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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기

제주 속의 제주로 들어가다

by 광적 2023. 8. 8.

제주 속의 제주로 들어가다

 

2023. 8. 5()- 1일 차

 

   눈을 뜨자마자 양치질로 새벽을 맞이했다. 냉수로 목을 축이고 아내와 함께 제주도립곶자왈로 들어갔다. 사계절 산소 공장이 되어 내 온몸 세포 하나하나마다 전류를 흐르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바람 많은 겨울에도 바람이 없는 곳, 눈이 와도 비가 내려도 우산이 되어주는 종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녹나무, 생달나무가 사는 곳.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어울려 살며 뿌리를 내리는 동지섣달에도 푸른 숲의 바다이다. 삼복더위가 완력을 자랑한다. 몸이 땀으로 벌써 젖는다.

   오늘은 12일 일정으로 대정향교에서 시행하는 문화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날. 목적지를 향해 아파트 출구를 빠져나간다. 순간 방아쇠를 당기는 아내의 짧은 말 한마디가 내 귀를 뚫는다. 한신경로당 앞으로 가야 한단다.

   나는 급히 직진에서 좌회전으로 바퀴의 각도를 꺾었다. 경로당 회원들이 우리 차를 기다리고 있단다. 경로당에서 출발하는 우리 일행은 김재용 회장, 안숙희, 조덕희, 정철우, 성영숙, 이점순, 김경옥, 이미희, 공재란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다.

   나는 제일 어르신인 김재용 회장 부부, 조덕희 님, 정철우 님 부부를 내 차에 태우고 싶었다. 그러나 단장을 짚으신 회장님은 운전해야 된다며, 당신 자동차 쪽으로 힘들게 걸어가신다. 그리고 몇 사람이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순간, 아니 조금이라도 젊은 분들이 차를 몰아야지 그게 뭐냐고, 내 입에서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9시쯤 대정향교에서 자동차가 엔진을 멈춘다. 현재 기온 30.6. 구름 몇 점만이 외롭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늘은 벌써 가을이 곁에 왔다고 푸르디푸른 빛깔을 낸다. 하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작불 같은 화력은 이제 막바지 힘을 쓴다.

   달궈지는 지표면은 아우성이다. 높이가 낮은 향교 입구 중방에 머리를 쿵 찧으며 들어선다. 행사에 동행할 일행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동재와 서재 사이의 잔디 마당엔 음식이 간이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어디에서나 고생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들 때문에 늘쌍 우리가 대접받고 살고 있다.

 

    잠시 후 대정향교의 이자신 전교께서 의관을 갖추고 앞에 자리를 잡으신다. 그는 향교의 CEO, 오늘날 학교의 교장에 해당한다. 손을 모으고 교장선생님과 상호인사를 한다. 그리고 전교님의 대정향교에 대한 설명과 이틀간의 일정 안내가 잔디밭에 깔리고 있었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유교를 가르치며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맡아왔다. 오늘날 지방의 국공립대학에 해당하며 공립 중·고등학교의 역할도 어느 정도 겸했다고 보면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34개의 향교가 있다. 경향 각지에서 불리는 교동(校洞), 명륜동(明倫洞), 향교리(鄕校里), 교리(校里), 교촌(校村)과 같은 지명들은 그곳에 옛날 향교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3대 향교는 나주향교, 강릉향교, 장수향교이다. 제주도에는 제주향교, 대정향교, 정의향교가 있다.

   여기서 대정은 조선시대의 대정현을 의미한다. 그 당시 제주는 한라산 북쪽의 제주목, 한라산 이남은 동쪽의 정의현과 서쪽의 대정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정현은 오늘날 대정, 안덕, 중문, 한경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대정향교는 박쥐 모양의 단산오름을 북쪽에, 남쪽에는 지구의 1/3을 차지하는 태평양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야말로 배산임수가 완벽한 제주도 최고의 명당이다.

