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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스페인, 포르투갈에 가다.

by 광적 2018. 6. 8.

 

스페인, 포르투갈에 가다

 

2018. 5. 23() 1일차, 바르셀로나에 입성하다.

 

그제 제주에서 올라왔다. 두 번째 손주, 우리 집 대를 이을 귀염둥이 시온이를 만났다. 어제는 안산의 데코스포텔의 하자를 확인하러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오는 길, 벽제의 노스페이스 할인매장에서 티셔츠 몇 장과 아내의 바지를 샀다. 유명 브랜드 신상품 아내에게 제대로 된 것 하나, 사주지 못하는 남자인 것을 반성한다.

아침 6시 기상이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물감을 칠한 것처럼 하늘이 쾌청하다. 송추에 승용차를 세우고 인천공항행 7200번 리무진버스를 기다린다. 아내는 공항에 빨리 가야한다며 택시를 타자고 조른다. 이곳에서는 버스의 좌석이 없는 경우가 많아 지난번 타이완에 갈 때도 버스를 놓치고, 택시를 이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08:10분 다행히 버스가 왔다. 얼른 승차하여 공항으로 달린다. 친구들은 이미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온다. 북한산의 녹음이 싱그럽다, 차창 밖에서 봄 하늘이 출렁인다. 9시가 조금 넘어 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제1터미널 바로 옆이지만, 우회하느라 버스로 10분 이상 걸렸다.

환갑도 훨씬 넘긴 친구들 전영호, 류선하, 김건수, 이근수와 우아하게 다가오는 예쁜 사모님들을 만났다. 친구들의 늙어가는 모습이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박종도 가이드를 만나 여행안내서와 수신기가 든 비닐팩을 받는다. 비행기 좌석을 끊었다. 아내는 면세점에서 화장품을 구입한다. 교환권으로 컵라면도 받는다. 서점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책을 구입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 서부 일대

1230분 대한항공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바로 서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비행예정 거리 9561km, 고도 19,500피트. 창공을 가른다. 점심으로 기내식이 나온다. 나는 쇠고기 감자 스튜에 레드와인, 아내는 닭고기 샐러드에 화이트와인이다. 커피로 입가심을 한다.

창가 표를 끊고 유우라시아 대륙의 풍광을 눈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내 자리는 비행기 날개가 그것을 막고 있다. 모니터도 고장인지라 비행안내도 볼 수 없다. 승무원이 몇 번 손을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대신 얼굴이 조막만한 여자 승무원은 내게 신문(조선,중앙,한겨레,매일경제)과 잡지(월간조선,골프), 그리고 간식거리를 가져도 주며, 내 마음을 달래준다. 눈을 감고 비행하는 느낌이다.

비행기는 북경, 울란바토르를 거쳐 시베리아 평원을 남부를 따라 날고 또 난다. 어려서 꿈꾸었던 하늘의 구름 위를 난다. 지구의 자전속도 보다 빠른 비행기, 서쪽하늘로 비행하는지라 시간이 더욱 빠른 속도로 뒤로 가고 있다.

간식으로 삼각김밥과 피자가 나온다. 유럽으로 향하는 하늘 길, 구름의 모습은 마치 폭설 후 포클레인이 제설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설작업을 한 눈덩이를 밀며 비행기는 전진한다. 감았던 눈을 뜨고 아내의 모니터를 본다. 비행기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부르크를 지나 핀란드의 호수 위를 날고 있다. 이선희의 노래를 듣는다. 중국의 만다린 음악도 귓바퀴를 맴돈다. 다큐멘터리 호주의 그레이트베리어프를 보며 시간을 달랜다. 다시 비행기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독일의 드레스덴 하늘을 난다.

저녁식사 시간이다. 나는 돼지불고기를 아내는 닭고기를 시켰다. 베른, 로잔, 알프스산맥 위를 날고 난다. 차창에는 성에가 끼어있다. 이탈리아의 북부를 지나며 알프스의 만년설이 폭포수의 거품처럼 흘러내린다. 프랑스의 아비뇽, 마르세이유 그리고 지중해의 고혹적인 풍광이 우리를 맞이한다. 푸른 바다 위엔 기다란 섬들이 혹등고래처럼 오고간다.

한국시간으로 새벽 2시경 드디어 스페인 까딸루니아주의 바르셀로나가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스페인 시간으로는 52319시이다.

스페인의 정식 명칭은 스페인왕국(Kingdom of Spain)으로, 에스파니아(Espana)이. 국토의 면적은 505370, 인구는 4800여만 명. 마드리드(Madrid)를 수도로 하고 있다. 종족구성은 라틴계 스페인인, 이베리아인, 게르만인, 아랍인 등이다. 언어는 스페인어, 남미에서 브라질을 제외한 국가에서 사용하는 그 언어가 바로 스페인어이다. 전인구의 74이상이 가톨릭교를 믿는다.

기후는 여름이 덥고 겨울이 약간 추운 온대성. 농업이 주된 산업이며 올리브·보리·포도 등을 주로 재배한다. 석탄·철광석·아연 등 광물자원도 풍부하지만, 다른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 개발이 늦다. 결국은 관광산업이 스페인경제의 주요 수입원이다. 낮은 물가와 투우·플라멩코 및 이슬람교 유적 등에 끌려 세계 각국에서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전근대적인 대토지소유제가 지배적이며 빈부차가 큰 문제점이 있다.

우리를 인천에서부터 인솔한 박종도 가이드가 다시 등장한다. 스페인 인사 안녕하세요?’올라라고 한다. 우리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는 알렉스이다. 드디어 인구 170만과 함께 메시가 뛰는 바르셀로나FC 축구팀을 가진 도시, 황영조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몬주익 언덕이 있는 바르셀로나이다. 현지 가이드 박성기 님이 등장한다. 늘씬한 키에 머리를 볶은 모습이 제주의 미라클합창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단원 한 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호로 익숙했던 노란 리본이 보인다. 지난 해 까딸루니아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붙들려 간 주지사 등 수뇌부의 석방을 기원하는 것이란다. 찻길 중앙분리대에서는 제주에서 많이 본 유도화, 그리고 카나리아야자수,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주로 농수산물을 수출하는 스페인, 무역 물동량의 80%를 바르셀로나 항구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스페인엔 비록 자국 브랜드는 없지만, 세계 각국의 자동차회사들이 공장을 세워 9개 브랜드의 17개 공장이 돌아가는 자동차 생산대국이란다. 승무원 포함 일만 천여 명이 타는 대형 크루즈가 일주일에 세 번씩 들어와 여러 나라의 관광객을 풀어놓는다고 한다.

가이드가 스페인말을 소개한다. 물은 아구아’, 화장실은 아세오’, 감사합니다는 그라시아스매우 감사합니다는 무차 그라시아스.'

스페인에서 첫날밤을 지낼 호텔 Illuson에 짐을 푼다. 슬리퍼, 치약, 칫솔도 보이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눈을 안 붙여서 그런지 잠이 쏟아진다. 샤워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내가 핸드백을 살피고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전날 환전해 온 1000유로가 보이지 않는단다. 나는 아내에게 집에 놓고 왔을 거라며, 그래도 잠자리에 들어야 여행일정 소화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리고 순간 나는 비몽사몽에 빠져들었다. 걱정이 태산 같은 아내는 밤새 불안의 늪을 헤매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국제전화를 걸어 의정부의 내 친구 원대식 교장에게 우리 집에서 돈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함께 걱정을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가슴에 차올랐다. 또한 바쁜 와중에도 우리 아파트까지 달려와 걱정의 소재를 확인해준 친구 원교장에게 고맙다는 카카오톡을 보냈다.

