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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詩54

가을, 덕양중학교 가을, 덕양중학교 / 김춘기 하늘이 물청소를 마끔히 마친 상오 학교 뒷들 풀벌레 가족 명지바람을 밀어내며, 촉촉한 풀잎 건반을 눌러댄다 참새 눈알 같은 구슬을 꿰는 맥문동 이파리에 이슬 방울 촘촘하다 물 한 바가지에 배를 통통히 불린 조롱박 새끼 물뱀처럼 기어가는 고구마줄기 무.. 2009. 9. 13.
달과 아내 달과 아내 / 김춘기 귀뚜라미소리 가득한 강섶에서 식구들 건강하게 해달라고 손을 모으면 푸른 달빛을 양손 가득 쥐어주던 한가위 보름달 산등성이에 앉아 묵상중이다 아폴로 11호가 반딧불이처럼 붙어 성조기를 펼치던 달 우리 딸 윤지 장미꽃 피는 날짜를 정확히 알려주는 달 벽에 금.. 2009. 9. 10.
매미울음을 볶다<교원문학상 수상작> 매미울음 볶다/김춘기 아침부터 매미가 제 울음을 굵은 체에 쳐서 볶는다 발가벗겨진 말복 햇살이 테팔 프라이팬에서 탁탁 튀어 따끔따끔하다 붉은 꽃 배롱나무가 고개 흔들며 몸을 털고 있다 전봇대에 납작 엎드린 털매미, 참매미, 애매미 느티나무 어깨와 겨드랑이에 다닥다닥 붙은 쓰르라미, 깽깽매미, 두눈박이좀매미 혼성합창 경연 중이다 정오쯤부터 산 넘어, 개울 건너 재수생, 대학생, 취준생 매미들까지 무더기로 프라이팬을 들고 몰려온다 동네 참깨, 들깨 죄다 퍼 날라 달달 볶는다 한쪽에선 기름에 지글지글 녹두 지짐이 육적굽기, 계란말이, 꼬치꿰기 야단법석 시끄럽다 앞마당 마른 솔가지 타는 화덕 국 끓는 열기에 속옷이 다 젖는다 벽오동나무는 옆에서 눈 감고 부채질 중이다 큰어머님, 작은어머님, 고모님, 서울 누님 .. 2009. 9. 2.
종점/김춘기 종점/김춘기 서산마루에 걸터앉은 하늘이 대포 한 잔에 취기가 돌쯤 늦가을 어스름 몇 점 싣고 온 법원리 종점 33번 시외버스 천천히 시동을 끈다 보건지소 다녀오는 마지막 승객 중노인이 내리고 어둠이 전신주의 허리를 감으면 나른한 하루도 터벅터벅 귀가를 서두른다 젊은 시절 면 소재지 처녀와 수수 밭머리에서 청춘을 피웠던 박씨 장성광업소 광부 20년 이력, 지금은 교하신도시 지하 맨홀을 드나든다 아내도 가고, 한 줌 꿈마저 도시 외곽을 떠도는 밤 중고 티브이 혼자 춤을 춘다 그믐 달빛 몇 줄기에 젖은 양철 지붕 사글셋방 버스를 따라온 초겨울 바람이 비닐 덧댄 창문을 밤새도록 흔들고 있다 2009.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