   제주도로 유배되어온 추사 김정희는 지난한 생활 속에서도 이곳 대정향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여기엔 추사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이 있다. 선생님의 체취가 아직도 서려있다. 빙떡, 수박, 음료수 등으로 요기를 한다. 버스에 오른 우리 일행은 평화로를 잠시 지나, 추사의 유배지였던 안성리의 추사관에 발자국을 찍는다.

   이 건축물은 김정희의 얼이 서린 국보 세한도를 모티브로 건축한 공간이다. 역사의 얼이 서려있는 건물의 겉모습과 그 곁에서 푸르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가 대신 선생님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본관이 경주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안동김씨 가문의 누명을 쓰고 조선 최남단 바람의 고을로 유배되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는 역작 세한도와 추사체가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위대한 추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 지역 예술인들과 학자들이 마음을 모아 1984년 유배지를 정비하고, 추사유물 전시관을 세웠다. 2007년 김정희 유배지가 사적 제487호로 지정됨에 따라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2010년 현재의 추사관으로 다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정희(1786~1856)는 대쪽 같은 인품과 치열한 학예 연찬으로 서예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빼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추사는 55세가 되던 해인 1840년 윤상도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서 약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83개월 위리안치(圍籬安置) 상태에서 대정의 송계순의 집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현감의 부탁을 받아 후학들을 가르치며, 추사체라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필적을 남겼다. 또한, 중국의 학자들도 감탄한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를 출산하였다. 세한도의 원본은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 추사관에 보관하고 있는 것은 영인본이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함께 한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이며 역관인 이상적에게 1844년 답례로 그려준 선물이다. 추사는 세한도에서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운 겨울에도 혼자 푸른 소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고 전해진다. 성균관에서 대정향교 평가를 위해 내려온 김학경 박사가 구수하게 해설을 한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귓바퀴 속을 계속 맴돈다.

   당시 환경이 혹독했던 제주, 세수는 물론 목을 축일 물조차 귀했다. 먹을 것이라야 메밀로 만든 묵 정도인 이곳까지 추사의 아내는 사람을 시켜 송편 등 음식을 보냈다. 예산에서 이곳 대정까지 오고 가는 데 6개월이나 걸린다. 괴나리봇짐에 매달려온 아내의 정성 가득한 음식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곰팡이가 되어 있었다. 추사는 어느 날 자식도 없는 사랑하는 아내가 혼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고 울었다는 말, 김학경 박사의 그 말이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추사는 한때 예조참판, 형조참판, 암행어사, 대과급제 등을 거치기도 했다. 왕가의 외척이었지만, 그는 갖가지 모략으로 집안이 몰락하여 결국은 알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의 최고의 덕목은 청렴, 청빈, 그리고 명예욕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추사가 알거지가 된 것도 그 덕목에 한 가지는 확실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까나.

   오늘은 유교의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제주의 역사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날이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군자, 즉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은 남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하지만, 소인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여 융합하지 못하고 자기의 고집만 부린다고 했다.

   밖에 나오니, 다시 산방산탄산온천의 건식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다. 등이 뜨겁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버스에 오른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근처에 있는 알뜨르비행장이다. 알뜨르는 아래 벌판을 의미하는 제주어이다.

  알뜨르비행장은 원래 제주도민들이 대를 이어 농사를 짓던 농지였다. 소와 말의 먹이인 목초를 키우는 가족의 목숨이 달린 땅이었다. 일제는 이를 강제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수수깡처럼 몸이 마른 주민들을 동원하여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군사용 비행장으로 건설하였다.

   66ha 넓이의 알뜨르에는 폭 20, 높이 4, 길이 10.5규모의 20개 격납고가 짐승처럼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1937,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의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이곳에서 대표적 전범 기업체인 미쓰비시에서 만든 제로센 전투기를 출격하였다. 난징은 이곳 제주에서 약 700km 거리에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1만 934대를 생산하여 '동양의 신비'라고 치켜세우던 제로센 전투기는 두랄루민을 사용하여 초경량화에만 신경을 썼다.  또한, 조종사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공중 전투력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전투기의 경량화를 위해 장갑판을 걷어냈다. 그리고 조종사들에게는 적군에 생포되느니, 천왕을 위하여 차라리 목숨을 버리라며 낙하산을 공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자살특공대 가미가제라는 이름으로 수도 없이 미국 군함의 굴뚝 속으로 집어넣었으니 말이다.