 

2017.05.24() 2일차 건축가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인구 170만의 바르셀로나는 까딸루니아의 주도로서 스페인의 주요항구이다. 상업 중심지로 문화의 저력, 호젓한 경치로도 유명하다. 또한 평야지대는 기름진 땅이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사람들에게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도시이다. 이곳은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 프랑스로 이어지는 철도망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으며, 인근에는 프라트 국제공항까지 함께 있다. 1992년 제25회 올림픽 대회가 개최되어 국제적으로도 더욱 알려진 곳이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를 배출한 도시이다. 그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바르셀로나를 온전히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우디의 건축물이 눈을 사로잡는 도시이기도 하다.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그의 혼이 들어간 건축물들은 100년이 넘는 창작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초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가우디 건축물

먼저 까사밀라로 간다. ‘밀라의 집이라는 뜻의 까사밀라는 그곳에서 5분 거리에 소재한 카사 바트요를 보고 반한 부동산 업자가 가우디에게 요청하여 지은 집이다. 처음엔 연립주택 형식으로 지어졌다. 볼품없는 외관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아 밀라만 묵었다고 한다. 이후 카사밀라와 카사 바트요의 소유권은 인근 지역의 기업에게 넘어갔으며, 현재는 입장료를 받으면서 수익사업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건물의 외부의 물결모양과 해초의 모습을 형상화한 테라스가 눈길을 끈다. 옥상에는 영화 스타워즈에 영감을 준 굴뚝이 자리하고 있다. ‘까사밀라의 부드러운 곡선을 배경으로 하며 아내와 함께 셔터를 서로 누른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장에서 아내와 포즈

다음은 유태인의 산을 의미하는 몬주익 언덕이 있는 바르셀로나 올림픽경기장이다. 1992년 올림픽 때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에 알린 곳. 그곳엔 경기도와 바르셀로나의 자매결연 기념으로 황영조 선수가 돌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내와 황영조 선수의 뛰는 모습을 스마트폰 속에 흔적으로 한 장씩 남겼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장은 현재 미식축구 유럽리그팀인 바르셀로나 드레곤즈와 바르셀로나 축구팀 Reial Club Deportiu Espanyol의 구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밖에 다양한 체육행사와 콘서트 등이 열리고 있단다.

황영조 선수와 함께 뛰기 포즈

점심은 해물 빠에야와 홍합요리. 빠에야는 스페인 전통 쌀 요리. 프라이팬에 고기 또는 해산물과 채소를 볶은 후 쌀을 넣어 익히는 요리이다. 이때 꽃에서 나오는 샤프란이라는 향신료가 들어가 노란색을 띈다. 특히 홍합, 새우가 들어가면 해물 빠에야라고 한다. 손풍금 연주자가 식사의 풍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5유로의 팁을 건네자 웃음이 활짝 핀다. 지중해를 곁에 두고 입맛의 품격을 높였다.

식사 후, 잠시 거리에서 사람들의 눈동자를 끌어들이는 장면, 중년의 서양남자가 완전 알몸으로 활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모님들은 얼굴은 고정시켰지만, 두 눈동자들이 그 장면을 따라 움직인다. 이 나이에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콜럼버스 동상

다음은 스페인에서 가장 멋스럽다는 람블라스 거리를 누빈다. 북쪽의 까딸루니아광장에서 항구 근처 콜럼버스 동상이 우뚝 서 있다. 파우광장까지 약 1km 구간이다. 2~3십 미터쯤 장신의 양버즘나무 비슷한 교목들이 산소를 내뿜고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테이블에 앉아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곳이었으나, 19세기 경 복개하여 오늘의 명물이 되었단다. 영국의 소설가 섬머 셋은 이 거리를 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는 거리라고 했단다. 리세우역 부근의 산책로 바닥에는 스페인의 화가 후안 미로가 디자인한 모자이크가 깔려있어 품격을 높여주고 있었다. 거리 화가들의 솜씨도 보고, 악사들의 리듬에도 빠져보았다. 콜럼버스의 동상 앞에서 폼을 잡으며 대서양 파도를 헤치며 신대륙을 발견한 그의 모험정신에 빠져보기도 한다.

발길은 구엘공원으로 향한다. 파밀리아 성당과 함께 가우디의 최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곳,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이 바르셀로나의 부유층을 위하여 계획했던 전원주택 단지였다. 1900년부터 약 14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계획대로라면 60채 이상 분양되어야 했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던 중 구엘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3채만 분양되고, 미완성 단지로 남게 되었다. 공원 입구에는 관리실과 경비들의 숙소로 사용 예정이었던 2채의 집이 있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그 앞엔 알록달록 타일을 붙여 만든 도마뱀 분수와 그리스 신전을 모티브로 지어진 시장이 있다. 시장의 지붕에는 구엘공원의 꽃이라 불리는 타일벤치가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파도 위에 늘씬한 용이 누워있는 모습, 구불구불 용의 움직임이 우리들을 동화 속으로 초대하고 있다. 고개를 드니, 지중해의 석양이 눈부시게 달려오고 있었다.

곡선의 미학을 추구하는 가우디의 철학은 이 공원에도 적용되었다. 자연을 설계에 담기 위해 땅을 고르지 않고, 길은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다. 마차가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이 부부처럼 정겹게 이어져 있다. 구엘공원엔 가우디가 아버지와 함께 20년간 살았던 집이 있다. 지금은 가우디 박물관이 되어 그가 생전 사용했던 유품들과 독특한 가구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엘공원

다음은 가우디 최후의 걸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 가족 성당)’. 이 건물은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큰 감명을 받고 돌아온 바르셀로나의 한 출판업자가 대성당을 짓자는 운동을 벌여 시민모금이 시작되었다. 1882년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비야르(F. de P. Villar)가 좋은 뜻에 동참하여 무보수로 성당 건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조건 싸게 지으려고 하는 교구의 강요에 질려 포기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였던 가우디를 대신 추천하였다. 젊은 건축가에게 맡기면 공사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보수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가우디가 공사를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1. 가우디는 비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을 무시하였다. 다시 설계하면서 죽는 날까지 43년간 이 공사에 남은 인생을 바쳤다. 그는 공사 현장에서 직접 인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설계도를 그려 나갔다. 마지막 10년 동안은 아예 작업실을 현장으로 옮겨 인부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성당 건축에 몰입했다. 그러나 대성당은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1926년 트램이 가우디를 덮치는 불의의 사고가 그를 하늘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자신이 지은 이 성당의 지하 납골묘로 들어갔다. 원래 이곳엔 성인이나 왕족의 유해만 안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에서는 가우디의 신앙심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영원히 성당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후, 스페인 내전 과정에서 설계 도면이 불에 타 사라져 공사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후배 건축가들의 기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성당의 건축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가우디 별세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성당에는 총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가 있다. 이들은 예수탄생’, ‘예수수난’, ‘예수영광을 주제로 설계되었다. 이 중 예수탄생의 파사드만 가우디가 생전에 직접 완성한 것이다. ‘예수수난파사드는 1976년에 완공되었고, 마지막 남은 예수영광파사드는 아직 착공도 못한 상태이다. 3개의 파사드 위에는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이 세워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정중앙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거대한 탑이 세워질 계획이란다. 현재까지는 8개의 종탑만 완공되었다. 내부는 마치 숲속처럼 나무와 꽃들을 형상화하여 기존의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의 독특한 색상은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성당 앞에서 서양 미녀들과의 기념사진도 한 컷 카메라로 빨아들였다.

음식점 리틀 코리아에서 한식이다. 만찬이라고 해야 할까? 이어서 선택관광인 바르셀로나 선셋 타파스 투어이다. 해질녘 바르셀로나를 황혼으로 빠져들게 하는 풍광에 빠져보는 것.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카페에서 맥주와 샹그리아주, 오징어 볶음, 멸치 튀김 등을 먹고 마시며, 타파스와 함께 스페인을 느껴보았다.

 

2018.05.25() 3일차 와이너리, 몬세라트에 가다.

