천명의 도시. 그곳이 우리들의 눈을 환상 속으로 끌어당겼다. 연신 카메라의 셔터가 춤을 춘다. 세계 주요 정상들이 회의를 했다는 건물이 유럽의 대표적인 휴양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빙하호인 블레드호수, 그 호수의 한쪽에 우뚝 서있는 성으로 가기 위해 조그만 배에 오른다. 그것은 블레드에서 가장 큰 건물로 15세기에 건축된 성모 마리아 교회이다. 길이가 52m에 달하는 탑과 99개의 계단이 있다. 그 계단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오르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나는 일행 중 첫 번째로 아내를 안고, 계단을 올랐다. 가이드는 연신 셔터를 누르고.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성,‘알프스의 눈동자’라고 불리는 블레드성.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오늘따라 블레드성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개성 있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악기연주를 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나도 아내와 함께 흥을 돋우며, 사진도 찍으며 그들과 함께 했다.
다시 버스로 40분쯤 이동하여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간다. 류블냐나의 의미는‘사랑스럽다’는 뜻이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는 예보였으나, 기상예보가 빗나가 행복하다. 길가의 옥수수, 밀밭, 그리고 푸른 초원이 내 마음을 푸르게 만들고 있다. 석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고속도로 변의 집들, 안개는 구름이 되어 산을 넘고 있다.
류블냐나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전형적인 동유럽의 느낌을 주는 발칸의 핵심도시이다. 옛 유고연방시절 가장 먼저 자유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하여 공산주의에서 벗어났으며,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의 거대한 양버즘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나는 아내와 손을 잡고 기념사진을 남긴다. 트리플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이 나를 부른다. 저녁 햇살에 반사되는 물결이 눈부시다. 마치 오스트리아의 느낌을 주는 시내 거리, 그곳에서는 과학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전기, 기계, 지질, 로봇, 그리고 각종 실험을 유도하며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화산모형과 각종 암석을 가져다 놓은 지질코너를 방문하여 내가 관심을 보이자, 관계자가 열심히 설명을 한다.
류블냐나 외곽에 위치한 아담한 마을, Krka호텔에 여장을 푼다. 내일 베네치아에서 출발하는 항공기의 좌석을 인터넷으로 예약한다.
2017. 6. 4(일) 열 하루째 날, 류블랴나→포스토이나→트리에스터→베네치아
이번 발칸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일찍 일어난 나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호텔 뒤편 언덕에 성당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서 건너편 도시의 품격을 본다. 그리고 마을길을 따라 사진을 찍으며, 산책을 한다. 이렇게 잘 생긴 마을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잠시 후 아내가 호텔에서 나와 함께 거닐었다.
아침 7시 출발, 버스로 1시간 정도의 거리인 포스토이나로 간다. 세계에서 2번째로 길다는 포스토이나동굴, 피크카강의 물줄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동굴의 여왕이다. 총 20km 중에서 5.2km만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대문호 헨리 무어가‘가장 경이적인 자연 미술관’이라고 격찬했던 슬로베니아의 보물이다.
입구에서 기차를 타고 달린다. 안전모를 쓰지 않아 위협을 느꼈다. 가는 곳곳마다 수많은 광장에는 종유석, 석순, 석주가 가장 각기 다른 현상을 만들어놓고 관광객들에게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포스토이나동굴에는 어둠 속에서도 극한의 조건에 적응한 150종 이상의 동물들이 살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인간 물고기라고도 불리는 흰 빛깔에 퇴화한 눈을 가진 프로테우스이다. 동굴 밖의 상점에서는 프로테우스 모형을 인형, 모형, 조각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방문객들을 눈길을 끌고 있었다. 11시가 좀 넘었을 때, 이곳의 식당에서 미리 점심식사를 한다.
버스는 이제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로 향한다. 이탈리아의 땅끝, 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트리에스테는 슬로베니아의 국경지대이자 illy커피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세기까지는 오스트리아 땅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에 병합된 도시이다.
인구 20만의 작은 바닷가 도시,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에 이어 2번째로 잘 사는 도시란다.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 등 소수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어 동방정교회도 볼 수 있는 곳, 우니타광장에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곳 광장에서, 바닷가에서 크루즈를 바라보며 카메라를 향하여 포즈도 취하고, illy커피 에스프레소를 시켜 그 맛을 음미하기도 하였다. 커피와 함께 초콜릿을 주는 것이 특이하였다.
트리에스테에서 1시간 반 정도 고속도로룰 달려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간다. 그곳 말코폴로 공항에서 오후 6시 30분 카타르항공 QR126편 비행기에 오른다.
잠시 후 기내식 저녁식사가 나온다. 눈을 붙이다가 모니터를 보다가 여정을 생각하다보니, 비행기의 창을 통하여 도하의 화려한 불빛이 보인다. 한낮의 회색도시가 별이 초롱초롱한 하늘과 같은 도시로 변한 것이었다.
2017. 6. 5(월) 돌아오는 날, 도하→인천
카타르 시간 새벽 1시, 도하에서 QR858기로 바꿔 탄 우리 일행은 다시 밤이 되어 걸프만, 이란, 아프카니스탄, 히말라야, 티벳, 그리고 발해만 하늘을 뚫고 하늘을 난다.
꿈속을 항해하다보니, 어느 덧 인천공항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현재 시간은 오후 5시. 일행과 헤어진 아내와 나는 출발 전 인천공항에서 분실한 수신기를 찾기 위하여 유실물 센터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린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는 10만원을 변상해야 한다고 했다. 피곤한 몸, 괜한 시간만 소비한 채 씁쓸함을 삭이며, 7200번 버스에 오른다. 고국의 오후가 어둠을 불러드리고 있었다. 양주의 아파트에 도착하니, 출발 전 정리하던 화분들만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도 아내와 함께 한 계획하지 않은 뜻 깊은 즐거운 여행이었다. 옛 우리 부모님, 조상님들은 하시지 못한 여행을 하며, 죄송한 마음과 함께 참 좋은 시절에 살아간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