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땅, 남미에 빠지다.
1일차 2018. 11. 5(월) 잉카의 고향 남미로 간다
어제는 대부도에 갔었다. 안산에 사는 막내동생네 집에 모처럼 우리 식구들이 모인 것이다. 손주 가온이와 시온이를 보아서 더없이 흡족했다. 6개월 된 손자 시온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내 마음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동생이 잘 가꾼 정원은 가을 풍경과 함께 단연 그 마을에서 으뜸이었다. 부산에서 열심히 대학공부를 하는 조카 남진이는 모습이 듬직하였다.
점심은 정원으로 꾸며진 잔디 위에서 고기파티로 했다. 남진이 아빠가 열심히 고기를 굽는다. 우리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다. 밭에서 직접 뜯은 상추에 고추에, 그리고 갖가지 반찬으로 입이 호강하였다. 울산 남훈이네, 그리고 봉일천의 현석이네 식구들도 함께 모였으면 더욱 즐거웠을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멀리 남미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하지만 오전에 아내와 함께 의정부성모병원으로 달렸다. 내 몸에 뭔가 이상하여 진료를 받으러 간 것이다. 가정의학과에서 의사와 상담을 하니, MRI를 찍으란다. 난생 처음의 경험이다. 검사통 안에 들어가니, 완전히 공사장의 온갖 잡음이 귀를 계속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체질검사도 했다. 21일엔 피검사 예약을 잡아준다. 28엔 결과를 보는 날이다.
아내와 의정부 홈플러스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배가 출출한지라 나는 비빔국수, 아내는 들깨칼국수를 눈 깜박할 사이에 먹어치웠다. 여행준비를 위하여 튜브고추장과 헤어젤을 구입하였다.
18:10쯤 집에서 출발한다. 송추의 개울가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7200번 인천공항행 버스에 올랐다. 승객이 거의 없었다. 지난번 발칸여행 때 버스의 좌석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갔던 생각이 떠올랐다. 19:30분쯤 인천공항 제1터미널에 도착하여 일행을 만나 체크인을 하였다. 얘기를 하다가 보니, 작년 북유럽 여행 때 함께 했던 두 가족(인천, 거제)을 다시 만나 함께 여행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내는 더욱 예뻐지려고 화장품(헤어오일, 메이컵)을 산다. 밤 11시에 10번 게이트에서 만나 비행기에 오른다.
꿈에 그리던 남아메리카로 간다. 남미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앙헬폭포를 가진 나라, 베네수엘라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강 아마존이 흐른다. 그리고 가장 긴 산맥인 안데스에는 최고봉인 6962m의 아콩카과산이 우뚝 솟아있다. 또한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인 아타카마 사막, 가장 넓은 열대우림 지역인 아마존 우림, 가장 고도가 높은 수도볼리비아의 라파스, 무역선이 오가는 가장 고지대의 호수인 티티카카호가 있다. 또한 남극을 제외하고 세계 최남단의 마을인 칠레의 푸에르토 토로가 있는 대륙이다.
저녁식사가 기내식으로 나온다. 치킨에 김치, 마카로니, 빵, 버터, 케이크이다. 레드와인을 아내 몫까지 시켜 마시며 밤하늘을 난다. 여행은 내게 행복 그 자체이다. 아내는 과식인지 소화제를 찾는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계속 날아간다. 밤하늘을 뚫고 비행기는 날고 또 난다. 계속 밤이다. 어느 덧 비행기는 파키스탄 하늘에 닿아있다. 한국시간 07:00. 아침밥이 나온다. 간이 히잡을 쓴 여승무원이 정성스럽게 서빙을 한다. 궁금하여 물으니, 에미리트항공 제복이란다.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장터가수 여진종의 ‘미운사랑’, 미기의 ‘천년지기’, 이현의 ‘내 사랑 지금 어디’가 흘러나온다. 비행기는 이란을 지나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고 있었다.
기내 좌석에 꽂힌 잡지를 넘기니, 에미리트항공 구호가 보인다. ICE(I: Information, C: Communication, E: Entertainment). 2층으로 이루어진 비행기가 깨끗하다, 흔들림도 거의 없다. 서비스도 맘에 든다. 하늘의 궁전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발칸여행 때 탔던 카타르항공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곧 두바이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라는 멘트가 나오고 조금 지나니, 두바이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버즈 두바이 빌딩의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2일차 2018. 11. 6(화) 브라질이 부른다.
10시간쯤 밤하늘을 날아온 비행기가 현지시각 새벽 5시쯤 중간 기착지인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국제공항에 착륙한다. 낯선 아랍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SAM SUNG 코너, I Pad 코너를 둘러본다. 아내는 머리끈을 구입한다. 그리고 두어 시간 기다려 07:10 갈아탔다. 비행기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19J석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사막 위에 세워진 두바이 공항은 초록빛깔을 한 평도 보이지 않았다. 페르시아만을 뒤로 하고 비행기는 아라비아반도를 횡단한다. 만년설처럼 쌓인 구름이 우리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 아래엔 연속 사막으로 이어진 대지였다. 첫사랑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뛴다. 바닷가 마을이 보이고, 바로 홍해가 10km 발 아래에서 출렁인다. 드디어 비행기는 아프리카대륙으로 진입한다. 모래 평원이 끝없이 지나간다. 메마른 호수와 산이 보인다. 여기가 검은 대륙 아프리카이다.
6.25참전국인 사막의 나라, 에티오피아를 지나 비행기는 열대우림으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중부로 들어선다. 비행기의 모니터에는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 나라의 지도가 나온다. 북한, 네팔, 부탄, 파푸아뉴기니, 쿠바, 에티오피아… 아프리카의 밀림 위에는 구름과 함께 산맥들이 줄을 서서 우리를 사열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원시의 지구 위를 날고 또 난다. 다른 승객들에게 미안하고, 눈이 부시지만 나는 자꾸 비행기의 창을 열지 않을 수 없다. 난생 처음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아직도 8시간을 날아야 한다.
기내식이 나온다. 생선과 채소이다. 아직도 내 발자국을 허락하지 않은 아프리카의 나라들. 케냐, 탄자니아, 모잠비크, 우간다. 나미비아의 상상 이미지가 머리에 들어왔다가 나간다. 비행기는 이제 대서양을 품속에 넣는다. 아라비아반도와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회색 하늘이 감청색으로 변신하였다. 포르투갈의 서쪽 끝 ‘까보 다 로까’에서 만났던 대서양을 여기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인도양은 언제쯤 만날거나. 내년 아니면 후년에는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에도 발을 들여놓아야지. 대서양의 짙푸른 파도와 양떼구름이 몸을 섞고 있다.
기내에서는 내 앞좌석의 아기가 계속 울며 보챈다. 젊은 부부가 안쓰러웠는지, 그 옆의 브라질 아줌마가 꼬맹이를 안고 달랜다. 드디어 비행기가 적도를 넘는다. 남반구가 나를 끌어 당긴다. 이것도 내 인생의 첫 경험의 여러가지 중 하나이겠지. 내게 여행은 끝없는 설렘이다. 비행기 속에서 잠든다는 것조차 아까운 생각이 든다. 아직도 브라질에 도착하려면 6시간 전. 우리나라의 반대쪽에 있는 대서양의 하늘이 어릴 적 본 우리 고향의 가을처럼 푸르다. 비행기의 외부 현재 온도는 -45℃. 리우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나는 옷 앞섶에 안경을 2개 걸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아내의 안경이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을 다녀오자마자, 좌석의 침침한 바닥을 다 뒤진다. 혹시 발에 밟혔을까봐 걱정하면서 말이다. 안경은 다행히 앞좌석 아래에 안전하게 놓여있었다.
비행기의 천장에서 별자리 모양의 불빛이 반짝인다. 마치 맑은 날 밤하늘을 보는 것 같다.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카시오페아자리… 드디어 비행기는 대서양을 건너 남아메리카대륙에 상륙하고 있었다. 두바이에서 이륙한지 14시간 40분, 구름 속에 파묻힌 온통 푸른 산하가 신비스럽게 내려다보인다. 드디어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에 우리들은 푹 안긴다.
리오의 가이드, 딸 세 명의 엄마 유현숙님을 만난다. 공항에서 고개를 드니, 바로 바다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1,500년경에 인도인 줄 알고 상륙한 곳이다. 리우는 강을 의미하고, 자네이루는 1월을 뜻한다고 한다. ‘1월의 강’이라는 의미이다. 아마 아마존강을 처음에는 바다로 착각한 것이리라. 브라질은 가톨릭 국가, 그리고 모계사회이다. 브라질 여성들은 14~15세에 출산을 시작하고, 부모는 막내딸이 모신단다. 우리가 탄 버스가 지나는 큰길 옆으로 빈민가가 펼쳐진다. 처음 보는 색다른 풍경이다. 시내에서는 목걸이 등 장신구를 조심하란다. 특히 삼성 갤럭시 휴대폰은 그들에게 최고로 갖고 싶은 물건이라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란다. 미국은 남북전쟁 후 이곳에서 노예를 사갔다고 한다. 리우의 신도시는 바다를 메워 건설했다고 한다.
‘뻥지 아수까(뻥<빵>의 뜻, 아수까<설탕의 뜻>)’라고 부르는 슈가로프산으로 향한다. 리우에 간다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명소이다. 이곳 리우항구는 세계 3대 미항이다. 리우항은 시내는 물론 리우의 랜드마크인 거대 예수상까지, 리우의 전체를 내려다 볼수 있는 최적의 장소. 케이블카를 타고 슈가로프산 정상에 오른다. 케이블카에서 내다보는 풍광이 압권이었다. 뻥지 아수카에 올라 리우데자네이루의 외항과 내항의 진경에 취한다. 외항의 길게 이어진 곡선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내항 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도시의 모습은 한 폭의 명화였다. 그리고 멀리 구름 속에서 예수상이 가끔씩 얼굴을 보여준다. 엊그제 온 관광객들은 날씨가 궂은 관계로 그 신비로움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내겐 복이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연신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꺼낸다.
