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가 강원도, 경상북도 오지를 누비다
新中年(Active Senior), 두 남자 추억 여행
2023.05.26.(금) 제주에서 육지로 비행하다
그제 제주에서 올라왔다. 원래 아내와 함께하려 했으나, 며칠간 D초등학교 강사로 출근하게 되어 혼자 김포행 비행기에 올랐다. 양주 집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지하주차장으로 갔다. 먼지를 잔뜩 먹고 있던 자동차가 반갑게도 엔진을 돌려준다. 어둔리 저수지를 지나 의정부 녹양동으로 향했다. 자동차 검사소에서 전조등과 번호판 등을 교체하고, 자동차의 정기건강검진을 마쳤다.
어제는 양주 숲길을 종일 걸었다. 굴참나무가 뿜어내는 천연 항균제 피톤치드가 온몸 세포 속속 스며들었다. 은봉산 입구에서 백석 배수지까지 산소 탱크 속에서 맑은 공기로 폐를 말끔하게 씻었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은 어머니 무릎처럼 나를 포근하게 받아 안는다. 70여 년 전 내 태가 잘린 곳, 우고리 삼현마을에 들러 사촌 형수님을 뵈었다. 먼저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 지난겨울 병원 신세를 지셨단다. 자꾸 연세가 높아지신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집에 들어와 의정부에서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니고, 양주에서 함께 퇴직한 깨복쟁이 원대식 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 3월에 약속한 대로 내일 단둘이서 강원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2023.05.27.(토) 미래의 땅, 강원도로 들어가다
아침 일찍 SUV자동차가 함께 환한 얼굴이 아파트 앞에 나타났다. 원교장이었다. 우리를 실은 자동차는 일단 강원도 춘천 쪽으로 내비게이션을 켠다. 의정부를 지나 남양주로 들어선다. 자동차들이 거북이가 되었다. 역시 수도권 교통은 그날그날 길의 사정에 맡기는 수밖에…, 3일 연휴까지 끼었으니. 승용차가 경춘가도의 오전을 느슨하게 가른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북한강은 물뱀이 되어 서울로 향하고 있다. 대학생들 MT의 명소 대성리와 청평이 우리 곁을 지나간다. 자전거로 보납산 약수를 길어오던 생각이 난다. 가을이면 낙엽이 연인의 발자국처럼 깔리는 남이섬,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한 자라섬이 곁을 지난다. 경기도의 동쪽 끝, 가평 읍내가 내 눈을 고정시킨다. 30년 전 내가 가평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3년 동안 청춘의 밭을 갈았던 곳이다.
가평천에서 줄낚시로 두 아들 남인이, 남규와 피라미를 잡으며 옷을 흠뻑 적셨던 생각이 난다. 정월 대보름날 밤, 불 깡통을 만들어주면, 녀석들은 밤새 하늘을 빙빙 돌렸다. 동심 가득했던 눈망울이 동영상처럼 머리에 떠오른다. 경춘대교를 건너면서 보이는 강 언덕바지 자라목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당시 새벽잠을 깨고 달려와 이마에 솟는 땀방울을 닦아낸 후, 온몸에 에너지를 충전하며 하루를 준비하던 곳이다.
구곡폭포가 있는 강촌을 지나 춘천에서 별미 막국수로 점심을 해결한다. 밖에 나가 강 건너를 바라본다. 구름에 잠긴 산릉선이 유화처럼 운치를 더해준다. 산자락에 걸린 구름은 여인들이 순면 스카프를 두르고, 사뿐사뿐 걷는 것 같다. 승용차는 와이퍼를 저으며, 홍천 쪽으로 속도를 낸다. 그리고 다시 평창으로 방향을 튼다.
먼저 도착한 곳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르는 곳이다. 고향이 봉평이신 정평림 시인이 생각난다. 큰형님 같으셨는데, 얼마 전 하늘에 오르셨다. 언제나 무쇠솥에서 우려낸 숭늉처럼 구수한 말씀으로 나를 감싸주시던 인하대 의대 교수이시다.
뚜렷한 사계절과 처녀림 가득한 곳. 자연이 모두 모여 숨 쉬는 이곳은 65%가 해발 700m 이상의 고원 청정지대. 봄이면 온갖 들꽃의 리듬체조, 여름엔 울울창창 활엽수림, 가을이면 산골짜기마다 불꽃놀이, 겨울엔 산기슭 목장 눈꽃 설경이 자연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평창이다.
전국 최대 수석전시관인 읍내의 돌문화체험관이다. 장암산과 노산을 끼고 굽이치는 평창강.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붓끝에서 나온 것 같은 산세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곳. 정문을 찾아 입구에 들어선다. 경로우대는 생각 못 하고, 입장표를 끊는다. 출입문이 열린 사무실에는 늙수그레한 해설사가 앉아있었다.
