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에 가다
2018. 3. 18(일) 1일차- 고궁박물관, 충렬사, 101빌딩
서울에서 열리는 현대사설시조포럼(3.24~25)에 참석할 겸, 그제 제주에서 올라왔다. 어제는 오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 아내와 양주 백석의 팔일봉에 올랐다. 아직은 봄소식이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문학행사에 함께 하기 위해 육지에 올라오는 김에 얼마 전 참좋은여행사와 접속하여 타이완 여행을 준비하였다.
새벽 4시에 알람이 울리기 전 이미 눈이 떠져 있었다. 아내와 함께 야채즙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짐을 챙겨 승용차에 올랐다. 6시 40분 인천공항에서 가이드와 만나는 시간에 대기 위해 송추정류장으로 향한다. 5시 반쯤 도착하니, 방금 공항으로 가는 7200번 리무진이 지나갔다. 20분쯤 지나니 공항행 버스가 멈췄다. 그러나 만석이라고 탈 수 없단다. 다음 버스를 또 기다려 세우니, 이번에는 좌석이 하나밖에 없다고 두 사람이 함께 탈 수는 없단다며 매정하게 문을 닫는다..
아내는 안절부절, 나는 태연자약한척하고 있었다. 시간은 6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당황한 아내와 나는 뒤 따라 오는 택시를 타고 급하게 공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김포대교를 지날 때쯤 가이드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직 인천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다른 일행들은 이미 도착한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하면 미리 표부터 끊고 만나자고 한다.
그래도 택시기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외곽순환도로와 공항고속도로를 달린다. 기사는 자식을 다 결혼시키고, 손주가 벌써 대학에 들어간다며 여유로운 생활을 보여주려고 한다. 우리 손주는 이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데…
7시 반이 넘어 공항에 도착하였다. 매표소 앞은 줄다리기하는 사람들처럼 이어져 있었다.. 언제 표를 끊을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항공사 직원이 진에어가 아닌 티웨이항공 매표소로 옮겨 표를 끊도록 도와준다. 그 사이 가이드와 통화도 하고, 잠시 예쁜 여자가이드 두 명과 얼굴을 마주 했다. 바쁠수록 여유를 부리려고 노력하였다. 126번 게이트가 우리의 출구이다. 그런데 팻말을 제대로 안 보았는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예쁜 아내의 손을 잡고 가던 길을 다시 돌아오며 눈의 초점을 맞추어 방향을 되찾았다. 그리고 아침 9시 넘어서 진에어에 탑승하였다. 언제쯤 촌놈의 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제주행 비행기를 밥 먹듯이 타면서도 이렇게 숙맥이가 되니 말이다. 비행기에 빈 좌석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왔다.
예정시간대로 9시 40분 타이완행 비행기는 하늘 날아올랐다. 섬들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 준다. 비행기가 흐린 날씨, 잿빛 하늘을 뚫고 금방 파란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발 아래쪽은 새하얀 양털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은 구름이 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기내식 아침식사가 나왔다. 간단한 삼각김밥이었다. 그리고 바나나, 불가리스, 김밥으로 출출한 배를 달래주었다.
고도 일만 일천 미터를 나는 비행기, 손바닥 만한 창문 밖에 성에꽃이 피어났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미당의 詩를 엽서에 써서 여승무원에게 준다. 100일쯤 지나면 그것이 집에 도착한단다. 동중국해 상공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징표이다.
황해를 지나 제주해역의 서쪽을 지나 동중국해에 비행운을 뿜어내며 나는 아내와 하늘을 헤엄친다. 마치 푸른 하늘과 구름 사이를 걸어가는 것 같았다. 어느덧 유리창에 맺힌 성에는 지워지고, 발아래에서는 무역선, 여객선들이 하얀 물살을 가르며 푸른 바다에 수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기름으로 보이는 것들로 엄청나게 오염된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저 아래 사는 물고기들은 어떻게 숨을 쉴까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타이완의 도시와 교외의 모습은 흡사 우리나라의 풍경이었다. 현지 시간에 맞춰 시계를 1시간 거꾸로 돌려놓았다.