리우데자네이루는 1565년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 세워졌으며, 1763년부터 1960년까지 브라질의 수도였던 곳이다. 리우항구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호주의 시드니와 더불어 세계 3대 미항으로 불린다. 삼바 카니발로도 유명한 이곳은 2016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이기도 하다. Rio에는 우리 교민이 70~80명 정도만 거주하고 있단다. 우리 교민의 대부분은 상파울루에 거주하고 있다. 브라질은 목질이 단단하여 현악기의 활의 재료로 쓰이는 브라질나무(Pau Brazil:‘불 붙은 숯과 같은 나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Americas Copacabana 호텔에 짐을 풀고 남미에서의 황홀한 첫날밤을 보낸다.
3일차 2018. 11. 7(수) 리오데자네이로에 빠지다
새벽 눈을 뜨자마자, 얼굴에 물만 묻히고 아내와 시내 길을 더듬어 코파카바나해변에 닿는다. 리우데자네이루가 인종차별이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물결모양의 흰색, 검은색 보도블록이 선명하다. 낭만 가득한 대서양의 파도가 춤을 추고 있었다. 이곳 해변은 약 5km에 걸쳐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1년 내내 따뜻한 기후로 관광객이 끊이는 날이 없다. 백사장에서 노숙자들이 아무렇게나 누워 잠자고 있다. 세상 어디엘 가나 떠도는 삶들이 있는가 보다. 해안가 큰길 옆에는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이겠다.
이곳 브라질은 11월 1일부터 서머타임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제 가이드로부터 코파카바나 해안은 사람이 많은 만큼 범죄도 자주 발생하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졌으나, 새벽인지라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바로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 중 이곳에서 여유를 부린 사람은 우리 부부뿐이었다. 하지만 그 유명하다는 이곳 코파카바나해변의 야경을 어젯밤에 보지 못하여 몹시 아쉬웠다.
아침 식사 후 미니버스를 타고 구름 속의 코르코바도 언덕을 오른다. 옛날부터 브라질사람들이 생각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심은 바로 이곳 코르코바도 언덕이었다. 이곳에는 1931년 브라질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초대형 예수상이 있다. 높이 38m, 양팔 너비 28m, 무게 1,145톤에 이르는 이 예수상은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리우의 황제 같았다. 이 예수상 위용이 세계의 관광객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예수상의 내부에는 시내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15명 정원의 전망대가 있다. 날씨 좋은 날 오후에 오르면 리우데자네이루 시내에 내려앉는 황혼의 바다와 함께 세상 최고의 노을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코르코바도 언덕의 카페에서 아내와 함께 따끈한 남미 커피의 풍미를 느끼며, 우정을 다졌다.
브라질은 국토의 면적으로는 세계 5위이다. 하지만, 사막이나 빙하 같은 쓸모없는 땅이 없어 실제로는 세계 1위의 좋은 땅을 가진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하에는 보석과 광물, 석유 등 지하자원이 무궁무진하다. 옥수수는 매달 수확하고, 커피는 3모작까지 하는 나라. 못 살래야 못 살 수 없는 나라가 브라질이다. 하지만 현재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슬픈 나라가 바로 브라질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굳이 원인을 들자면 지도자들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제대로 못한 것이리라.
서민의 기본 월급은 400$정도로서 사립학교는 학비가 비싸기에 서민은 꿈도 못 꾼다. 이 나라는 유치원부터 대학까지는 무상교육이다. 그러나 9학년까지만 다니고 대부분은 사회로 진출한다. 그래도 브라질의 대학수준은 세계적이란다. 과연 맞는 말일까? 브라질 국민의 80%는 가톨릭, 15% 정도가 개신교이다. 평균 수명은 50~60세 정도. 리우에서 우리 교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상파울루까지는 450km, 자동차로 약 10시간 거리이다. 순간 내가 평상시부터 동경하고 있던 아마존 정글의 도시 마나우스에도 가보고 싶어진다. 언제쯤 그 꿈이 이루어질까?
창밖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까지 휴대폰을 하는 사람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곳은 모계사회이기에 장모와 사위의 갈등이 많다고 한다. 신분상승은 주로 축구를 통해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그러나 브라질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국민들. 비록 생활수준은 낮지만 이들의 행복지수는 상당히 높다고 한다. 태풍이 없는 나라. 이곳 우리 교포자녀들은 보통 4개국의 언어를 자유롭게 한단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한국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k-pop으로 한국 열풍에 빠져있다는 나라 브라질.
점심식사 후 시내관광이다. 아침에 가보았던 인종차별이 없음을 상징하는 보도블록이 깔린 코파카바나해변을 옆에 끼고 버스가 천천히 운행한다. 사람들이 팬티차림으로 비치발리볼을 즐긴다. 브라질의 모래밭에 누워 선탠을 하는 구릿빛 피부의 사람들도 보인다. 쭉쭉 빵빵 몸매를 자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삼바축제가 펼쳐진다는 축제장. 하지만 삼바의 철이 아닌지라 썰렁하기만 하다. 혼혈의 늘씬한 아가씨가 화려한 깃털을 단 왕관에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다. 사진촬영을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1$을 내야지 찍을 수 있는 것, 나는 삼바라도 즐긴 것처럼 아가씨와 멋진 포즈를 취하며,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다.
2016년 리우올림픽이 열렸던 경기장을 지난다. 거리에서는 브라질 유니폼을 입은 축구선수가 헤딩시범을 보이며 축구실력을 여행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운동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축구로 미친 나라, 인류의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황제 펠레를 탄생시킨 나라가 바로 브라질이다. 옛날 의정부에서 중학교 시절 흑백 TV로 본 축구경기가 눈에 선하다. 그것은 바로 1970년 개최되었던 멕시코월드컵 축구경기. 브라질이 우승하고, 이탈리아가 준우승을 차지했던 경기 말이다. 그 때 브라질의 유명했던 공격 삼각편대가 바로 펠레, 자일징요, 토스타오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참 오래 가는 것이다.
수용인원 2만 5천명의 리우대성당이다. 원추형의 독특한 디자인을 한 건물로 언뜻 보면 성당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특이한 건물이다. 이곳 성당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예수 상을 공중에 띄워놓은 것이 특징이다.
쇼핑몰에 들렀다. 역시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들의 유니폼인 노란색 T셔츠에 녹색 팬츠가 유난히 눈에 띈다. 쇼핑몰의 한쪽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쪽지를 붙여 놓은 벽이 시선을 끈다.
다음은 이과수폭이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우리를 리우공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19:30 이륙한 비행기는 21:10 이과수공항에 착륙한다. 키가 늘씬한 젊은 남자, 파라과이 교포 2세 최웅진 가이드가 버스에 오른다. 이곳 이과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의 국경지대이다. 버스기사는 이름이 갈로인. 우리는 운전을 잘해달라고 뜨겁게 박수를 친다. 이곳 말로 아침인사는 ‘봉지야’ 고맙다는 ‘오브리가도(다)’ 좋다는‘따봉’이다. 가이드는 버스 안에서 안내 설명 중에 자주 ‘따봉?’을 반복하며 우리 일행의 대답을 이끌어낸다.
가이드의 부모님은 이민 초창기 이곳 가축 도축장에서 버리는 소, 돼지 내장을 가져다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음식을 만들어 팔며 자식을 키웠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지금은 파라과이 사람들도 곱창원료인 가축의 내장을 돈 주고 거래한단다. 우리 교포들이 어떻게 이민으로 와서 성공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21:35분 브라질의 이과수에 도착 후 호텔 투숙한다. 호텔의 이름은 Viale Cataradas Hotel.
제4일차 2018. 11. 8(목) 꿈에 그리던 이과수폭포
화장실의 휴지가 티슈인지라 불편했다. 아마 여기에선 뒤처리를 비데로만 하는가보다. 샤워부스에는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샤워기만 있었다.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는 따뜻한 우유에 시리얼을 타서 에너지를 채운다. 가이드가 추천하는 음식, 카사바를 갈아서 만든 부침전 코너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식사 후 브라질의 이과수국립공원으로 향한다. 이과수의 오늘 날씨는 완전 쾌청이다. 꿈에 그리던 이과수폭포가 멀리서 파노라마처럼 내 눈에 들어온다. 푸른 숲 사이 건너편에 행주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도열한 모습의 이과수폭포. 물소리가 내 귀를 울린다. 물보라를 배경으로 무지개가 다리를 만들고 서있다. 1.1km의 숲속 폭포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오른쪽 시야 쪽에서 쏟아져 내리는 2.7km 너비의 이과수가 다른 곳으로 내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길가 나무에서는 코아티(킨코너구리)라는 동물이 주둥이를 흔들며 사람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혹시‘먹이를 얻어먹을까?’ 해서 사람 곁으로 온단다. 가이드는 절대 먹이를 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폭포의 사진을 찍는다. 포토존마다 다양한 인종의 세상 사람들이 갖가지 자세를 취한다. 폭포에서 날아오는 물살의 비를 맞으며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일행 중 혼자 온 여자의 사진을 여러 컷 찍어주다 보니,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앞쪽으로 먼저 갔을까? 뒤쪽에 쳐졌을까? 사진 찍기에 정신이 팔린 나는 계속 셔터를 누른다. 바로 그 때 나를 툭 치는 손, 뾰로통한 아내였다. 아내가 잔뜩 화가 나있음을 육감으로 알아챘다. 내가 엉뚱한 여자와 걷는 모습에 샘이 난 것이겠지… 하여튼 아내에게 서운하게 만든 미안한 행동이었다.