원교장은 해설사에게 내가 지질학을 전공했다고 귀띔한다. 그곳엔 전국에서 모인 개성 있는 수석들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해설사가 내게 암석의 이름과 생성기원을 묻는다. 실은 눈으로만 보고, 암석을 전부 판단할 수는 없는 것. 정확한 분석을 위해 편광현미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곳 돌문화체험관의 전시품들은 거의 수석이었다. 나는 해설사에게 차라리 이곳 이름을 수석체험관으로 붙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떠보았다. 해설사도 긍정적이었다. 1층 상설전시실 벽에는 체험관에 수석을 기증한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내가 아는 이수성 전 총리, 여고시절 데뷰한 문희옥 가수 등의 이름도 보였다.
엔진작동을 시작한 자동차는 아우라지가 있는 정선으로 방향을 돌린다. 사시사철 푸른 숲 터널, 일급 산소 제조공장에서 뿜어내는 원시의 맑은 공기와 온갖 텃새들이 아기 손톱보다 작은 부리로 연주한다. 이곳을 '미래의 땅, 코리아의 샹그릴라'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정선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의 허리쯤에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해저에서 생성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악지형. 도시로부터 거리가 멀어 큰마음을 먹어야만 올 수 있는 곳이다. 교통마저 영월, 평창보다 훨씬 불편하다. 뭣하나 내세울 만한 게 없어 옛날엔 원조 감자바위라고 불리던 그야말로 아득한 오지이다.
노랫말이 700~800가지나 된다는 정선아리랑의 발상지. 그곳을 흐르는 두 물줄기가 어우러진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아우라지엘 꼭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일정상 부득이 정선시장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아쉬움이 가슴에 물결을 일으켰다.
1966년 처음 문을 연 정선시장. 고라니와 멧돼지의 주민등록지인 원시림에서 채취한 무공해 산나물, 갖가지 약초와 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북새통이다. 공연장에서는 정선아리랑, 떡메치기 등 다양한 행사를 즐길 수 있다고 들었지만, 오늘따라 출연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폴폴 수증기를 내뿜는 곳으로 갔다. 순대, 옥수수빵, 김치만두가 예민한 내 코와 침샘을 파고든다. 전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물건을 흔들며, 분주하게 흥정 중이다. 이곳 정선 읍내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여관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여관마다 만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여 숙소를 정하기로 했다.
영원한 교육자 원교장이 젊음을 불태웠던 700m 고원도시 고한읍으로 향한다. 먼저 고한중·고등학교에서 시동을 끈다. 지하 갱도가 개미굴처럼 뚫려 있는 곳. 학교는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산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친구가 이곳에 근무할 때의 지인과 휴대전화를 연결한다. 자기네 집에서 자고 가라며, 어서 오란단다.
고한중학교는 1974년 개교한 고한여자중학교로부터 출발하였다. 당시에는 수백 명의 학생이 향학열을 불태웠던 곳. 하지만 지금은 수십 명의 학생만이 소담하게 꿈을 키우며, 추억이나 파먹고 사는 배움터. 몸집만 큰 속 빈 두메학교로 변해 있었다. 같은 교정의 고한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화단에 ‘행불유경(行不由徑)’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지름길이나 샛길로 가지 않고 떳떳하게 큰길로 간다’라는 의미의 글이다. 그 옛날 수많은 젊은이와 가장들이 지하 막장에서, 가족의 풀칠을 위해 곡괭이로 어둠을 파냈던 곳이다. 가뜩이나 지방이 소멸하는 마당에 광산촌인 이곳은 오죽하랴.
학교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아득한 계곡을 따라 낡은 집들이 성냥갑처럼 띄엄띄엄 혈맥을 잇고 있다. 걸어서 학교로 오는 길은 경사는 심하다. 하지만, 데크가 단정하게 깔린 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원교장은 이곳에서 만기를 채운 첫 교사였단다.
친구는 당시 졸업 예정 학생들의 앞날을 생각하며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경기도교육청, 의정부여고, 그리고 주식회사 신성통상에 절절한 사연을 담아 민원을 넣었다. 그리고 직접 방문도 하며, 끈질기게 담당자들을 설득하였다. 결국, 탄광지역 무명교사의 교육적 바램이 열매를 맺었다. 당시 고한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수십 명의 제자가 의정부여고의 산업체 학급으로 진학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산골 여학생들은 도시로 나와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밤에 고등학교에서 코피 쏟으며 미래의 꿈을 조립하였다. 형설지공(螢雪之功)으로 제자들은 수도권 사회로 당당하게 진입하게 되었다. 늘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친구 원교장은 내가 본받아야 할 진정한 교육자다. 교사로서 그의 소신은 내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친구의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급경사길, 운전대를 잡은 원교장은 브레이크를 밟았다 떼기를 반복한다. 지인 집에 도착하였다. 비 내리는 마당, 비닐 텐트가 색다른 산속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뜻밖에 여러 사람이 함께 우리를 맞이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연, 그 집 안주인이 암 투병 중이었다. 그래서 객지의 가족들이 주말을 이용하여 고향에 들른 것이다. 원교장의 지인 내외, 호적이 잘못되어 법적으로는 형이 된 그의 동생, 그리고 사위가 함께 그곳에 모여 있었다. 1970년대 후진국 시절, 면서기의 서툰 행정으로 형과 동생의 생년월일이 바뀌었다. 결국 동생이 형보다 먼저 푸른 제복을 입었다니…. 가슴 아픈 한 편의 가정사를 귀에 넣었다.
