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베트남․캄보디아로
2012. 1. 26(목)
설날 연휴가 끝났다. 아내가 음식을 준비한다. 늙으신 아버지와 동생가족들과 함께 몇 년 만에 만났다. 남인이 남규를 키워놓고, 나를 끔찍이 사랑하면서 중병으로 훌쩍 세상을 떠난 윤여숙 여사. 벌써 5년이 다가온다. 어머님과 조강지처 윤여사에게 설맞이 차례를 지냈다. 지난 추석에 이어 장남의 역할을 오랜만에 하는 것에 대하여 나 스스로에게 기쁨을 보낸다. 인생이란 행복의 숲속을 걷는 듯 보이지만, 사람들의 가슴 한켠으로는 늘 근심거리가 들락거린다. 그래도 우리네 삶이란 것이 희망의 자그만 불씨를 살려가면서 먼 길을 향해 나가는 것이리라.
나는 사회에 진출하여 대학친구들과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다. 몇 년 전 그 친구들은 나를 제외하고 태국여행을 다녀왔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님이 투병 중이셔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향친구들과의 또 다른 태국여행은 내가 바쁜 관계로 지금은 하늘에 사는 전처만 다녀왔다. 그리고 내가 금강회 회장인 관계로 그 후 대학친구들과의 호주여행을 내가 추진하게 되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처가 중병의 터널 속에 있기에 모임의 회장이었던 나는 그 여행계획 자체를 추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떠난다. 호기심의 파도를 타고 말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김영옥 여사와 함께 떠난다. 우리는 청바지로 세트를 만들고 집을 나선다. 나도 아내도 이미 각자 다녀온 코스이다. 하지만, 새 아내와 첫 번째 해외여행인지라 가슴엔 설렘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3:30 집을 나서 인천공항으로 간다. 기분이 하늘 위에 떠다니는 것 같다. 91번 버스를 타고 주엽역에서 다시 3300번 버스로 갈아탔다. 잠시 후 시베리아공기가 아라뱃길 곁을 지나는 버스 창에 빗금을 긋는다. 썰물이 빠져나간 서해 갯벌은 육지로 되어있었다. 저녁 햇살을 밀어내며 서쪽으로 달려가는 고속버스도 기분이 좋은 지 흔들림 없이 속도를 낸다.
18:30 베트남항공 VN415기, 좌우 3개씩의 좌석으로 이루어진 자그만 비행기이다. 아오자이 차림의 여 승무원이 매력을 뽐내며 곁을 지난다. 그러나 중요한 일들은 한국인 승무원이 주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느덧 어둠 속으로 잠수하였다. 20:00쯤 저녁식사가 나온다. 농어튀김, 밥, 그리고 월남 커피, 펩시콜라와 함께 하늘을 난다.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영화를 보는 사람, 공자님을 만나는 사람… 다양한 군상들이 임시 가족이 되어 무릎을 대고 있다.
2200피트 상공에서 아내의 얼굴을 카메라 속에 담는다. 내 얼굴도 찍힌다. 지난 가을엔 교장자격연수의 일환으로 베트남․말레이아시아를 다녀왔다. 그 때 보던 황해, 동지나해, 남지나해의 푸른 물결도 베트남의 밀림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2시간의 시차를 가진 베트남. 하노이 공항 현지시간 21:45쯤 내려 버스에 오른다.
북베트남의 명소 하롱베이로 가는 것이다. 열대의 공기 속을 달린다. 주변은 어둠의 창고이다. 가끔 가로등이 나왔다가 가버리고, 마을도 거의 숨어버렸. 삼성애니콜 공장이 지나가고, 오리온초코파이 공장도 잠깐 얼굴을 비췄다가 가버린다.
베트남도 동양권이라 구정연휴(음력설, 중국설이라고 베트남인들은 말함)가 있다. 우리보다 긴 7∼10일 정도로 중요한 명절인 것이다. 벼농사를 2∼3모작 하는 그들에겐 가을수확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들에겐 추석이라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남성미 넘치는 현지가이드가 인사를 한다. ‘신짜오(안녕하세요) 신까먼(감사합니다.)’ 베트남 말을 몇 마디 가르쳐준다. 중국어보다 성조가 더욱 복잡하다는 베트남 말이다. 베트남인들에게 결혼, 이사 등이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란다. 사회주의 냄새가 난다.
