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아하는 문학장르1109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커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 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 2023. 5. 14.
아버지의 마음/김현승 아버지의 마음/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 2023. 5. 8.
산벚 등고선/최연수 산벚 등고선/최연수 하얗게 바깥이 저민다 햇살이 소금에 절인 듯 그늘이 파닥거리고 푸른 꽁지를 흔드는 산벚 등고선 밖으로 쿨럭 늦봄을 토해놓는다 공기를 따라 휘는 파문은 차가운 지도를 헤엄쳐 나온 나이테 한철 살아본 것들이 가지는 물결무늬다 나부끼는 허공을 따라가면 식욕 왕성한 오후가 바람을 층층 발라낸다 너와 나의 한때도 미처 지우지 못한 아린 냄새로 한순간 수로를 거슬러 오른다 가장 절정으로 기우는 추억 가장 낮게 허물어지는 잠 앙상한 뼈들을 숨기기 위해 살집을 늘린 나무가 지느러미를 부풀린다 잘 헤엄칠 수 있도록 유리창이 제 안을 말갛게 닦는다 2023. 4. 13.
어머니 손가락/이무원 어머니 손가락/이무원 지난 4월 선산에 납골당을 조성하였다 포클레인 기사는 숙련된 솜씨로 파묘를 하고 김 사장은 차근차근 유골을 수습했다 그늘에 집을 지으신 할머니는 곱게 탈골을 하셨는데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할아버지 집에서는 물이 나왔다 등성이 외진 곳에 누워 외로웠을 형수네 집은 흙이 화장품처럼 고왔다 저승에서도 한집 살림을 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집은 돌집 아직도 이승에서 입고 가신 옷을 반쯤 걸치고 계셨다 어머니 손을 감싸고 있던 장갑을 벗겼다 도르르, 다섯 개의 동그란 뼈가 공깃돌처럼 굴러 나왔다 어머니 불현듯 나는 어머니를 불렀다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동생이 죽었을 때 목놓아 우시던 어머니가 보였다 인민군에 끌려간 형 살려달라고 정한수 떠놓고 비시던 모습이 보였다 내 등록금 마련하러 급.. 2023.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