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밭/時調205

안티, 헬 조선(사설시조) 안티, 헬 조선 김춘기 1. 무역선에 몰래 실려 거친 바다 건너왔지. 아가미 옆 파란 반점 블루길, 몸 가운데 검은 줄무늬 배스. 너희들 고향은 메콩강, 아니면 톤레샵호수. 낯선 눈빛, 두툼한 입술로 눈칫밥으로만 살아야 했지. 피부 빛깔 다르다고, 지느러미는 왜 톱날 같으냐는 텃세에 꼬리 마냥 흔들었지. 먹새가 좋아 피라미 참마자 종일 배를 채워도 허기는 끝이 없었지. 온몸 쥐어짜 알 쏟는 네게 연신 작살이 날아왔지. 그래도 여기 터를 잡아야 한다며, 들꽃 향 짙은 산굽이 드맑은 강 유영하고 싶은 물안개 꽃구름 피는 곳, 귀화 꿈꾸는 외래종들. 2. 시베리아 북풍이 왁자한 남동공단 프레스 톱니에 엄지가 잘린 너, 휴일도 반납하고 밤낮 일만 했지. 곱슬머리는 이발소가 필요 없겠다고, 황소개구리 눈이라고 놀.. 2019. 7. 23.
읍내 목욕탕 풍경(사설시조) 읍내 목욕탕 풍경 김춘기 휴일 아침, 읍내 목욕탕엘 간다. 김 자욱한 남탕 안, 머리 벗겨진 중년남자가 사춘기 아들의 싱싱한 등을 민다. 가무잡잡한 코밑수염에 볼살 오른 피부가 우유처럼 하얗다. 바로 그 옆, 근육질 중년남자가 쇄골 드러난 밀랍 같은 노인의 어깨 주무른다. 온몸을 자.. 2019. 7. 23.
러시아워(사설시조) 러시아워 김춘기 서울 러시아워가 전철에 실려 간다. 종로3가 1호선 전철, 안내원 목소리만 귓바퀴에 맴도는 철관. 성형된 표정들이 손잡이에 걸린 채, 새벽 숨소리를 포개고 있다, 휴대폰으로 빨려드는 박제된 눈빛. 칸칸마다 촘촘히 등 기댄 침묵들이 무표정의 시선을 자르며, 또 다른 침묵을 재생하고 있다. 종점마트 정육점에 칸칸 걸린 식육 같은 얼굴들, 원색활자 광고판에서 눈길 얼른 거두고는 시간의 블랙홀 속으로 연속 빨려들고 있다. 2019. 7. 23.
안경, 내 참 동무(사설시조) 안경, 내 참 동무 김춘기 시간만 나면 집밖으로 날 이끄는 너 어제는 먼지 낀 하늘을 유리창처럼 닦아주더니, 오늘은 내가 쏘다니는 동네골목을 말끔하게 쓸어주고는 이중삼중 잣대로 보이는 세상을 내게 명료하게 정리해주었지. 마음 화창한 날엔 선글라스로 바꿔 썼지. 블루진엔 푸른 .. 2019.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