구름 같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과수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지역의 이과수강이 파라나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이과수강을 따라 상류 쪽 23km 위치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편자모양에 높이는 82m, 너비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4배인 4㎞이다. 폭포의 절벽 가장자리에 숲으로 뒤덮인 바위섬들로 인해 높이 60~82m 정도의 크고 작은 폭포 275개가 저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 위해 물줄기를 쏟아 붓고 있다.
이과수폭포는 이곳을 최초로 방문한 스페인의 탐험가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바카에 의해서 알려졌다. 1541년 그는 폭포의 이름을 '살토데산타마리아'라고 지었단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거대한 물’이라는 파라과이의 제2언어인 과라니어의‘ 이과수’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점심식사는 이과수폭포를 바라보며 즐기는 뷔페식,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폭포를 먹고 있었다.
오후엔 마쿠코 폭포의 사파리를 하는 옵션 일정이다. 하지만 물을 뒤집어쓰기 싫어하는 나는 아내와 레스토랑 근처에서 여유롭게 폭포를 다시 보며 즐긴다. 동상 근처에서 외국인들과 친구처럼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여행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무 아래 벤치에서 아내는 오카리나를 꺼내어 ‘바위섬, 홀로 아리랑’등을 연주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순간 나는 1860연대부터 영국에서 시작했다는 거리공연인 버스킹을 생각하며, 모자를 그들 앞에 놓았다. 아내가 쑥스러워하며 뭘 하느냐고 얼른 모자를 집어온다.
폭포 사파리가 재미있었다는 일행들의 소감을 들은 아내는 그것을 못했다고 아쉽단다. 너무 내 생각만 했나보다. 오늘 밤도 어제와 같은 Viale Cataradas Hotel이다.
5일차 2018. 11. 9(금) 악마의 목구멍, 지옥의 문
아침식사 후 1975~82년에 건설된 이타이푸댐으로 간다. 버스를 타고 잠시 내륙국가인 파라과이에 입국한다. 이타이푸는 ‘노래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이 댐은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국경에 위치한 파라나강 상류에 위치한다. 세계 7대 현대 건축물로 평가되기도 하는 이 댐은 브라질과 파라과이가 함께 건설한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이다.
이 댐의 높이는 196m, 1만 2,600MW 의 발전용량을 가지고 있다.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댐을 건설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총 출력 1만 4,000mw로 이 곳에서 생산되는 전력은 브라질 전체 전력의 26%, 파라과이 전체 전력의 78%를 차지하고 있다. 댐의 저수지가 북쪽으로 160㎞까지 뻗어 있어 댐이 건설되기 전 장관이었던 ‘과이라폭포’를 완전히 잠기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 한쪽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11시 29분 파라과이를 빠져나와 다시 아르헨티나의 이과수국립공원으로 들어온다. 1.1km의 거리를 기차에 올라 시속 5km의 속도로 이과수폭포의 ‘악마의 목구멍’을 만나러간다. 젊은 시절 탔던 완행열차인 비둘기호에 앉은 기분이 든다. 기차 안에서는 세계의 언어들이 함께 데워지고 있었다. 한국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호기심에 가득한 세계의 인종들이 호기심을 가득 안고 간다. 제주도 에코랜드의 기차를 타고 숲속을 달리는 느낌랄까?
드디어 이과수폭포의 하이라이트라는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이 가까워진다. 물보라가 보인다. 폭포의 굉음이 귀청을 흔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환호소리는 이제 폭포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져버렸다. 이곳은 영화 미션의 촬영지.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악마의 목구멍’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호기심이 불쑥 나왔다.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에도 물살이 낙하하는 벼랑 바로 근처에 '악마의 수영장'이 있다.
어쩌면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힘과 마주하면 붙여지는 이름이 악마인가? 악마의 목구멍은 단순히 '목구멍'이 아니었다. 조물주가 세상의 모든 물줄기를 모아 쏟아 붓는 구멍, 그곳은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거대한 대문이었다. 이곳 이과수의 지신이 하늘을 쏟아 붓는다. 굉음이 진저리를 친다. 물줄기가 부서지고, 합치고, 소리를 지르고, 놀래고, 괴성을 지르고… 그것은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세상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내는 마지막 울음이었다.
아! 이과수폭포의 클라이맥스 악마의 목구멍,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한다. 아내도 연신 사진을 찍는다. 되돌아오던 나는 아내와 함께 다시 악마의 목구멍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다시 놀래고, 경탄한다. 다시 나무다리를 따라 역 쪽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는다. 내 발길은 자동으로 또, 다시 악마의 목구멍으로 옮겨진다. 아! 악마의 목구멍,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 세상을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
기차를 타고 다시 돌아온 나는 역에서 바로 앞의 화장실을 들렀다. 그러나 잠시 후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점심식사를 하러 갔을 텐데…. 나는 아내와 걸음의 속도를 냈다. 공원 끝에 닿아 출구까지 빠져나왔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이미 이곳을 빠져나갔는지, 아니면 아직 공원 안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검표원에게 표를 보여주며 공원입구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나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다. 공원 안내원이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알아들을 뿐이었다. 잠시 기다리니 파라과이 교포인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찾으러 왔다. 지구 반대편 이국에서 만난 구세주였다.
하마터면 점심을 놓칠 수 있었던 뉴스에는 나오지 않는 내게는 큰 사건이었다. 다행이 쇠고기 바비큐. 멜론, 망고, 수박 등의 과일이 시원하게 목으로 넘어갔다.
이제 버스는 우리 일행을 브라질 이과수공항으로 안내한다. 기념품 가게를 들른다. 다양한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대한 수정결정들이 시선을 끈다. 그러나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브라질의 國鳥인 투칸 인형이다. 두툼한 부리와 동그란 눈동자,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상을 지닌 실물 같은 모형. 갖가지 모양의 투칸이 실물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 손님들을 끌어들인다.
버스가 이과수공항으로 들어간다. 'LATAM, Interjet, Avianca, Air France' 이름을 단 비행기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LATAM LA2442 리마행이다. 이제 마추픽추가 있는 페루로 날아간다. 밤 8시가 훨씬 지나 비행기에 오른다. 우리는 남미대륙을 남동에서 안데스산맥을 가로질러 북서방향으로 밤하늘을 4시간 반 동안 가른다.
새벽 2시쯤 도착한 곳은 리마의 호르헤 차베스 국제공항. 페루 최초의 조종사로서 안데스산맥을 넘던 중 추락하여 사망한 ‘호르헤 차베스 다르트넬(스페인어: Jorge Chávez Dartnell)’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곳은 잉카의 심벌인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하루에 만 명 이상이 입국한단다. 현지 가이드는 이종만 님과 만난다.
태평양에 서쪽에 두고 안데스산맥을 거대한 등뼈로 삼고 있는 페루. 이 나라에서는 요즘 인기 있는 QLED TV를 놓고 우리나라의 삼성과 LG가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단다. 또한 한국의 현대와 기아자동차가 1, 2위를 놓고 이곳에서 순위 다툼을 한다. 페루의 관광차는 스타렉스가 단연 으뜸이란다.
LG 스마트폰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가진 것이 많다’라는 뜻을 가진 페루의 수도 리마는 인구 800만 명을 거느린 대도시이다. 안데스에서 일출, 태평양으로 일몰을 이루는 페루의 수도 리마. 관광수입이 연 12억$인 페루, 그러나 그 돈을 잉카인 후손들이 만지기엔 하늘의 별 따기이다. 잉카인들은 거리에서 기념품을 팔아 단지 1~2달러를 받는 궁핍한 삶을 이어간다. 안데스의 고산지대인 이곳은 바닷가 저지대에 비하여 산소가 22% 부족하다.
두바이에서부터 현지 시간이 맞춰지지 않아 답답했던 스마트워치가 다시 작동을 시작한다. 고맙게도 가이드님이 해결해 준 것이다. 시간은 새벽 두시! 그래도 호텔에 여장을 푼다, 그곳은 San Augustin Exclusive Hotel. 여독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자는 둥 마는 둥, 얼른 샤워만 하고 다음 일정을 위해 침대에 누워 온몸에너지를 충전하였다.
6일차 2018. 11. 10(토) 마추픽추에 발을 딛다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 다시 공항으로 이동하여 6시 44분 발 LATAM LA2053 비행기에 오른다. 1시간 반 짧은 비행이지만, 안데스산맥의 상공을 비행한다.
창가에 앉은 잠시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저 안데스의 설산으로 눈길을 연속 보낸다, 멀리 구름을 뚫고 나온 산맥의 봉우리들이 섬처럼 보인다. 그리고 산의 주름진 경사면들이 내 눈을 고정시킨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종이를 접어놓은 것 같은 새하얀 능선들은 완전한 조각작품이었다. 산맥의 골짜기들이 아침 햇살을 받지 못하여 검은 그림자로 채워져 있다. 그 계곡 속에 갇힌 섬처럼 외로운 마을들. 저 깊은 골짜기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안데스의 진경, 아! 설레는 가슴, 오르가즘의 순간 같은 마음. 나는 도저히 그것을 카메라에 담지 않고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쿠스코에 가까워지나 보다. 부드러운 능선의 아래쪽엔 마을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안데스 산악에 조물주가 작품을 만들어 펼쳐놓은 것일까? 산이 길을 내어 마을을 만들고, 하늘은 구름을 모아 구름바다를 만들고, 그 위로 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산자락에 초록빛 나무군락지가 양탄자처럼 덮여있다. 다시 구름 위를 난다. 구름 사이로 각진 능선이 다시 보인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알프스의 마터호른이 여기에 온 것 같다. 만년설을 머리에 산이 다시 보인다. 드디어 7시 40분 쿠스코공항의 시원한 공기가 코로 들어온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순간 어지러움이 내 몸을 흔들었다. 해발 3,400m의 고산지대, 산소가 부족한가보다. 정신을 차리니, 쿠스코의 현지가이드 40대 아줌마 ‘사이다’가 우리를 맞이한다.