2012. 1. 27(금)
00:30쯤 버스는 우리 일행을 Halong Plaza Hotel에 풀어놓는다. 아내와 해외에서의 첫날밤이다. 피곤한 우리는 금방 잠에 빠졌다. 05:30 모닝콜이 귓전을 때린다. 아침식사는 안남미 쌀밥이다. 빵도 있다. 수박, 용과, 과바 등 열대과일도 보였다. 하지만 과바는 익지 않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둠이 걷히고 창밖으로 남국의 바다가 보인다. 호텔 창문 위로 높다랗게 현수교가 보인다.
흐린 날씨이다. 중국대륙의 찬 공기와 적도 쪽의 더운 공기가 만나 하늘이 찌푸린 것이다. 07:00 체크아웃, 버스에 타고 금방 하롱베이 선착장에 내린다. 베트남 국기를 단 유람선들이 3∼7대씩 조를 짜서 대기하고 있었다. 07:33 우리 일행은 배에 오른다. 5살 내외의 꼬마가 몽키바나나, 땅콩, 과바를 들고 사란다. 아시아 최연소 장사꾼인가보다.
남중국해의 서쪽 통킹만 하롱베이, 3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비의 바다이다. 수많은 섬이 모여 있어 파도는 오지 않고, 호수처럼 고요하다. 지질시대에 바다 밑에서 만들어진 석회암층이 융기하여 만들어진 섬의 군락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지금도 매년 조금씩 섬이 융기하고 있단다. 열대지방이라지만 날씨가 선선하다. 우리 일행은 한국에서 입던 오리털파카를 그냥 걸쳤다. 배는 우리를 이름 없는 섬에 내려놓는다. 천궁동굴이다. 그 속엔 한반도지형, 세종대왕, 김구 선생님, 견우와 직녀, 용, 남근석, 머리 감는 선녀…(이름도 잘 붙인다.) 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 종유석, 석순, 석주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지하수가 없어 새롭게 석회암지형이 생기지는 못 한다. 그래도 아름다운 동굴이었다.
다시 배에 오른다. 바다에 이루어진 수상어촌이다. 다금바리, 새우, 이름 모르는 어류들이 사람들에게 소신공양을 위하여 수족관에서 기다린다. 강아지들도 그들의 가족이 되어 배 위에서 산다. 생선회, 새우튀김에 우리가 가져간 소주가 새참으로 입맛을 자극한다.
쾌속선을 타고 티톱섬에 다다른다. 그렇지 않아도 쌀쌀한 날씨에 안개비까지 내린다. 여기에도 중국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점심시간이다. 매운탕, 밥, 어묵에 김치까지, 그리고 다시 가져간 소주도 곁들인다. 유람선엔 노래방기기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아내가 1번으로 등장한다. ‘You raise me up'을 바다 위에 아름다운 음성으로 풀어놓는다. 마음 착한 아내는 노래까지 잘 한다. 형구 아내의 ’노래는 나의 인생‘, 선하 처의 ’뿐이고‘, 근수 댁의 ’당신의 마음‘, 영호 아내의 ’여자의 일생‘이 머나먼 베트남의 안개 낀 하늘에 나부낀다.
얼큰해진 몸을 이끌고 허브향 같은 은은함이 피부에 와 닿는 편백나무(히노끼) 상점으로 들어간다. 음이온을 다량 발생시키고, 자연에 가장 가까운 공기를 만들며, 피톤치드가 가득하다는 여러 가지 물품들이 보인다.
