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時調

몸에게/김제현

by 광적 2018. 8. 12.

                      몸에게 

                                               김제현

안다
안다
다리가 저리도록 기다리게 한 일
지쳐 쓰러진 네게 쓴 알약만 먹인 일 다 안다
오로지 곧은 뼈 하나로
견디어 왔음을

미안하다, 어두운 빗길에 한 짐 산을 지우고
사랑에 빠져 사상에 빠져
무릎을 꿇게 한 일
쑥국새, 동박새 울음까지 지운 일 미안하다

힘들어하는 네 모습 더는 볼 수가 없구나
너는 본시 自遊(자유)의 몸이었나니 어디든 가거라
가다가 더 갈 데가 없거든 하늘로 가거라
뒤돌아보지 말고

- 군색하거나 쫍친 구석이라곤 없는, 확 풀린 가락. 활달하다 못해 출렁거리는 시상의 전개가 미간을 잡아당깁니다. 이런 변화의 율격에서 전통 시가 형식에 드리운 퇴영의 그늘을 찾기는 어렵지요. 시조는 정형률이기 전에 '인간율'입니다.

몸은 곧 생명이거니,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몸에 바치는 한 편의 참회록이 처연하게 행간을 이끕니다. 주저 없는 직설 화법의 힘. 다리가 저리도록 기다리게 한 일, 지쳐 쓰러졌을 때 쓴 알약만 먹인 일, 어두운 빗길에 한 짐 산을 지운 일―세속에 던져진 몸은 늘 이렇듯 가혹한 고통으로 삶을 기억합니다. '안다'와 '미안하다' 사이의 낙차. 미묘하게 뒤섞인 긍정과 회한의 감정이 의외로운 정서적 파장을 낳습니다.

본디 自遊(자유)의 존재인 몸이 좇는 바는 떠돎이요, 그 떠돎의 미학인 것. 어디라 매인 데도 거칠 데도 없는 몸이 끝내 가 닿을 곳은 영원의 미지인 하늘 뿐. 비록 여위고 지친 몸일망정 더 갈 데가 없으면 가야지요. 뒤돌아보지 말고
박기섭(시조시인)

 

'좋아하는 문학장르 > 좋아하는 時調'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골 그 살구나무집/ 최길하  (0) 2018.08.13
묵시록3/이정환  (0) 2018.08.13
출근, 월요일/서숙희  (0) 2018.08.11
택배 쪽지/채천수  (0) 2018.08.11
산, 귀를 열다/김제현  (0) 2016.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