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줄장미/ 김춘기
어머니 얼굴 같은 수국이 꽃을 다 떨군
고향집 펌프 우물가
질경이 민들레 그리고 애기똥풀과 가족을 이룬
이태 전 죽은 자두나무를 감싸며
줄장미가 핀다
오전 내내 울밑을 들락거리던
산들바람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가슴 속 상처들을 죄다 꺼내어 피는 꽃
잔가지마다 촘촘하게 솟아오르는
슬픈 가시들을 보듬으며
초여름의 허리춤을 선혈처럼 물들인다.
한낮 햇살에 목이 타는 자두나무는
밤새 잔별들의 울음을 품고 있던 팔을 뻗어
줄장미의 지친 손들을 붙들어 주고 있다
그 옛날 병원에도 못 가보고 하늘로 간
할아버지 할머니
마른 젖조차 며칠 못 먹고 간 쌍둥이 동생들
그리고 췌장암 말기인 줄도 모르고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신
팔십 넘으신 아버지의
통증까지 모두 모아 피는 줄장미
십 년 전 어머니 저 세상 가시던 날
소리내어 울며, 온몸을 흔들며
꽃상여를 뒤따르던 만장처럼 붉디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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