현지시간 11시 30분, 도원국제공항에 내려진 나와 아내는 입국장을 빠져나와 50대 중년쯤의 남자인 현지 가이드 방조금과 만났다. 그는 대만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한국어를 익혔단다. 고구마 모양의 국토는 우리나라의 1/3 정도, 이천 삼백만 인구의 나라에 오토바이가 이천만대란다. 복잡한 도시를 누비는데 크게 공헌할 것 같다. 일본으로부터 50년 동안 지배를 받은 이 나라. 환율은 우리 돈과 40:1, 여름의 기온은 때로 47~48도까지도 올라간단다. 지진이 빈번하여 대만의 북서쪽으로 흐르는 딴수이강은 수력발전을 위한 댐이 없단다. 본토에 가까이 있는 금문도에서 생산된 고량주는 58°란다. 진도 2~3도쯤의 지진은 무감각하게 받아드리는 나라, 벼는 3, 4모작, 주식은 쌀국수란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점심식사부터 하였다.
먼저 세계 3대 박물관 주의 하나인 고궁박물원으로 버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타이완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인 이곳은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전시품은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네 왕조의 황실 유물로, 본래는 중국 베이징의 고궁박물원 등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1948~1949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옮겨온 것들이란다.
가이드가 표를 끊고 나와 아내는 이어폰을 나누어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앞의 모녀와 함께 안내원들이 입구에서 바로 앞 사람의 출입을 잠시 멈추게 하는 바람에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2층으로 올라가 일행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시 사무실에 내려와 한국말이 통하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았지만 일행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우리는 2층을 뒤지고 있었고, 일행은 1층에서 열심히 유물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이드에게 잠시 항의를 했지만 변명뿐이었다.
고궁박물관은 20만 6천m2의 넓은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본관은 중국 궁전양식의 4층 건물로 녹색 기와와 금색 벽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밖에도 여러 동의 부속건물이 있었다. 본관 뒤로 보이는 산의 중턱에는 지하 수장고를 지어 귀중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단다. 이 박물관에는 오천 년 역사의 중국 보물과 미술품 69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 한꺼번에 전시하기에는 장소가 비좁아 탐방객들에게 관심을 끄는 유물들은 상설 전시관에 전시하고 옥, 도자기, 회화, 청동의 보물들은 일정 기간을 두고 테마를 바꾸어 가며 전시하고 있단다. 박물관은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 반까지 쉬는 날이 없이 개방하며, 매일 여러 나라 언어로 가이드 투어를 실시한다. 사진은 플래시만 터트리지 않으면 찍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가이드가 가장 강조하며 설명한 것은 고궁박물관에서 가장 관심을 받는 취옥배추(翠玉白寀)이다. 녹색, 백색으로 자연 발색된 옥을 가공해서 배추처럼 만든 것이다. 자세히 보면 배추 위에 여치가 보인다. 왕비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예물이란다. 배추는 신부의 순결을 뜻하고 여치는 자손번영을 뜻한다나. 어찌나 관심을 끌던지 이것을 촬영하려고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옥의 역사인 것 같았다.
다음으로 발길이 닿은 곳은 충렬사이다. 중화민국의 건국 전 혁명 열사를 비롯하여 항일투쟁과 국공 내전 중에 희생된 33만 장병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그들의 애국정신을 담고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각각 한 차례씩 열리는 제사에는 국가원수와 정부 관료들이 모두 참석하며, 타이완을 방문 중인 외국의 정상이나 주요 인사들도 이곳에 와 헌화한다. 이때는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단다.
