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김춘기 시론]
어느 날 문들 이런 말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가장 근원적인 복지는 자연이다. 무릇 이 말은 다양한 층위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그 논란은 그만큼 자연을 겪어 살아내는 방법론의 양상이 다양하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복지는, ‘좋은 건강, 윤택한 생활, 안락한 환경들이 어우러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이나 조건도 있지만 이걸 받아들이는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상태, 그리고 정서적인 포용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분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자연과의 조우가 오늘날 어느 정도까지 삶과 어울리는 조화와 결속의 자연스러움으로 행복의 근사치를 얼러낼 수 있는가는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예전 도가사상이나 자연귀의 정신이 복잡다단한 도시적 생활과 합치되려면 그만큼의 새로운 정신적 혹은 물질적 접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은 그 자체로 원시와 현재가 하나일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의 문명적 조건에 둘러싸인 자연은 여러 사회적 제도적 제약 혹은 인간의 정신적 상황 속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조에 있어서 자연은 막연한 동경이나 단순한 회상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네 삶을 반추하고 들여다보게 하는 근원성에의 거울이라는 이미지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영된다. 샛샛의 변화와 유전하고 순환하는 거대한 흐름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유한을 여러 결로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촉들을 내어준다.
자연과 조화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보면 근원적인 일치나 너나들이가 요원해진 지경을 에둘러 이름이 아닐까. 엄혹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자연을 상찬하고 동경을 표하지만 그 자연과의 상존이나 자연스런 호혜의 깊이를 일구어내는데 종종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인간의 일방적 지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그 폭력적 확장이 자연의 파괴뿐 아이라 자연에서 교감되던 본래적인 마음마저 잃어가기 때문이다. 김춘기의 시에는 자연과의 조화의 분열, 부조화의 심화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신산스럽게 하는가를 능란하게 보여준다.
서울 황조롱이
1.
비정규직 가슴 속에 안개비가 내리는 밤
여의도길 전주 한켠 둥지 튼 황조롱이
옥탑방 살림살이가 긴병처럼 힘에 겹다
2.
산 능선 너럭바위에 건들바람 불러 모아
풋풋한 날개 저어 억새 탈춤에 신명나면
제일 큰 나무에 올라 흐벅진 몸 곧추세우던 너
3.
오늘은 밤섬에서 찢긴 비닐 비집고는
마포대교 어깨에 앉아 깃털 훌훌 털어내고
북악산 여름 숲으로 건듯 날아오르는구나
4.
순환선 철길 위를 에도는 내 발자국
휴대폰에 떠오르는 눈빛 모두 잠재우고
물소리 푸른 강가에서 시계 풀고 살고 싶다
문명에 능욕 당한 자연 속에서는 사람이든 황조롱이든 별반 그 처지나 심경에 차이가 없어 보인다. 특히나 제목이 드러내는 서울이라는 시공간의 한정 속에 놓인 숨탄것들은 예전의 그 활기나 기상을 좀처럼 되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노자께서 말한 閒遊하는 방황이 아닌 저열한 숨을 내뿜는 일상화된 고통 속의 방황을 시 속의 화자와 황조롱이는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을 폭력적으로 대체해 가는 문명의 환경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런데 역시 자연은 자연인가 보다. 문명을 짓지 않는 날짐승은 날짐승인가 보다. ‘마포대교 어깨에 앉아 깃털 훌훌 털어내고/ 북악산 여름 숲으로 건 듯 날아오르는’ 기상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황조롱이’처럼 문명의 더께 진 오물을 ‘훌훌 털어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한다. 그것은 ‘긴병病처럼’ 늘 따라다닌다. 다만 화자의 바람은 본래적 자연, 그 본래적 자유를 실천하는 상상으로 열린다. ‘물소리 푸른 강가에서 시계 풀고 살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모종의 결단이 뒤따르는 서사를 꿈꾼다. 화자와 황조롱이가 하나의 이미지를 견지하는듯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두동지고 결별하게 되는 데에는 문명과 자연의 조화가 그리고 소유와 존재 의 구별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대로 드러낸다.
아침을 클릭하며
1.
아침을 클릭하며 한 여자가 출장 간다.