세계 2위 쌀 수출국 베트남, 70%의 국민들이 농업에 종사한다. 그러나 농기계가 고가인지라 거의 수작업에 의하여 농사가 짓는다. 세계 쌀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하는 안남미의 일종인 베트남쌀은 한국의 쌀보다 쌀알이 길다. 도로가의 집들은 폭(가로 5m, 세로 12m 정도)이 좁다. 사람들이 도로 쪽으로 집을 짓고 싶어 하여 국가에서 폭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물론 토지는 국가소유이다. 국민들은 국가로부터 임대권을 받아 토지로, 택지로 사용한다. 이 임대권은 매매가 가능하며, 그 지역이 개발될 경우에는 국가가 보상한단다.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의 공화국, 하롱베이에서 하노이로 버스가 달린다. 어제 밤에 암막을 쳤던 거리가 이제 제대로 보인다. 차창 밖은 70년대 우리나라의 풍광이다. 도로 옆에 철길이 나란히 달리고 있다. 철길을 걷은 사람이 보인다. 옛날 중․고교시절에 경원선 철길을 걷던 생각이 난다. 집집마다 붉은 바탕에 노란별을 단 베트남 국기가 펄럭인다. 농지 곁에는 묘가 보인다. 이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을 2년 정도 매장하여 뼈를 수습한 후 납골묘를 농지 곁에 만들고, 그 영혼과 늘 가까이 하나보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의 국기에서 별의 5개의 꼭짓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공산당, 노동자, 농민, 군인, 학생을 상징한다. 순하고, 힘이 좋다는 검은 빛깔의 물소가 풀을 뜯는다. 각종 공예품, 생활용구, 밥주걱 등을 만들기도 하는 물소의 뿔은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된다.
프랑스에 80년을 지배 받았던 베트남, 하지만 그들이 베트남의 현대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은 거의 없단다. 베트남 여성들이 착용하는 아오자이는 중국의 치파오와 프랑스의 콜셋의 결합이란다. 아오자이는 남베트남에서 많이 입는단다.
우리나라는 미국, 호주 등과 함께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그들과 싸웠다. 그렇지만 한국에 대한 그들의 나쁜 감정은 이미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의 드라마, K-Pop 등 한류도 한 몫을 했겠지만,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강국이라 생각하고, 실용주의에 따라 그렇게 변했으리라. 자존심이 강한 국민성의 베트남 사람들은 거리에 앵벌이 행세를 절대하지 않는다. 우리의 서울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노숙자들도 거기엔 없다.
버스의 앞길을 가로 막으며 5마리의 소떼가 지나가고 있다. 대한민국과 사돈관계인 나라, 우리나라의 농촌에 가면 베트남 며느리들이 많다. 하노이의 가든시티를 지난다. 3층 단독주택이 줄을 지어있다. 저녁식사는 ‘대장금’이라는 한국 음식점이다. 삼겹살, 된장국, 월남소주가 나온다. 내 앞자리에는 수원대학교에 근무하다가 퇴직 후 원주로 귀농했다는 부부이다. 아내의 회갑기념으로 여행을 왔다고 한다. 식사 후 수상인형극 관람이다. 앉아서 연주하며 부르는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애절하다. 조명과 함께 이무기, 공작, 낚시하는 사람의 모습, 그리고 물고기들이 싸우기도 하고,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재미있다. 사람들이 뒤에서 저렇게 인형을 조작하여 작품을 만들다니, 그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하노이 대우호텔에 여장을 푼다. 한국과 베트남 교역의 상징이며, 하노이 최초의 오성급호텔, 아셈회의가 열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묵었다는 곳이다. 내가 7∼8년 전에 와서 묵었던 곳이다. 김대중 정부의 출현과 함께 사라진 대우그룹의 일부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로비에서 금강회(우리 대학친구들 모임) 일행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한다. 회장을 새로 뽑고, 금년 여름의 계획을 만드는 것이다.
2012. 1. 28(토)
베트남 쌀국수, 빵으로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한다. 그리고 열대과일을 집었다. 식당 밖에는 야자수 사이로 차디찬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노이는 보통 궂은 날씨가 많다고 한다.
체크아웃 후, 호치민을 만나러 간다. 이 나라를 통일한 베트남의 영웅, 미국 그리고 다국적군과의 전쟁에서 당당히 승리한 호치민. 평생 독신을 지키며 국가와 결혼하였던 그가 있기에 베트남이 있는 것 같았다. 광장의 입구에는 아침부터 참배객,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호치민이 살았던 집, 정원사의 집, 연못, 그리고 공원의 풍광을 살핀다.
씨클로를 탄다. 자전거의 앞쪽에 관광객을 탈 수 있도록 좌석이 만들어져 있다. 아내가 앞의 씨클로에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아내에게 뒤를 돌아보라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하노이 시내의 풍경이 내 눈에 들어온다. 설날 바로 다음인지라 거리는 ‘Happy Chinese new year', 'Happy lunar new year' 등의 현수막이 바람의 리듬을 타며, 아직도 설분위기에 젖어있다.