잉카와 마야의 공통점은 석조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마야의 수호신은 물, 잉카의 수호신은 태양이다. 잉카인들은 태양을 통해 절기를 구분하며 농사를 지었다. 숫자 3을 좋아하던 그들. 태양을 숭배하는 잉카인들은 해를 찾아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갔으리라. 이곳은 미세먼지와는 담을 쌓은 청정지역. 양쪽 코가 뻥 뚫린다. 우리가 단 1시간 반 만에 날아온 리마에서 쿠스코(가이드 왈, 조종사가 오줌이 마려우면 50분 만에 날아온다나, 뭐라나)까지 버스로는 20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이다.
이곳은 페루의 5대 도시, 120만이 거주하는 ‘배꼽’을 뜻하는 쿠스코. 버스에 오른다. 건조한 날씨지만, 먼지 없는 푸른 하늘이 그저 싱그럽게 내 뺨을 감싸 안는다. 깊은 산골짜기를 따라 난 길을 따라 굽이굽이 버스는 뱀의 머리가 되어 달린다. 아까부터 거리에 선거 벽보가 계속 보인다. 얼마 전 이곳의 시장 선거가 있었단다.
버스가 잠시 멈춘다. 가이드가 가리키는 산의 벼랑을 보니, 캡슐호텔이 여러 개 매달려 있다. 줄을 타고 암벽을 기어 올라가서 머무는 숙소란다. 이 캡슐호텔은 지상에서 400m 높이에 매달려 있다. 호텔 이름은 Natura Vive Skylodge Adventure Suite. 체크인을 하려면 암벽 등반과 절벽과 절벽을 잇는 외줄타기를 통해 객실을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체크아웃은 짚 라인으로 한 번에 내려올 수 있다는 게 이 호텔의 매력이다. 오르기 전 어떤 위험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 헬멧 등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벼랑을 올라야 한다. 호텔에는 침대 4개와 친환경적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태양열 전기시설을 갖추어 환경을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한단다. 식사와 와인도 해결해 주며 1박에 40만 원 정도란다. 하룻밤 저 공중에 묵어보았으며 좋았을 텐데.
집안을 한 바퀴 돌아서 나간다는 마을의 수로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하수도는 별도로 있단다. 버스에 큰 짐은 그대로 두고 페루 잉카 레일트레인 역에 도착한다. 열차 안에선 창밖의 우리를 보고 신기한 표정으로 셔터를 누른다. 나는 아내와 기차를 배경으로 요리조리 사진을 찍는다. 잠시 역 근처의 화단에 들어선다. 잉카의 칸나가 핏빛처럼 선명하다.
기차에 오른다. 인천에서 오신 70대 부부와 마주 앉았다. 거리엔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보인다. 열차에서 간단하게 점심이 나온다. 빵과 사과, 그리고 초코과자. 아내와 아메리카노커피를 시켜 잔을 부딪쳤다. 열차의 천장은 유리창으로 되어 하늘이 보인다. 밤이라면 남반구에서나 볼 수 있는 남십자성을 비롯한 새로운 별들을 볼 수 있겠지. 증기기관차가 기적소리를 뿜는다. 40분 정도 이동 우르밤바 강가의 오얀타이탐보역 도착했다.
키 작은 잉카인들이 거리를 오간다. 비록 그들의 삶은 고단하겠지만, 원색빛깔의 복장이 화려하게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드디어 잉카인들의 삶 속까지 들어왔다. 잘 생긴 원주민 남자와 사진을 한 판 박았다. 여기도 관광지인지라 호텔과 상점들이 즐비하다. 순간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에 간 것이었다. 쿠스코에서 아내를 한참 찾았는데, 이곳 오얀타이탐보역에서 화장실에 간 아내가 또 없어져 걱정을 걱정을 한 번 더 추가했다.
13:45분 버스에 올라 마추픽추로 향한다. 길가엔 비닐, 플라스틱, 종이컵, 과자봉지들이 뒹군다. 세계적인 관광지가 이래도 되는 건지. 잠시 후 산악도로를 탄다. 굽이굽이 아리랑고개, 쓰리랑고개,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이 낭떠러지에서 브레이크라도 파손된다면 그대로 지옥행이리. 버스에서 내렸다. 마지막 산언저리는 걸어서 오른다. 숨을 몰아쉰다. 드디어 마추픽추가 눈에 들어온다.
남아메리카 하면 떠오르는 유적지, 마추픽추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 우르밤바강(아마존강의 원류)을 따라 북서쪽으로 114킬로미터 올라간 해발 2,280m에 1400년쯤 건설되었다고 추정한다. 그곳 마추픽추(Machu Picchu, 늙은 봉우리)는 1911년 미국의 하이램 빙엄(Hiram Bingham)이 발견했다. 그 전까지 안데스의 깊숙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수백년 겨울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으로부터 정복당하여 대부분 파괴된 잉카 제국의 다른 유적들과 다르게 원형을 거의 유지한 채로 발견된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인 상하, 좌우, 남녀, 시간과 공간의 기준에 따라 의도적으로 정교하게 건설되었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다.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퓨마의 형상으로 보인다.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안데스의 맹금류인 콘도르가 날고 있는 것 같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이다. 잉카인들은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산꼭대기에 이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마추픽추는 인간의 손에 의해 다시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500년의 시간 동안 깊고 깊은 밀림의 고독한 봉우리에서 어떻게 잠들어 있었을까? 이 가파른 벼랑으로 둘러싸인 산꼭대기에서 잉카인들은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오늘날과 같은 장비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크고 무거운 바위들을 산 정상까지 옮길 수 있었을까? 자연이 아닌 인간에 대한 신비와 경외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마추픽추가 아닐까나?
하늘 위의 도시 마추픽추에서 아내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포즈를 취해 본다. 원주민 가이드가 우리 부부에게 관심을 보이며, 전용 사진 기사처럼 대해준다. 여러 가지 포즈를 만들어주며, 촬영해 준다. 유적 아래의 경사면엔 오랜 세월을 견딘 이곳에 살던 잉카인들의 계단식 밭들이 우리들에게 경이로움을 보내주고 있었다.
라마 몇 마리가 그 옛날 이곳에 살던 잉카인들의 비밀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하루쯤 더 머무르며, 바로 앞의 와이나픽추에 한번 올라가보고 싶은 충동이 순간 밀려왔다. 마추픽추엔 잉카트레킹도 있다는데 말이다. 2박3일 코스, 5박6일 코스 등이 있단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더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
하늘의 도시 마추픽추를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견뎠을까? 그 목숨들이 눈을 감았을까?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육대주에서 여행자들이 오늘도 파도가 되어 밀려들고 있다. 옛날 잉카인들은 왜 안데스의 첩첩산중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완벽한 도시 하나를 이곳에 세웠을까?
스페인의 침략을 받은 잉카인들이 그들을 피해 황금을 가지고 건설한 최후의 도시였다는 주장이 있다. 어떤 학자는 종교적인 목적의 도시였다는 학설을 펼치기도 한다. 혹자는 단순히 잉카 왕족의 여름 피서를 위한 별장이었다고도 하지만, 아직도 정확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20:55분 기차에서 내려 우리 전용버스에 올라 22시경 우리가 묵을 우루밤바에 도착한다. 저녁식사 후 San Agustin Urubamba & Spa Hotel에서 또 하루의 피로를 풀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7일차 2018. 11. 11(일) 잉카의 심장 쿠스코
새벽 5시 반에 이르게 아침식사를 한다. 길가의 높은 산에 숫자가 새겨져 있다. 궁금하여 가이드에게 물으니, 밤이면 LED로 빛나는 광고물이란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쿠스코를 탐방하는 날. 쿠스코는 세계에서 가장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문명의 하나인 잉카제국의 수도이다. 안데스산맥의 해발 3,400m 높이에 ‘중앙부'라는 뜻의 케추아 인디언어에서 이름이 유래된 쿠스코, 역사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와 주변지역에는 우아타나이강이 흐른다.
사크사우아만 요새, 태양신전, 주거지 등을 비롯해서 넓디넓은 잉카 문명의 유적들이 즐비하다. 1650년에 발생한 강력한 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지만,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쿠스코는 후에 주로 그림·조각·보석류·장식목공품 등 훌륭한 예술품을 다량 생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첫 번째 모라이(Moray) 계단식 농경지에 들어선다. 모라이 유적은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38km 떨어진 곳에 있다. 근처에는 해발 3,500m 산중에 Maras마을이 있다. 모라이는 1932년 미국 탐험가 로버트 시피와 조지 존슨이 항공 촬영 중 발견하였다. 깊이가 30m쯤 되는 겉모습은 원형경기장과 비슷하다.
내 상식으로 보면 아마 화산이 분출할 때 생긴 분화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각 계단마다 온도와 습도 일조량이 달라 어떤 작물이 잘 자라는지 연구하는 시험장이었단다. 이곳에서는 감자, 옥수수, 밀, 키노아 등이 재배되었다.
오늘도 맑디맑은 공기가 온몸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있었다. 동심으로 돌아간 아내와 설산을 배경으로 점프도 하고, 기차놀이도 하면서 추억의 앨범을 만든다. 오늘 새벽 쿠스코에 지진이 있었다는 겁나는 소식이 들려온다.
다음은 살리네라스염전. 해발 3,380m 산비탈에 층층이 만들어진 살리네라스(Salineras, 소금마을)에 도착했다. 천천히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밤새 내린 눈이 덮인 것 같은 계단식 농경지. 그것은 소금(살리)이 하얗게 쌓여 있는 계단식 염전이었다. 이 높은 산골짜기에 어떻게 소금밭이 만들어졌을까?
지질시대에 안데스산맥은 바다였으리라. 판구조론으로 설명을 한다면, 움직이는 태평양판이 아메리카판 아래로 파고들면서 융기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높이 솟아올라 안데스산맥이 만들어지고, 바닷물과 함께 올라와 그곳에 염전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이나 미국의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염호처럼 말이다.