새벽 별 곁들여 캡슐 한 알 이온음료에 타 마시고, 스마트폰에서 쏟아지는 시간의 질량을 재며, 공항으로 차를 쏘는 여자. 초음속 비행기 띄워 창공을 가른다. 실리콘 유방에 일회용 브래지어 착용감이 좋다는 S라인. 청담동에서 다리 견적 다시 내겠다는 미스 강남. 카멜레온 원피스 걸치고 통통 튀는 추상파 깍쟁이. 일주일 연애한 로봇과 이젠 동거쯤은 해야겠다는 그래도 낭만파 얼짱. 손가방 속엔 일급비밀 파일, 우주여행 티켓, 천리안렌즈 깊게 숨긴 플라스틱 같은 여자. 샛노란 가발 휘날리며 은빛오픈카로 푸른 바다 위를 질주한다. 오늘도 점심은 테이크아웃 버거에 블랙커피 한잔. 하오엔 휴게방에서 산소 샤워하는 신소재 새침데기. 이동사무실에 앉아 동공인식 화폐 충전하고, 검지마디 하나로 빛이 되어 날아다닌다.
그녀는 슈퍼 알파걸, 불꽃처럼 춤을 춘다.
2.
온몸 곳곳 조립된 금속성 DNA 칩
세상 미세 신경망 손끝에 담아놓고
속도로 승부를 건다, 인스턴트 세상이다.
기상 알람에 맞춰 새 날을 또 연다.
끝없이 얼굴 내미는 터치화면 솟는 눈동자.
숨 가쁜 광속 세계가 사하라처럼 황량하다.
문명적 삶의 극단을 보여주는 위 시편은 풍자적 스토리를 품고 있다. 인공과 속도와 성형의 그늘에 사는 한 여자는 ‘슈퍼 알파걸’이란다. 스마트하고 세련돼 보이지만 무언가 큰 결핍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만 같다. 문명의 시혜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어느 순간에 존재의 큰 싱크홀 속으로 푹 꺼져들 것만 같은 불안이 끼쳐들어 있다. 그것은 아마 문명이 지닌 말들의 반대말을 시 속의 주인공이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일부러 자연의 성정을 방기한 채 한쪽으로 치찰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속도 대신 느림을, 패스트푸드 대신에 슬로우푸드를, 성형 대신에 있는 그대로의 자기만족을 , 첨단통신 대신에 마음의 너나들이를 먼저 가져보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옥을 선택한 자는 지옥의 매뉴얼대로 조종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들은 서서히 고통의 추종자가 되고 만다. ‘첨단’이라는 문명의 최면술에 취해 지옥도地獄道를 멋모르고 연출하고 있는 셈이다. 첨단이라는 말의 기묘한 퇴영과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이 시가 보여주는 자기발견, 즉 문명화된 인간을 스스로 풍자할 수 있는 비판의식이 아닐까 싶다. ‘숨 가쁜 광속 세계가 사하라보다 황량하다’라는 깨달음이 전제돼야 한다. 나의 중독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둘러보고 살펴보고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의 친구이자 이웃이어야 한다. 점점 잘나가는 인간이 아니라 점점 이상해져 가는 인간임을 한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희망연립 들어서다
물방개 소금쟁이 여름 내내 수중발레. 남실바람 소매 걷고 물 주름 연신 접으면, 하늘이 종종 내려와 미역 감던 다랑논. 안개꽃 햇살을 불러 마을 환히 밝히면, 해종일 개구리논 하이든 교향곡 축제. 한적한 천주교 공소엔 능소화 웃음만 머물던 곳.
산허리 깎인 자리 희망연립 들어섰지. 새봄부터 미니분교에 도시아이들이 오고, 휴일엔 은빛 경적이 골프장으로 향했지.
떠돌이 도둑고양이 목 축이는 둠벙. 폐윤활유 빈 통이 간밤에 또, 버려졌나? 질경이 토종 민들레 코를 막고 돌아앉았네. 무지개 기름띠에 구름 몇 점 떠도는 하오. 물땅땅이 장구애비 언제 올까 그려 보던 하굣길 개구쟁이들 물수제비뜨고 가네.
위 시편은 문명의 침탈이 어떻게 진행되고 그것은 결국 환경적 결손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의 심성에 어떤 왜곡과 장애를 불러일으키는가를 소박한 풍경에서 찾고 있다. 자연물들은 활기와 본연 속에 능놀고 있다. 이 본연의 자연 상태가 조금씩 결락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희망연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의 ‘희망’은 자연의 희망이 아니고 인간의 희망도 아니며 문명의 허울뿐이 수사, 즉 레토릭에 불과하다. 실체화되거나 자연과의 최소한의 조화를 꾀하기에 부족한 ‘희망연립’은 극명하게도 ‘산허리 까까인 자리’에 들어섰다. 이 파괴적인 들어섬은 인간의 공공연한 폭력이면서 자연의 퇴출을 꾀하는 동시적 현상의 고리를 드러내는 말이다. ‘물땅땅이 장구애비 언제 올까 그려보던 하굣길 개구쟁이들 물수제비’만 뜨고 간다. 어딘가 쓸쓸하다. 우주의 한 귀퉁이가 비어져 가는 쓸쓸함을 알아야 한다. 너른 의미로 보면, 같이 있자! 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사랑이다. 더불어, 라는 부사는 이미 그런 동사적 취항을 한껏 품고 있다.