베트남에는 노인이 아주 적다. 60% 정도가 30대 미만인 젊은 나라이다. 이 나라는 치안이 잘 되어 있어 흉악범, 유괴범 등이 거의 없다. 발마사지를 받으러 간다. 자리에 누우니, 24살의 아가씨가 내게 나이를 묻는다. 초등학생처럼 내 나이를 대답한다. 그런데 거짓말이란다. 꽤나 젊게 보이는 것인가? 아가씨가 좋아하는 한국의 연예인 이름을 댄다. ‘장동건, 원빈, 이민호…’ 내가 모르는 연예인의 이름까지 나온다.
라텍스 매장이다. 생고무로 만든 침대 매트리스, 베게, 이불… 등 다양한 제품이 눈길을 끈다. 생고무를 제일 싫어하는 것이 벌레란다. 꿀이나 음식이 들어있는 그릇에 고무줄을 매어 놓으면 다른 벌레들이 절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최상급의 생고무로는 젖꼭지, 수술장갑, 콘돔, 비행기 바퀴 등을 만든다고 한다.
버스에 오른다. 하노이에서 제일 크다는 西湖가 무채색으로 우리 곁을 기웃대고 있다. Sen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그리고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으로 향한다. 15:25분 베트남항공 VN837기의 뱃속으로 들어간다. 캄보디아 상공에 다다르자 육지가 온통 물바다이다. 대부분의 도로가, 마을이 물에 잠겨 있었다. 태국의 홍수가 여기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시엠립공항에 내린다. 남국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우선 가이드에게 캄보디아에 대홍수가 났느냐고 질문을 한다. 하지만, 홍수는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홍수의 모습은 톤레샵호수였던 것이다. 고대 크메르왕조의 고도였던 캄보디아 씨엠립 지역은 앙코르 왕조의 유적인 앙코르와트, 앙코르톰 등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다. 한해 한국인만 해도 30만이 이곳을 방문한다.
캄보디아, 1431년도까지는 동남아의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의 강국이었으나, 그 후 멸망했던 이 나라. 원래 군주입헌국이었으나 1993년도부터 중립국이면서도 자유민주주의국가를 선포했다는 왕국이다. 한국보다도 먼저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 사실은 1964년 제2회 신생국 올림픽을 개최(제1회는 1962년 스리랑카)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드디어 날씨가 열대기후, 땀이 흐른다. 리무진버스에 얼른 오른다. 순간 캄보디아가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7∼8년 전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서울에서 수명을 다한 시내버스가 ‘구로동, 봉천동’ 등 한글을 그림처럼 붙이고 이곳의 거리를 누비며 우리를 안내 했었다. 가이드가 호텔로 가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다며,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방향을 와트마이 사원으로 틀었다.
킬링필드의 흔적이 다시 내 눈을 자극한다. 미국에서는 그들이 이 나라에 자행한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영화 ‘킬링필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월남전 당시 북베트남에 병참기지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B52 전폭기로 베트남과의 국경지역에 1969년부터 1973년까지 30여회 네이팜단을 비롯한 각종 폭탄으로 맹폭격의 세례를 받았던, 약한 자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던 캄보디아이다. 그 미국에 대하여 극도로 적대감에 사로잡힌 붉은 크메르군들은 정권을 잡고 3년 8개월(1975.4.17∼1979.1.9) 동안 교사, 공무원, 학생, 안경 쓴 사람… 등 사회의 엘리트라고 생각되는 약 300만명의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그 비극의 흔적이 여러 사원에 남아 해골, 뼈로 빽빽하게 담겨져 그 당시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979년 1월 9일 훈센 수상이 크메르루즈군을 몰아내고 집권하여 현재의 캄보디아를 만든 것이다. 1400만 명 인구의 캄보디아는 사형제도가 없다. 원주민 크메르족이 대부분인 그들은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쌍꺼풀눈에 속눈썹이 길며 키가 작다. 크메르어를 주로 사용하는 캄보디아는 베트남과는 한일관계보다 더 심한 앙숙의 관계로 유명하다. 이 나라는 태국에서 전기를 수입하기 때문에 전기세가 한국의 3배 이상이라고 한다. 또한 화교가 70%의 상권을 가지고 있다.
