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일기

추자도 여행

by 광적 2019. 3. 13.

 

추자도 여행

 

1일차 2019. 3. 5() 추자도에 발을 딛다.  

어제부터 다시 미세먼지가 제주도까지 덮쳤다. 모슬포에서 평화로를 달려 영어교육도시로 오는 길, 산방산이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고, 단산오름조차 장막 속에 가려진 것처럼 희미하게 보일뿐이었다.

오늘은 섬 속의 섬, 독일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에서 맹활약 중인 축구선수 지동원이 태어났다는 추자도로 가는 날이다. 얼마 전 드라이빙해외여행이라는 다음 카페에서 추자도 여행 겸 정기모임을 갖는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렇지 않아도 금년 봄에는 아내와 추자도를 다녀오자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제는 모슬포에서 여행갈 물품들을 구입했다. 햇반, 라면, 우유, 소주, 마스크짐이 많다. 캐리어, 큰 쇼핑백, 배낭, 아내 핸드백.

하필 여행을 떠나는 날, 하늘이 미세먼지로 뒤덮여 마음이 심쿵하다. 아침 9시가 좀 넘어서 조천 해동그린앤골드로 차를 몬다. 조천 집에서 수건 빨래를 하고, 정오가 조금 넘어 제주항여객터미널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탄다.

 

13:00쯤 항구에 도착하니, 팔도에서 모여든 일행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19명의 동행할 사람들, 대부분 육지에서 온 선남선녀들이었다. 내일은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들린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샀다. 늘씬한 배 한일페리호에 승선하자, 여객선은 테너 톤으로 고동을 울리며 봄 바다를 가른다. 하늘의 먼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갑판 위에 오른다. 우리 일행의 한 남자만 혼자 올라와 있었다. 세무공무원으로 30년 이상 근무하고 지금은 춘천에서 세무사를 하고 있다는 닉네임 춘박님이라는 분이다. 그분과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먼지 낀 하늘 때문에 그냥 선실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춘박님과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추자도에 내릴 준비를 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제주에서 45km, 전라남도 해남에서 35km 떨어져있는 사시사철 싱싱한 해산물이 쏟아져 나오는 추자도는 생각보다 큰 섬이었다. 조선 시대까지 추자도는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이 주로 죄인의 유배지였으며, 현재는 행정 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한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는 편도 1차선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추자도가 추자도의 중심이다. 가래라고 불리는 추자 열매를 뿌려놓은 것 같아 붙여진 추자군도는 상추자, 하추자, 횡간도, 추포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있다.

이곳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원종 12(1271)부터이다. 그 옛날 제주와 육지를 오가던 배들이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섬이라 하여후풍도라 불리기도 하였다.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굴비를 비롯한 다양한 물고기들이 오늘도 어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비록 행정 구역은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하지만, 주민의 언어나 생활상, 그리고 가옥 구조 등을 보면 육지의 전라도에 많이 닮아있었다. 이곳 추자도엔 1980년대까지만 해도 6천여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지만, 현재는 1800여명이란다.

 

신양항에 내리니, 우리를 안내하는 분이 스타렉스차에 짐을 싣는다. 우리는 공영버스에 오른다. 요금은 단돈 천원. 20분쯤 달려 상추자도의 추자면사무소 근처 ‘in 추자카페짐을 푼다. 이곳은 드빙카페의 나폴레옹님이 추자도로 진출하여 새로 개업하는 펜션 겸 카페이다. 짐을 풀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상점에 들러 굴비를 만져보던 아내와 함께 항구를 가로지르는 시멘트 길을 걷는다. 그리고 등대산공원에 오른다. 먼지 가득한 상추자도가 눈에 들어온다. 공원의 나무들이 세찬 바닷바람에 시달려 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만찬이었다. 참돔회, 돼지고기 수육에 한라산소주일행들이 소개된다. 드빙카페지기 허여사, 이곳 가게 주인 나폴레옹, 춘박, 산행열차, 뒤통수, 산녀, 임반장알콜이 들어가고, 음식이 넘어가고, 분위기가 오른다. 팔도에서 온 여행객들이 금방 다정하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카페 바로 앞의 파도소리도 안주로 곁들인다. 내일, 모레, 글피 아침 식사를 책임질 6명의 당번을 정하기 위하여 사다리를 탄다.

아직 정식 개업도 하지 않은 펜션의 방, 2층에 올라 첫 밤의 꿈을 꾼다.

 

2일차 2019. 3. 6() 상추자도 나바론하늘길을 걷다.