 

새벽 산책이다. 바르셀로나 시내의 공기가 백다다기 오이 맛이다. 바다를 본다고 한참을 걸었으나, 바다는 보지 못했다. 반대쪽으로 방향을 향한 건 아닐까? 몬주익 언덕을 옆구리에 끼고 와이너리를 보기 위해 또레스(Tores)로 버스가 달린다. 포도 생산량 세계 1위인 스페인은 세계 3대 와인 생산국. 와이너리에 닿으니 포도밭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포도밭 주위에 생뚱맞게 장미꽃이 피어있다. 진딧물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란다. 장미가 진딧물에 민감한 것을 이용하는 것이리라. 초현대식 와이너리 공장이다. 지하창고에서 공장의 홍보요원을 통하여 와인의 역사, 제조과정, 숙성시키는 모습 등을 보고, 들었다. 그리고 와인을 색깔 별로 마셔보았다. ‘까바라고 불리는 샴페인의 일종인 스파클링 와인도 보인다. 동료들 중 일부는 와인을 직접 구매한다. 꼬마 기차가 우리 일행을 구불구불한 코스를 따라 옮겨주었다.

다음은 기암절벽에 진을 친 세계 4대 성지의 한 곳인 몬세라트(‘톱니 모양의 산의미). 케이블카를 타고 산중턱까지 오른다. 이곳은 880년에 성모 마리아상이 우연히 발견된 이래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서 사람들이 기도를 들어줘 수많은 기적이 이루어졌단다. 우리나라의 마이산에서 볼 수 있는 사암과 역암이 붉은색을 띈 지층들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도에 내게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질시대 바다 밑에서 만들어진 지층이 융기하여 예술작품 같은 산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산봉우리들이 침식작용으로 들쭉날쭉, 아기자기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협곡 가운데쯤에 수도원이 있다. 유적들은 선사시대에 사람이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몬세라트 수도원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대학친구들과

11세기에서 15세기 초까지 번창하던 정규 수도분원은 1410년 대수도원으로 독립하여 지금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절벽 위에 세워진 현재의 바실리카 수도원은 각각 1560년과 1755년에 세운 것으로 1812년 반도전쟁 중 프랑스군이 파괴한 후 대대적으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가우디가 어릴 적 마음의 위안을 얻어 건축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자연으로도 유명하다. 관광객들 중 일부는 산악열차를 타고 정상으로 향한다. 나는 아내와 십자가가 보이는 장소까지 유유자적, 대학시절을 생각하며 단둘이 데이트를 즐겼다.

바르셀로나와 산 조르디(Sant Jordi, 영어로는 세인트 조지)의 전설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 공포스러운 용 한마리가 배고플 때마다 어떤 마을에 쳐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 용이 무서워 키우던 가축을 용의 동굴에 제물로 바쳤단다. 그럼에도 가축이 흔적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모두 넣어 제비뽑기를 했다. 그리고 뽑힌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어느 날, 제비뽑기를 하는 데 공주의 이름이 나왔다. 왕은 너무 슬펐지만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공주가 떠나는 날, 마을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주는 착하고, 마음 좋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드디어 공주가 동굴 앞에서 용을 기다렸다. 그리고 용이 다가오는 순간, 말을 탄 기사가 나타나 용과 싸웠다고 한다. 마침내 기사의 창이 달려오는 용을 찔렀고, 용은 피를 흘리며 죽었단다. 그런데 용의 피가 땅에 떨어지면서 장미가 빨갛게 피어났다. 그리고 기사는 그 꽃을 꺾어 공주에게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까딸루니아 사람들은 이 날을 기념하며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주기 시작했단다. 그 날은 또한, 스페인 사람들의 자랑인 '세르반테스'와 영국의 세익스피어가 운명한 날이기도 하다. 까딸루니아에서는 423일을 산 조르디의 날이라 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장미를 여자는 남자에게 책을 주고받으며, 발렌타인데이, 로즈데이처럼 사랑을 주고받는 날로 보낸다고 한다.

말라카로 가기 위하여 공항으로 이동 중이다. 가이드가 스페인의 의료비, 의과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FC바로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경기는 한일전만큼이나 격렬하단다. 까딸루니아가 스페인의 남부지역보다 3배 정도 잘 산단다. 그래서 까딸루니아가 독립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길가와 산의 소나무들이 건조기후에 적응하느라 그런지 몽실몽실하다. 버스를 보고 노란 꽃들이 손을 흔든다. 개울은 온통 흙탕물이다. 황금빛 밀밭이 이어진다. 멀리 피레네산맥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라고 알려준다.

공항에 도착하여 발권을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가이드가 하는 말, 말라가행 비행기가 고장이란다. 저가 항공기라 그럴 수 있는 일인가? 마음 급한 가이드 박종도 님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다른 비행기를 알아본다. 고속철을 알아본다. 뭔가 일이 안 풀리는 것 같다. 오늘밤 임시로 머물 호텔도 알아보았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것이었다. 여행일정에 차질이 생기려나? 우왕좌왕, 좌왕우왕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가이드가 온다. 비행기를 이용하여 19명은 그라나다, 나머지는 가이드와 함께 세비야를 거쳐서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단다. 2030분 그라나다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러나 연착되어 21시에 출발한단다. 서머타임인지라 아직 밖이 환하다. 착륙하는 비행기의 불빛들이 별처럼 보인다. 우리 비행기가 이륙한다. 상현달을 머리에 이고 있는 지중해가 눈에 들어온다. 피로가 밀려온다. 구름 위에서는 다시 태양이 눈부시게 자리하고 있었다.

22:30분쯤 비행기는 우리를 그라나다공항에 내려준다. 섹시한 여자 가이드 김은지 님이 버스와 함께 우리를 맞이한다. 버스에 탑승 후 3시간쯤 지나 말라가공항을 거쳐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 우리는 미하스(MIJAS)호텔에 여장을 풀 수 있었다. 1시간 반이면 도착할 곳을 어렵게, 어렵게실은 이렇게라도 온 것이 다행스럽다. 저녁도 못 먹은 상태. 배가 고프고 잠도 고프다.

 

2018,05.26() 4일차 유럽 최대의 휴양지 미하스.

 

피곤을 툭툭 털며, 6시 반쯤 일어났다. 호텔 밖을 내다본다. 풍경이 애인의 맑은 눈과 옷 매무새처럼 연애하고 싶게 만들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백설탕빛 집들이 산으로 오르는 것 같다. 이발을 한 것처럼 단정한 잔디에 처음 보는 새가 디뚱디뚱 내 눈빛을 끌어당긴다. 테니스장이 보인다. 야자나무 사이로 지중해가 보인다. 종려나무들이 호텔 앞에 줄을 맞춰 서서 아침을 맞이한다. 돌담 사이의 제라늄이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다. 새소리가 현악기의 줄을 튕기는 것처럼 들린다.

원래의 예정 일정은 지중해의 휴양도시 프리힐리아나와 네르하였다. 어제의 항공기 고장으로 그라나다를 거쳐서 새벽에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대체된 관광지이다. 가이드가 유럽 최대의 휴양도시라고 과장해서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미하스는 바로 우리가 묵은 미하스호텔이 있는 마을이었다.

잠시 골목길을 따라 산마을로 오르니,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 하얀 마을 미하스는 코스타 델 솔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안내소 근처에 당나귀 택시들이 몰려있는 비르헨 데 라 페냐(Virgen de la Peña)’ 광장이 있다.

미하스에서 대학친구 사모님들

당나귀를 타고 마을 바깥쪽을 10~15분 정도 돌며 마을의 정취에 빠져들 수 있다. 당나귀는 10유로, 당나귀 마차는 15유로, 당나귀를 타고 촬영만 한다면 2유로란다. 나는 우리 일행과 함께 부부마다 25유로씩 내고, 당나귀가 아닌 말마차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정감이 가는 인상 깊은 관광지였다.