고개를 드니, 구름이 걸린 산릉선은 화원이었다. 산은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었다. 신선이 모여 사는 중국 계림 곁 양삭의 노천온천으로 여행을 온 느낌이었다.
오징어회, 삼겹살, 어묵에 산골표 상추, 부추, 파절이가 소주잔을 계속 끌어당겼다. 투병 중이신 여사님을 뵈었다. 겉보기에는 병색 없으신 것 같았다. 꼿꼿한 자세로 미소를 지으신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어서 쾌유하시라고 빌어드렸다.
철딱서니 없이 계속 내리는 비. 그 빗소리도 술잔에 함께 담아 연신 부딪친다. 이야기꽃이 만개했다. 식사가 끝나자, 원교장 지인이 예약해준 모텔로 향했다. 피곤한 몸, 바로 자리에 누웠다.
2023. 5. 28(일) 광산촌에서 옛 생각을 하다
번쩍 눈을 뜨니, 어느새 새날이었다. 조반을 해결하러 시장 쪽으로 두리번거린다. 길 건너 식당 아줌마가 누님처럼 우리를 맞이한다. 순두부에 깔끔하게 반찬이 차려진 식탁. 방전된 몸을 충전하고, 시장통으로 들어갔다. 이름은 ‘고한구공탄시장’이다. 해발 900m의 옛 탄광촌의 역사를 가득 담고 있는 재래시장. 고한역과 실개천 사이에 옛이야기들이 손을 붙들고, 오갔던 곳이다.
첼로 소리 같은 빗줄기가 거리를 적신다. 상인들의 발걸음도 목소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인 데다가 장날이 아니라 그런가 보다. 시장 초입이 석탄광산의 입구처럼 꾸며져 있었다. 시장통의 천장도 마치 갱도에 들어온 것처럼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먹거리 장터에는 떡갈비, 전병, 녹두부침 메뉴판만 우두커니 서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공탄시장의 대표 먹거리는 연탄에 고기를 구워 먹는 연탄구이라고 한다.
연탄재에 정성스럽게 그려진 작품들. 그것을 쌓아놓은 울긋불긋 예술 탑이 내 호기심을 꺼낸다. 갖가지 동물, 사람 얼굴이 무명작가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고한 정말 잘되길’ ‘고한 파이팅’ 등 탄광촌의 구호를 실은 글귀가 보인다. 그들의 간절한 꿈과 희망이 내 가슴을 울린다. 시장 옆 개천에는 맑은 물이 졸졸 여울을 만든다. 나는 그 옛날 고한시장의 일기장을 펼치고 있었다.
오전 9시쯤 이어서 들른 곳은 카지노의 메카, 정선카지노라 불리는 강원랜드. 하늘은 계속 뚫려 있었다. 자동차에서 내려 얼른 우산을 폈다. 카지노의 건물 외관만 둘러보았다. 강원랜드는 석탄산업 사양화에 따른 폐광지역의 경제 회생을 위해 1998년 6월 설립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기업이다. 저 건물 속에서 지금도 단 한 방의 잭팟을 꿈꾸며, 심장 박동을 억누르는 무데뽀 돌쇠들이 밤을 지새우겠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내국인이 출입 가능한 강원랜드. 카지노의 개장과 함께 많은 백성이 돈을 잃고 가산을 탕진한 채, 목숨을 던졌다. 해마다 노숙, 사기, 절도사건이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한다.
차량을 돌려 함백산 정암사로 간다. 사찰 옆 계곡엔 천연기념물 제73호 열목어가 군집을 이루며, 피난민처럼 산다. 이곳은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서 갈래사라고도 한다. 일주문 곁에는 최근에 완공된 선불장이 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른다. 등줄기가 땀으로 습지가 되었다. 원교장은 지난겨울 발목을 접질려 걸음걸이가 불편하다며, 그냥 절 마당에서 기다리겠단다. 계단이 끝날 때쯤 국보 제332호인 높이 9m의 수마노탑이 얼굴을 내민다. 수마노는 빛이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석영의 일종이다. 중장비도 닿기 힘든 산비탈에 땅을 고른 뒤 축대를 쌓고, 그곳에 큰 돌을 벽돌처럼 세공하여 석탑을 세운 것이다. 평생의 불심을 여기에 다 쏟은 분들은 니르바나에 이르렀을까나.
