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항아리/정경해
헛간 구석진 곳
키를 낮춘 항아리 하나 앉아 있다
살갗에 무성한 비듬 슬은 채
헛배가 부른지 가끔 트림을 하며 먼지를 올린다
항아리는 기억한다
밤마다 찾아와 얼굴을 묻던 그 사내
자신을 사랑하던, 한 남자의 생을
사내가 가슴을 더듬을 때마다
마음껏 젖줄을 물려주던 짜릿짜릿했던 그때를
그 목덜미 물고 놓아주지 않던
사내는 밤마다 울었고 어둠이 장송곡을 연주했다
그럴수록 항아리는 입을 더 크게 벌렸고
사내는 광맥을 찾는 포식자처럼 눈을 번득였다
언제부터인가
항아리의 마른기침이 잦아지더니
사내의 발자국이 지워졌고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술항아리
그렇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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