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진포구를 열다 / 김춘기
만삭의 바다가 바람을 품고 있다.
부리 말간 괭이갈매기 울음이 물이랑을 일구는 새벽. 순항미사일 돌고래 떼가 겨울산맥을 축조하기 위해 파도를 일일이 호명하며, 해안선쪽으로 항진한다. 공룡처럼 억센 허벅지를 연신 주무르는 바다, 근육이 붙는 바다는 너울의 일렁이는 어깨를 일렬로 세우며, 풍랑의 등뼈를 촘촘하게 꿰어 나아간다. 붉은 해가 수평선의 상처 덧난 언저리부터 입김을 불어넣으며, 물의 탑을 세워나간다.
파도의 지느러미가 떠도는 섬의 허리를 거칠게 훑자, 어머니 바다가 숨가쁘게 달려와 그의 신음을 품어안는다. 허공을 받친 내설악 능선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던 바다, 중위도의 해풍을 다 불러모아 물의 히말라야를 줄줄이 출산해 나간다. 부풀어오르는 만조의 물살을 힘껏 밀어내며, 해역을 확장해 나간다. 하늘을 붙들고 내닫는 해류의 검푸른 호흡소리, 비상하는 물새들의 짙푸른 날갯짓. 만조의 대양 그 위로 소나기눈이 교향곡처럼 내리고 있다.
바다 편 천지창조가 여기에서 펼쳐지네
육지장사, 한낮 / 김춘기
산사 천수경소리에 접시꽃이 붉게 핀다.
마당귀에서 햇살을 쪼던 참새들이 대웅전 계단에서 깨금발을 뛰고 있다. 장수말벌이 들락거리는 단청 아래, 선잠 깬 쇠물고기가 종을 치며 정오를 알린다. 아침부터 명부전 곁의 밤나무, 하얀 국수를 연신 뽑아낸다. 명지바람이 밤꽃 향을 날라 분홍 접시에 수북이 담는다.
목탁소리 한 접시, 여울물소리 한 접시, 풍경소리도 한 접시…
물오리나무가 절 마당에 다녀간 뒤, 여우비가 몰래 발자국을 남기고 간다. 흰 손수건 몇 장 꺼내든 하늘이 산마루에 내려앉는다. 신갈나무 겨드랑이에 터를 잡은 까막딱따구리 딱딱 목탁을 치는 사이, 밤꽃 접시꽃이 여기저기 또 피어난다.
하짓날 전생의 부부들이 상봉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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