충렬사에서 또 하나의 관람 포인트는 근위병 교대식이다. 정문 앞을 지키는 위병들은 마네킹처럼 보였다. 꼿꼿한 자세로 엄숙한 표정이 정말 사람인지 만져보고 싶어졌다. 1시간에 한 번씩 열리는 교대식에서는 본관에서 정문까지의 약 100m 거리를 행진한다. 힘차고 절도 있는 동작과 총검술이 옛날 군대생활 하던 생각을 들게 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근위병들의 행진을 흉내도 내면서 그들의 늠름하고 절도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국민소득이 몇 년 전 2만 6천불에서 2만 3천 불 정도로 내려갔다는 타이완은 직업군인의 천국이란다. 모병제로 군인을 뽑는 이 나라는 군인 월급이 우리 돈으로 2백만 원 정도이고, 퇴직 후에는 4백~5백만 원의 연금을 받는단다.
다음은 타이완의 상징인 101빌딩이다. 버스가 다다르기 전 멀리서부터 빌딩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처럼 이곳은 새로 개발되고 특히 101빌딩의 영향으로 평당 땅값이 1억 8천만 원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국제 금융 빌딩인 이곳은 항상 많은 관광객이 몰리면서 타이베이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곳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건물의 높이는 508m로서 지상 101층, 지하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분당 1,010m의 속도를 자랑하는 엘리베이터는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마치 하늘로 뻗은 대나무 위에 꽃잎이 겹겹이 피어난 것처럼 보이는 101빌딩은 8층씩 총 8개의 마디로 구분되어 있다. 타이완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 ‘8’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이 건물의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는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가와 전 세계 유명 브랜드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타이완의 최고급 쇼핑몰이다. 유명한 딤섬식당인 딘타이펑(鼎泰豐)과 타이베이에서 가장 넓은 커피숍도 바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9층부터 84층까지는 은행과 증권회사 등 금융기업들이 들어서 있다. 85~87층은 전망대식당, 89층에는 실내 전망대, 91층 실외 전망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높이 382m의 89층 전망대에서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빌딩의 진동을 제어해 주는 거대한 황금빛깔의 추(Wind Damper)가 우리들의 눈길을 끌었다.
91층 옥외 전망대는 날씨가 흐리고, 여기도 중국 본토의 영향을 받았는지 시야가 멀리 확보되지 않아 아름다운 타이베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타이베이 101 빌딩의 전망대에서 보는 환상적인 야경은 타이완에서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이다. 특히 해마다 열리는 새해맞이 불꽃 축제는 이 빌딩의 하이라이트로, 평생 잊을 수 없는 멋진 순간을 선물해 준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몽골리안 바비큐.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숙주나물, 당근 채, 붉은 고추 채, 과일 등을 그릇에 담아 주방의 남자 요리사들에게 넘기면, 이것을 600℃ 철판에다 익혀주는 것이다. 내 차례 바로 앞에서 시커멓게 탄 철판을 북북 긁어내는 모습을 본다. 위생상 그렇게 깔끔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쇠고기를 얇게 썬 것에 생강과 마늘소스를 넣고, 파인애플을 많이 첨가하였다. 줄을 기다려 우리 일행 중 거의 꼴찌로 요리사에게 넘겼다. 아줌마들이 접시에 음식을 담는 모습이 식탐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쇠고기를 샤브샤브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그래도 소스를 적당히 잘 했는지 맛있었다. 배부르게 저녁식사를 하니, 포만감이 피로를 몰고 오는 것 같았다.
잠자리를 위하여 타이완의 온천도시 자오시의 雪山호텔로 향한다. 여장을 풀고 시내산책을 한다. 과일가게에 들렀다. 처음 본 열대과일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머리를 닮았다는 석가이다. 보통의 석가는 표면이 단단하고, 떫어서 먹을 수 없단다. 충분히 숙성하여 말랑말랑해졌을 때 먹어야한다. 하얀 빛깔의 속에 검은 씨가 들어있었다. 엄청 단맛이기에 다른 과일부터 먹고 석가를 먹어야 한단다. 대추도 샀는데 아기 주먹 크기였다. 물이 많고 시원한 맛이랄까? 온천도시답게 시내에 족욕카페, 물고기족욕 등이 있었다. 그리고 거리의 수도꼬지에서도 따뜻한 물이 나왔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본 모습이다. 호텔에 들어와 온천물을 받아놓고 피로를 풀었다.