관광 안내소를 뒤로 하고 좌측 전망대 방향으로 가면, 미하스 수호 성녀인 폐냐 성녀가 모셔져 있는 천연 동굴 성당(Ermita de la Virgen de la Peña)이 있다. 1900년에 지어진 타원형의 미하스 투우장도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투우장의 관중석은 하얀 마을을 제대로 조망하기에 참 좋은 자리였다. 또 한 곳은 투우장 근처의 옛 성터 자리에 있는 전망대 공원으로, 푸엔히롤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망대공원에서 아내와 엄지척

다시 어제 심야 비행기에서 내렸던 그라나다로 이동한다. 젊은 시절엔 바람을 피우고, 지금은 쿠바에서 가정을 이뤄 산다는 홀리오 이글레아시스의 헤이가 흘러나온다. ‘키스해줘요를 의미하는 베사메무초가 내 양쪽 귀의 달팽이관을 자극한다. 여행은 그 자체가 즐거운 것, 나와 아내의 입에서는 제주에서 내가 단장으로 활동했던 미라클합창단에서 했던 노래들 아름다운 나라, 새몽금포타령, 꿈꾸는 섬등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바다를 보고 있는 마을들. 산을 오르는 별장들. 지중해식기후에 적응해 살고 있는 들꽃 무리의 귀여운 표정들. 연록색의 화려한 햇살. 그리고 길가에서 출렁이는 유도화의 눈웃음들이 여행을 감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버스는 달리고, 또 달린다. 길 양쪽 고래의 등 같은 산등성이마다 줄을 맞춰 도열해 있는 올리브나무, 길게 누운 산맥, 낮은 산 꼭대기 풍력발전기들의 여유로운 동작, 축 늘어진 태양과 하늘로 오르는 조가비구름을 보며 나는 이 순간 스페인 사람이 되어본다. 신들의 선물이라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세계 80%를 차지하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유럽의 과일과 채소를 스페인이 거의 다 공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하얀 눈으로 덮인 시에라네바다산맥이 눈에 들어온다. 아람브라 언덕에는 집시들이 많이 산단다. 집은 허름하지만, 그들에게도 자동차는 가족처럼 끼고 있단다. 그들도 경제활동을 열심히 하여 기본적인 부를 축적한 것이리라. 어떤 집시는 포르쉐 같은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다니 말이다.

점심은 현지 식으로 돼지 뒷다리를 말리고 발효시켜서 만든 하몽을 먹어보았다. 가우디가 그렇게도 좋아했다는 나무, 사이프러스가 계속 다가오며 손짓을 한다. 잘 익은 열매를 보면 안쪽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그라나다는 석류를 의미한단다. 서양 아가씨들과 사진을 찍고 이메일을 받는다. 사진을 보내주기 위해서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학생들과

버스에서 내려 식당으로 이동하던 중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 왔다는 여학생들을 만났다. 사진을 찍고 인솔교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합창단으로서 연주를 하기 위해 스페인에 온 것이란다. 저녁은 PACO MARTIN에서 입맛을 달랜다. 그리고 그라나다 야경 속으로 들어간다. 크리스토빌 전망대에서 아브라함 언덕을 건너다본다. 그리고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산맥으로 눈길을 보내본다. 다음은 알바이신지구 골목길 산책이다.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왕궁과 그라나다 야경을 다시 본다. 인파의 밀림이다. 싸움을 하는 젊은이들이 우리들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모로코 사람들이 주로 생계를 유지해 가는 야시장에 들른다. 아프리카 상품들이 가득하다.

CERVEZAS ALHAMBBA에서 입맛에 따라 맥주, 샹그리아, 여름의 와인 등을 한 잔씩 마신다. 나는 맥주, 아내는 여름의 와인을 타파스(한치요리)와 함께TV에서는 유럽 챔피언스리그 축구경기, 레알 마드리드와 리버풀의 최종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과는 2:0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이다. 거리에는 환호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Abba Hotel에 들어와 또 하루의 밤 하늘나라로 직행했다.

 

2018.05.27() 5일차

 

08시 론다로 간다. ‘부에노스 디아스리사 안토니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선창에 맞춰 운전기사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날씨는 잔뜩 흐려있다여전히 올리브나무의 천국이다. 산꼭대기까지도 모두 올리브나무였다. 고속도로의 다리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루나무가 줄을 맞춰 서서 손을 흔든다. 황금 밀밭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감자꽃밭, 마늘밭이 제주의 풍광처럼 눈에 들어온다. 올리브나무의 키 작은 묘목들이 수유하는 것처럼 스프링클러의 물줄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푸른 초원 위엔 목초를 베어 쌓아올린 하얀 원통 모양의 비닐들이 반짝인다. 끝없는 평원, 나지막한 구릉의 파도, 농작물을 거둬내고 새로 일군 붉은 평원이 차창 밖에서 창문 쪽으로 달려온다. 건조한 기후라지만 저수지 같기도 한 연못들이 싱그럽게 눈을 자극한다. 감미로운 음악이 귀청을 자극한다.

풍력발전기들 폭력꾼처럼 산등성이를 짓밟고 있다. 노란색 들꽃 군락, 붉은 양귀비꽃들이 수채화처럼 펼쳐졌다가 사라진다. 오토바이 족속들이 똥폼을 잡고 있다. 하얀빛깔, 보랏빛, 노란빛깔의 꽃들이 여리디여리게 하늘거린다. 론다가 가까워지니, 산악이 이어진다. 구름이 산등성이를 감싸고 있다. 공기가 습해져 나무와 풀들이 싱싱해지는 것 같다.

아름다운 절벽의 도시 론다에 발자국을 찍는다. 말라가에서 북서쪽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말라가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세계적인 작가 헤밍웨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 말했을 정도로 스페인에서도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헤밍웨이는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절벽 위의 도시 론다마을

안달루시아의 꽃이라는 론다 마을은 과달레빈강(Río Guadalevín) 타호협곡(El Tajo Canyon) 780m 고지대에 세워진 절벽 위의 도시이다. 론다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1785년 개장한 스페인의 전통 스포츠가 펼쳐지는 투우장. 말을 타고 창으로 찌르던 전통 투우 방식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빨간 천을 흔들어 소를 흥분시키고, 투우사가 소의 급소에 창을 꽂아 절명시키면 끝나는 방식의 투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투우장 정문

예술가들이 낭만을 구가했다던 협곡의 도시 론다가 깊은 골짜기와 함께 우리들의 눈길을 잡아당긴다. 누에보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에 있는 첫 번째 골목을 따라가면 캄피요 광장(Plaza del Campillo)이다. 광장 오른쪽 끝의 전망대까지 가면 누에보다리와 협곡 위에 자리잡은 론다의 아찔함에 빠져들 수 있다

론다의 상징 누에보 다리

특히 론다의 상징인 누에보다리는 120m 높이의 타호협곡 위에 세워져 이곳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동맥 역할을 한다. 과거엔 깊디깊은 협곡 아래에 과달레빈강이 흘러 양 도시간의 교류가 힘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설한 3개의 다리 중 하나가 바로 누에보다리이다. 당시 아라곤 지역의 천재 건축가였던 마르틴 데 알데후엘라(Martín de Aldehuela)40여 년 동안 공을 들여 1793년 완성했다고 한다. 3개의 다리 중 가장 늦게 완공되었기에 이 다리는 누에보(새로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이곳에서 포로들을 떨어뜨려 처형하였단다. 다리 중간 아치에 있는 공간은 감옥으로 사용했었다는 슬픈 역사를 지닌 누에보다리. 오늘날엔 사진 촬영지로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곳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을 축제가 열리고 있다. 나도 그 속에 빠져든다. 나는 스페인 전통복장으로 춤을 추던 사람들과 짧게 말을 섞었다. 그들은 나에게 북한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요즘의 남북상황을 알려주며, 한반도에서 진정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들의 뒤를 따른다, 춤을 추면서 말이다. 다리를 다 지났을 때, 가이드가 나를 찾고 있었다. 우리 일행의 시선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스페인 전통복장의 현지인을 따라 걸으며 춤을 추다

점심식사는 스페인의 전통음식, 핀초이다. 핀초는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먹는 그들의 술안주이거나 간단한 요깃거리. 핀초에는 대구 등의 생선류와 스페인의 대표음식 하몽, 크로켓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짠맛만 느껴지는 고통의 음식이었음을 고백한다.