수마노석탑은 1972년에 해체 복원했다. 그 과정에서 3층 지붕돌과 받침돌 사이에서 5개의 탑지석(塔支石)이 발견되었다. 이슬비가 늦봄 한낮을 촉촉하게 적시는 수마노탑에서 정암사를 내려다본다. 숲속의 고즈넉한 사찰 건물들이 안개와 어울려 대형 캔버스에 수채화를 펼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구불구불 계단 길을 따라 절의 대웅전 쪽으로 내려온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줄 맞춰 원색 소원 행렬이 줄 맞춰 매달려 있다. 연등마다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비는 가슴 절절한 문구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중생들이 열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걷는 것 같았다.
다음은 1960~70년대 석탄을 운반하던 겨울 눈꽃의 명소 만항재(1,330m). 구름이 양탄자처럼 깔린 고원의 길이라며, 운탄고도(雲坦高道)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정선군, 영월군, 태백시가 핏줄처럼 이어지는 이곳은 함백산 줄기가 태백산(1,567m)으로 흘러내리다가 잠시 멈추는 경혈점이다. 만항재는 국내에서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갯길. 힘들게 산행을 하지 않아도 한겨울 설경 속에서 사람들을 무아지경에 빠트리는 ‘눈의 나라’동화 속의 설국이다.
한여름이면 낭만객들이 만항재로부터 함백산(1,573m) 정상까지 캠핑카 등을 몰며 여름을 식힌다.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까지는 시멘트 길이 이어진다. 그곳에 국가대표선수들의 훈련장과 방송국 송신소, 통신회사 기지국이 터를 잡고 있다.
지금이 겨울철이라면, 고갯마루에 펼쳐지는 눈꽃 세상과 발아래 물결치는 백두대간이 나를 구름으로 만들어 시 한 편의 영감을 싹 틔웠을지도 모를 일. 만항재는 ‘하늘 위의 꽃밭’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들꽃이 여고생들의 하교 시간 웃음처럼 피어난다. 이른 아침이면 안개가 살풀이춤을 춘다. 구름이 몽환적으로 몸짓하는 이곳, 만항재가 내 몸을 구름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
추전역 표지석
바다뱀자리처럼 이어진 산길을 빙글빙글 기어 올라와 차에서 내린다. 드디어 내 심장의 피가 끓던 청춘시절 제자들을 키웠던 곳. 옛날 황지, 태백시이다. 가장 강원도다운 도시, 석탄산업의 메카,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구가 줄어 행정단위로는 소규모 군급으로 주저앉은 슬픈 도시. 그래도 강원도민체전에서 성화를 채취하는 천제단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성스러운 태백산은 이곳의 자부심이다.
내가 태백에 발령받고, 며칠 후 아내는 첫아들을 출산했다. 그때 나는 주말이면 서울 처가에서 산후조리 중인 아내와 피붙이를 보러 역으로 향했다. 일요일 밤엔 아쉬움을 밀어내며,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탔다. 느림보 열차는 내가 새벽 단잠에 빠져있을 때쯤 기적을 울리던 곳이 추전역(855m)이다.
그러나 이제야 처음 발자국을 찍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높아 밤별과 친구 삼아 지내는 하늘 역. 겨울이면 바람까지 얼어붙고, 귀가 떨어지는 곳. 싸리밭골에서 추전(杻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녹색 철제 울타리에 무단출입 경고문을 명찰처럼 달고 있는 이곳. 역무원도 떠나고, 아랫마을 사람들도 죄다 타관으로 갔다. 녹슨 자물쇠 혼자 입을 꾹 다물고 사람들을 막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청량리발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치타처럼 지나간다.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을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가는 남자처럼 말이다. 역 앞에 장중식 시인의 ‘추전역’이라는 시비를 본다.
그 곁에는 내가 아는 김민정 시인의 ‘황지연못’이라는 시비가 높이 세워져 있다. 왜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가 아닌 이곳 추전역에 세워져 있을까? 근처에는 퇴출당한 샛노란 빛깔 미니 탄차가 고아처럼 울며 서 있다. 무연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세워진 추전역은 현재 관광열차 외에는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다.
추전역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대관령(832m)보다도 23m나 더 높다. 그렇다 보니 연평균 기온이 우리나라 기차역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이다. 여름에는 모기 한 마리도 없는 별천지. 한겨울에는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한국의 오이먀콘이다. 내가 아는 영월의 캠핑카 부부처럼 나도 캐러밴 한 대 장만하여 여름을 나고 싶은 곳이다.
이곳 추전역에서는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항상 난로를 피웠단다. 마음의 짐이 가득해 답답한 사람들에게 단 일주일이라도 머물러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사철 푸른빛의 바람과 함께 아날로그 감성에 잠겨 있는 이곳 추전역에서 시계 풀고 머물러 보라고.
