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밭/詩54 밥 이야기 밥 이야기 / 김춘기 고요마저 출가한 외양간, 황소 울음도 지워진 빈 것만 가득한 집. 주말 대청에서 아버지와 겸상 차렸습니다. 상추에 풋고추에 봉일천 누이동생이 끓여놓고 간 아욱국에 내 마음 가득 말았습니다. 봉당에서 꼬리치는 흰둥이와 시선 주고받습니다. 밥 한술 뜨는 순간, 안마당 나팔꽃 사이로 어머니가 보입니다. 개울 건너 감자밭에서 돌아와 저녁밥 뜸 드는 사이 달빛에서 손톱을 깎아 주시네요.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침 삼키고요. 쌀밥 콩밥 팥밥 차조밥 수수밥 기장밥, 가끔은 참기름 고소한 김치볶음밥, 생일날 미역국, 대보름날 윤기 흐르는 오곡밥을 그리면서 식구들은 무릎 맞대고 하루 두어 끼 보리밥이거나 밀수제비였지요. 당신은 내게 섣달에도 몸이 덥다고 무 메밀 연근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오.. 2010. 10. 26.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김춘기 궁사의 화살을 받는 과녁의 결연함처럼 오아시스를 향하는 타클라마칸 낙타의 그리움처럼 얼룩말을 쫒는 아프리카 세렝기티초원 사자의 심장박동처럼 홍로 사과가 젊은이의 입에 들어가 씹히는 아픔을 견디는 것처럼 일급 사형수가 또 하루 푸른 날을 기원하며 두 손.. 2010. 9. 16. 죽변, 아침 바다<공무원 문예대전 우수상, 행정자치부장관상> 죽변, 아침 바다 / 김춘기 바다가 출산중이다 어둠의 주름을 열며 에밀레종처럼 머리를 내미는 해 붉은 양수가 비릿하다 탯줄을 끊고도 바다는 계속 괄약근을 조이고 푼다 물의 부드러운 근육을 겹겹 쌓아올린 산맥이 바람을 앞세우며, 달려온다 파도가 자세를 낮추자 늙은 선장의 심박동.. 2010. 5. 1. 도봉산, 주식시장 열다/김춘기 도봉산, 주식시장 열다/김춘기 왁자지껄 배낭들이 바람의 그림자를 쫓아 봉우리 쪽으로 지름길을 낸다. 마루턱부터 개점 중인 도봉산증권, 전철역 계단에 무가지처럼 쌓이는 목소리에 객장이 후끈하다. 시세를 클릭하며 그래프를 끌어 올리는 포대능선, 실시간 강세에 맞춰 테마주의 주춤하던 일봉이 하늘을 찌른다. 우직하게 상한가를 고수하는 만장봉, 텔레비전 애널리스트도 연일 활황의 마개를 딴다. 산초 열매 몇 알로 배를 채운 송추계곡 유리딱새. 부리로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쥐똥나무도 몇 알 차익을 남긴다. 알밤 도토리 날래게 주워 모으는 날다람쥐 깜장 눈알이 코스피 곡선 위에서 구른다. 투우사 망토 빛깔로 가을을 직조하는 산 망월사 곁 입 닫은 적송, 힘껏 된새바람의 가슴팍을 민다. 머지않아 서리가 내리고 골짜기마.. 2009. 9. 14. 이전 1 2 3 4 5 6 7 8 ··· 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