버스는 다시 시동을 걸고 2시간 이상의 거리에 있는 스페인의 정수를 알려주는 도시 세비야로 향한다. 약간 흐린 날씨가 분위기를 잡아준다. 지평선을 배경으로 이제 개화를 시작한 해바라기 평원이 이어진다. 그리고 결실을 앞둔 밀밭이 이어진다. 선인장들이 보이고, 염소들이 유유자적 먹이활동을 하고 있다. 세비야에 들어서니, 보라색을 띄는 자카르타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는 스페인의 4대 도시이며 예술, 문화, 금융이 발달한 도시이다. 특히 세계적인 작곡가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비야의 스페인광장이다. 마리아 루이사 공주가 1893년 산 텔모 궁전 정원의 반을 시에 기증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딴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만들어졌다. 마리아 루이사공원 안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곳이 바로 이곳 스페인광장이다. 1929년 스페인-라틴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곳이다. 당시 본부로 지어진 건물은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외관은 서구식이지만, 이슬람식 타일장식을 갖추고 있다. 스페인광장에서 우리 일행은 말을 탄다. 지난번 말라가행 비행기 결항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에 대한 여행사 측의 보상이란다. 광장 곁의 숲속을 지나 자카르타나무의 보랏빛 향기를 맡으며 친구 부부들과 사진을 찍으며, 스페인에서의 낭만에 젖어들었다.

세비야 대성당

다음은 세비야대성당. 바티칸시티의 성 베드로 대성당(르네상스 양식),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네오르네상스 양식)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르네상스, 바로크, 네오 고딕 등 여러 양식이 반영되었다. 내부에 있는 무덤 가운데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관도 안치되어 있다. 네명의 왕들이 관을 들고있는데 그중 앞 두명은 웃고 있고 뒤 두명은 찡그리고 있다. 앞 두명은 찬성파이고, 뒤 두명은 반대파이다. 입고 있는 옷의 문장을 통해 구별할 수 있는데 앞에는 각각 카스티야와 레온을, 뒤에는 아라곤과 나바라를 상징한다. 관이 땅에 묻혀있지 않은 것은 콜럼버스가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을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황금의 탑이다. 이 건물은 13세기 이슬람시대에 건축된 12각형 형태의 탑으로 강 상류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원래는 강 맞은 편에 똑같이 생긴 은의 탑이 있었지만, 지금은 황금의 탑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 탑은 이슬람 시대에 지어진 군사용 건물로는 마지막으로 남겨진 건물로서의 의미를 품고 있다. 탑 위의 작은 부속 탑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새롭게 증축된 것이다. 탑은 소성당, 화약 저장고, 감옥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알카사르궁전에서 아내와 포즈

그 다음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유명한 세비야의 왕궁 알카사르. 세비야대성당과 가장 가까이에 인접해 있는 사자의 문(Puerta del León)’을 통과하여 작은 정원을 지나면 페드로1세 궁전이 보이는 파티오 델 라 몬테리아(Patio del la Monteria)’가 나온다. 이곳을 통과하면 알카사르의 압권인 페드로1세 궁전 안에 자리한 아가씨의 파티오(Patio de las Doncellas)’이다. 페드로1세가 이슬람장인들을 불러 모아 그라나다 알암브라 성의 나스르 궁전을 모델로 만든 곳이란다. 파티오를 둘러싸고 있는 페드로1세 궁전 내부에 있는 대사의 방은 우주를 상징하는 천장으로서 그것의 화려함에 관람객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식당 Moon

저녁식사는 Korean Moon 식당에서의 한식이었다. 타국에서 맛보는 한식은 우리 모두의 입맛을 자극할 수밖에. 한국 사장님은 식당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 온 건물을 짓고 있었다. 스페인에 와서 하는 식당사업이 잘 되는 것을 보니, 축하할 일이었다.

식사 후 플라멩고쇼 관람이다. 투우와 함께 스페인을 상징하는 이 춤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발달한 집시들의 음악과 무용을 말하는 것이다. 15세기 집시들이 유입되면서 그들의 사랑과 열정, 슬픔이 어우러진 춤과 음악이 플라멩고이다. 무용수의 노래와 춤, 그리고 기타리스트의 반주가 이어진다. 기타연주 없이 손가락에 낀 피토스라는 딱딱이를 이용한 리듬, 그리고 무용수들의 발자국소리가 드럼의 역할을 하며 무대를 흔든다. 거기에 여자 무용수들의 매혹적인 몸짓이 공연장의 열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맥주를 한잔씩 마시며 나는 아내와 함께 뜨끈뜨끈한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 들어와서는 바로 꿈나라 속을 헤매야만 했다.

 

2018.05.28() 6일차 대서양을 맞이하다.

 

아침식사가 끝나자마자 8시에 이베리아반도의 끝 포루투갈로 향한다. 6시간의 긴 버스길이다. 이슬비가 내 뺨을 스치는 것처럼 슬쩍슬쩍 창에 부딪친다. 오늘도 눈에 띄는 보라빛의 자카르타나무가 미녀들처럼 길가에 도열해 있다. 그리고 흰색, 붉은색, 분홍색의 유도화들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준다.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밀밭

스피커에서는 바리톤 김동규가 부르는 세비야의 이발사가 흘러나온다. 최성수의 동행도 우리와 함께 동행이다. 구름에 상체가 가려진 산 능선이 나온다. 굴뚝에 그려진 예쁜 여인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황금 밀밭의 뒤를 따라 개화하기 시작하는 해바라기 밭이 달려온다. 아내와 나는 꿈꾸는 섬을 부른다. 아내는 넬라판타지아로 답장을 보낸다. 산악이 이어진다. 녹음이 짙다. 젊은이들이 힘든 세상이 요즘이다. 우리 가이드는 비정규직 직원인 것 같다. 지금은 44, 그의 나이 60살이 되어야 하나뿐인 아들이 대학엘 들어간단다.

길가엔 형광색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도로를 보수 중이다. 태양이 환하게 얼굴을 내민다. 산 능선 위의 분홍빛 기와를 머리에 인 집들이 오종종 모여살고 있다. 버스의 곁으로 도토리나무들이 지나간다. 그 아래엔 방목하는 흑돼지들이 모여 있다. 우두머리 돼지의 귀에 GPS를 달아 집집마다의 돼지들이 알아서 집에 들어온단다. 돼지 다리를 통째로 발효시켜 만든 음식이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먹는 하몽이다. 와인 병마개를 만드는 코르크, 그것의 원료가 되는 코르크참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무의 아래쪽에는 코르크 채취 때문에 생긴 둥근 상처들이 우리나라 참나무들이 도토리 때문에 돌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게 보인다. 언덕 위엔 소, 양떼가 초원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나무 몇 그루 없이 푸른 초원으로 덮인 구릉이 목가적이다. 벌통도 보인다. 별을 밟으며 걷는 것처럼 음악이 흐른다. 넓은 밭을 태양전지가 숨쉬기 힘들도록 덮고 있다. ‘21세기는 여성, 노인의 시대다라는 황창연 신부의 강의가 흘러나온다. 흑돼지를 실은 트럭이 스쳐지나간다, 도살장으로 갈텐데.

11시 반경 국경을 통과하여 포루투갈에 진입한다. 보리수나무 아래에 노란 들꽃들이 양탄자를 깔고 있다. 그 곁에 양떼가 물결을 이룬다. 들꽃 무리가 갓 태어난 병아리들처럼 계속 버스를 따라온다. 들꽃의 축제 현장이다. 검은 양떼, 흰 양떼가 19로 바둑판에서 중반을 지나 끝내기를 하는 것 같다.