눈을 돌려 건너편 '바람의 언덕'을 본다. 고랭지 배추밭으로 유명한 매봉산이다. 고래 등 같은 스카이라인을 따라 미니어처같이 보이는 풍력발전기들이 시간의 태엽을 빙빙 감고 있다. 푸른 청춘 산맥이 바람을 모으고 있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하늘과 양떼구름 피어나는 산마루가 열두 폭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재작년 발간한 내 첫 번째 시집 '웃음 발전소'에 수록된 짧은 시 한 편을 실어본다. 추전역의 맑디맑은 하늘을 별밭이라고 생각하며 지은 ‘추전역, 별밭 분양’이라는 졸작이다.
하늘 속내 / 궁금하여 / 산 위에 / 오른 열차 /
밤하늘 /은하수 바다 / 알몸 /별들 /드맑은 / 영혼/
금 긋고/한 장씩 /떠서 /서울로 실어 보내고 싶다
국내 제일의 광산촌 태백시가 나를 반긴다. 1980년대 목돈의 황금빛과 막장인생의 검은빛이 낮과 밤처럼 교차하던 곳. 여기는 하늘 아래 첫 동네, 그 당시 팔도의 청춘들은 저마다 가슴에 희망을 품고 여기로 몰려들었다. 검은 노다지를 캐는 광부가 되려고, 장사로 한 밑천 잡으려고 말이다. 똥개도 장사꾼을 따라 '세종대왕님 얼굴'을 한 장씩 물고 다녔다는 엘도라도가 태백이었다.
나도 그 당시 아내, 그리고 아장아장 걷던 두 아들과 함께 탄가루 날리는 이곳에서 파도 세찬 바다를 항해했다. 겨울이면 수도가 끊겨 옆집에서 손수레와 초등학생 키 만한 고무 물통을 빌렸다. 그리고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을 해머로 깨며, 물을 길었다. 나는 수레를 앞에서 끌고, 아들을 등에 업은 아내는 뒤에서 눈발을 헤치며 밀었다.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우는 아기를 달래면서… 그리고 얼음물에 고무장갑도 없이 두 아들의 기저귀를 빨았다. 지금은 흔한 세탁기도 없던 석기시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다음은 우리 큰아들이 첫울음을 터트린 1983년 3월부터, 막둥이의 돌잔치를 벌린 1986년 2월까지 3년간 근무했던 학교로 간다. 그 이름 황지고등학교.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광산촌답게 급경사 진입로가 우리 발걸음을 늦춘다. 겨울이면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무릎이 빙판길에 깨지면 어쩔까나?
내가 근무할 당시보다 학교 건물이 많아졌다. 외형적으로 엄청 비대해졌다. 40년 전의 정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장년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세월의 연륜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래도 당시 함께했던 방송통신고등학교는 건재하다고, 현관에 교명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순간, 대학 선배 박운기 선생님이 생각났다. 고양시 화정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교육부에서 '고마우신 선생님'을 주제로 교육현장 체험수기를 공모하였다. 나는 강원도 오지의 교직 생활 당시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의 일상을 생각하며 '광산촌의 페스탈로치'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보냈다.
얼마 후 교육부장관 직인이 찍힌 공문을 학교에서 접수했다. 정부서울청사에서 시상식을 마친 후 수상자들은 청와대의 초청을 받았다. 그날따라 DJ 대통령님은 출장 중이었다. 대신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 수기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황지고등학교에 근무할 당시 페스탈로치처럼 제자 사랑을 펼친 대학선배‘고 박운기 선생님’이시다.
자동차는 다시 엔진을 켜며, 통리협곡으로 향한다. 내비게이션이 혼돈에 빠졌는지, 고갯길에서 우리의 발길을 잠시 오르락내리락 헷갈리게 했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들풀이 우거진 임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협곡으로 내려간다. 계단과 야자 매트가 지그재그로 연속 이어진다. 폭포를 보고 다시 비탈을 오르는 사람들 숨소리가 거칠다.
내가 아는 삼척 출신 김민정 시인의 시 한 편이 여기서도 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제목은 ‘폭포와 시’. 회색빛 철판에 굴림체로 미인폭포를 지키고 있는 시비였다.
잠시 후 고개를 돌리니, 붉은빛 협곡이 숲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미인폭포 전망대를 지나 폭포수가 투신하는 맨바닥까지 내려갔다.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는 옅은 우유빛깔이었다. 물빛이 투명하지 않은 것은 석회암지대라 그런 것 같다.