아침에 일어나니, 밤비가 하늘의 먼지를 말끔히 닦아주었다. 아내가 복덩이라 그런지 오늘은 날씨 복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카페를 나와 추자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선다. 원색으로 단장한 건물이 동화의 나라처럼 눈에 들어온다. 추자초등학교의 경우에도 과거 600여 명의 학생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교문을 들락거렸다지만, 현재는 남학생 29, 여학생 19명 총 48명의 단출한 학교란다. 일찍 아침식사는 일행들이 가져온 것들로 만들어졌다. 메뉴는 쫄깃쫄깃 맛있는 떡국이었다. 식사를 하고나서도 비가 살짝 온다.

 

아내와 우산을 챙겨가지고 길을 나선다. 이곳 추자도의 17.7km 제주올레 18-1코스는 제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펼쳐지는 올레길이다. 상추자와 하추자도를 넘나들며, 섬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는 올망졸망한 추억을 남기기에 딱 맞는 트레킹코스이다. 올레의 시작은 추자초등학교. 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한 아내는 관심이 많은 지 이곳 교정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붉은 동백꽃이 화단에 투신해 있었다. 현대적 건물의 교직원 사택이 운동장 곁에 서있다. 아직 시간이 일러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추자종합체육관을 거쳐 고려 공민왕 때 난리를 진압하려 탐라로 가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이곳에 머물러 사람들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최영 장군 사당 곁을 지난다. 길은 이어져 봉글레산으로 오른다. 경사가 급한 계단이다. 숨이 차다.

상추자에 위치한 봉글레산은 해발 85.5m의 낮은 산이지만, 추자군도를 거의 다 조망할 수 있다. 쉼터 곁에는 방사탑이 우뚝 솟아 하늘에다 추자도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산불감시초소도 보인다. 다음은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는 용둠벙. 이곳은 수평선 위로 지는 해를 어떠한 방해물 없이 볼 수 있는 해넘이의 명소라고 한다. 용둠벙전망대에서 눈을 드니, 섬들이 봄바람 부는 바다 위를 우아하게 유영하고 있었다. 정자의 벤치엔 아직 밤에 내린 빗방울 때문에 물기가 흥건하다. 눈을 들어 수직으로 내려깎인 나바론 절벽을 바라본다. 철로 만든 원형 건축물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다. 어젯밤에 내린 비로 사진 찍기 좋은 날이다. 마침 서울에서 온 여인들 덕분에 아내와 함께 하는 추억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나바론 하늘길안내판이 보인다.

 

하늘로 오르기 위하여 가파른 계단을 탄다. 2차 세계대전 영화나바론 요새에 나오는 절벽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나바론절벽 위의 나바론 하늘길을 걷는다. 2km의 시원한 트래킹 구간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오르막길, 등에 흐르는 땀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다. 괜히 하늘길이라고 붙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났다. 점심은 두유에 생식을 타서 간단히 때웠다. 하늘 길을 연결하는 수직 철 계단에서 포즈를 취한다. 산봉우리에서 하늘 아래의 세상을 내려다본다. 북쪽바다에 안긴 상추자도 항구마을은 마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부니크처럼 아기자기함을 뽐내고 있었다.

하늘 길을 걷다보니, 여행객이 눈에 띤다. 60대 후반쯤 되는 여인이다. 혼자서 제주도 올레길을 다 걷고, 이곳 18-1코스가 마지막이란다. 새하얀 빛깔의 외관을 뽐내는 등대전망대에 오른다. 영흥리 마을부터 상추자항까지의 모든 풍광을 한 눈에 넣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을 돌리니, 하추자도를 비롯한 추자군도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발길은 드디어 하추자도로 연결된 추자교에 와있었다. 다리의 노란색 중앙선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곁에는 한국전력이 추자도의 밤을 밝히기 위하여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바다에 달라붙은 버스길을 따라 상추자항으로 향한다.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가끔 자동차가 한 대씩 지나갈 뿐 길이 한산하다. 산에서 흘렸던 등의 땀이 식는다. 추자도 굴비를 알리는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간판에 그려진 사람들의 모습이 외국인처럼 보인다. 항구 근처에서 아내는 바닷가에서 해초를 손질하는 사람들 곁에 발길을 멈춘다. 제주의 몸국에 들어가는 모자반을 손질하는 사람들이다. 아내는 그분들에게 요리하는 방법을 물으며, 1kg을 구입한다. 가격은 25천원. 거의 숙소에 다다를 때쯤, 우리 일행 2명을 만난다. 하추자도까지 다 돌았단다, 대단한 사람들로 보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피곤이 몰려온다. 거실의 TV를 잠깐 보다가 방에 들어가 잠시 눈을 붙였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 내 아내가 저녁을 먹으라는 소리였다. 햇반을 따뜻하게 데워서 상을 차려준다. 총각김치, 멸치볶음, 파프리카와 함께 먹는 간단한 한 끼였지만, 호텔의 만찬보다 입에 착착 붙는 만찬이었다.

 

3일차 2019. 3. 7() 하추자도를 섭렵하다.