Best Western호텔에 투숙하였다. 옛날 일본의 큐슈에 묵었던 하우스텐보스 분위기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본다. 열대의 그믐달이 달무리를 만들고 있다. 머리 꼭대기에 오리온자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바로 이곳이 적도에 가까운 곳입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침대 옆 벽에는 도마뱀이 2마리나 붙어 있다. 그리고 새소리가 들린다. 새소리는 바로 도마뱀이 우는 소리란다. 호텔 문턱에는 개구리가 보인다. 더워서 그런지 목이 탄다. 로비에 가서 얼음물을 시켜서 마신다. 건물 밖의 등잔모형의 조명이 눈길을 끈다.
카운터 아가씨가 손을 모으고 내게 인사를 한다. 나도 답례를 한다. 남방불교(소승불교)의 탓이리라. 합장인사에서 손이 위로 올라갈수록 공손한 인사라고 한다. 이곳은 11월부터 5월까지는 건기이다. 저녁식사를 위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늘봄식당’에 도착하였다. 쌈밥이 주 메뉴이다. 캄보디아에서 유명한 압살라민속쇼가 공연되고 있다. ‘압살라’는 ‘물 위의 요정’이라는 뜻이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율동을 펼치는 젊은 배우들의 나긋나긋한 손, 발, 몸동작이 신비롭게 보인다. 역시 이들의 민속쇼의 주제도 사랑하고 이별하는 우리들의 서민적 이야기였다.
2012. 1. 29(일)
버스가 시엠립 시내를 달린다. 자동차도 많아졌고, 오토바이의 매연도 제법 보인다.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는 캄보디아. 드디어 앙코르와트 탐방이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앙코르지역의 유적을 보고 감동하여 ‘이곳의 경이로움과 더불어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한 세계 7대 불가사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얼마 전 우리나라 제주도와 함께 세계 7대 경관에 선정된 앙코르와트이다. 햇살이 뜨겁다. 땀샘이 왕성하게 활동한다. 호수에 비친 앙코르와트가 물결에 흔들린다.
아! 또 다시 보는 앙코르와트, 그것을 본 사람들은 건축물의 장엄함, 고색창연함, 그에 따른 신비로움에 모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곳은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도 가장 큰 사원이다. 크메르 건축물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크메르 건축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오죽하면 불가사의 건축물이라고 하겠는가? 앙코르와트는 석조 건축물로 만들어진 우주의 축소판으로 지상에 있는 우주 모형인 것이다. 아내와 열심히 인증샷을 찍는다. 세계의 군상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것 같다.
다음은 앙코르톰이다. 1850년 여름 프랑스 신부 ‘부유보’가 캄보디아 사람들과 톤레샵호수 북쪽 밀림 속을 헤매다가 언덕에 올라서 눈 아래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경악했다는 앙코르톰. 부처님 얼굴을 새긴 탑이 수없이 늘어서 있고, 거대한 왕궁과 나무에 뒤덮인 도시가 저녁놀 아래 상상할 수 없는 규모로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9세기 초 수리야바르만 2세가 크메르를 통일하면서 이 사원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이웃 나라의 세력에 밀려 국가의 안정마저 지킬 수 없었다. 급기야 1177년에는 라오스의 침공을 받아 결국 이곳 크메르의 왕도는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새롭게 등장한 자야바르만 7세는 라오스의 참파군을 보기 좋게 격퇴하고, 성곽을 한층 굳건히 건축하여 새로운 도성을 만들었다. 이로부터 300년 만에 완성된 도시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와트가 힌두문화를 상징하는 사원이라고 한다면 앙코르톰은 불교의 진리를 믿고, 깨달음을 구하는 자는 모두 구제 받을 수 있다는 불교문화가 배어있는 도시이라고 할 수 있다.
앙코르톰은 1431년 타일랜드 아유타족이 저수지를 파괴하자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되었고, 드디어 1434년 크메르족은 끝내 도읍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만다. 이때부터 화려한 도시 앙코르톰은 숨도 쉬지 못하고 밀림에 묻혀버린 것이다.