   해외여행 중에 만나는 시끄러운 중국 사람들에 비해 일본 사람들이 유난히 조용한 것은 나서면 죽는다는 사무라이 문화 때문이란다. 일본 사람들은 원래 예의가 밝은 사람들이라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들이라고, 정말로 겸손하다고그것은 완전 오해였나보다.

   알뜨르비행장은 중일전쟁 기간 중 2차 공사를 통해서 40만 평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193811월에 일군이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이곳의 일본 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고, 알뜨르비행장은 연습비행장으로 격하되었다.

 

    알뜨르와  관련있는 내 졸시 한 편을 소개해 본다.

 

제로센 전투기소리 귀 쟁쟁한 알뜨르

태평양 칼바람이 오름 코를 베던 그날

모슬포,

어물전 큰딸 가슴에 핀 총탄 자국들

     

                                                                                                             -알뜨르 동백꽃-

 

   버스는 모슬포 시내로 들어와 우리를 신호등식당’에 내려놓는. 돔베고기 정식이 상마다 차려졌다. 돔베는 제주어로 도마를 말한다. 버스는 부른 배를 두드리는 우리를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경 쪽으로 몰고 간다.

   김학경 박사의 해설이 다시 이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내용이 긴 책, 두꺼운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성경, 무슨 무슨 대하소설아니냐고, 우리는 대답한다. 정답은 역사적으로 크게 중요한 조선시대의 승정원일기란다.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왕이나 한양들에서 올라온 일들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죄다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승정원일기의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출발한 이후부터 멸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기록되었다. 도중에 그 이름은 몇 번 바뀌었지만, 역사학계에서도 편의를 위해 그냥 승정원일기라고 통일하여 부른다.

   승정원일기를 요약한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변고를 통해 많은 양이 불에 타 없어졌다. 그래도 현재 엄청난 양의 승정원일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 양이 대략 24250만 자. 엄청난 양에 놀랄 수밖에 없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는 49646667자란다. 아직도 펼쳐보지 못한 많은 승정원일기들이 대학도서관과 박물관에서 햇빛을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남다른 생각, 블루오션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고, 이 분야의 연구에 도전했으면 좋겠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국들의 정세까지도 자세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유네스코에서는 승정원일기를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역사에 문외한인 내게도 자극을 주는 해설이다. 새로운 알거리를 접한 내 기분은 순간 콜라 한잔 시원하게 마신 기분이었다.

   버스가 호흡을 다시 멈춘 곳은 김대건 신부가 표류하던 중 다다른 용수성지. 이곳에는 김대건 기념 성당과 기념관이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으로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안드레아 신부는 1844년 사제로 서품된 그해 8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과 함께 나무배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하여 귀국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거친 풍랑을 만나 한 달을 동중국해와 남해를 표류했다. 그리고 928일 이곳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해안에 닿았다.

   그를 기리기 위해 천주교 제주교구는 포구의 언덕을 1999년 성지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2006년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기념관과 제주 표착기념 성당을 세웠다. 또한, 그가 타고 온 라파엘호를 복원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마당 한켠에 놓여있는 나무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떻게 저 배를 타고 거친 바다를 헤쳤을까? 목숨을 걸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머문 기간은 단, 3일 정도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천주교에서 부풀려서 성지화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꺼내 본다. 순간, 지난 오월 친구와 방문했던 배론성지의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떠올랐다.