살리네라스 염전은 우연히 만들어졌다. 이 지역을 지나던 잉카인들은 흐르는 물이 짠 것을 알았다. 그들은 좁은 통로를 통해 계단식 밭으로 염분이 가득한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이 밭에 모아진 소금물은 안데스의 뜨거운 햇살에 증발되어 하얀 결정체를 낳은 것이다. 지금도 이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어 그들은 살아가고 있으니, 그 당신 잉카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살리네라스에는 3,000여 개 소금밭이 있다. 소금밭 하나의 면적은 4~10㎡, 깊이는 10~30cm 정도이다. 하나의 소금밭에서 한 달에 700㎏ 정도 소금을 수확하는데, 이것이 마을 사람들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란다. 착한 아내는 기념으로 소금을 2kg이나 사며, 그들의 삶에 보탬을 주고 있었다.
다음은 3,300m 고지의 친체로마을, 잉카인 재래시장으로 간다. 이곳은 잉카인들의 생활의 터전. 싱싱한 안데스의 농산물, 간단한 공산품, 기념품들이 우리 눈을 유혹한다. 시장입구에서 잉카인에게 옥수수 하나를 사먹었다. 알이 매우 굵은 놈이 강원도 옥수수보다 훨씬 고소한 맛이었다. 아내는 시장에서 목도리, 스웨터, 그리고 마추픽추 모자를 산다. 그리고 빨강, 파랑, 노랑 빛깔로 치장한 잉카인 원주민과 몇 장의 사진을 찍는다.
이어 쿠스코의 아르마스광장으로 버스가 우리의 발길을 옮겨준다. 페루국기와 잉카의 국기가 어깨를 맞대고 펄럭이고 있었다. 스페인 침략군들이 잉카의 수많은 건물들을 파괴하고 남은 자리. 그러나 아르마스광장은 잘 가꾸어진 조경과 분수대, 그리고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잉카인들의 삶을 음미하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광장의 양옆에는 아름답기로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성당과 라 콤파냐 데 헤수스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안내원에게 화장실을 물으니, 스타벅스로 가라고 알려준다.
점심은 수프, 빵, 쇠고기, 닭고기, 과일 등이 나왔다. 출출한 배를 채우니, 다시 힘이 생겼다. 잠깐 빗줄기가 슬쩍 왔다가 금방 사라진다. 괜히 우산만 적셨다. 원주민에게 셀카봉을 사서 사진을 찍어본다. 마을 노신사들과도 기념촬영을 하였다. 광장 주변에는 여행사와 상점, 레스토랑이 밀집된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다.
여행자들이 오가는 길을 따라 엽서를 파는 소년이 보인다. 여행사의 호객행위를 하는 아저씨, 원주민 전통 복장에 새끼 라마와 함께 사진을 찍어 주며, 삶을 이어가는 잉카인의 후손들.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광장의 평화로운 모습과 이곳의 옛 주인이었던 잉카 제국 후손들의 초라한 모습. 잉카제국의 몰락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명암이었다. 15:30분 쿠스코 시내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른다.
18:02 Avianca항공 Av830 비행기에 오른다. 쿠스코공항에서 하늘로 올라 1시간 반쯤 걸려 리마공항에 도착하였다. 다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행 22:09 Av965 비행기로 몸을 옮긴다. 리마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잠시 태평양쪽으로 향했다가 기수를 돌려 안데스산맥을 타고 오른다. 어둠에 잠긴 심야의 비행이라 밖을 볼 수 없다. 아쉽다, 핑게를 대며 잠이나 자야겠다.
8일차 2018. 11. 12(월) 하늘에서 하룻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별빛의 양탄자를 깐 새벽의 도시이다. 04:28 비행기는 우리를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내려놓는다. 날이 환하게 밝아온다. 그리고 07:50분 다시 아르헨티나항공(Aerolineas Argentinas) 체크인이다. 15kg까지만 통과시킨다 하여 캐리어의 짐을 다시 쌌다. 짐을 부치고, 검색대를 통과한다. 상자가 부족한지 그냥 컨베이어벨트 위에 짐과 소지품을 놓으란다.
흩어진 배낭, 륙색, 지갑, 벨트, 모자…. 기분이 껄쩍지근했다. 순간 아르헨티나의 불친절이 기분을 다운되었다. 기다리는 시간,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내가 목마르단다. 얼른 물 한 병을 사러 갔다. 그런데 줄이 만만치 않게 길었다. 인내력으로 견딜 수밖에. 10시가 다 되어 아침 기내식이 나온다. 그것은 초코파이와 비슷한 Tofi라는 빵 하나에 물 한 잔이다. 구름의 늪지대를 지나 바다가 나온다.
AR1824 비행기로 3시간 15분 비행, 10:51분 머나먼 남극대륙에 인접한 파타고니아의 엘 칼라파테공항이다. 9개월짜리 아기를 둔 장미희 가이드를 만난다. 그리고 실습중인 김철웅 보조가이드도 함께. 대륙을 횡단하는 강행군의 연속이다, 그러나 마음은 계속 설레임의 연속이다.
늘씬한 미루나무들이 우리를 반긴다. 점심은 Isabel 레스토랑, 빵, 만두, 파스타, 밥이다. 후식은 검은 빛깔의 칼라파테 아이스크림. 파타고니아 지방엔 오디 모양의 칼라파테라는 열매를 많이 재배한단다. 동맥경화, 혈관, 항암작용, 노화방지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최근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단다. 레스토랑 지붕 위의 멋진 풍광을 사진을 내가 찍으니, 일행들도 죄다 따라 일어나 변화무쌍한 구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칼라파테 호텔(Lagos Del Calafate Hotel)에 짐을 푼다. 호텔 앞에는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국기가 펄럭인다. 그런데 태극기는 안 보인다. 내 한 마디에 가이드는 다음 한국에 가면, 태극기를 가져다 반드시 게양하겠단다. 박력 있는 그녀의 애국심이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엘 칼라파테의 마을과 거리를 누빈다. 아르헨티노 호수 길을 따라 아내와 데이트를 한다. 2만 5천명이 거주한다는 엘 칼라파테, 페론 전 대통령의 고향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20년 전에는 800명이 거주했다니 말이다. 소나무, 미루나무 가로수가 싱싱하다. 넓디넓은 호수에 홍학이 여유롭게 먹이를 쪼며, 우아한 날갯짓으로 남반구 끝의 멋을 뽐내고 있다. 햇빛에 반사되는 물빛에 눈부시다. 현지 가이드와 함께였지만, 일행들이 많이 피곤해 한다. 어서 호텔에 가서 쉬자고 하는 사람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며, 12월 남반구의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파타고니아, 지도에서만 봤던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그렸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그려진 파타곤은 평균 키가 155cm였던 스페인 사람에 비해 거인인 180cm 정도의 장신족 떼우엘체 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아내와 남미에 온다고 급하게 준비한 새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영장으로 직행이다. 감촉이 적당히 좋게 따뜻한 물이다. 호사스러운 수영장에서 아내와 단둘이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수영 잘하는 아내가 자유형, 배형 시범을 보인다. 수영을 배운 적이 없는 나는 어려서 고향에서 놀던 개구리헤엄이다. 아내가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도 찍는다. 시내 산책할 때부터 피곤하다던 우리 일행들은 분명 단잠에 빠졌을 것이 뻔하다.
저녁식사는 양 아사도. 내장을 뺀 양을 펼쳐 통째로 불길을 멀리하여 서서히 구워내는 것이다. 고기를 먹는 것보다는 아사도를 만드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9일차 2018. 11. 13(화) 아! 파타고니아 엘 칼라파테
아! 내 생애 동경하고 꿈에 그리던 지구의 끝,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스페인어: Patagoña→Patagonia, 빠따고니아)는 남아메리카의 최남단 지역이다. 남위 40도 부근을 흐르는 콜로라도강 이남 지역.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양국에 걸쳐 은둔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사람들을 기다리는 땅이다.
파타고니아의 서쪽에서 남쪽으로는 남아메리카의 등줄기 안데스 산맥, 그리고 동쪽으로는 고원과 낮은 평원을 이룬다. 파타고니아의 75%는 아르헨티나, 15%가 칠레 땅이다. 이곳은 연중 기온은 낮고, 바람이 센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국 탐험가 에릭 시프턴(Eric Shipton)이 왜 이곳을 '폭풍우의 대지'라 불렀겠는가?
파타고니아의 대명사가 바로 바람이기 때문이리라. 태평양으로부터 거센 편서풍이 안데스 산맥을 넘는다. 물기를 가득 실은 바람이 푄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칠레 쪽엔 비가 많이 올 수밖에 없다. 이곳 안데스의 서부는 연간 강수량이 5,000mm를 넘는 곳이 허다하다. 파타고니아에 형성된 대규모 빙하는 바로 이 엄청난 양의 강수로 인한 것이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아내는 짐정리를 한다. 철없는 나는 혼자 호텔 저편 로터리를 건너 칼라파테주민센터까지 걸었다. 그리고 그곳을 배경으로 셀카도 찍었다. 어제 버스를 타고 오면서 건물과 눈에 띄는 상징물을 보았으니,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나.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엘 칼라파테. 아침식사 중 순간 위장을 훑듯이 배에서 통증이 지나갔다.
머나먼 남미까지 와서 아프면 큰일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버스로 한 시간 반쯤의 거리. 길옆에 펼쳐진 385km의 구비구비 큰뱀자리 같은 아르헨티노 호수가 옥빛으로 눈에 들어온다. 호수라지만 육지로 깊게 들어온 만처럼 보인다. 고개를 드니, 언덕에서는 안데스의 독수리인 콘도르가 토끼를 사냥하고 있었다. 내 눈이 순간 포착은 잘한다. 아마도 파타고니아의 하늘과 아르헨티노호수의 빛깔이 어우러져 아르헨티나 국기가 탄생했겠지.