다음은 바이욘사원, 중앙에 지름 25m, 높이 45m 되는 거대한 중앙 탑이 솟아 있다. 그 주위는 4면 불상의 탑 54개가 사방에서 자비로운 미소를 발산하고 있어 '크메르의 미소'라고 불린다. 숫자 54의 의미는 그 당시 왕국 안에 있었던 주(州)의 개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사원에 쓰인 돌만 해도 60만개. 1톤 이상이 되는 거대한 돌들은 거의 태국, 베트남에서 코끼리나 배의 힘으로 이곳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바위산 모양을 한 이 사원에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한 자야바르만 2세의 웃는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부처와 동일한 정도의 왕국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제 1회랑에는 신화나 용맹스런 전투 모습뿐만 아니라, 당시 서민생활의 모습이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다. 제 2회랑의 벽화는 힌두교 신화나 전설을 주제로 하고, 북쪽에는 유명한 '라이 왕의 전설' 신화가 한쪽 면에 전개되어 있다. 창건 당시 화랑에는 불상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자야바르만 7세 왕이 세상을 뜬 뒤 힌두교사원으로 개종되면서 불상을 제거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코끼리 테라스는 12세기 후반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것으로 광장과 접한 동쪽 정면에 만들어져 열병식이나 행사를 관람하는데 이용되었다. 350m 길이의 웅장한 규모로 옹벽에는 코끼리 부조가 연달아 새겨져 있다. 곳곳에 머리가 세 개 달린 코끼리 神인 에라완에 긴 코로 연꽃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코끼리 테라스의 바로 옆에 라이 왕의 조각상이 있는 테라스가 있다. 라이 왕은 크메르 신화인 '라이 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왕이다. 옛날 왕이 밀림에서 독사와 싸우게 되었는데 그 뱀을 죽일 때, 피가 튀어 문둥병에 걸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 2회랑의 동면 북쪽에 이 전설을 주제로 한 부조가 전개되어 있다. 현재 이곳에 머리가 없는 상태로 전시돼 조각상은 모조품이다. 진품은 머리통이 온전한 모습으로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타프롬 사원은 앙코르톰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원은 12세기 중반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봉헌하기 위해 지은 사원이다. 그 당시에는 약 8만 명의 사람들이 3천여 개의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18명의 고승과 740명의 관리들, 그리고 수많은 댄서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과 내분 등으로 수백 년 동안 방치되었다. 지금은 시간의 깊은 수렁 속에 잠기어 무너진 돌 더미가 통로를 막고 있다. 거대한 스펑나무(무화과나무)의 뿌리는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을 완강히 붙잡고 있다. 거대한 사원을 자연이 공격해 들어오는 이곳은 자연의 흉폭함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이곳은 안젤리나 졸 리가 주연이었던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드넓은 평원과 정글 위에 우뚝 솟은 ‘신성한 산’을 의미하는 60여m 높이의 프놈바껭산이다. 코끼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도 있다. 길옆에서는 내전 당시 부상당한 제대병들이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1달러를 내려놓으며, 그들에게 합장을 하였다. 산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영화 ‘왕과 나’를 촬영했다는 드넓은 정글이 펼쳐져 있다. 산 정상에 자리한 신전은 중앙탑과 그 주위에 4개의 탑(초승, 그믐, 보름달, 반달을 의미), 그리고 아래쪽에 12간지를 의미하는 동물의 탑들이 중앙을 호위하고 있었다. 멀리 서쪽으로 바라이호수가 보인다. 원래 이곳은 일몰풍광이 멋진 곳이었으나, 오늘은 날씨 관계로 멀리 정글을 향하여 사진만 찍고 내려가게 되었다.
저녁은 뚤레메콩이라는 곳에서 베트남 음식이 차려졌다. 그리고 'Alaska Massage'라는 곳에서 전신마사지를 받는다. 피곤한 몸을 맡기니 졸음이 쏟아진다. 정신을 차리고 일행과 함께 야시장엘 들른다. 7개의 체인점을 가지고 있다는 Blue Pumpkin, 미국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가 왔었다는 ‘Red Piano’가 불빛을 흔들며, 사람들을 부른다. 유럽피안 거리라고 하는 이곳에는 반바지, 발팔티 차림의 수많은 백인들이 맥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긴다. 우리도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 1. 30(월)
Best Western호텔 아침식사이다. 볶음밥도 있고, 김치도 있다. 단층 건물 여러 개로 되어있는 호텔 건물 사이의 연못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식당 창가에서 포즈를 취하며 아내와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나와서 시엠립 외곽의 풍광을 담는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호텔 체크아웃이다.
버스가 톤레샵호수으로 간다. 하늘에서 보았을 때, 대홍수가 난 것으로 착각했던 바로 그곳이다. 호수로 가는 길가, 논에서는 낫으로 벼 베는 모습이 보인다. 말, 흰소, 물소, 오리가 그 주위에 풍경의 조화를 만든다.
