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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314

매미울음을 볶다<교원문학상 수상작> 매미울음 볶다/김춘기 아침부터 매미가 제 울음을 굵은 체에 쳐서 볶는다 발가벗겨진 말복 햇살이 테팔 프라이팬에서 탁탁 튀어 따끔따끔하다 붉은 꽃 배롱나무가 고개 흔들며 몸을 털고 있다 전봇대에 납작 엎드린 털매미, 참매미, 애매미 느티나무 어깨와 겨드랑이에 다닥다닥 붙은 쓰르라미, 깽깽매미, 두눈박이좀매미 혼성합창 경연 중이다 정오쯤부터 산 넘어, 개울 건너 재수생, 대학생, 취준생 매미들까지 무더기로 프라이팬을 들고 몰려온다 동네 참깨, 들깨 죄다 퍼 날라 달달 볶는다 한쪽에선 기름에 지글지글 녹두 지짐이 육적굽기, 계란말이, 꼬치꿰기 야단법석 시끄럽다 앞마당 마른 솔가지 타는 화덕 국 끓는 열기에 속옷이 다 젖는다 벽오동나무는 옆에서 눈 감고 부채질 중이다 큰어머님, 작은어머님, 고모님, 서울 누님 .. 2009. 9. 2.
종점/김춘기 종점/김춘기 서산마루에 걸터앉은 하늘이 대포 한 잔에 취기가 돌쯤 늦가을 어스름 몇 점 싣고 온 법원리 종점 33번 시외버스 천천히 시동을 끈다 보건지소 다녀오는 마지막 승객 중노인이 내리고 어둠이 전신주의 허리를 감으면 나른한 하루도 터벅터벅 귀가를 서두른다 젊은 시절 면 소재지 처녀와 수수 밭머리에서 청춘을 피웠던 박씨 장성광업소 광부 20년 이력, 지금은 교하신도시 지하 맨홀을 드나든다 아내도 가고, 한 줌 꿈마저 도시 외곽을 떠도는 밤 중고 티브이 혼자 춤을 춘다 그믐 달빛 몇 줄기에 젖은 양철 지붕 사글셋방 버스를 따라온 초겨울 바람이 비닐 덧댄 창문을 밤새도록 흔들고 있다 2009. 7. 13.
영천사, 한낮<강원문학 신인상 당선작> 영천사, 한낮 / 김춘기 천수경소리와 함께 접시꽃이 붉게 핀다. 마당귀에서 햇살을 쪼아 먹던 참새들이 대웅전 계단에서 깨금발을 뛰고 있다. 장수말벌이 들락거리는 단청 아래, 선잠 깬 쇠물고기가 종을 치며 정오를 알린다. 아침부터 명부전 곁의 밤나무, 하얀 국수를 연신 뽑아낸다. 명.. 2009. 6. 26.
여름 전쟁 여름 전쟁 / 김춘기 대전 갑천 변 국도. 초여름 땡볕 군단이 공터에 주둔하는 사이, 철 울타리 안 대파와 개망초가 몸싸움중이다. 발칸포 K2소총 수류탄도 보이지 않는 여름 전쟁, 별이 뜨거나 달이 뜨면 일시 휴전이다. 날이 밝으면, 다시 벌어지는 국지전투. 순간 다국적군 아까시, 버드나.. 2009.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