   제주도에는 김대건 신부의 용수성지, 정난주 마리아의 대정성지, 금악의 새미은총의 동산, 제주시의 황사평 성지, 조천의 김기량 순교현양비 등 여러 곳에 천주교 성지가 있다. 초열지옥을 뚫고 버스는 한림, 애월, 하귀를 거쳐 제주 시내로 들어선다. 제주목관아이다.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관아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아시설은 1434(세종 16) 관청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타버렸다. 그 뒤 1435년부터 계속 중·개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또다시 파괴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자취를 감췄다.

   제주시에서는 제주목관아를 복원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했다. 그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연희각·우련당·귤림당 등의 건물터와 건축물 잔해가 확인되고,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어 1993330일에 제주목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다. 발굴과정에서 초석·기단석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등 당대의 문헌과 중앙 문화재위원, 향토사학가, 전문가 등의 고증을 거쳐 관아지 복원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제주목관아는 19999월에 시작하여 200212월에 복원을 마치고 눈앞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이동한 곳은 주정공장 수용소였던 4.3 역사관이다. 길 건너엔 만남과 이별의 눈물이 있는 제주여객터미널, 산타모니카호가 육지로 출발을 알리며 뱃고동을 울리고 있다. 이곳은 제주 ‘4.3을 기억하고 그 아픔을 교훈 삼아 평화·인권의 길로 나아갑니다.’라는 문구를 앞세우고 있다. 역사관 입구에 도착하니, 동상 아래 바닥에서 안개가 뽀얗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물 같은 그 장면에 순간 마음을 숙연해졌다.

   동양척식회사가 직영한 이곳 제주 주정공장은 일제 말기인 1943년에 준공되어 1970년대 말까지 기계가 돌아간 중요한 산업시설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곳은 제주 4.3 당시 민간인의 최대 수용소가 되었다. 수용자 중 일부는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 들어가 고문을 받다가 6.25 전쟁 후 총살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곳 주정공장 내 고구마 창고는 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으로 끌려온 주민들을 감금하는 장소로 변신하였다. 예비검속된 사람들은 결국 정뜨르비행장 부근에서 대부분 총살되어 암매장되거나 돌에 묶인 채 제주 앞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비극이다. 인권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던 그곳. 예비검속이란 피고인을 석방했을 때 새로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경우나, 피고인을 억류하지 않는 것이 그에 대한 사법기관의 조사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질 때 행해지는 것을 말한다. 제주도에서는 2023년 올해 이곳 주정공장 옛터를 제주 4.3 역사관으로 리모델링하여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게 만들고 있다.

   제주 4.3 사건은 미국 군정 당시 발생한 한국 현대사에서 6.25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엄청났던 사건이다. 1947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며, 5.10 총선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슬로건으로 출발한다. 19484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봉기하여 시작된 비극적 사건이다. 대정면 영락리 출신 선봉대장은 김달삼이다. 그는 대정중학교 상업과 교사로 근무하였고 본명은 이승진.

   그는 1948년 8월에 월북하여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및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김일성 정권 창건에 참여하였고,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다음 해 8월에는 유격대원 300여명을 이끌고 38선을 침투했다. 경북 보현산 일대에서 대한민국 전복활동을 하다가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강원도에서 국군에게 사살되었다. 현재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그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충돌로 이데올로기와 관계없는 아버지, 삼촌,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내,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들이 쓰러졌다. 1954921일 한라산 통행 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77개월간 3만여 명의 주민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당시 실종된 억울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

    나는 졸시 '비치미오름에 피는 꽃'에서 들꽃을 '4.3 때 하늘로 간 아이들의 울음'이라고 표현했다. 아깝게 돌아가신 그분들의 명복을 빌고 빈다. 아직도 제주도민들은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상처가 언제쯤에나 아물까나.

   조천 쪽으로 운전대를 튼 버스는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연북정으로 간다.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이다. 푸른 바다, 갈매기와 함께 하얀 파도가 연속으로 밀려온다. 고려 후기 제주 목사 이옥이 건립한 조천리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정자이다.