유람선에 오른다. 캄보디아 8~9세 정도 되는 사내아이 둘이서 승객들의 손을 잡아준다. ‘머리 조심하세요.’를 반복한다. 메콩강이 역류하여 만들어진 동양 최대의 호수, 톤레샵. 수평선이 보인다. 호수가 마치 바다가 되고 싶다는 것처럼 말이다. 황톳물이 들썩인다. 사내아이들이 승객 개개인 등 뒤에서 안마를 한다. 손맛이 시원하다. 지압을 하고, 두드리고, 선상마사지인 것이다. 1달러씩 내민다. 아내가 예뻐서 그런지 더 열심히 두드린다. 내 뒤에서도 안마가 계속된다. 1달러를 줄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는 사내아이 하나가 선장을 밀어내고, 직접 배를 운전한다. 어려서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든 참 기특한 아이들이다.
톤레샵호수에는 물과 배와 수상가옥과 바람과 함께 사람이 이들과 어울려 산다.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여기저기 시선을 보내고 거둔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원주민들이 주인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이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그들을 대하는 것 같다. 메콩강과 함께 캄보디아의 주요 수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우기에 불어나 메콩강의 물이 역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우기에는 경상남북도 크기의 호수가 갈수기에는 강원도 크기로 줄어든다고 한다.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의 양이 캄보디아 어족자원의 80%를 차지한다. 민물어종이 원래 165종 정도였으나 베트남에서 댐을 건설한 이후 현재는 102종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물 위의 도시라고 부르고 싶다. 수상가옥이 있고, 마트가 있고, 교회가 있고, 학교도 있다. 부레옥잠이 떼를 지어 돌아다닌다. 배 수리시설도 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수상전망대에 오른다. 조각배가 기우뚱거리며 뱃전에 몸을 기댄다. 어떤 조각배에는 모자가, 때로는 모녀가 또 다른 배에는 남자애 둘이 뱀을 목에 두르고 구걸을 한다, 애절하게 1달러를 요구한다. 그들은 베트남 난민이었다. 얼굴 빛깔은 까무잡잡한 캄보디아인들에 비하여 하얗고, 키도 크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국적이 없다. 남베트남이 패망하여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들의 국가 잃은 설움이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한국 사람들이 여기에도 많이 진출하고 있다. 밥퍼목사의 교회가 보인다. 국민은행 방과후학교의 간판도 눈에 들어온다. 수원시는 이곳 시엠립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도로를 개설해 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리엘’이라는 민물고기로 젓갈을 만든다. 그 냄새가 한국의 김장시장처럼 코를 자극한다. 이 수상가옥의 사람들은 갈수기가 되면 집을 끌고 이사를 간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 모습이 향상되어 그런지, 몇 년 전 보았을 때의 호수의 모습보다는 느낌이 덜 하였다.
톤레샵호수 관람을 마치고, 보석점(World Gem)으로 간다. 사모님들에게 관심을 끄는 곳이다. 나는 밖으로 나와 거리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자동차가 가끔 지나가고, 오토바이도 지나간다. 웃옷 흰색, 아래는 청색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학교를 끝내고 집으로 가고 있다. 그 아이들을 불러 함께 사진도 찍는다. 거리는 뙤약볕이 모래를 볶고 있었다.
Ankor Suki라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우리 입에 잘 맞는 음식들이 나온다. 나는 베트남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무엇이든 잘 먹고, 잘 마신다. 향신료가 있을수록 내 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어서 캄보디아 왕의 별장 근처 박쥐공원엘 들른다. 황금빛 사원이 함께 있다. 그곳에서는 점도 본다고 한다. 향이 연기로 타오르는 절 안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중이다. 박쥐공원이라지만, 수십m 크기의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여러 아름드리나무의 줄기를 타고 덩굴식물이 기어오른다. 가이드가 얘기하기를 낮에도 보인다던 박쥐는 다 어디로 피신했나보다.
상황버섯 상점으로 간다. 캄보디아 열대 정글의 구지뽕나무에서 수백 년 동안 자라서 만들어졌다는 버섯, 그것이 신비의 명약처럼 한국인 판매원이 홍보를 한다. 피를 맑게 한다고, 당뇨에 최고라고, 그리고 각종 성인병이 이것이면 완전히 정복될 것처럼 말이다. 사모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만병통치약을 구입하느라 눈알의 광도를 높인다. 아내도 신랑인 나의 건강을 위해 거금 1200달러를 들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내의 따뜻한 마음에 사랑을 보내고 싶다.
