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배/ 김춘기
밀물이 해안에 닿으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낡은 구두 한 짝 닮은 배는
먼 바다로 나갔다
그렁그렁한 엔진소리만 몇 마디
남겨 놓고 떠난 배
밤새도록 파도 위에 낚시를 던졌지만
구겨진 달빛 몇 조각과
성단에서 떨어져 나온 잔별들만
겨우 건져 올렸다
여명과 함께 항구로 들어오는 것은 늘,
허기와 수조 바닥이 보이는 빈 배
남자는 젊은 시절 대관령 비알밭에서
고랭지 배추를 재배하였다
파출부로 이골난 아내 통장에
입금내역이 이따금씩 찍히긴 했지만
풍년이면 가격 폭락에 속이 꽉 찬 자식들을
갈아엎어야만 했고
흉년이면 원금도 못 건져
농협 빚 독촉 고지서만 날아왔다
그래도 만선의 꿈 꺾을 수 없었던 가장
길을 바꾼 배추 유통업도
친구에게서 덥석 물려받은 철물점도
구불구불한 벼랑길로 이어졌다
늘그막 남자는
빈 배에 쿨럭쿨럭 기침소리만 싣고
어릴 적 꿈을 키우던 항구로 돌아왔다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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