   조천진성에 자리한 연북정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한양으로부터 석방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한양의 임금을 향하여 큰절을 올리며, 나랏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지어진 정자이다. 이곳에서 다시 제주 유배문화와 선비정신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정책을 상소하며, 그것을 목숨 앞에서도 꺾지 않는 선비들이 유배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해당하는 말처럼 들린다.

   저녁은 흑돼지 정식이다. 출출하던 배가 빙긋이 웃는다. 해는 서쪽 바다로 기울어진다. 버스는 번영로를 따라 동쪽으로 길을 가른다. 창밖을 보다가 졸다가를 반복한다. 어느덧 제주도의 대표적 볼거리 성산 일출봉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가 오늘 밤 쉴 곳은 코델리아 호텔이다.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로비 옆 공간에서 한예종 출신 남자 무용가와 함께 선비춤을 추었다. ~더쿵 더덩~더쿵 좋다, 얼씨구 등 추임새를 넣으면서. 선비춤은 무언 무용극의 하나이다. 진주 지방을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서 성한 것으로, 과거에 낙방한 한량과 중이 기생을 꾀는 시늉을 하며 추는 전통 춤이다.

   아내가 방 열쇠를 받았다. 3303호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밖에 야외 수영장이 눈에 들어온다. 깔끔하게 2인용 침대 두 세트가 자리하고 있다. 겉보기보다는 수수한 숙소였다. 샤워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일출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서다. 길을 건너고 방향을 틀쯤 아내는 배가 아프단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아내. 나는 일출봉 방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새로 지은 하얀 빛깔 타운하우스들이 보이는 쪽으로 간다. 시간은 흘러 날은 저물고 길은 막혀 있었다. 고개를 드니, 일출봉이 허리쯤부터 몸을 내밀고 있다. 방향을 돌렸다. 오던 길로 다시 걷다가 번듯한 건물 성산성당을 만났다. 잘 가꾸어진 잔디에다가 일출봉까지 웬만큼 보였다. 아쉽지만, 그것이라도 사진 몇 장으로 남긴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진다. 호텔을 일출봉 가까이에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자동차라도 있었으면 달려가 일출봉의 저녁 풍경을 찍었을 텐데호텔로 되돌아 왔다. 몸을 씻고, 휴대폰을 꺼내어 뉴스를 본다. 아내는 피곤한지 일찍 잠들었다. 나는 자정 근처가 되어서야 꿈속으로 진입하였다.

 

 

2023. 8. 6()- 2일차

 

   눈을 뜨니, 커튼 밖이 환하다. 추분을 앞둔 아직은 낮이 밤보다 길다. 옷을 간단하게 챙겨입고 아내와 밖으로 나왔다. 호텔 가까운 곳에 물풀과 함께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반사되는 장소가 내 눈길을 잡아당겼다. 고수천이라는 연못이다. 다공질 암반으로 이루어진 제주도에서는 호수나 연못을 보기 힘들다. 고수천은 수산리에서부터 이어지는 물줄기가 고성리인 이곳까지 이어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수천에서는 갈대, 부들, 송이고랭이, 부레옥잠, 흰꽃여뀌, 큰비짜루국화 등의 습지식물이 자생한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초본 식물로는 갈대, 환삼덩굴, 왕모시풀, 계요등, 며느리배꼽, 쇠무릎, 닭의장풀, 소리쟁이, 별고사리, 망초 등이 자란다고. 목본식물로는 천선과나무 팽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마삭줄, 예덕나무, 사스레피나무 등이 이곳에서 볼 수 있다고 간판이 앞 가슴을 벌리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저어새, 백로, 왜가리, 물닭, 흰뺨검둥오리 등이 사는 환경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란다.