2018. 3. 19(월) 2일차- 칠성담해변, 타이루거협곡, 노천온천욕
6시쯤 일어나 아내와 시내 산책을 한다. 아열대기후의 싱그러운 공기가 코를 자극한다. 녹음 짙은 나무들이 거리를 시원하게 만든다. 가게와 노점들이 이미 열렸다. 하얀 빛깔의 콜라비, 브로콜리, 배추, 양배추, 파, 양파 그리고 수많은 과일들이 즐비하다. 섬나라인지라 꼴두기를 비롯한 다양한 생선들도 보인다.
역전(Jiaoxi station, 礁溪車點)에도 들렀다. 거리에 자오시온천(礁溪溫泉) 간판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타이완에서 아주 유명한 온천의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의 지하수는 거의 다 온천수라고 한다. 호텔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09:10분경 화롄행 열차에 오른다. 이란, 뤄동, 동산, 난아오, 신청을 거쳐 화롄 쪽으로 우리는 힘차게 달린다. 동쪽에 바다를 서쪽에 산악을 두고 달리는 열차,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동해안의 정동진 부근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옅은 안개 속의 산이 가고, 들이 오고, 논이 오고, 마을이 가고 터널을 거치며 열차가 덜거덕 소리를 연속으로 낸다. 바다의 반대쪽은 거의 수직의 벼랑이다. 타이완의 하천도 우리나라처럼 물이 거의 마른 상태, 아마도 지금은 건기라서 그렇겠지. 구름 모자를 눌러 쓴 산들이 지나간다. 정글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뒤로 간다. 잘 정리된 논이 인상적이다. 논 가운데에 집들도 많이 보인다. 호수 위의 집 같다. 녹나무 가로수가 손을 흔든다. 야자나무를 닮은 열매가 도토리 모양인 삥랑수라는 나무가 하늘을 찌른다. 제주도의 야자수들은 죽지 못해 겨울을 나는 데 이곳은 열대식물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뜻글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타이완에서 소리글자인 외국어를 표현하는 방법도 재미있다. 프랑스에서 온 쇼핑몰 ‘카르푸를 家樂福’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마침내 우리열차는 10시 30분쯤 화롄에 도착하였다. 이곳 화롄은 어제 쟈오시에서 처음 맛보았던 석가라는 과일의 주 생산지라고 한다. 역전에서부터 시내에 들어오면서 중앙분리대를 중심으로 연등 같은 붉은 등이 연이어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특별히 어떤 행사 때문인지는 모르겠단다.
버스가 바닷가에 멈춘다. 칠성담(치싱탄)해변이다. 칠성담은 화련을 대표하는 해변으로 칠성담이라는 이름은 ‘북두칠성이 가장 잘 보이는 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멀리서 해변을 바라보면 별 모양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바닷가에서 거리의 가수를 만났다. 우리를 알아보았는지 가수는 아리랑을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나는 1달러를 내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타이완의 하늘 아래에서 몸을 흔들며 아리랑을 마음껏 불러댔다. 태평양을 향해 기지개를 펴고는 아내와 몇 커트 사진을 찍었다. 가이드 말로는 그 가수는 65살쯤 되고, 출신이 원주민의 두목이라고 하였다.
점심식사 후 버스는 타이루거(태로각)협곡으로 향한다. 타이완은 비록 섬나라이지만 이곳에는 2천~3천5백m의 산들이 258개나 된다고 한다. 아시아의 그랜드캐년이라는 타이루거협곡은 이 나라에서 4번째로 지정된 국가공원이라고 하다. 석회암과 대리암으로 이루어진 이곳 협곡은 태풍과 지진의 영향으로 국가적에서 위험지역으로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타이완에서 사용하는 건축자재인 대리석은 대부분 이곳에서 채취한다고 한다. 이곳 원주민들은 총을 구입하여 주로 사냥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안개에 잠긴 협곡이 마치 겸재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이곳이 바로 신선들이 놀던 곳이 아닐까? 4년 정도에 걸려 완성된 해발고도 2천 미터, 길이 20km에 달하는 협곡으로 난 길은 192km라고 한다. 병풍처럼 깎아지른 절벽에서 터널을 뚫고, 도로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군인들과 죄수들을 공사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돌에 깔리거나 계곡 아래로 추락하여 안타깝게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계곡 중턱에 세워진 절이 장춘사라고 한다.