그 당시 태백시 일대의 개울물은 모두 검은빛이었는데… 아이들은 학교에서 미술시간 하얀 도화지에 까만색의 개울만 그렸는데… 지금은 채탄량이 줄고, 하수를 제대로 처리해서 그러리라. 폭포와 협곡의 모습을 계속 스마트폰에 넣었다. 그 옛날 주말이면 목말 태우고 동네를 돌던 우리 두 아들, 그리고 백합 같은 아내와 손 붙들고 이곳으로 놀러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폭포를 뒤로하고 다시 경사길을 오른다. 숨이 가쁘다. 습도가 높은 날씨.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티셔츠가 등에 축축하게 붙는 것 같다.
장성, 철암을 지나 태백시에서 경상북도로 넘어가는 곳, 천연기념물 제417호 구문소(求門沼)에서 멈췄다. 구문소는 강물이 산을 관통하여 거대한 돌문을 만든 것이다. ‘구무소’는 그 아래 깊은 물웅덩이가 생겼다는 뜻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구무'는 옛말로 구멍이나 굴을 뜻한다. '소'는 한자로 물웅덩이를 의미한다. 강이 산을 뚫고 흐른다고 해서 '뚜루내'라고도 불린다. 구문소는 황지천과 철암천이 부부가 되어 몸을 섞는 곳이다.
황지천과 철암천의 두 물길이 원래 지하에 있던 동굴을 수십만 년을 두고 깎고, 또 깎아냈다. 그러면서 그 동굴이 계속 넓어지면서 지상에도 동굴 모양의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구문소의 지형을 세밀하게 탐사하여 5억 년 전 한반도 지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정하고 있다.
구문소는 바다 환경에서 만들어진 석회암층이다. 이곳엔 다양한 퇴적구조와 삼엽충 등 옛 생물의 화석이 잘 보존되어 있다. 후배 지질학도들의 야외 탐사 현장으로 추천하고 싶다. 사람들은 대부분 구문소 옆 도로에 뚫린 석벽터널을 배경으로 셔터를 누른다. 구문소와 비교하면, 특이한 통로로 눈에 잘 띄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일제 식민지 시절 석탄을 수탈하기 위해 돌산을 뚫은 길이었다.
이어서 도착한 곳은 동점동의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생대 지층 위에 세워진 고생대를 주제 자연사박물관이다. 지질관, 석탄 발견관, 석탄채굴관, 광산 안전관, 광산 정책관, 광산 생활관, 체험 갱도관 등의 다양한 전시관을 갖추고 있다.
전시관의 삼엽충, 고사리류를 비롯한 고생대에 살았던 동식물의 화석과 모형, 그리고 당시 지층의 암석들이 내 관심을 집중시킨다. 고생대 박물관이라면서도 중생대의 공룡과 암모나이트, 매머드 등 멸종 동물의 표준화석과 화석모형들까지 함께 진열하고 있었다. 고생대의 바다 환경에서 생존했던 해양생물을 볼 수 있는 영상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냥 지났다. 주마간산처럼 스친 자연사박물관이었지만, 과학도인 내게 잠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곳이었다.
다시 승용차는 빗줄기를 가른다. 영화 '워낭소리'의 무대이기도 한 경상북도 봉화가 우리 자동차를 끌어당긴다. 금강송의 일종인 한국의 일등 소나무 춘양목과 솔향이 1등급인 송이버섯으로 유명한 일급 오지, 봉화 탄산약수가 사람들을 부르는 곳이다.
여우천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이곳에서 갈라져 낙동강으로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소천면 분천리의 산타마을이다. 마을 다리 앞에는 붉은빛 마을 홍보 아치가 산타 옷을 입고 늠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그치지 않고 훌쩍훌쩍 내린다. 시간을 반년쯤 쭉 잡아당겨 크리스마스쯤이라면 해남진미 군고무마를 호호 불며, 눈썰매라도 신나게 타 볼 텐데…
석포면 승부리의 승부역과 함께 쌍둥이 간이역으로 요즘 많이 알려진 분천역이다. ‘관광열차가 강릉으로 출발한다’는 안내 방송 메아리가 내 귓바퀴를 굴린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안내하는 간판도 보인다. 역사에 들어서니, 적막만 가득하다. 크리스마스 때 도착한다는 엽서를 내 피붙이, 손녀딸 가온이에게 보냈다. ‘어서 쑥쑥 자라서 큰 사람이 되거라’는 문구와 함께 우체통에 넣었다.
오후 내내 빗속을 걸었다. 오른쪽 신발에 구멍이 났는지 질척거린다. 신발 속에서 땟국물 먹고 울고 있는 오른발이 불쌍했다. 자동차는 달려서 영주 쪽으로 향한다.
영주는 경북 북부지역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서 이곳에서 중앙선, 영동선, 경북선이 교차한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숙소를 알아보려고 전화를 했다. 방이 있단다. 도착하여 보니, 온돌방만 있다는 허술한 호텔이다.
