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장르1109 염전에서/박영호 염전에서/박영호 소금은 한여름 땡볕에서 땀과 고통과 눈물과 인내로 일궈낸 바닷물이 쓴 언어의 결정체이다 모름지기 저렇게 다져지고 시달리고서야 겨우 하얗고 짜디짠 시 한 편 써지는가 보다 2022. 11. 23. 형수의 밥상/홍사성 형수의 밥상/홍사성 빈소 향냄새에 그 냄새 묻어 있었다 첫 휴가 나왔을 때, 감자 한 말 이고 뙤약볕 황톳길 걸어 장에 갔다 와 차려낸 고등어조림 시오리 길 다녀오느라 겨드랑이로 흘린 땀 냄새 밴 듯 콤콤했다 엄마 젖 그리워 패악 치며 울 적마다 가슴 열어 빈 젖 물려주던 맛과 똑 같았다 그 일 둘만 안다는 듯 영정 속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시동생 일부러 무표정하게 맞았다 어머니뻘 형수가 차린 오늘 저녁 밥상 고등어조림 대신 국밥이다 한 수저 뜨는데 뚝, 눈물 한 방울 떨어졌다 2022. 11. 19.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김승원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김승원 1. 젖줄을 토해낼 때마다 허공에 다리가 놓인다 격자무늬 그물 사이로 굵은 바람만 빠져나갈 뿐, 거미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2. 모두 마을을 떠난 후, 여뀌며 끈끈이주걱, 바랭이가 무성한 빈집엔 도둑고양이와 생쥐가 떠나고 없다 밤이면 달빛을 풀어 추녀와 젖은 굴뚝 사이 무당거미가 슬그머니 나와 집을 짓는다 연통의 온기가 식어가면서 거미들은 재빨리 세간과 주민등록을 옮기고 이 집의 새 가장이 된 것이다 이제 거미는 썩은 대들보 살집을 파고 들어가 이 집의 내력과 가훈을 갉아먹는다 이 집엔 원래 실직한 사내가 귀향해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어느 날 아무도 몰래 밤 기차를 타버리고 그때부터 허물어진 집터를 배경으로 거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집단 농장을 이루고 산다 3. .. 2022. 11. 13. 자정의 비/김영산 자정의 비/김영산 순간, 골목 어귀에서 어둠이 비틀거린다 플라타너스와 체르니 사이 흩뿌리는 가랑비에 자정의 목덜미가 젖는다 푸른 선풍기 느리게 돌고 있는 주점은 칠부쯤 눈을 감았다 빗물 낯바닥에 어리는 불빛 아무리 밟아 뭉개도 꺼지지 않는다 우우 데모하여 바람의 꽁무니 쫓아다니는 적막이여 국제건강약국 낡은 입간판에 붐비는 부식의 시간이여 벼룩신문 어느 광고에 중고 희망 매물은 나온 게 없을까 가슴에 꽂힌 향기로운 절망도 시들어 버린 지 오래다 수천 갈래 생의 교차로에 녹색 신호등 플러그가 빠져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막차 보내고 난 장의자에 길게 드러눕는다 (1998년 제4회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작) 2022. 11. 13. 이전 1 ··· 44 45 46 47 48 49 50 ··· 27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