오늘은 드빙카페 일행들과 함께 걷는다. 9시쯤 식사를 마치고, 10시에 출발. 19명 중 15명이 동참하였다. 먼저 영흥리 벽화골목이다. 다른 곳에서는 페인트칠을 하여 그린 벽화만 보았지만, 이곳은 타일을 붙여 만든 수준 높은 작품들이다. 물고기, 사람, , 마을 풍경등이 정겹게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추자교를 지나 올레코스로 들어간다. 북쪽 바다를 끼고 걷는다. 나무들이 새봄을 알리느라 열심히 눈을 터트리고 있었다. 핸드폰에서는 미세먼지가 최악이라고 경고를 보낸다. 하지만, 견뎌야만 했다, 오늘 아니면 언제 추자도를 섭렵하리. 나는 아내와 일행의 맨 앞에 섰다. 묵리고갯길 교차점을 지나 직진하여 묵리마을로 들어선다. 뒤에 산을 두르고 앞에 탁 트인 바다를 내려다보는 배산임수의 명당마을이었다. 작은 키의 대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바닷가에 처녀당이라는 정자가 보인다. 일행 중 나만 그곳에 발자국을 찍었다. 먼 옛날 제주에서 추자도로 물질하러 온 해녀들 중에 어머니를 따라온 아이업개(아기를 돌봐주는 처녀)가 있었다. 하루는 그 아이업개가 발을 헛디뎌 아기와 함께 묵리바다에 빠져 죽었단다. 그런데 그날 밤 아기 어머니의 꿈에 처녀가 나타나 지금의 당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이 처녀를 불쌍히 여겨 이곳에 처녀당을 세우고, 배를 타는 가장의 안전과 사랑하는 자녀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곳이란다.

정오가 조금 지나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편다. 점심식사 시간이다. 음식점이 없는지라 각자 가져온 음식들을 펼친다. , 과자, 누룽지, 주먹밥, 쫀드기, 두유그제 배에서 내린 신양항이 정겹게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한다. 시멘트 고갯길을 지나 모진이해수욕장에 다다른다. 바닷가에서 귀를 기울이니, 몽돌들이 짜그락짜그락 호젓한 산사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여인네들은 그곳에 누워 다리를 들고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바닷가에서 특별한 풍광을 만들었다.

다시 우리들 발길은 신대산의 비탈에 한 묘소로 향한다. 이곳은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이 잠든 곳으로 천주교 111번째의 성지로서 많은 순례객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황경한의 아버지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이른바황사영 백서를 써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다. 그는 즉시 체포되었고, 결국 대역죄인으로 몰려 처형된다. 그리고,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는 1801년 두 살짜리 아들을 가슴에 안고 쓸쓸히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는 제주로 가는 뱃길, 추자도에 이르러 아들이 제주에 함께 가면 평생 죄인이 되어 노예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 뻔하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결국 정난주는 젖먹이 황경한을 추자도의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사공들에게는 아이가 죽어서 수장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 갯바위에 서의 울던 아기 황경한은 다행스럽게도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어부 오씨에 의해 구출되어 키워지게 된다. 그리고 성장한 뒤에는 추자도에서 가정을 이루어 두 아들을 낳고 후손을 남기게 된다. 현재 예초리에는 황경한의 6대 손부와 7대손 황인수씨 내외가 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생겨났단다. 황경한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바다로 삐쭉 나온 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로 이 갯바위가 두 살 된 황경한이 울고 있던 바위란다. 그리고 그곳의 십자가를 눈물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신대전망대를 지나 억새와 같은 들풀들이 예의를 갖추며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예초리에 들어서서예초리기정길을 걷는다. 이 길은 추자바다를 옆에 두고 숲속을 걷는 아름다운 산책하는 구간이다.‘기정이란 제주도 말로 가파른 벼랑을 뜻한다. 발아래 펼쳐진 파도의 봄바다의 물결이 올림픽 경기장 관중들의 함성처럼 밀려온다. 숲속에서 나오는 청량한 바람이 온몸을 시원하게 씻어주고 있었다.

해안 길을 지나 해발 164m의 돈대산으로 오른다. 경사진 길이지만 너른 길에는 고무로 만든 바닥재를 깔아놓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길옆엔 봄을 알리는 나무의 새순들이 참새의 혓바닥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등에는 땀이 흐르지만, 숲속의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시원하게 식혀주고 있었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상추자, 하추자, 그리고 수많은 섬들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신양항도 소담하게 자리 잡고 바닷가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돈대산 정상에는 아름다운 정자와 함께 운동기구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산을 오르느라 숨차게 운동을 했는데 운동을 더하라는 건가?