유럽 서쪽 땅끝마을 '까보 다 로까'에서 아내와

유럽의 서쪽 땅끝마을, ‘까보 다 로까이다. 로까 곶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을 보고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카모잉스는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 시구는 까보 다 로까를 상징하는 십자가 아래에 새겨져 있다. 또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곳을 위대한 에덴이라고 표현했단다. 대서양의 푸르디푸른 물결이 내 뜨거운 가슴을 뻥 뚫러준다. 제주에서도 볼 수 있는 송엽국, 가자니아와 같은 들꽃이 고향의 향수처럼 노래를 부르며, 다가온다. ! 대서양,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서양은 나를 향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내와 함께 대서양을 바라보며, 선문답을 하고 있었다. 서양 할머니가 넘어지는 것을 일으켰다. 한국인 아가씨의 부탁으로 사진을 멋지게 찍어주었다. 아내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찍히는 사진마다 눈을 감고 있었다.

까보 다 로까에서 본 대서양의 푸른 물결

수도 리스본에 들어서면서 가이드가 간식을 사준다. 에그타르트(Egg tart)라는 음식. 이것은 밀가루 반죽을 접시에 얇게 펴고 그 위에 달걀, 설탕, 생크림, 바닐라 향을 섞어 만든 크림을 얹어 구운 파이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이란다. 홍콩이나 마카오의 에그타르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절 전파된 것이란다. 그리고 닭고기가 들어온다. 인사성 밝은 종업원들의 서비스가 굿이다. 그들과 함께 강남스타일 춤을 추며, 사진도 찍는다. 포르투갈의 상징이 바로 닭이다. 포르투갈에는 상점마다 닭을 모델로 한 선물들이 가득하다. 스페인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가 그들에게는 세계적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음식점 종업원과 강남스타일 한 판

포르투갈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수도인 리스본은 포르투갈어로 리스보아라고 불린다. 떼주강가의 활기찬 도시 리스본은 3세기 로마, 8세기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12세기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코임브라에 있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왔다. 지중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최고의 위치 조건으로 15세기에 들어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대항해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1755년 대지진으로 화재와 쓰나미가 덮쳐 도시 2/3가 파괴되면서 리스본의 전성기는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엔 다시 성장하여 포르투갈의 수도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로시우광장이다. 리스본 시가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은 이 광장은 리베르다데 대로와 바이샤지구에 닿아 있다. 원래 이름은 동 페드로 광장이다. 중앙에는 독립 브라질의 첫 번째 왕인 동 페드로 4세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노선의 버스와 트램이 많아 교통의 접근성이 좋으며, 수많은 관광객들로 늘 붐비고 있다.

벨렝탑에서 포즈 취하다

다음은 벨렘탑이다. 1515~1519년 사이에 건설된 이 탑은 바스코다가마의 세계 일주의 위업과 현대 항로의 개척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는 건축물이다. 마누엘 양식의 3층 건축물로 하얀 나비가 물 뒤쪽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3층에는 아름다운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벨렘의 마리아상이 있다. 1층은 19세기 초까지 정치범의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벨렘탑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그리고 제로니모스 수도원. 1498년 바스코다가마(Vasco da Gama)가 인도항을 개척함으로써 비단과 향신료가 포르투갈에 들어오게 되자, 마누엘 1세가 그를 위해 짓기 시작한 수도원이다. 1502년 착공하여 1672년에 완공되었다. 대지진 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아 더욱 유명세를 탄다. 특히 야자수처럼 생긴 기둥과 천장은 마누엘 양식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수도원 안 성당에는 인도를 개척했던 바스코다가마의 석묘와 시인 루이스 바스 데 카몽스의 석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바스코다가마의 석묘에는 밧줄을 쥔 손을 조각해 놓은 기둥이 있다. 이것을 만지면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다고 하여 이 조각품은 사람들의 손길로 반짝이고 있다. 이곳은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함께 198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호텔로 향하는 길,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보인다. 나무의 마찰이나 물방울의 렌즈현상으로 산불을 일으킨단다. 작년에도 대화재가 발생했단다. 실제로 길가에서 나무들이 검게 탄 모습이 여기저기 참혹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버스의 바퀴에 펑크가 났다. 응급조치 후 잠깐 운행했으나, 결국 시골마을 길가에서 버스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던 가이드는 우리를 마을의 카페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대체 버스를 불렀다. 우리 일행은 차를 마시기도 하고, 길가의 들꽃들을 감상하며 새로운 버스를 기다린다. 새로 부른 버스기사가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여 헤매고 있다고 가이드와 통화를 한다.

결국 우리 버스기사가 펑크 난 타이어를 직접 교환하고, 그 버스는 다시 출발한다. 오늘의 일정도 일부 내일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저녁식사도 시내에 예약된 포르투갈 전통음식 바깔라우를 취소하고, 호텔로 직행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호텔에서 나온 쇠고기요리가 우리의 입맛을 홀리게 했다. 호텔은 Estoril Eden이다.

 

2018.05.29() 7일차, 아름다운 전원의 도시 신트라로 간다.

 

호텔 창문을 열고 본 대서양

호텔에서 아침 창문을 여니, 대서양이 바로 앞에서 출렁인다. 자식들에게서, 그리고 내가 단장으로 활동 중인 금년에 창단하는 제주도 혼디갑주합창단에서 카톡이 왔다. 문대통령과 김정은의 남북 2차 정상회담이 열렸다는 뉴스도 떴다. 이젠 정말 한반도에 평화가 왔으면 좋겠다. 유럽의 서쪽 끝에서 또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오후의 사정으로 때문에 생략된 일정을 되찾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이다.

목적지는 신트라. 이곳은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28km쯤 산속에 위치한 도시이다. 영국 시인인 바이런이 에덴의 동산이라고 표현한 동화 속 세상 같은 곳이다. 역대 왕가의 여름 궁전이 자리하고, 귀족들의 피서지로도 사랑받았던 곳이다. 지금도 호화로운 저택과 호텔, 레스토랑들이 여행자들의 기분을 귀족으로 만들어준다. 특히, 이곳은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두 군데 모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도시이다. 동화책에서 튀어나올 법한 페나 성은 신트라에서 최고의 걸작이다.

아내와 손을 잡고 시내를 걷는다. 좁은 골목이 서민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곳이라고 느낌이다. 하늘색과 노란색의 건물이 연인들이 모여 산책하는 것처럼 눈에 들어온다. 경사진 골목을 오르내리며 발자국 소리를 낸다. 노란색과 붉은색 시내 투어버스가 교대로 찻길을 누빈다. 단촐한 도시 신트라는 시내 골목골목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이 모여서 우리 관광객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이다.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길, 버스가 골목에 잘못 들어가 복잡하게 주차한 자동차들 때문에 회전하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버스와 함께 남자들이 내려가 자동차를 들어 옮기고, 버스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식사 후 우리 버스는 화려했던 항구도시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포르투로 이동한다. 포르투는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2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포르투갈의 제2의 도시이다. 포르투갈의 국가명은 고대 로마인들이 포르투를 부르던 포르투스 칼레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도시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 포르투는 고대 로마인들로부터 정복을 당하기 시작하면서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당했다가 국토 회복 운동으로 기독교가 자리를 잡았다.

대항해 시대를 끝으로 포르투의 화려했던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고,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고립되면서 포르투는 발전을 멈추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포르투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서도 관광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롤링이 포르투에서 영어강사를 할 때, 포르투의 한 서점에서 영감이 떠올라 해리포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는 해리포터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포르투의 구시가는 196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도우루강을 사이로 포르투의 역사 지구인 구시가지와 포투 와인 저장창고들이 모여 있는 빌라 노바 데 가이아 지역은 두에로강을 경계로 지역감정이 심하단다. 특히 두 지역의 축구경기에서는 격렬한 응원전이 펼쳐진다고 한다.