바위엔 구멍들이 숭숭 뚫린 구멍들이 보인다. 그곳엔 한국, 동남아에서 날아온 제비들이 사는 제비동굴이라고 한다. 계곡을 오르내리며 살아가는 산양들, 갖가지 뱀의 무리, 산돼지, 곰 등 다양한 동물들이 살아가는 이곳이야말로 동물들의 천국인가보다. 고개를 드니 멀리 드높은 계곡에서 물줄기가 하얗게 흘러내린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 자식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눈물이란다. 일제시대에 돌아가던 수력발전 시설도 보인다. 구름다리로 향하던 길의 중간 지점에서 낙석을 제거하기 위한 공사가 벌어져 있었다.
열차시간을 맞춰야 하기에 우리 일행은 지체할 수도 없었다. 구름다리 쪽으로 향하던 우리 일행은 물론 그곳으로 향하던 차량들은 일제히 일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좁은 길에서 순서대로 차를 돌린다. 대신 우리 일행은 류방교를 탐방한다. 그곳엔 코끼리를 닮은 바위도 있었다. 아내가 급히 소변이 마렵다기에 으슥한 곳으로 안내하여 급한 불을 끄게 하였다. 원주민들의 모임 장소였다는 Buluowan에서 안개에 잠긴 산악을 바라보며, 잠시 세상을 관조해본다. 누가 이런 진경산수화를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어제 묵었던 호텔이 있는 쟈오시로 가는 열차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화롄역으로 버스가 달린다. 이슬비 내리는 아리랑고개를 버스가 돌고 돈다. 한고비를 돌면 개울이 나오고, 한고비를 돌면 계곡이 얼굴을 내밀고, 다시 벼랑이 치솟아 오르고, 고개를 드니 하늘이 섬처럼 보인다. 야생토란인 알로카시아가 군락을 이루며 너풀대고 있다. 시내에 들어오니, 가로수가 울창하다. 오륙십 년 된 버드나무란다. 철조망 안으로 공군부대가 보인다. 격납고가 마치 제주의 알뜨르비행장을 연상시킨다.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이 보인다. 15층짜리 호텔인데 로비를 넓게 하려고, 중요한 기둥을 제거하여 생긴 참사란다.
16시 30분발 쟈오시행 열차에 오른다. 일본의 신간센에서 운행하는 열차란다. 오른쪽으로 잔뜩 흐린 태평양을 곁에 두고 열차는 안개 속을 빠져나간다. 산능선이 바다로 떨어진다. 무지개가 사람들의 눈을 빨아드린다. 밀려오는 파도 위로 떨어지는 무지개,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무지개가 계속 셔터를 누르게 한다.
17:40 쟈오시역에 도착, 설산호텔에 들어선다. 바로 저녁식사시간, 김치국에 밥, 돼지고기, 채소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은 아내와 노천온천에 들렀다. 수영복은 출국할 때 가져왔지만 수영 모자가 없어 매표소에서 하나씩 샀다. 온천은 다양한 시설로 구비되어 있었다. 가슴마사지, 머리마사지, 등마사지, 경혈마사지, 용천마사지, 어깨마사지… 그리고 투명한 물은 대박이었다. 아내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맘껏 물마사지를 즐겼다. 미국, 일본, 중국 의 노천온천을 다녀보았지만, 시설로서는 이곳이 최고였다. 정말 물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많이 후회했을 온천이었다. 호텔방에 들어오자마자 꿀잠 속으로 빠진다.
