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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詩

빈 배/ 김춘기

by 광적 2020. 10. 9.

      빈 배/ 김춘기

 

 

밀물이 해안에 닿으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낡은 구두 한 짝 닮은 배는

먼 바다로 나갔다

그렁그렁한 엔진소리만 몇 마디

남겨 놓고 떠난 배

밤새도록 파도 위에 낚시를 던졌지만

구겨진 달빛 몇 조각과

성단에서 떨어져 나온 잔별들만

겨우 건져 올렸다

여명과 함께 항구로 들어오는 것은 늘,

허기와 수조 바닥이 보이는 빈 배

 

남자는 젊은 시절 대관령 비알밭에서

고랭지 배추를 재배하였다

파출부로 이골난 아내 통장에

입금내역이 이따금씩 찍히긴 했지만

풍년이면 가격 폭락에 속이 꽉 찬 자식들을

갈아엎어야만 했고

흉년이면 원금도 못 건져

농협 빚 독촉 고지서만 날아왔다

 

그래도 만선의 꿈 꺾을 수 없었던 가장

길을 바꾼 배추 유통업도

친구에게서 덥석 물려받은 철물점도

구불구불한 벼랑길로 이어졌다

 

늘그막 남자는

빈 배에 쿨럭쿨럭 기침소리만 싣고

어릴 적 꿈을 키우던 항구로 돌아왔다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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