 

드디어 내리막길이다. 묵리마을로 가는 교차점을 지나 하산길이다. 드디어 추자교가 나온다. 그리고 어제 아침에 걸은 해안길을 걷는다. 다시 아침에 걸었던 영흥리 벽화길을 걷는다. 그리고 추자 처사각에 다다른다. 이곳의 주인공인 박인택은 추자도에 들어와 사는 태인 박씨의 시조이다. 그는 조선 중기에 추자도로 귀양을 와 불교에 심취하여 생활을 하며 주민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불교 교리를 가르치면서 살았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박씨 문중 후손이 병이 들어 갖가지 약으로도 고치지 못하고 있을 때, 꿈에 조상인 박인택이 나타나 사당을 건립하고 열심히 빌면 병이 나을 것이라 했단다. 후손들이 그 말을 실행에 옮기자, 실제로 신비스럽게도 병이 바로 나았다고 한다. 이에 그의 후손들이 사당을 번듯하게 짓고 추모하며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내고 있고 한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봄에는 삼치, 도미, 농어, 광어, 볼락, 멍게, 소라, 전복, 해삼, 문어, 참모자반, 톳이 풍성하여 봄철에 오는 관광객은 어디서나 삼치회, 도미회, 굴비정식, 먹장어탕을 즐길 수 있다는 곳, 추자도. 저녁식사를 위하여 굴비정식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난 오누이식당의 문을 연다. 우리 일행들이 이미 그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닉네임 산행열차님이 권하는 소주를 곁들인 저녁은 진수성찬이었다. 숙소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눈꺼풀이 방바닥으로 쏟아진다.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4일차 2019. 3. 8() 다시 제주로 가는 길, 가방 분실사건.

오늘은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는 날, 아침 일찍 식사를 한다. 일행이 가져온 간장게장의 맛이 일품이다. 평시에는 아침식사를 생식으로 대신하지만, 여행 때만은 일반식으로 배를 채운다. 펜션에서 짐을 챙겨 신양항으로 향하는 공영버스에 오른다. 추자도에 들어올 때의 신양항이 다시 우리를 맞이한다. 이곳은 대형 여객선인 레드펄호가 약 400여명의 승객과 70여대의 자동차를 싣고 제주-추자-완도를 오가는 정착지 항구이다. 배의 출발시간이 넉넉한지라 대합실 밖으로 나왔다.

 

빛바랜 간판과 아담한 상점 몇 곳이 봄볕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신양리, 추자중학교와 신양분교로 들어선다. 신양분교는 소나무 숲속에서 아담한 학교였다. 총 학생수가 7명인 미니분교다. 요즘의 초등학생은 우리나라의 국보가 아닌가 싶다. 그 옛날 수많은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00년 가까이 되었다는 신양상회와 새마을상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옛날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먹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제주로 가는 배가 들어온다. 계단을 오르며, 다시 추자도를 돌아본다. 고동을 힘차게 울리며 배가 출발한다. 신양항이 우리에게 또 오라고 손짓을 한다. 들어오는 날보다는 하늘에 먼지가 덜 끼어 있었다. 갑판 위에서 사진도 찍고, 춘박님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곳이 제주의 다도해인가보다.

제주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일전에 단양에서 내려온 분에게 점심초대를 받았기에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그분의 집으로 향한다. 택시에서 내려 그분의 집으로 향하는데 뭔가 허전하였다. 아내의 헝겊가방이 안 보이는 것이었다. 택시에 놓고 내린 것인지, 여객터미널에 놓고 온 것인지 가물가물하였다. 그래도 일단 초대받은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단양에서 경찰로 아주머니는 군청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제주도로 내려온 것이다. 정성스럽게 차려진 점심을 먹었다. 충청도 양반답게 정성을 다해 대접해주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였다.

잃어버린 가방이 걱정이 되어 이곳저곳 전화를 한다. 마침내 여객터미널에 그 가방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점심식사와 커피를 마신 뒤 바로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함께 우리를 싣고 제주항 여객터미널로 향한다. 사무실에 들르니, 아내의 부엉이가 그려져 있는 헝겊가방이 우리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단양에서 오신 분 부부와 조천집으로 향한다. 그분이 소개하는 단양시청 공무원이 우리 집에서 한 달 간 제주살이를 한단다. 고마운 그분들은 차 한 잔 못 마시고 바쁘다며 가셨다.

아내는 손님맞이 준비로 청소를 한다. 나는 염치없게도 TV의 바둑이나 보고 있었다. 저녁때쯤 아내와 다시 대정으로 향한다. 러시아워인지라 길이 막힌다. 애조로를 지나 비가 살금살금 뿌리는 평화로를 달린다. 집에 들어서니, 제주도립곶자왈의 맑은 바람이 창으로 받아들이며, 훈훈한 거실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다. 아내와 깜짝 추자도여행, 34. 짧게 해외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하늘 맑은 늦가을쯤 추자도에 다시 가서 밤별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퍼뜩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