여의도, 그곳
밤섬 개나리는 툭하면 봄이란다.
선유도 줄장미는
마음 내키면 피고지고.
하늘은 사월 중순쯤에도
눈설레*를 뿌린다.
여의도 그곳 바람은
풍향계가 필요없지유?
그날, 그날
기분, 기분
여름, 겨울
상정, 결렬
한강변 개나리꽃이 카카오톡 한창이다.
문명의 간섭이 지극해진 탓일까. 잊 자연도 자연이 지녀야 할 순리에 어깃장을 놓는가 보다. 교란된 자연, ‘풍향계’가 없는 정치는 계절이 갖는 자기 결정권을 이탈한 식물들의 개화를 비견되곤 한다. 무덕무덕 꽃이 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우리의 감각도 무뎌져 간다. 이런 착종錯綜의 상태는 어리로부터 비롯됐는가를 살펴보게 하는 시니컬한 시대의 풍경화 한 컷이 아닌가 싶다. 순항이나 순행이 비상식적인 요소들에 의해 장애를 받는 오늘을 향해 뭔가 일침을 가해야 할 것만 같은데, ‘그곳’은 아직 깨어날 기미가 요원해 보이는가. 다시 풍향계를 찾고 바라보고 거기에 호응할 수 있는 자연의 감각 혹은 정치의 상식이 이 스마트한 시편ㅇ서는 너무 무겁지 않게 개진되고 있다.
지리산, 아버지
사계절 근육을 불려
구름 정글 가꾸는 산
돌개바람 숨비소리
설벽을 타는 하오.
금강송 눈잣나무도 함께 기어오른다.
평생 속 깊은 바다 아버지 마음이다.
대풍년을 경작하는 황소보다 우직한
왜바람 눈사태에도
온 산 품는 능선들
한여름엔 허리 아래 활엽수림 울울창창
텃새들 노랫소리에
추임새 맘껏 넣으면서
영호남 손을 맞잡고 만세삼창하고 싶다.
대지의 모성은 일찍이 많이 이야기 된 바가 있다. 그 어머니로서의 혹은 대자연의 자궁으로서의 다산성의 차원에서 많이 기려져 왔다. 그런데 김춘기의 대지와 자연은 좀 더 우람하고 듬직하며 그 포용성이 늠름하다. 우리가 자연에 깃들고 안 것들과의 물리적 관계 여부에만 집착할 때 그의 시는 보다 근원적인 자연의 풍모를 드러낸다. 마치 초록의 ‘우직한’ 기상을 청천으로 들어올리는 ‘활엽수림 울울창창’처럼 역동적이며 헌걸차다. 대지의 모성적인 측면 곁에서 대지의 부성父性와 남성성이 조화를 이룰 계제를 갖추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적극성과 남성성은 ‘지리산’이라고 하는 ‘왜바람 눈사태에도/ 온 산 품는 능선들’과 같은 부드러움도 영마루처럼 엮어내고 있다. 급기야 그 남성적 포용력은 자연의 ‘추임새’속에 ‘영호남 손에 손잡고 만세삼창’하는 화합과 호혜의 기상을 얼러내고 있다. 이 냅뜰성이야말로 자연이 한낱 전원적 삶의 안일 속에 파묻히는 협량함을 걷어내고 실존의 기량과 웅숭깊음을 길러내는 호연지기의 자연, 지나친 분별과 차별을 물리고 상존의 너나들이의 관계를 부른다. 자연의 기상이 실존의 허약함을 거두고 든든하게 보익補益하는 차원에서 그의 자연은 물리칠 수 없는 아니 끝없이 교감해야 할 실존의 터전인 셈이다. 대지의 어머니 곁에 대지의 우뚝한 산으로 아버지는 영원한지도 모른다. 천민자본주의의 세속에서 소외받고 차별받는 착한 이들이 있다. 그들이 혹여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허망 곁에서 자연은 무수한 앎, 그 서정과 실존의 깨달음을 우리가 육화시키길 가만히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유종인(2014. 하반기호 ‘정형시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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