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카드의 가출
내 취미 중의 첫 번째를 꼽으라면 단연 여행이다. 그해에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대학 동창생 친구들과 그리스와 터키를 패키지로 여행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10km 떨어진 피레우스항구에서 페리호를 타고 9시간을 항해하여 키오스섬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다시 배를 타고 50분쯤 지나 체스메항을 통하여 터키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고 고대 로마 유적지 에페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목화의 성’을 뜻하는 온천 파묵칼레, 화산재로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으로 동굴호텔이 있는 카파도키아를 거쳐 해발 800m에 있는 수도 앙카라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잠시 내려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 묵념하고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잠시 시간을 내어 호텔 밖으로 나와 아내와 시내를 걷고 있었다.
여행에 동행중인 자매가 우리보다 먼저 호텔 밖으로 나갔다가 현지인들의 시선이 무섭다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 부부를 보더니, 다시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와 일행이 된다. 서아시아의 따갑고, 건조한 여름 햇살이 살갗에 침을 놓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더위에 지친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여행은 언제나 즐거움에 더하여 호기심을 불러오는 것, 나는 새로운 풍경들을 순간순간 눈에 넣기에 바쁘다.
시내를 잠시 걷는 중에도 내 시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돌려 길 건너 터키 건국의 아버지이며, 초대 대통령인 케말 파샤의 동상 쪽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헬로우, 헬로우’ 소리가 반복적으로 귀를 스친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그러나 계속 들리는 ‘헬로우 소리’. 몇 발자국을 더 걷던 내 몸이 결국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때 행인들 틈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서양인 남자가 우리에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내 시선은 자동으로 그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우리를 향해 급하게 손짓을 하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우리 앞에 멈추자마자 손에 든 뭔가를 내민다.
이게 웬일인가. 그것은 바로 내 눈에도 익숙한 그것, 바로 아내의 마스터카드였다. 아내의 스마트폰 케이스에 넣어져 있던 것이 어떻게 가출했을까? 놀란 아내는 휴대전화를 열어본다. 내 몸에는 순간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눈이 동그래진 내 가슴은 타국에서 이웃집 형님을 만난 것처럼 뛰었다. 쑥스러운 표정을 감춘 아내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터키의 현지인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그분에게 ‘땡큐’를 연발했다. 그리고 내 손은 무의식적으로 그분의 두 손을 덥석 잡고 있었다. 나는 그분과 구면이라고 되는 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건 말건, 서툰 영어로 터키가 한국전쟁에 전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2002월드컵 준결승전 한‧터키 경기 얘기까지 서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우리 둘이 국제적 친구가 되었다며 어깨동무를 했다. 함께 사진도 찍었다. 여행객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춰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다. 나는 터키의 초로의 남자분께 다시 고마움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면 연락하라고 주소를 메모해 주고, 이별의 악수를 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밀어내는 바람 줄기가 어느덧 시원한 공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호텔에서 아내와 참 좋은 경험을 했다며, 두런두런 얘기하다가 잠이 들었다.
형제의 나라 터키에서의 갈색 눈동자 이방인으로부터 받은 따뜻한 정을 가슴 속에 깊이 담고 귀국하였다. 그날 앙카라에서의 추억은 사진 한 컷처럼 내 가슴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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