마테차를 마시면서 눈을 돌린다. 버스 차창으로 들어오는 호수가 눈부시다. 남극의 자태를 발산하는 저 물의 평원, 그 옛날 이곳에 ‘인어쯤은 살고 있지 않았을까?’잔잔한 호수 위로 유빙이 여기저기 주인을 기다리는 나룻배처럼 머물러 있었다. 그 위에서 자태를 뽐내는 저 푸른 빛깔의 유빙은 웁살라빙하에서 떨어져 나와 바람에 밀려 이곳까지 밀려왔단다.
호수 곁 풀밭엔 아르헨티나의 말들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밭 위엔 홍학 무리들이 자신의 붉은 빛깔 깃털과 몸매를 뽐내며,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멀리 설산이 보인다. 여기가 바로 우리나라에서 지구의 반대쪽 아르헨티나, 한국과 정확히 12시간 시차가 나는 남극으로 가는 길목이다. 하마의 잔등 같은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의 능선들이 내 마음을 진정시킨다. 플라멩고라고 부르는 홍학 200만 마리가 여름 내내 서식한다는 이곳, 스마트폰을 꺼내 차창 밖의 장면을 담는다.
드디어 버스가 멈췄다. 도착한 곳은 페리토 모레노빙하. 남북극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답다는 이곳이다. 억겁의 시간 동안 한없이 다져진 빙하의 얼음들. 그들이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광채를 내며,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유람선이 우리들을 빙하 가까이로 데려간다.
선실에 있던 세계 곳곳의 인종들이 갑판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연발 감탄사를 토해낸다.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연신 교차한다. 얼음 산이 우리에게 슬금슬금 접근한다. 순간 꽈과광 꽈광… 천둥소리가 들린다. 빙붕(氷棚)현상에 내 눈의 광도가 높아졌다.수십 미터 크기의 빙하가 추락하는 파열음, 내 가슴 속에서는 태풍처럼 파도가 친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폭 5km, 길이 35km이며, 표면적은 195km2에 이른다. 호수와 맞닿은 부분의 높이는 평균 60m 정도이지만, 가장 높은 곳은 100m에 다다르기도 한다. 이 빙하는 기온의 상승으로 인해 움직임이 활발한 편이기 때문에 다른 빙하에 비해 자주 붕괴되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끄는 것이다.
빙하의 생애를 마친 파편들이 푸른 물 위에 즐비하다. 전망대가 생기기 이전에는 이러한 파편을 맞고 천국으로 직행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멀리서 보기에는 작은 얼음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파트 한 채 이상의 얼음덩이가 수십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그 위용을 방금 실감했다. 휴대폰이 왜 셔터를 누르지 않느냐고 몸을 흔든다.
전망대에 올라 다시 빙하를 본다. 순간 또 다른 굉음, 빙하가 또 떨어져 나온다. 내가 그렇게 그리던 파타고니아의 클라이막스였다. 언제 다시 지구 정반대 쪽 파타고니아에 와보려나.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아내에게는 얼른얼른 포즈를 취하라고 독촉한다. 인천에서 온 노신사 부부와 이야기를 하던 중 아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게 사랑의 포즈를 취하잔다. 그리고 입을 먼저 내민다. 노신사의 아내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준다. 계단에서는 빨간 옷을 입은 독일인을 만나 사진을 찍는다. 그들도 카메라로 우리와 함께한 포즈를 담아간다.
점심식사는 공원 내 레스토랑. 눈은 창밖의 빙하 쪽으로 보내놓고, 저작운동을 한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식사자리가 있을까? 음식이 코로 넘어간다. 저녁식사 장소는 어제 단잠을 이룬 칼라파테호텔. 장미희 가이드가 한국식 특별음식을 내놓는다.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어머니의 작품이란다. 파타고니아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민들레 쌈, 한국 토종고추장에 기름기 잘잘 흐르는 쌀밥까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남위 50도, 밤 9시가 거의 되었는데도 해가 떠있다. 저녁식사 후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어깨 가방에 손을 넣어 본다. 그런데 여행메모 수첩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앞이 캄캄하다. 의자의 밑에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가이드를 통해 호텔에도 연락해 보았지만, 알 수 없다는 대답뿐.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여행일기를 어떻게 써야할지… 몇 년 전 중국 태항산에 갔을 때도 여행수첩을 잃어버려 여행기를 못 쓴 적이 있었는데…
칼라파테공항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행 표를 사는 도중 호텔에서 수첩을 찾은 것 같다는 소식이 왔다. 다행이었다. 순간 기쁨이솟았지만, 아직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는 단계. 아마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기 전 내가 덥다고 가방을 후다닥 내리면서 옷을 벗는 사이 그놈이 소파에 숨은 것이 아닐까? 그 중요한 녀석을 확인도 안하고 버스에 올랐으니, 내가 바보지, 확실한 바보, 이런 바보가 세상에 또 있을까나? 언제쯤 그 수첩이 내게로 돌아올 수 있을런지…
20:20분 Aerolineas Argentinas항공 AR181편 항공에 올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다. 항공기가 아르헨티노호수를 배경으로 날개를 활짝 펴고 이륙한다. 양털처럼 이어지는 호숫가 들풀의 향연, 호수 건너 석양을 받아내는 언덕이 우리에게 다음에 또 오라고 손을 흔든다. 남반구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코끼리 등 같은 능선들이 구름의 틈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아르헨티노호수를 쓰다듬으며 비행기는 난다. 저 멀리 눈 덮인 산들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구름의 터널을 뚫고 비행기는 항진한다. 20:54분 드디어 석양이 지평선 아래로 숨는다. 구름 낀 밤의 터널 속으로 비행기는 날아간다.
부에노스아리레스에 가까워지면서 비행기가 반쯤 미친듯이 몸을 흔든다. 사람들 모두가 긴장하여 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겁을 먹은 듯 조용한 비행기 안에 간간이 들리는 신음소리. 두려움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한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까지도 정적은 그치지 않았다. 흔들리던 비행기가 아슬아슬하게 활주로에서 멈춘다. 적막을 부수며 안도의 박수소리가 비행기 안을 가득 채운다. 그제야 부에노스아이레스공항의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짐을 찾고, 잠시 후 가이드가 내게 다가와 카톡사진을 보여준다. 칼라파테의 호텔에서 수첩을 찾았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내 눈으로 그 녀석을 확인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집 나간 자식을 찾은 느낌? 이제 여행일기를 제대로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하늘 위로 상승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여 박우현(디에고) 가이드를 만난다. 심야버스로 이동하여 SCALA호텔에 여장을 푼다. 자정을 지나 현재시간 01:30분.
10일차 2018. 11. 14(수) 남미의 빠리 부에노스아이레스
06:30분 잠에서 깨어 호텔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앞에 펼쳐지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를 내려다본다. 어제 가이드가 이야기한 한 22차선 그 도로, 폭이 110m에 이르는 ‘7월 9일 대로(스페인어: Avenida 9 de Julio)’이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의 독립기념일(1816.7.9)을 상징하는 것. 호텔 문을 열고 나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에 발자국을 찍는다. 폭이 세계에서 가장 넓다는 길인데, 차가운 공기 속의 두 차선만 건너보았다. 아르헨티나의 아침 바람과 함께 바오밥 비슷한 나무가 보인다.
파라나강과 우루과이강이 합류하여 만들어진 라플라타강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하늘이 사계절 푸른 나라. 축구선수 마라도나, 메시로 유명해진 나라, 아르헨티나. 스페인어보다는 자신들의 고유어인 카트샨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주체성이 강한 나라. 인구는 약 4천 6백만 명으로 많지 않지만, 국토는 우리나라의 28배의 광활한 땅을 가진 국토 세계 8위의 부러운 나라. 지리시간에 공부한 팜파스에는 현재 5천만 마리의 소가 풀을 뜯고 있다는 나라다.
아르헨티나의 넓은 땅은 다양한 종류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세계에서 열대우림과 빙하를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이다. 밀림은 북부 후후이, 미시오네스, 이과수 지역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폭포, 안데스가 만든 빙하를 남부 파타고니아와 티에라델푸에고 지역이 품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아르헨티나는 서쪽에 칠레, 북쪽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동쪽은 우루과이, 북동쪽은 브라질과 몸을 맞대고 있다. 남동쪽에는 4,725km에 이르는 대서양 해안이, 서쪽과 남서쪽에는 안데스 산맥과 파타고니아고원이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남쪽 끝에서 북동쪽으로 약 5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이곳의 주권을 주장하며 1982년 잠시 점령했다. 그러나 영국 공군이 바로 폭격을 앞세워 제압하고 만다. 적의 공습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만 몸집만 큰 허깨비 아르헨티나. 역시 국력은 국방력, 즉 펀치가 말해주는 것이리라.
09:30분 체크아웃 후, 드디어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로 간다. 원래 도시의 북부부터 돌아볼 예정이었지만, 이곳의 시위예정 뉴스가 전해진다. 하는 수 없이 오전에 우선 남부지역부터 투어가 시작된다. 먼저 5월 광장이다. 여기는 남반구, 비록 11월이지만, 우리나라의 5월과 같은 늦봄의 계절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마치 아르헨티나의 국기처럼 몸을 활짝 펴고 있다. 열대의 푸른 나무들이 싱그럽다. 공원의 맑은 공기가 몸 깊숙이 들어와 폐를 깨끗이 씻어낸다. 보랏빛 꽃이 만개한 자카란다나무 가로수들이 우리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대통령궁, 법원건물, 은행, 세무서가 보인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대성당으로 들어간다. 이곳엔 아르헨티나는 물론 칠레, 페루 등 남미의 많은 나라를 독립시켰다는 산 마르틴 장군의 묘가 있다. 100년간 꺼지지 않았다는 작은 횃불이 일렁이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두 명의 노인이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모습이 정겹다. 사람들이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무엇을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일까? 그리고 신부님께 고해성사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나도 아내와 함께 잠시 두 손을 모아본다. 순간 아내의 얼굴에는 눈물이 촉촉하게 배어있었다.