철교(위)와 유럽 최대 아치교(아래) 전경

멀리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와 아치교가 보인다. 케이블카에 오르기 위하여 골목을 지난다.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이 보인다. 공중으로 이동하면서 포르투의 전경을 눈에 넣는다. 도루 강에는 1881~85년 프랑스의 토목기사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건축한 루이1세 다리(길이 180m)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유럽 최대의 아치교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도루 강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공중 위를 걸으며, 안개가 낀 강과 도시를 내려다본다. 고개를 들면 리스본 철도가 지나는 마리아피아다리가 보이고, 루이1세 다리 아래엔 사람들이 오가는 아라비다하이웨이교가 포르투를 낭만의 도시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 다리는 1963 완공되었으며, 총길이는 약 485m이다. 특히 볼거리인 다리 아래의 철근콘크리트 아치는 길이가 약 266m로서 세계적인 명물로 꼽힌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온다. 외국인들과 어깨를 대고 사진을 찍어본다.

오늘의 숙박은 호텔 DIGHTON이다.

 

2018.05.30() 8일차, 다시 스페인으로

 

버스가 다시 시동을 건다. 아침인사를 나누고, 우리 일행은 다시 스페인으로 간다. 4시간 거리에 있는 학술과 문화의 도시 살라망카. 낮은 구름이 끝없는 들판을 쓰다듬고 있다. 차창 밖에는 도토리나무와 흑돼지들이 유럽의 풍경을 장식하고 있다. 60세 이상의 캠핑카 족에게는 나라에서 여행비의 일부를 지원해 준다는 스페인. 산 능선 위로 소, , 양들이 평원 위에서 유화를 연속으로 그리고 있다. 스페인의 독수리는 무섭단다. 겨울이면 3마리가 소 한 마리쯤은 독수리가 먹어치운다니! 끝없이 평원을 누비는 양떼, 도토리나무 밑으로 순서대로 얼굴을 내미는 하늘, 그리고 메밀꽃처럼 피어오르는 구름, 쇠를엮어 만든 전봇대, 점점이 오가는 소떼의 여유로운 풍경이 아메리카 대평원처럼 내 눈을 착각하게 만든다. 자주, 보라, 노랑, 초록의 화원이 펼쳐진다. 물뱀자리 모양으로 휘어진 철도가 고향으로 가는 길처럼 나를 잡아당기고 있다.

살라망카는 토르메스 강의 북쪽 기슭 해발 778m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는 8~11세기에 그리스도교도들과 무어인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1087~1102년 그리스도교도들이 이곳으로 다시 이주해왔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옛 대성당(1140경 착공)과 새로운 대성당(1513 착공, 18세기 완공)을 비롯해 역사적 유적들이 즐비하다. 회랑이 있는 아름다운 마요르 광장은 지금까지도 이 도시의 센터이다. 곡물농업의 중심지로서 공장이 몇 개 있으나, 그것보다는 관광산업이 살라망카 경제에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살라망카대학교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서쪽에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자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 이 대학은 1218년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가 설립하였다. 중세의 대학을 의미하는 스투디움 게네랄레는 바티칸으로부터 인정받아왔다. 1988, 살라망카의 구시가지와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된다.

살라망카 대성당

살라망카 대성당이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져 외벽은 섬세한 조각이 돋보인다. 정문은 우아한 모양을 갖춰 순례객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하다. 조가비 문양이 독특한 건물 조개의 집을 본다. 건물 곳곳 빼곡하게 장식된 조개문양과 독특한 창이 기억에 남는 건물이다. 이 집은 원래 산티아고 순례길을 지키던 기사의 집이었다. 현재는 공공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체험학습을 나온 서양 아이들의 눈빛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마드리드에서 대학 친구들 부부와 함께
돼지 다리를 발효시켜 만든 하몽

점심식사 후 다시 3시간 반 거리의 마드리드로 이동한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시내 중심가를 걷는다. 하몽이 줄줄이 걸려있는 가게들, 맥도널드, 빵집, 선물가게들이 손님들을 부르고 있다. 수많은 자동차들과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간다. 거리엔 독특한 탈이나 장식, 이상한 옷을 입거나, 동물의 포즈를 취하여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며, 사람들을 부른다. 사진을 한 번씩 찍으면 돈을 받는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쇼핑점 입구에 웬 북한의 돼지 김정은의 사진이 1면에 실린 신문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럽에까지 와서 그것을 보니, 내 마음을 이상하다. 가방, 지갑, 벨트 등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구미를 당기게 한다. 저녁식사는 사랑방이라는 한식집이다. 된장국에 제육볶음, 그리고 쌀밥이 오랜만에 입맛을 극도로 자극한다.

마드리드의 한국 식당 사랑방

숙박은 홀리데이 인 마드리드 베르나베우(Holiday Inn Madrid Bernabeu)이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자마자 멀리 눈에 들어오는 레알마드리드 전용 경기장으로 향한다.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경기장을 향하여 사진을 찍었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얼른 호텔로 들어와야만 했다.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밤이다. 오늘 밤엔 고국에서의 일상인 꿈을 꾸려나.

 

2018.05.31(), 9일차,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 똘레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는 산꼭대기에 위치한 똘레도(Toledo)는 타호강에 둘러싸여 있다. 1560년 이전까지 스페인의 옛 수도이기도 했다.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예술에 있어서 마드리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도시이기도 하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의 식민도시를 거쳐 8세기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도시는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 가지 종교의 유적지가 공존하는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무어인들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똘레도의 칼로 대변되는 철제 생산과 경공업이 크게 발달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15세기에 수도가 마드리드로 옮겨지자 톨레도는 침체기를 걷기 시작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세계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관광도시로 재탄생하였다. 똘레도는 남성적이다, 반면 세고비아는 여성적 도시이다. 똘레도의 강변을 따라 사람들이 조깅을 하고 있다. 타호강은 흙탕물이지만 우리들의 오염된 마음을 씻어주고 있었다. 양지꽃, 메꽃을 닮은 보라색, 흰색 들꽃이 내 마음을 어린 시절로 보내주고 있었다.

똘레도 대성당

똘레도 대성당은 1225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페르난도 3세의 명에 의해 지어졌다. 원래 이슬람사원이 있던 자리에 고딕양식을 기반으로 1493년 완성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예술가들의 손길을 거쳤다. 현재는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 역할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22개의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본당 보물실에는 16세기 초 엔리케 아르페가 만든 성체가 5,000개의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본당 성가대석에는 그라나다가 함락되는 전쟁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조각이 있다. 똘레도 시내를 걸으며, 그곳에서 펼쳐지는 예수의 부활을 축하하는 꼬르푸스(Corpus)축제에 빠져든다. 카페에서 일행들과 마실 커피를 주문하는데, 총소리가 들린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알리는 축포소리였다. 경찰과 포즈를 취하며 사진 한 컷도 찍어본다. 사람들이 바다가 바로 그곳이었다.

산토 토메교회

산토 토메교회는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에서 백작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가는 두 성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천상계인 상부와 지상계인 하부로 이뤄진 이 그림은 상단은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영혼을 맞이하는 천상을 하단은 장례가 치러지는 지상을 상징한단다.

점심은 특식으로 미슐랭 코스요리이다. 음식점은 오전에 방문했던 올리브유, 발사믹식초, 아르간오일을 판매하던 가게 옆에 위치해 있다. 4코스 요리를 즐기는 La Casa Del Carmen 레스토랑은 2016년 미슐랭 스타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중세도시 똘레도의 맛을 본다지만, 내 입에는 그저 그런 음식이었다.

다시 비행기를 타야하기에 수도 마드리드로 간다. 마드리드는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가 유명한 스페인 최대 도시이자 문화예술과 산업의 중심지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 외곽 부촌의 전원주택에 호날두를 비롯한 명사들이 산다고 한다. 프랑코 시대 이후 이 도시를 포함한 주변 지역이 새 행정구역상 한 지방이 되었고 그 이름은 시와 같은 마드리드로 이름이 지어졌다.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왕궁을 옮긴 지 거의 1세대가 지난 1607년에 펠리페 3세가 마드리드를 공식적으로 수도로 정했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펠리페 왕조의 후원 아래 마드리드는 오래되고 다소 번잡한 도심과 그 주위의 궁전·수도원·교회·공공건물이 좋은 대조를 이루는 도시로 성장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마드리드는 메세타라고 하는 해발 635m의 기복이 진 고원에 세워져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수도가 되었다. 연중 온화한 시기는 봄과 가을이다. 이 시기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때이기도 하다.