짐을 풀고 우산을 든 채, 영주시장 쪽으로 축축한 발자국을 찍는다. 눈에 띄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삼겹살을 주문했다. 원교장과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끼리 경쾌하게 입맞춤을 한다. 주인아줌마와 또 다른 여인네와도 함께. 이왕 취한 것, 노래방에 가서 맥주까지 더 마셨다. 숙소에 들어오니, 숙취에 피곤이 몰려왔다. 몸을 대강 씻고 바로 꿈나라로 향했다.
2023. 5. 29(월) 부석사, 배론성지를 방문하다
다시 아침이다. 기지개를 켜며, 식당에 들렀다. 메뉴는 우거짓국. 낯선 경상도 반찬이지만, 생각보다 수수했다. 식사 후 처음 찾는 곳은 배흘림기둥과 무량수전을 품은 부석사. 절 입구에 도착하여 자동차 문을 여니, 세찬 비가 차 안으로 들이친다. 나와 원교장은 각각 우산을 폈다. 바짓가랑이가 흥건하다. 가로 놓인 큰 돌에 새긴 부석사 표지석이 우리를 안내한다. 궁금함을 가득 안고, 절에 들어섰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이 사찰은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국보 제17호인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 조사당벽화, 보물 제249호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 보물 제735호 고려목판, 그리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인 원융국사비 등이 문화재의 박물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빗속을 산책하던 중 부천에서 왔다는 70대 부부와 눈길이 연결되었다. 우산을 맞댄 채, 음악과 예술에 대하여 한참 얘기를 나눴다. 전화번호도 교환하였다. 인생 제2막을 여유롭게 가꾸고 있는 부부였다. 절을 산책하던 끝 무렵 연못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분수가 분위기를 돋운다. 이슬비 내리는 산사, 안개에 잠긴 고찰이 마치 무릉도원처럼 다가온다.
다시 자동차는 영주시 순흥면의 금성대군 신단에서 엔진을 멈춘다.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며, 단종의 숙부이다. 1433년(세종15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인 방석(芳碩)의 대를 잇는 자식이 되었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금성대군은 1455년(단종3년) 모반혐의로 강원도 철원지역의 삭녕으로 그리고, 다시 경기도 광주로 유배되었다.
1456년(세조2년) 성삼문·박팽년 등이 벌인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그는 이곳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격문을 돌리며,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종 복위를 다시 계획했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여 아깝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순흥부까지 완전 해체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다시 서울 쪽으로 가는 길, 충청북도의 오지 제천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봉양읍의 배론성지. 제천하면, 의림지와 함께 지금도 매년 만나는 대학친구 강형구 선생이 생각난다. 그는 충북에서 평생 제자를 키우면 인생 전반을 보냈다. 지금은 퇴직하여 천둥산 박달재에 별장을 꾸미고, 사모님과 오손도손 참깨를 볶으며 살아가고 있다.
제천은 강원도, 경상북도, 충청북도 3개 도의 접경지역이면서 중앙선, 충북선, 태백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다 보니, 음습한 숲이 계속 이어진다. 중앙선도 없는 울퉁불퉁 1차선만 계속되는 시멘트 길. 중간중간 반대쪽에서 덩치 큰 차가 밀려오는 바람에 진땀이 흐른다. 거기에다 원교장의 훈수가 운전대를 잡은 내 마음에 파열음을 만든다. 순간 당황 늪으로 빠졌다.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내비. 아마 이 아가씨가 오늘은 미친 게 뻔하다. 속으로 XX, XX하며, 일단 그녀를 무시했다. 유턴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원교장이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빗속에서 차의 앞뒤 바퀴 움직임을 살피며 손짓한다. 나는 핸들을 좌우로 연속 틀며 전, 후진을 반복했다. 다행히 차가 돌려졌다.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일단 고속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목적지에 닿았을 때도 등에 흐르던 땀이 식지 않았다.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서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 한국 초기의 가톨릭 신자들이 정부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장소이다. 이들은 힘겹게 두메산골에서 화전을 일구고, 배고픔을 견디며, 옹기를 만들어 팔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들만의 보금자리 천주교공동체를 이루었다.
배론이란 지명은 이 마을이 위치한 산골 속의 지형이 배 밑바닥을 닮아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소리가 나는 대로 배론(徘論)이라고도 불린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이은 한국 교회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을 바라본다. 수많은 천주교 신앙인들의 순교를 생각하며, 잠시 묵상에 잠긴다. 그리고 황사영 백서(帛書) 토굴을 바라보며 마음을 비워본다.
