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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314

폐선/김춘기 폐선/김춘기 삼십 년 된 트롤선이 모래톱에 노숙 중이다 나사 풀린 스크루와 소리 꺾인 엔진들 태평양 밤별 해역이 젊은 날 고래실이던 만선 갑판 춤추던 어깨 적도해류 갈매기 교향곡 웃음 만평, 여유 만평, 배포도 만평이던 숙부 한겨울 외항 방파제 위 낚싯대에 걸려 있다 2021. 12. 19.
대설, 한라산/김춘기 대설, 한라산/김춘기 흰나비들 떼창처럼 1100고지에 내리는 눈 제설차 경적은 이미 경사로에 묻혔다 하늘은 엊그제부터 공습경보 발령 중이다 해일 같은 눈보라에 관목들이 엎드린다 산정 향해 포복하는 숨찬 구상나무 군락 북벽은 두 눈 꾹 감고 *매킨리산이 된다 구름은 설피도 벗고 남벽 수직 벼랑 탄다 날 밝기 전 사람들은 숫눈길 또, 헤친다 아이젠 나사 조이며 길 없는 길 뚫어낸다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제주 산악인 고상돈이 등정 중 희생된 곳으로 북미 최고봉(6,191m)이다. 초강풍 제트기류가 직접 이곳을 통과하며, 화이트아웃이 극심한 산으로도 악명 높다. 2021. 12. 9.
궁둥이/김춘기 궁둥이/김춘기 반달 같은 네 얼굴 봐준 적 없었구나 내 발걸음 힘 부치면 자리부터 찾는, 너 공사장 계단이거나 벼랑길 돌 위라도 습습한 하수구 곁 종일, 코도 막지 않고 허구헌날 구렁에서 날 받치고 있었구나 평생, 내 궁둥이였던 어머니가 보인다 2021. 12. 9.
냉이꽃/김춘기 냉이꽃/김춘기 불도저 쇳소리에 비명이 몰려갔다 먹성 좋은 중돼지들 젖이 불은 어미, 새끼 울음은 겹겹 매몰되었다, 뜬눈으로 눈감았다 텅 빈, 개량형 돈사(豚舍) 어둠이 차지했다 가장은 겨우내 이명만 달고 살았다 이른 봄 냉이꽃이 만발했다, 녀석들이 돌아왔다 2021.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