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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걱정 마, 안 죽는다/유안진 걱정 마, 안 죽는다/유안진 ​ ​겁먹은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 엄마에게 고했다 글쎄 얘가 동전을 삼켰대요 얼마짜리를요? 엄마는 태연하게 물었다 친구의 100원짜리를 빼앗아 놀다가, 뺏긴 친구가 뺏으려 하자, 입에 넣고 삼켜버렸대요 엄마, 나 죽어, 하며 아이는 울어댔지만, 엄마는 더 태연했다 남의 돈 수천씩 먹고도 안 죽는 사람 많더라 설마, 그깟 것 먹고 죽을까잉, 걱정 마 기가 막힌 선생님은 돌아갔고, 아이는 그래도 걱정되어 기도했다 하느님, 앞으로는 절대로 남의 돈 안 먹을 테니 살려주세요 다다음날 아침, 앉은 변기에서 똑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대변에 하얀 동전이 섞여 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엉덩이를 깐 채로 감사기도부터 했다 2023. 1. 2.
막내/천융희(디카시) 막내/천융희 알츠하이머 진단받은 지 수 년째 노모의 갖은 기억들 하얗게 사라지고 있다 뇌 속 혈류 끝에 매단 “막내 우리 막내”라는 저 섬만이 숨 하나 근근이 이어가는 연유 요양병원 206호 벽에 기댄 봄, 속수무책이다 2022. 12. 26.
하찮은 물음/윤성관 하찮은 물음/윤성관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어느 대학 가고 싶니, 죽을 둥 살 둥 들어간 대학교에서는 고등학교를 묻고, 회사에서는 대학교와 학과를 묻고, 결혼 후에는 어디에 있는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 묻고, 늙은 요즘에는 자식들이 무얼 하느냐고 묻는다 하찮은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만큼 하찮게 살아왔지만 물어보려면, 저 별빛은 언제 태어났는지,「전태일 평전」을 읽고 뒤척이다 아침을 맞은 적 있는지, 귀를 자른 한 화가의 자화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詩)가 얼마나 많은지, 당황하더라도 이 정도는 물어야지 아니면 최소한,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물어줘야지 아침마다 새들이 묻는 소리에 내 마음에 꽃 한 송이 피우는데 .. 2022. 12. 23.
빗소리/이재무 빗소리/이재무 빗소리에 젖는다 비에서 소리만을 따로 떼어내 바가지에 담고 양동이에 담고 욕조에 가득 채운다 소리를 퍼 올려 손을 닦고 발을 닦고 마음을 닦는다 소리를 방안에 가득 깔아놓고 첨벙첨벙 걸어 다닌다 소리의 줄기들을 세워 움막 한 채 짓는다 2022.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