제주 대정에 묘가 있는 정난주 마리아의 남편인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로서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인이 되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다. 내용은 첫째, 주문모 신부의 처형 등 신유박해의 순교자 내력을 기록한 후 천주교의 위기를 언급하고. 둘째,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서양의 여러 나라에 재정지원을 부탁했으며. 셋째,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방안으로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청나라에 편입시켜 감독하게 해달라는 것 등이었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비단에 새긴 백서는 1만 3,311자를 먹으로 피를 토하듯 쓴 편지이다. 그러나 이것을 전달하려던 옥천희와 황심이 사전에 체포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황사영은 팔, 다리, 목에 밧줄을 매어졌다. 그리고 다섯 마리의 말이 천천히 걸어 나가자, 몸의 관절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거열형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연못에 비추는 예수님 동상과 수정빛깔 하늘이 내 마음을 정갈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 달쯤은 여기에 머물면서 내 마음속의 때를 말끔하게 씻어내고 싶었다. 구름이 되고 싶었다. 산이 되고 싶었다. 세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배론성지를 마지막으로 가슴에 담고, 자동차는 고속도로를 탄다. 그리고 북행이다. 중부고속도로가 막힌다. 저속도로가 되어있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밀려온다. 자동차는 찔끔찔끔 서다, 기다, 멈추다를 반복한다.
수도권순환고속도로에 이르자, 도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자동차들이 다른 곳으로 피해 준 건 아닐까? 이제부터 ‘액셀을 신나게 밟아 보라’며, 왕복 4차선이 시원하게 우리 앞에 펼쳐졌다. 양평, 남양주 도로를 미끄러지듯이 달린다.
의정부가 우리를 다시 반긴다. 이곳은 '갈비씨(KBS)'라는 별명이 붙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 재수한 뒤, 중학교에 들어가 연탄불에 밥을 해 먹고, 친구 도시락의 달걀 프라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춘기를 보냈던 곳이다. 내가 고3 때, 선생님이 소개해 준 고2 학생네 과외선생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기도 했던 곳. 원교장과 함께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곳. 어머니의 따순 밥상을 매일 그리워하며, 내 인생의 발판을 다진 곳. 생각만 해도 눈물 나는 곳이다.
도봉산과 사패산을 뒤로하고 의정부시청이 가까운 호원나들목을 통과한다. 경민대학교를 지나 씽씽 달리던 자동차는 이제 여유까지 부린다. 내 고향의 명산 양주의 불곡산이 우리에게 잘 다녀왔느냐고 손짓한다. 흥복산업단지의 식당가에서 차를 세운다. 이른 저녁 소주 대신 생수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제육볶음을 한 그릇씩 놓고, 배고픔을 달랬다
피곤한 자동차는 여행의 마무리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를 양주 서광아파트 마당에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여행을 마치자, 하늘은 구름을 말끔하게 걷어내었다. 오늘 고향 밤하늘에 별밭을 만들려나 보다. 다음에는 더 좋은 곳에 또 다른 기분으로 발자국을 찍어 보자고 친구와 손을 잡는다.
내가 육지에 올라오면 꼭 자기 차를 몰고 다니는 친구. 밥까지 자신이 사야만 직성이 풀리는 영원한 친구. 지난번에는 한탄강 잔도로 나를 안내했던 원교장. 악수를 끝내자, 그를 실은 자동차는 피곤함을 배기가스로 뿜어내며,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세계 일주 여행기 '패밀리 집시'를 쓴 일본의 다카하시 아유무는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다. "소중한 것을 깨닫는 장소는 언제나 컴퓨터 앞이 아니라, 파란 하늘 아래였다.”라고.
물론 이번 여행은 내내 흐린 하늘이었다. 와이퍼로 차창의 빗물을 계속 닦아내며, 회색 짙은 하늘만 따라 다녔다. 그래도 소중한 것들을 깨달았다. 몇 년 전 원교장을 비롯한 고교동창 친구 4명과 함께한 '고흥 일주일 살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젊은 시절 제자들과 고락을 같이했던 탄광촌을 다시 보았다. 강원도와 경북, 충북의 오지의 몸속을 보며, 그곳의 숨소리도 들었다.
퇴직 후 나는 종종 해외여행을 떠나곤 한다. 평상시의 이완된 마음이 낯선 곳에 닿으면, 설렘의 끈을 당기며, 새로운 글감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한다. 생활의 활력을 되찾는다. 올가을에는 아내와 함께 북유럽을 다녀올 계획이다. 대서양 중앙해령이 국토를 관통하는 나라, 카리브해에서 출발하는 멕시코만류가 일년 내내 흘러들어 고위도임에도 기후가 온화한 나라 아이슬란드. 그리고 여체의 곡선을 닮은 협만과 북극 하늘의 오로라가 내 눈을 경이로움으로 빠트릴 것이 뻔한 스칸디나비아반도 말이다.
3일간의 짧은 여행이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그리고 낯선 산길 따라 굽이굽이 자동차의 바퀴가 구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마음의 때를 벗겼다. 여유로움을 동반했다. 친구와의 우정을 확인했다. 탄광촌의 그림자와 아픔도 살폈다. 내 젊은 시절을 재생하는 기분이었다. 신중년 두 남자가 40년 전을 되새김하는 기회였다. 아니, 미래의 땅 유람이었다. 한 편의 수필 같은 미니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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