보카주니어 축구팀으로 유명한 라 보카지구로 향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10대 강국이었다는 아르헨티나. 현재의 로마교황의 나라. 마라도나, 메시가 축구광들을 미치게 하는 나라. 월드컵에선 항상 우승후보인 축구를 빼면 아무 것도 아닌 나라.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를 억수로 사랑하는 나라. 하지만, 정치인들의 달콤한 복지정책, 오랜 기간 포퓰리즘이 판치고 있는 나라, 그래서 국가경제가 다 무너져 온 나라가 흔들흔들한다는 괴물국가, 덩치만 컸지 우리보다 훨씬 못 사는 바보 같은 나라. 잠시 가이드는 대한민국의 요즘 정치상황이 이곳을 닮아가는 건 아니냐고, 우려스럽다고 진단한다. 젊은이들이 부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오직 축구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라. 아르헨티나 축구선수의 70%는 바로 빈민가 출신이란다.
드디어 라 보카지구. 길거리의 자카란다나무들의 보랏빛이 환상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알록달록 원색의 벽화가 나를 동심의 세계로 빠트린다. 남녀가 끈적끈적 탱고를 춘다. 사람들이 자석처럼 주점으로 끌려들어간다. 마라도나 모습의 플라스틱 동상들이 길거리에 서있다.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나는 현지인들과 사진을 찍어본다. 190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는 밀과 소고기 수출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들은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당시 이민자들을 실은 배가 도착하고, 그들이 집단을 이뤄 살던 빈민촌이 바로 이곳 라 보카 지구란다.
빈민촌으로 출발했던 곳이라기엔 원색의 건물들과 세련된 레스토랑들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내와 손잡고 걷다가 고개를 드니, 빠의 위층에서는 마라도나가 우리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마라도나는 바로 이 라 보카 지역에서 나고 자라나 세계적인 축구의 스타가 되었다. 강아지에게 원색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으라고 부른다. 뒷다리를 바지처럼 입힌 개도 내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몸매 쭉 뻗은 아가씨와 탱고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라고 호객꾼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나도 한 컷 찍을까 하다가 뒤로 물러섰다.
이곳에 온 이민자들은 빈민촌이었기에 엄청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이곳은 다른 지역과의 지역갈등이 심하다고 한다. 벽에는 보카지구의 역사를 설명하는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이민자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도착하는 모습,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빈민들로부터 시작된 탱고의 모습이 이곳의 풍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빛깔은 알록달록하지만 자세히 보면 낡은 벽돌 외벽에 그대로 페인트 칠을 해 놓은 것이다. 원래 이곳에 살던 가난한 이민자들이 항구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얻어와 집에 색을 칠하면서 화려한 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 아르헨티나의 유명인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동상이 보인다. 나는 교황님과 함께 했다고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아르헨티나엔 한국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자제품만큼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의 70%가 삼성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니 말이다.
점심은 고기, 튀김, 일식… 무엇을 접시에 담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음식이 풍부하다, 마치 음식백화점 같은 느낌이다. 오후엔 부촌이 많은 북부지역 탐방이다. 내년에 대통령선거가 있단다. 과연 아르헨티나가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설 것인지, 그냥 쓰러질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눈이 오지 않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 곳. 봄엔 자카란다나무가 보랏빛 물결을 이루고, 가을엔 아카시아나무가 노란빛깔로 도시의 길거리를 장식한다는 이곳이 바로 남미의 빠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다음은 1822년 지어졌다는 총 4천 8백기의 무덤이 있는 레콜레타 묘지이다. 이곳의 작은 묘지에 일반인이 안치되려면 5억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단다.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묻혀 있고, 많은 묘들이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역대 대통령, 정치인, 유명 연예인 등 많은 사람이 이곳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곳은 바로 ‘에비타’의 묘. 에비타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자라 유명배우로 활동하다가 결국 페론 대통령의 부인이 된 에바 두아르테(Eva Duarte)의 애칭이다.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가난한 민중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던 이 여인은 34세에 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에비타(Evita)의 이야기는 뮤지컬, 영화 등으로 제작되어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365일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그녀의 묘엔 꽃다발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의 묘들은 세계의 다양한 건축양식 모두 보여주고 있었다.
오페라하우스를 개조해서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엘 아테네오서점이다. 내부를 들어서니, 원형의 웅장한 내부구조와 조명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책들이 위용을 더해 주고 있었다. 엘 아테네오는 처음에 극장이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서의 첫 유성영화를 상영했던 이곳은 2000년대 이후로 서점으로 바뀌었다.
세상에서 제일 클 것 같은 400년이나 되었다는 고무나무를 본다. 열대지방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 위용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동쪽의 가지들은 쇠기둥으로 받치고 있었지만, 서쪽의 굵은 가지들은 아예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이제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공항으로 향한다. 길가엔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잔디밭이 물에 잠긴 모습이 보인다. 20년 동안 3번째의 홍수라고 한다. 체크아웃 후, 가이드가 준비해 온 김밥을 먹는다. 고추장을 곁들이니, 혓바닥이 춤을 춘다. 21:20분 밤하늘로 날아오른다. 남미의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야경이 다시 눈부시게 들어온다. 3시간쯤 지나 밤 비행기는 우리들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내려놓는다.
11일차 2018. 11. 15(목) 하늘에서 또 하룻밤
공항에서 대기하던 우리 일행은 Emirates항공 EK247에 올라 다시 아라비아반도의 두바이를 향해서 또 날아오른다. 비행기는 남아메리카를 떠나 대서양을 횡단하기 시작한다. 적도를 넘는다. 드디어 남반구에서 북반구의 하늘을 난다. 9,988m 상공, 732km/h의 속도로 검은 새가 되었다. 불빛만 깜박깜박거리며, 밤하늘을 뚫고 나간다. 귀에 수신기를 꽂고 노래를 듣는다. 좌석의 모니터를 통해 대서양을 횡단하는 모습을 본다.
비행기는 아프리카의 상공을 통과한다.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이지리아 상공을 난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중부 내륙국 차드를 통과한다. 이어서 수단이다.‘흑인들의 땅’을 의미하는 이 나라는 우리나라 이태석 신부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룬 땅으로도 내 가슴에 깊이 박혀있는 나라이다. 비행기는 홍해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심부 아라비아반도를 횡단한다. 그리고 중동의 부국 아랍에미리트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기내에서 식사를 연속으로 4번이나 했다. 장장 14시간의 긴 비행이었다. 이곳 시간 22:45분, 두바이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호텔에 여장을 푼다.
12일차 2018. 11. 16(금) 사막의 기적을 보다
08:00 아침식사 후, 아내는 화장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두바이가 궁금한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갔다. 중동 사막의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이른 봄의 황사 하늘처럼 고약하다. 주민들이 사는 것 같은 아파트가 보인다. 베란다에 빨래가 걸려있다. 세탁소, 미니 슈퍼마켓, 그리고 무슬림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가 눈에 들어온다. 고층아파트 옥상 위에 야자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고 있었다.
여기는 아랍에미리트연합(United Arab Emirates). 아부다비·두바이·샤르자·라스 알카이마·아즈만·움 알 카이와인·푸자이라 등 7개의 토후국(Emirates)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남한보다 약간 작은 면적에 인구는 600여만, 수도는 아부다비. 여름에는 때로 50℃까지 오르는 사막성기후이다. 비가 그리운 나라, 몇 방울의 비도 계절에 따라 다르단다. 막대한 양의 원유와 천연가스가 사막 위에 세계 최첨단 도시를 만들어 놓았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스 못지 않게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현대판 도시, 두바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에 하천이나 강이 없기 때문에 농업조차 곤란한 곳. 여기에도 코리아가 있었다. 아랍에미리트에는 우리나라의 두산에서 건설한 바닷물 담수화 공장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상수도로 하여 사계절 목을 축이고, 거리마다 스프링클러를 연결하여 나무들을 키운다. 길거리의 화초들은 작은 고무호스를 통하여 물을 공급받고 있었다. 공산품으로는 비료·알루미늄·시멘트·플라스틱 등이 일부 생산될 뿐이다.
두바이는 제주의 2배, 서울의 6배 넓이의 도시이다. 아랍에미리트의 국부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Sheikh Zayed bin Sultan Al Nahyan)’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1918년 태어난 그는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누아얀(KHALIFA bin Zayid al-Nuhayyan)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어린 시절 사막에서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꿈을 키우며, 이슬람의 기본원리와 베두인식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셰이크 자이드는 1953년 영국과 프랑스의 선진문화를 만나면서 근대화의 필요성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원유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을 학교, 병원, 도로와 주택 건설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청춘을 바쳤다.
셰이크 자이드는 1966년 아부다비의 통치자가 되었고, 마침내 1971년 7개 연방이 연합하여 세운 아랍에미리트연합(United Arab Emirates)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5년마다의 대통령 선거에서 계속 재선되어 30여 년 동안 집권하였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종교적 관용과 평등, 여성 인권의 존엄성, 환경문제 등을 정치에 반영하는 등 위대한 정치적 족적을 남기고 2004년 11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거리마다 이 나라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세이크 자이드의 초상화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기적의 현장, 이곳 두바이는 현재 86%가 외국인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국가에서 배급하는 돈으로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다. 일부의 근로자들은 주로 관공서에서 일을 한다. 대부분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필리핀 사람 등 외국인들이 주로 이곳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 결국 외국인들의 노동이 이 나라의 경제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이곳의 한국인들은 주로 대기업 주재원, 외교관으로서 근무하고 있다. 이곳은 날씨가 더운지라 수도꼭지에서는 찬물이 나오지 않는단다. 보통 40℃의 물이라니, 더운 날 샤워 한번 시원하게 할 수 없겠구나.