   사진을 찍다가 보니, 아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얼른 휴대전화의 번호를 누른다. 일출봉 쪽으로 가고 있단다. 나는 길가의 카센터 근처에서 폐타이어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혹시 내 시(詩)에 알맞은 장면은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아내를 찾고 호텔에 들어서니, 창밖의 수영장에서 초등학생 같은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이를 하고 있다. 제주시내태권도장에서 하계 연수를 받으러 왔다고 한다. 우리 손주 가온이, 시온이도 함께 노는 모습 같다. 아이들의 동심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아침부터 땀이 젖은 몸을 말끔하게 씻어냈다. 더위가 씻겨 나간 몸, 새가 되어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해외에 여행 중인 기분이다. 순간 유럽이라 생각하고, 조반은 빵에다가 잼과 버터를 발라서 먹었다. 우유에 플레이크를 넣고, 커피도 곁들여서. 7년 전쯤 아내와 함께 표선면 성읍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제주 동부의 오름을 오르내린 날들이 떠오른다. 동심 반원을 연속으로그리면서 들어오는 밀물이 아름다운 해비치해수욕장을 거닐던 생각과 함께 말이다.

   정의향교로 들어선다. 향교의 후문이라는데, 높은 돌담 위에 우뚝 솟은 하늘 정자가 시원한 인상을 주었다. 문에 들어서니관계자들이 미리 나와 있었다. 갓을 쓰고, 하얀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전교께서 우리를 맞이하면서 환한 웃음을 보내준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정의향교는 1416(태종 16)에 창건되었다. 1809(순조 9)에 현감 여철영이 서성내로부터 화원동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1849(헌종 15) 목사 장인식이 임금께 청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리고 196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5칸의 명륜당, 동재·서재·삼문 등을 갖추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함께 5성(五聖)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와 송조4현(宋朝四賢)으로 불리는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그리고 동방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8현은 신라인 2, 고려인 2, 조선인 14명이다.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안유와 정몽주이다. 그리고 조선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말한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향교 내에는 5개의 송덕비가 있고, 향교 앞에 10개의 송덕비가 있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의향교에 전패(殿牌)가 전국의 향교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패는 조선시대 각 고을에 관원들이 묵던 객사(客舍)에 봉안한 임금님을 상징하는殿자를 새긴 나무 패이다.

   이는 서울에 중국 황제를 상징하여 봉안되었던 궐패(闕牌)를 모방하여 지방에 왕권의 지배를 나타하며 의식에 사용하던 중요한 물건이었다. 동지·설 및 국왕의 탄신일과 기타 중요한 의식이 있을 때 수령 이하의 관원과 백성들이 이를 모시고 경배하였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하여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다. 또한, 해당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에 병합되었으며, 지방관은 즉시 파면되었다. 이 때문에 지방관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축출하기 위하여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도 있었다. 전국의 객사마다 이 전패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없앴버렸다. 다행하게도 정의향교만이 이를 감쪽같이 숨겼다가 다시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어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보내야하지 않을까?

   향교에서 나와 성읍민속마을을 둘러본다. 태양이 이젠 화염방사기로 변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주변의 나무, 집 등 온통 마을 전체가 반숙이 되었다. 한낮, 시멘트 포장길은 네바다주의 데스밸리처럼 달구어졌다. 등에서는 더운 땀이 도랑이 되었다. 내가 사진을 찍느라 혼를 뺀 사이 일행이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그러려니 하고, 태연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민속마을 거리가 옛날 같지 않게 어수선하였다. 이제 코리아는 G8이라는데, 선진국다워야 관광객들이 계속 K컬쳐를 찾을 텐데 말이다. 관계 기관에서는 뭘 하는지 모르겠다.

   잠시 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행들과 움직이고 있단다. 버스 곁에서 만난 아내는 내 잔등에서 땀으로 흥건한 남방을 수건 훔쳐내며 더위를 식혀준다. 역시 복덩이 아내를 가진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남자다.

   배가 출출한 버스는 우리를 '고수마'라는 음식점에 내려놓는다. 말고기 전문 음식점이다. 선홍빛깔 생간, 육회가 고급스럽게 접시에 담겨 나왔다. 내장으로 만든 요리도 나왔다. 그리고 구워 먹도록 말고기가 나왔다. 육수가 진한 국물도 나왔다. 처음 먹어보는 말고기 정식, 입이 호강하였다.

