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 김이령】
수어手語 배우기
손끝에서 부푸는 말
둥글게 빚어진다
듣지 못한 아이들은
손으로 글썽이고
모음은 부스러기가
많아서 따스하다
창밖엔 소리 없이
떠다니는 흰 눈들
손으로 빚어놓은
새들이 눈을 뜨면
첫눈은 입을 벌린 채
가만히 녹아간다
침묵으로 세상은
환하게 오는 거라
꿈결에 처음 듣는
자신의 목소리에
말들은 잇몸을 가져
벙긋이 태어난다
【부산일보 / 김동균】
어느 모텔 수건의 공식
나란한 공식으로 하얗게 각 잡힌 날
씻어낸 자리마다 낯가림이 따로 없어
한 번만 쓰고 버려도 표정 없는 얼굴이다
두꺼운 커튼 사이 햇살을 막아두고
계절을 빨아 놓아 돌고 도는 순백의 시간
아무리 흩어놓아도 반듯하게 접혀있다
새겨진 문신처럼 씻어도 그대론데
눈총으로 찍힌 낙인 구석으로 밀려날 때
객실 벽 초침 소리는 꽃무늬에 스며든다
【조선일보 / 한승남】
취급주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슬픔을 운구한다
얼굴 없는 수취인 이름도 희미해졌다
똑 똑 똑 대답 없는 곳
긴 복도가 느려진다
저 많은 유품들은 누가 보내는 걸까
주문을 외우면 외로운 착각의 세계
반품도 괜찮을까요
열지 못한 사연들
상자도 사람도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
유리 같은 마음입니다 던지지 마세요
날마다 포장된 시간
기적을 쌓는다
【동아일보 / 류한월】
절연
불꽃이 튄 자리엔 그을음이 남아 있고
뭉쳐진 전선 끝은 서로 등을 돌린 채로
흐르던 전류마저도 구부러져 잠들었다
구리 선을 품에 안은 검은색 피복처럼
한 겹 두 겹 둘러싸는 새까만 침묵으로
철로 된 마음속에서 절연되는 가족들
한 번의 접점으로 미세 전류 흐르는데
묻어둔 절연층엔 전하지 못한 말들이
심장의 전압 내리고 가닿는 길 찾으려
【농민신문 / 김영곤】
어떤 광합성
병실에 누워있다, 깡마른 나무 한 그루
한뉘 내내 둥근 세상 사각 틀로 깎아내다
제 몸을 보굿*에 끼워
몸틀처럼 앙버티는,
무엇을 기다릴까, 천 개의 귀를 열고
한 번도 부화되지 않은 톱밥의 언어들이
끝내는 해독 못한 채
침묵 속에 갇히고,
저 왔어요 한 줌의 말 광합성이 되는 걸까
핏기 잃은 가지에서 붉은피톨 감돌 때
고집 센 심장박동기
뿌리째 팽팽해지는,
무척산에 옮겨 심은 우듬지 저류에서
썩지 않는 후회가 시간의 빰 데우며
절단된 둘째손가락
단풍 빛깔로 손 흔드는,
*보굿: 나무껍질의 순우리말
【서울신문 / 박락균】
달을 밀고 가는 휠체어
물비늘 일으킬 때 주저앉는 여름밤
내려온 눈썹달이 당신 뒤를 밀어주면
휠체어 해안선 따라 바퀴가 걸어간다
당신의 마디마디 달의 입김 스며들어
번갈아 끌어주는 밀물과 썰물 사이
눈동자 물결에 멈춰 어둠을 다독인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뭍에서 사는 동안
파도만큼 출렁여 눈 뜨고 산 새벽시장
발자국 병상에 누워 허공을 걷는 어머니
【오륙도신문 / 한정】
비대칭 모임
하현달 기울다가 벽에서 일그러질라
급하게 서두르면 평면 사이 어려운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금 쩍 가면 난감하지
파도가 밤새도록 벼린 날 집어삼켜
현 위치 가늠 못 해 어느 때 낮이 올지
끝과 끝 서로 맞닿아 부메랑이 되어올까
바다는 마음 없이 가만히 두고 볼 일
야위다풍성하다 저 혼자 여유롭게
선대칭 데칼코마니 회전축에 포갠다
【경상일보 / 오향숙】
인사이더 식사법
푸성귀 같은 날들 집으로 가져와서
큰 그릇에 버무리면 사람이 모여든다
내 편과 네 편의 입맛 한때는 겉돌아도
속속들이 배어든 유연한 참기름 말
제 각각 살아있는 뿌리의 속마음은
밖으로 내뱉지 않아 싸울수록 순해진다
싱거운 나의 하루 쓴맛이 녹아들어
혀가 만든 비법 하나 스며든 인사이더
싱싱한 유일한 재료 입 닫고 귀를 연다
【한라일보 / 박숙경】
뜨개질하는 여자
맞은편 유리창 속 나 같은 여자 하나
구겨진 종이 가방 무릎 사이 세워놓고
안뜨기 바깥뜨기로
남은 오후 늘이네
실마리 움켜잡고 내달리는 두 개의 손
바늘 끝 시선까지 한 코씩 엮어내면
상상을 더하지 않아도
이미 따뜻한 겨울
살다 보면 가끔씩 그럴 때 있기도 해
덜컹 덜컥 흔들리다 저절로 아귀 맞는
까무룩 졸다 깨보니
한 뼘이나 자란 오후
【매일신문 / 김정애】
자화상의 오후
빈칸 생의 여백이 귓불을 뜯게 했나
느닷없는 살 조각을 붕대로 친친 매고
회색빛 푸른 눈동자 거울 앞에 앉았다
아직 남은 소음에 대해 눈빛이 묻고 있다
오후 내 낯선 색채를 캔버스에 게워내며
진녹색 코트 여미고 파이프를 문 사내
색을 고르는 일은 칼날을 세우는 일
울분 한 붓 슬픔 한 붓 거칠게 찍어 눌러
죽어도 들키기 싫은 고독을 덧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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