2018. 3. 20(화) 3일차- 지우펀, 중정기념궁, 예류, 용산사, 야시장
버스는 이제 지우펀으로 달린다. 고가도로에서 강을 내려다보고, 고속도로에서 산을 쳐다보며 버스는 힘차게 달린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운전기사가 버스에 준비한 비옷을 한 장씩 가지고 내린다. 원래 매우 한적한 산골 마을이었던 이곳 지우펀은 19세기 말 청나라 시대에 금광으로 유명해지면서 화려하게 발전했었다. 그러나 광산업이 시들해지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급속한 몰락을 맞게 되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이런 지우펀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져 지금은 타이완에서 손꼽는 관광 명소로 거듭났다고 한다.
아홉 집이 나누어져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지우펀은 산을 끼고 바다를 바라보며 지룽산(基隆山)과 마주 보고 있다.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지형의 특성상 모든 길이 지네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오래된 집들이 어우러져 서정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골목마다 독특한 분위기의 작은 가게와 찻집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이어져 있다.
첫 번째 들른 곳은 토기로 만든 오카리나와 고양이, 개구리, 토끼 등 자그만 동물 모양의 인형을 만드는 집이었다. 흰색으로 외벽이 칠해져서 발길이 자동으로 옮겨졌다. 아내가 자그마한 오카리나를 만지다가 깨트렸다. 당황하는 아내에게 주인은 괜찮다며 안정을 시켜주었다. 아마도 직접 사장이 만드는 것이리라.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가게들의 처마 밑을 따라서 이동한다. 아내와 2층 찻집에 들러 우롱차를 마시며 분위기를 잠시 잡았다. 사진도 찍으면서 빗속의 지우펀을 느꼈다. 되돌아오는 길에 처음 들렀던 가게에 들러 아내가 갖고 싶어 하는 청색의 귀여운 오카리나를 얼른 샀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 중에는 서양 사람들이 어쩌다 끼어 있을 뿐 대부분은 한국 사람처럼 보였다. 골목의 끝에 있는 전망대에 들렀으나 워낙 안개가 자욱한지라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발길을 돌려 구불구불 버스 주차장을 찾아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향한다.
최근 ‘타이완 민주기념관이라고 이름을 바꾼 국립 중정기념당은 타이완 초대 총통인 장제스(蔣介石)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 장경국이 부친 생전인 1980년에 지어준 건물이다. 총면적 약 25만km2의 대지에 중국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들은 고대 중국의 왕릉과 비슷한 규모로 설계되었다. 정면에 서있는 76m 높이의 거대한 대리석 건물인 기념당은 남색과 흰색을 주로 띄고 있다. 천장은 하늘을 향해 둥근 모양이다. 89개의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오른다. 그곳에는 높이 6.3m, 25톤 무게의 장제스 총통 동상이 중국 본토를 향해 앉아 있어 타이완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내부 전시실에는 장제스 총통이 생전에 사용했던 물품과 사진 등 그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는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한 사진을 비롯한 사료들도 있어 한국과 타이완이 과거엔 매우 가까운 관계였음을 보여 준다.
기념관 주위로 정자, 연못이 있으며 우아한 정문 양측에는 국립극장과 콘서트홀 건물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건물 사이에 있는 광장에서는 주말마다 축제가 열려 국립 중정기념당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여러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충렬사와 마찬가지로 근위병들이 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장제스가 송미령과 결혼하기 위하여 아들 장경국의 어머니를 총살하였다는 가이드의 이야기가 한 영웅 정치인의 비정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 타이완 여행의 클라이맥스쯤으로 향하고 있다. TV에서 많이 보아 낯설지 않은 예류(野柳)로 간다. 예류지질공원의 기기묘묘한 암석들은 대만에서 자랑하는 세계적인 절경이다.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의 몸부림과 바람의 들쑤심, 그리고 땅의 침강과 융기의 영향까지 더해져 조각품보다 아름다운 지질구조와 눈을 뗄 수없는 보물들이 만들어졌다. 바람과 태양과 바다가 함께 깎고 다듬은 태평양의 자연조각공원이라고 불러야 할까나.