   김학경 박사와 같은 상에 앉아 소주 잔을 부디치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내가 시를 쓴다니까 시집을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대정향교에 가서 한 권 전달하겠다고 했다. 몇 잔 술에 더위는 훌쩍 날아가 버렸다.

   버스는 서귀포 쪽으로 달린다. 여전히 더위는 온 세상을 달구고 있었다. 휴애리 제주올레가 우리를 맞이한다. 태양을 빨아들이며 광합성하는라 나무들은 팔랑거리지도 않는다. 원여름 꽃들이 여기저기서 이름을 불러달라며 웃음을 연속 내게로 보낸다. 폭포가 더위를 부서뜨리며 투신한다. 구름이 내려와 우리와 함께 있고 싶다고 손짓한다. 등에 땀이 흐르든 말든 나는 여행만 나오면 그저 신난다. ‘I HUEREE라는 글자가 바람에 일렁이며,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얼굴을 내밀며 보챈다.

   인공터널이 보인다. 어둠을 시원하게 빠져나갔다. 시계를 보며 '하늘정원'으로 오른다. 그런데 안내원이 막는다, 그곳은 이곳에 사는 돼지가 다니는 길이라며.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한라산 풍광이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터널 근처의 몇 마리 동물이 있는 곳에 멈췄다. 아버지 염소가 자기 밥통 속에 들어앉아 있다. 어미 흑돼지가 여러 마리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 곤충 표본도 전시되어 있다.

    발길을 열심히 옮기느라 등에는 다시 땀이 개울을 이루고 있었다. 버스에 오른다. 냉장고에 들어온 것 같다. 오늘 공식 일정은 서서히 마무리되어 간다. 산록도로를 질주하는 버스, 중산간도로의 나무들이 하늘이 구름이 창문을 스쳐 지나간다. 오른쪽은 한라산. 도로 곁 다리 아래 깊은 골짝이 차례대로 지난다. 얼른 그곳에 뛰어내려 더위를 내려놓고 가고 싶었다.

   핑크스를 지나 광평리를 거쳐 버스는 제주시에서 오는 평화로와 만난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는 우리를 대정향교에 내려주었다. 고향에 온듯한 기분이다. 차에서 우선 시집을 꺼내 김학경 박사에게 드렸다.

   여행이 끝나는 자리, 감물을 들인 머플러까지 한 장씩 선물로 받는다. 아직 마르지 않아 비닐에 담아서 말이다. 고맙기 그지없다. 대형 선풍기에 더위를 식히면서 마지막 전교님의 말씀을 들었다. 수고해 주신 대정향교 관계자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문화재청, 성균관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자동차는 더위를 뚫고 아침에 출발한 영어교육도시 한신경로당으로 향한다. 경로당엔 이미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꿀물 뚝뚝 떨어지는 수박의 냉기를 온몸이 받아들인다. 소파 쪽 구석에서 아내의 전화기가 진동한다. 향교에 손가방이 남아 있다고 혹시 김영옥 님 것이 아니냐고 전화가 왔다. 향교의 사무장 이정숙 님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나는 아직도 후퇴하지 않은 더위를 뚫고, 다시 드라이브에 나선다. 엑셀에 발을 얹었다. 그리고 구억리 보성리를 지나 향교로 차를 몰았다. 도착하니, 김학경 박사와 전교님이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종일 수고하신 전교께서 서울에서 온 분들을 공항으로 배웅하려는 참이란다. 자동차가 집에 도착했을 때도 해가 서쪽 하늘에 아직은 높이 떠 있었다. 아파트에 들어와 한라산이 본적인 삼다수 같은 수돗물로 더위를 벗겼다.

    제주 속의 제주여행이었다. 9년 살이 제주에서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제주의 아픈 역사적 사실에 눈을 조금 더 뜨는 계기가 되었다. 더위 속에서 이틀 간의 여행을 강행했다지만, 내겐 오랜 기억될 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