프라도미술관으로 가는 길, 양귀비 벌판이 펼쳐져 있다. 베사메무초가 흘러나오고, 차이나타운이 휘익 지나간다. 세계 3대 미술관인 프라도미술관은 스페인의 회화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미술의 걸작 등 유럽의 다양한 회화작품들도 그곳에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1785년 카를로스 3세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게 자연과학박물관의 설계로 의뢰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이 건물의 건축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중단되었다가 1819년 완성되어 왕립회화관으로 공개되었다. 프라도미술관은 왕궁 및 에스코리알에 있는 그림들을 모아 이 소장품을 확장시킨 이사벨 2세가 추방된 뒤 1868년 오늘의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소장품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군주들이 수집한 미술품으로 이루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다른 부속 건물들이 지어지고 수집품도 더욱 풍성하여 졌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프란체스코 데 고야, 호세 데 리베라 등의 작품을 함께 소장하여 품격을 더하고 있었다.

마드리드 왕궁 앞 거리의 악사들 버스킹

마드리드왕궁이다. 원래 9세기에 세워진 무슬림의 요새가 있던 자리이다. 무슬림이 물러난 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요새를 궁전으로 사용했으나, 1734년 크리스마스 밤에 대형 화재로 소실되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 출신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펠리페 5세가 이 자리에 베르사유 궁전과 비슷한 왕궁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탈리아 건축가였던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a)가 설계를 끝내고 착공 전 사망하자 그의 제자였던 사게티가 승계 받아 사바티니, 로드리게스와 함께 1764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이곳은 스페인 왕의 공식 거처이지만 현재는 공식 행사에만 사용된다. 왕궁 안에는 2,800개의 방이 있는데, 그중 50개의 방만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거울의 방을 모방해서 만든 옥좌의 방’, 건축가 유바라가 설계한 로코코 양식의 걸작이다.

마드리드 시내 관광버스

산미구엘 전통시장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식재료를 공급하고 있는 전통시장이다. 화재로 인해 폐쇄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에게 농산물과 식재료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시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 리모델링을 통해 철골을 세우고 통유리로 둘러싸면서, 개방형이던 시장이 실내시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세련된 재래시장이랄까, 리모델링한 것처럼 깔끔한 분위기이다. 간단하게 음식 맛을 볼 수 있는 바르와 다양한 먹거리가 진열된 상점들이 사람들 발길을 붙들고 있다. 과일, 채소, 생선, 하몽, , 견과류 등을 파는 상점들은 바둑판처럼 자리하고 있어 시장을 보기 편한 곳이기도 하다. 부담 없이 와인 한잔이나 타파스 맛을 보기에도 좋은 곳이다. 나도 아내와 딸기를 주문하며 스페인 속으로 들어갔다.

흔히 솔 광장이라고 부르는 푸에르타 델 솔광장은 국도의 기점에 해당하는 장소로, 스페인 각지로 통하는 10개의 도로가 이곳에서 뻗어 나간다. ‘태양의 문이라는 뜻의 푸에르타 델 솔에는 16세기까지 태양의 그림이 그려진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광장 한쪽의 곰 조각상은 마드리드의 상징이며, 만남의 장소로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광장 주변에는 음식점, 백화점, 쇼핑몰, 카페, 책방 등이 자리하고 있어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마요르 광장

스페인의 전통을 간직한 마요르 광장이다. 중세에는 이곳이 시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펠리페 3세 때인 1619년 주요 행사가 열리는 광장으로 건설된 후에는 왕의 취임식, 종교 의식, 투우 경기, 교수형 등이 치러지는 장소가 되었다. 여러 번의 화재로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19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커다란 4층 건물이 반듯한 직사각형을 이루며 광장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9개의 아치로 된 문이 광장으로 통하고 있어서 이동하기 쉽게 건축된 곳이기도 하다.

광장 가운데에서 비상하는 자세로 말을 타고 있는 기마상은 바로 펠리페 3세이다. 광장 주위를 둘러싼 건물의 1층에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점, 관광 안내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9개의 아치문 중 하나인 광장 남서쪽의 쿠치예로스 문의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메손과 바르가 늘어서 있는 카바 데 산 미구엘(Cava de San Miguel) 거리와 만나게 된다. 마요르 광장에서는 매주 일요일 오래된 우표를 판매하는 우표 벼룩시장이 열리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시장도 열린다고 한다.

드디어 10여 일의 짧지 않은 여행이 막을 내리고 있다. 피로감이 온몸에 채워졌지만, 여행은 그 자체는 계속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마드리드 국제공항으로 이동한다. 저녁은 김밥에 과일과 물이 곁들여졌다. 공항 검색대에서 배낭을 풀어보잔다. 아내가 구입한 올리브오일과 발사믹식초가 나온다. 다시 짐을 맡기는 곳으로 이동하여 규정대로 처리했다. 그리고 다시 검색대를 통과하는 순간 또 보안원이 이번엔 아내의 배낭을 연다. 면세점에서 구입한 화장품을 살피는 것이었다. 액체물질을 몸에 지니고 비행기에 오르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 중에 저지른 행동. 보안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행이 통과시켜 주었다. 다음에 또 이런 실수를 하면 정말 바보가 되는 거겠지.

 

2018.06.01() 10일차, 대한민국 짝짝짝 코리아로

 

이곳 마드리드는 저녁 8시이지만, 한국시간으로는 심야이다. ㅅ페인에서 하늘로 오른다. 비행기 날개가 없는 창문 쪽 자리를 끊었다. 이륙하자마자 마드리드 시내가 발 밑에 보인다. 태양이 금방 서쪽 하늘 아래로 몸을 감춘다. 비행기는 바로 밤의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기내식 저녁식사가 나온다. 아내는 닭고기요리, 나는 비빔밥이다. 레드와인을 곁들인다. 끝없는 밤의 시간, 영화 남한산성을 본다. 다큐멘터리 미국의 위대한 유산 에버 글레이즈를 꺼낸다. 안드레오 보첼리의 실화를 다룬 영화 더 뮤직 어브 사일런스에 빠져든다.

꿈 속에서 빠져나오니, 다시 기내식이다. 아침이란다. 계란, 감자를 섞은 간단한 요리이다. 입맛도 없어 억지로 끼니를 때운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창밖을 보니, 고비사막이 만년설처럼 눈부시게 비행기 안으로 들어온다. 끝없이 이어지는 여인의 곡선 같은 모래언덕이 주름을 잡고 있는 사막, 바다뱀처럼 구불구불 하천들은 모두 바짝 말라 있었다. 드문드문 모래사막의 나무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의 텐진이 그림처럼 지나간다. 잘 정비된 해안선이 보인다. 다시 발해만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염되었다는 중국의 다롄과 옌타이 사이의 바다. 바다 위의 풍력발전기가 집단을 이루고 있다. 유유히 움직이는 무역선들이 한 폭의 유화처럼 내 눈을 호강시킨다.

어느 덧 비행기는 우리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내려놓는다. 잠시 후 의정부행 7200번 리무진버스에 오른다. 낮인데도 거의 좌석을 꽉 메웠다. 고국의 푸른 하늘과 정겨운 산악, 그리고 세련된 도시가 어머니 품처럼 느껴진다. 열흘 만에 보는 내 나라인데도 말이다. 송추에서 하차한 아내와 나는 방태막국수집에서 회국수를 주문한다. 언제 먹어도 일품인 그 맛. 개울가에 주차해 놓은 우리 차에 오른다.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말머리고개, 소사고개를 넘어 집에 도착하였다. 며칠 간 고향에서 쉬며 인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5일 날에 제주도로 내려간다. 아내와 함께 한 대서양을 만나고 온  이베리아반도여행, 짓푸른 대서양 물결이 오래도록 내 가슴을 출렁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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