예류지질공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제1구역에는 내가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다양한 모양의 버섯바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촛대바위와 아이스크림바위도 우리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었다. 제2구역의 경관도 제1구역과 비슷한 모양들이 내 눈에 다가온다. 여왕머리 바위와 용머리 바위, 금강 바위가 이 구역의 식구들이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단연 압권인 것은 여왕바위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진 한 컷을 남기기 위하여 긴 줄을 만들고, 조바심을 밀어내며 기다림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2구역에 인접한 해변에는 코끼리바위, 선녀신발, 지구바위, 땅콩바위라 불리는 암석들도 그곳을 지키고 있다.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제3구역은 파도의 위험으로 생략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발마사지를 하러 간다. 상호는 재춘건강생활관(再春健康生活館). 아내와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니, 남자 마사지사가 두 명 보인다. 그리고 온몸과 연결된 발의 지압부위를 나타내는 그림을 한 장씩 준다. 마사지크림을 바르면서 경혈자리를 누르고 주무른다. 아픈 곳의 신호를 보내면 아픈 곳을 지적해준다, 그것도 한국말로. 무릎, 고관절, 전립선, 간, 생식기… 내가 종합병원도 아닌데 말이다. 나를 마사지해준 사람은 왜 그런지 얇은 비닐장갑을 끼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저녁식사 후 타이베이의 또 하나의 볼거리 용산사(龍山寺, 룽산쓰)의 화려한 밤의 불빛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타이베이시에는 작은 사원부터 거대한 사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원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용산사는 이곳의 사원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은 전통사원이다. 불교, 도교, 유교의 중요한 신을 함께 모시는 종합 사찰로서 순례객의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네모난 뜰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가 3번 반복되는 3진 사합원의 궁전식 건물이다. 타이완 전통사원 건축의 극치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벽면마다 정성이 가득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돌로 만든 조각 역시 매우 정교하였다. 기둥과 처마의 경계 부분은 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지붕의 사방에는 용, 봉황, 기린 등 상서로운 동물들이 의젓하게 앉아 있다. 이 사원이 처음 지어진 것은 1738년이다. 태풍과 지진 그리고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허물어진 것을 1757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용산사의 곁에 있는 타이베이 화시제 야시장(화시제 예스, 華西街夜市場)으로 발길을 들여놓는다. 여전히 비옷 차림이다. 이곳은 다른 야시장과는 달리 보양식을 많이 파는 곳으로 유명하단다. 중국 한약재, 예술품, 잡화, 먹을거리 등이 가지각색으로 진열되어 있다. 중학교시절 교문 앞에서 보았던 무지개 색깔로 쓰는 글씨도 보였다. 잠시 50년 전으로 마음이 돌아가 있었다. 아내는 기념품 가게에서 귀여운 술잔들을 만지작거리다가 발길을 돌린다. 사원의 오색 야간 불빛들이 양 눈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하여 Freedom Hotel(國際大飯店 富立登)에 여장을 푼다.
2018. 3. 21(수) 4일차- 다시 대한민국으로
오늘은 귀국하는 날, 여유 있게 아침을 맞는다. 아내는 짐정리를 하고 나는 새벽 산책을 나왔다. 시내구경을 하려 했지만 오염된 개울이 흐르는 호텔 주변을 제외하고는 별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호텔 로비에는 빨간 미니스커트의 여성을 상징하는 마네킹처럼 생긴 등이 이채롭다. 거기에서 아내와 나는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고 도원국제공항으로 향한다. ‘See You Taiwan'이라는 문구가 눈을 자극한다. 아내와 함께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차밭을 나타내는 예술품이 공항의 벽을 차분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인천에서 왔다는 모녀, 딸이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챙긴다. 미국의 시애틀에서 살다가 어머니가 치매증상이 있다고 신랑조차 그곳에 혼자 놓아두고 왔단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으면서, 아이는 없다면서. 현대판 심청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올라 잠시 눈을 붙이다 보니, 벌써 인천국제공항이다. 7200번 버스에 올랐다. 역시 황사 가득한 고속도로가 우리를 반긴다. 우중충한 한강, 일산신도시, 북한산이 실루엣 속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다. 금년 첫 번째의 짤막한 해외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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