돛단배 모양을 한 321m의 두바이 랜드마크 7성급인 ‘버즈 알 아랍 호텔’을 보러 ‘주메이라 비치’로 간다. 이곳은 두바이에서 가장 유명한 바닷가. 적도바다의 산호섬처럼 에메랄드 빛 맑은 걸프만의 푸른 물결이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수영과 선텐을 즐기는 사람들이 인간시장을 이루었다. 이곳은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아직도 영국인의 부자들이 많이 거주한다.
다음은 전통 아랍풍의 건축양식인 엷은 황색의 메디나 주메이라. 기념품과 다양한 생활용품을 갖춘 가게들이 즐비하다. 그 안에는 건물에 달린 작은 인공연못이 산뜻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내와 사진을 찍고 화장실도 다녀온다. 그리고 컴퓨터로 운행된다는 무인 모노레일에 오른다.
팜 주메이라(Palm Jumeirah)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정부 소유의 기업 나킬이 만든 페르시아 만의 인공섬이다. 이 섬은 하늘에서 보면 야자수 모양을 띤다. 바다에 만든 세계 최초의 인공섬. 하나의 야자수 이파리 모양은 길이가 5km, 그리고 끝부분의 방파제는 11.5km이다. 모노레일을 타고 팜 주메이라의 외관을 눈에 넣으며, 버스로 스쳐지나간다. 중간 중간에 인공섬 사이의 물길이 눈부시다. 어떤 사람들이 여기에 살고 있을까? 나도 이곳에 와서 낙타를 타며, 무슬림이 되어 한 달쯤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다음은 버즈 칼리파(Burj Khalifa). 이 건축물은 높이 828m의 163층짜리 빌딩으로서 2015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나라의 삼성물산이 건설하여 2010년에 문을 연 곳이다. 21세기 최첨단 공법으로 건설된 이 빌딩엔 호텔과 주거시설, 사무실, 쇼핑센터들이 층층이 들어서 있다. 우리는 두바이의 랜드 마크인 버즈 칼리파를 그저 겉모습만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어서 베네치아에서 이름을 빌려와 가이드가 작명했다는 호수, 일명 두네치아. 그곳의 아브라 수상택시에 오른다. 교통체증이 심한 두바이에서 사랑받는 교통수단이란다. 오가는 배에 탄 낯선 인종들끼리 서로 손짓을 한다. 가이드가 이곳 두바이에서 재배된다는 야자열매로 만든 만수루라는 과자를 하나씩 나누어준다. 쫀득쫀득 맛이 달콤한 것이 먹기에 괜찮았다. 이곳 두바이에선 야자 이외의 과일은 모두 수입에 의존한다.
배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구도시의 금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64kg 무게의 금반지가 광채를 내며, 보석상 앞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나는 관광객마다 진열장에 손을 대고 사진을 찍는다. 금시장을 걷다가 골목으로 눈을 돌린다. 그 때,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 까무잡잡한 청년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약간은 겁이 났지만, 그를 따라가 보았다. 파키스탄 사람인 그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물건을 몇 개 만져보고, 그와 사진을 찍었다. 그 옆의 향신료 가게도 들어가 보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자세히 살필 수 없어서 인증 샷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음은 이곳에서 가장 크다는 쇼핑센터 두바이 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세계의 유명 브랜드들이 전시된 21세기형 세련된 상점들을 둘러본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열사의 나라 이곳 두바이에도 모피를 파는 상점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실내에서 냉방을 하고 이것을 입는다나? 사치에 빠진 사람들이까, 그런 짓을 하겠지. 사막의 나라에 스키장까지 갖췄다는 축복의 꽃이 핀 환상의 도시, 두바이. 그러니까 세상은 요지경인 것이지….
거대한 수족관이 보인다. 상어가 지느러미를 흔들며 느리게 유영을 한다. 바다에서 강제 이주당한 이름 모를 물고기들. 하지만, 그들이 수족관 속에서 오히려 우리들을 용인자연농원의 동물들처럼 흥미롭게 관람하고 있다. 전광판엔 LG라는 로고가 우리 눈에 들어온다. 이것도 우리나라 작품이리라. 순간 가슴이 뿌듯하다. 점심은 한식이다. 갈치조림, 제육볶음, 오징어무침, 양배추 쌈, 된장찌개, 쌀밥… 잠시 한국의 음식점으로 착각하였다. 이제 귀국이 가까우니, 한국음식이 나오는가보다.
오후 늦게 사막투어가 시작된다. 지프차를 타고 사막을 향해 달린다. 운전수는 파키스탄 사람. 가족은 고국에 두고 혼자 와서 돈을 벌고 있단다. 사막을 가로질러 쭉 뻗은 도로가 황량하다. 우리 차에는 7명이 탔다. 투어장소에 도착하니, 허름한 건물이 보인다. 운전수는 그곳 냉장고에서 물을 한 병씩 꺼내준다. 잠시 대기하던 우리는 타고 온 지프차에 다시 오른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맨다. 위험하지 않다고 안심시키며, 운전수가 서서히 사막의 모래언덕으로 방향을 튼다.
잠시 속도를 죽이며 정상에서 멈칫하던 차가 오르막에서 내리막으로 바뀔 때마다 급하게 방향을 좌우로 틀어댄다. 놀란 아내와 여자들의 괴성을 차 안에 가득 채운다. 나도 약간은 두려운 맘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자동차가 멈추고, 우리는 사막에 내려서 석양을 바라본다. 잠시 한 마리 낙타가 된 듯, 이리 저리 발길을 옮겨본다. 구름이 끼어 그리 멋진 풍광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래 언덕에 십자가 모양으로 눕기도 하고, 두 팔을 들어 하늘을 받쳐보기도 한다. 아내는 머플러를 펼쳐든다. 그 모습이 한 마리 홍학으로 보인다.
어둠이 사막을 덮자 불빛 환한 무대에서 야간공연이 펼쳐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좌식 테이블 주위에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3층의 스탠드에도 좌석이 있다. 중앙좌석은 VIP가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여자 무용수가 나와 춤사위를 보여준다. 그리고 남자가 나와 불방망이를 들고 쇼를 한다. 휘발유를 입에 물었다 뱉으며, 불길을 만들기도 한다. 어려서 약장수와 함께 하는 불쇼가 생각났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메뉴는 바비큐 뷔페디너. 몇 겹으로 된 긴 줄을 서서 음식을 받았다. 그러나 불에 탄 고기 음식들이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물담배 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헤나 체험하는 곳에 가서 오른 팔뚝 안쪽에 거미를 그리고 왔다.
10시쯤 시내로 들어온 우리 일행은 다시 두바이 몰로 들어갔다. 세계 3대 분수 쇼를 보기 위함이다. 최고 높이 150m인 분수는 30분에 한 번씩 물을 뿜는단다. 사막의 나라 중동의 불빛 아래로 수많은 인파들이 호수 주위를 채웠다. 나는 아내와 상가건물의 2층에 올라가 호수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잠시 후 분수 쇼가 펼쳐졌다. 하얀 물줄기들이 솟아오르고, 내리고, 휘어지고, 틀어지며 우리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일산에 살 때, 호수공원에서 주말이면 관람하던 분수쇼 생각이 났다. 두바이 몰의 눈부신 분수쇼를 한참 동안이나 보며 두바이의 마지막 밤에 취해 있었다.
8박 13일의 여행 일정이 마무리 되는 시간이다. 우리는 두바이 공항으로 이동한다.
13일차 2018. 11. 17(토) 다시 대한민국으로
03:40분 Emirates항공 EK248 비행기는 사막의 밤하늘로 비상한다. 두바이에서 인천까지 6733km의 거리. 비행기는 피곤함도 잊은 채, 논스톱으로 아시아대륙을 횡단한다. 잠시 붙였던 눈을 뜨고 좌석 앞의 모니터를 본다. 비행기는 페르시아만을 횡단하여 이미 이란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파키스탄을 지나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파미르고원 남동쪽의 카라코람산맥 위에 그림자를 만들며 날고 있었다. 적막 가득한 캄캄한 비행기 안, 그렇지만 비행기의 밖은 한낮이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살짝 비행기의 창을 열고 닫고를 반복했다. 남들은 장거리 여행에 피곤하다지만, 내 가슴은 연신 뛰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눈으로 뒤덮인 태초의 산맥들이 능선을 날카롭게 세우고 내 눈으로 들어왔다. 경이로운 이 장면을 세종대왕이 보았던가, 단군할아버지가 보셨겠는가.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하얀 설산의 비경들을 사진으로 연속 담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고, 또 다시 잠을 청하였다. 중간 중간 레드와인을 곁들여 기내식으로 고프지도 않은 배를 채웠다. 비행기는 아시아대륙을 통과하여 중국의 동부 허베이성을 지나 보하이만을 통과하며, 대륙의 풍치를 내게 선물하고 있었다. 드디어 서해바다의 영흥도, 선재도 위를 난다. 하늘 아래 우리 막내동생이 멋지게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대부도가 보인다.
드디어 비행기는 우리를 인천공항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한국시간 오후 4시 50분. 짐을 찾고, 일행들과 인사를 한다. 의정부행 7200번 리무진버스에 오른다. 역시 우리나라가 세련 그 자체였다. 공항, 도로, 그리고 건물들이 남미의 그 어느 나라에 비해 빼어남을 확인하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한국이라는 것을 느낀다. 송추에 도착한 나와 아내는 방태산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시킨다. 김치와 함께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국의 입맛이다. 주차장에 세워놓았던 승용차가 어둠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몸을 실은 나와 아내는 빙글빙글 송추고개를 넘었다. 잠시 후 양주의 우리는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잠시 꿈을 꾸다가 일어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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