다음은 시엠립 전통시장이다. 시장입구에 차와 사람들이 엉켜있다. 오토바이들도 그 곁에 삐딱하게 줄을 맞춰 서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캄보디아도 경제수준이 상승한 것이겠지. 키가 작고 가무잡잡한 크메르족 현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한쪽에서는 다듬이방망이 같은 빵이 보인다. 야자나무로 만든 바구니 안에 바나나, 과바,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이 수북이 담겨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의 아가씨가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에는 우수가 담겨있었다. 커다란 양팔저울처럼 생긴 지게가 그 옆에 놓여있다. 아직은 인력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이는 나라이다. 고구마, 감자, 고추, 마늘, 피망, 당근, 오이, 배추, 상추 등도 보인다. 대바구니 가게도 보인다. 중년의 남자들은 오토바이로 짐을 싣고 움직인다. 포장마차 정육점도 보인다.
어머니는 안 보이고, 꼬마가 주인행세를 하는 노점도 있다. 맨발로 다리를 걷어붙이고 앉아있는 아낙도 있다. 자동차 트렁크 위에서 카드놀이는 아이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고 게임에 빠져있다. 플라스틱제품을 파는 잡화상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다. 전기 줄이 망가진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꽃가게도 보인다. 어느 나라엘 가나 삶은 다 비슷한 것이다. ‘Drive your energy Bacchus' 라는 우리나라의 박카스 선전광고가 내 시선을 멈추게 한다.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프놈바껭 산 정상에서 멀리 보이던 바라이호수로 간다. 넓은 호수에는 배만 몇 척 오갈 뿐 한적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팔찌를 팔러 몰려든다. ‘아저씨, 아줌마 멋져요. 아줌마 예뻐요. 오늘 하나도 못 팔았어요.’를 외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도 팔찌를 사고, 아내도 산다.
아내와 호수 아래쪽까지 내려갔다. 댓살쯤 되는 남자아이가 내게 ‘할아버지 멋져요.’란다. 팔찌를 또 샀다. 우리 일행이 본진이 모인 곳 쪽으로 가보니, 아이들이 모여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곰 세 마리, 만남…’ 등 우리나라의 노래를 정말 잘도 부른다. 이전에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이 소리쳐주던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 여기에서 가게를 운영하기도 한단다. 그래도 빈손으로 1달러를 달라는 것보다는 그 아이들의 상업적 정신상태가 가상한 것이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어둠이 약간 덮이는 것 같다.
버스는 이제 시엠립공항으로 향한다. 우리의 일정도 마무리 되는 것이다. 현지 가이드와 작별을 하고 탑승구 쪽으로 간다. 면세점에서는 눈으로만 물건을 산다. 캄보디아 항공에 오른 우리는 잠시 후 옛 남베트남의 수도 호치민공항에 내렸다. 그리고 베트남항공에 올라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2012. 1. 31(화)
필리핀의 서쪽 바다를 지나 타이완의 상공을 통과하며 밤바다의 검은 공기를 가르는 동안 우리 일행은 잠의 골짜기에 빠져있었다. 순간 귀가 먹먹하다. 기장의 방송이 나온다. 스튜어디스가 지나가고, 비행기가 몸을 잠시 흔들며 고도를 낮춘다. 새벽 인천공항이다. 열대기후가 한대기후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재빨리 트렁크에서 겨울옷을 꺼내어 입었다. 컨베이어벨트가 계속 돈다. 나도 따라 도는 것 같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짐을 챙긴다. 친구들과 마마보이 같던 가이드 백과장과 작별인사를 한다. 그리고 영하의 날씨 한국의 공기 속으로 잠입한다. 3300번 버스는 영종대교를 지나 공항고속도로를 달려 일산으로 간다. 마을은 출발할 때보다 더욱 추운 겨울이 와있었다.
아파트 문에 작년에 써 붙인 ‘立春大吉 建陽多慶’ 문구가 우리를 맞이한다. 거실에 들어가 아내에게 수고했다고, 즐거웠느냐고, 포옹을 한다. 창가의 늘씬한 행운목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벽시계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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