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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詩54

고향집 줄장미 고향집 줄장미/ 김춘기 어머니 얼굴 같은 수국이 꽃을 다 떨군 고향집 펌프 우물가 질경이 민들레 그리고 애기똥풀과 가족을 이룬 이태 전 죽은 자두나무를 감싸며 줄장미가 핀다 오전 내내 울밑을 들락거리던 산들바람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가슴 속 상처들을 죄다 꺼내어 피는 꽃 잔가.. 2012. 7. 18.
교탁/김춘기 교탁/김춘기 우리 교실 맨 앞자리를 지키는 나무교탁. 담임선생님이 입학식 전날, 새옷을 입혔다지만, 가슴 속엔 늘 허전한 그늘이 돌처럼 뭉쳐 있지. 휴일엔 그냥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꼬리나 붙들고 흔들어 보기나 하구. 집 나온 햇살과 카드놀이를 하며 그들의 푸념이나 들으면서 불알친구들이 왜 자꾸 도시로 전학 가는 지 궁금해 하고, 3월에 새로 오신 새내기 선생님, 목소리가 은방울 구르는 것 같은 내 짝사랑 여자선생님 애인은 있을까 없을까? 내기해 보는 게 전부지. 개학이 다가오면, 자꾸 긴장하게 되지. 사모님과 싸우고 온 남자선생님이 화라도 나면 더욱 그렇고. 오후만 되면 신경질적인 노처녀 선생님 시간엔 정말 미치지. 졸고 있는 친구를 깨운다면서 왜 내 머리와 옆구리를 연방 때리는 건지 모른다니까? .. 2012. 6. 4.
옥상, 가을 오후 옥상, 가을 오후 / 김춘기 하늘마저 도약하고 싶은 가을날 오후 동네에서 제일 높은 연립주택 옥상 탑층에서 나온 꽃무늬 앞치마 새댁이 엉덩이를 통통 튕기며 바지랑대를 올리자 건너 편, 티브이 안테나에서 날아온 고추잠자리 쌍이 한 몸이 되어 은빛 줄 위로 날아오르네. 하늬바람이 숨바꼭질을 하고 나올 때마다 만국깃발처럼 펄럭이는 원색의 율동 곁에서 백로처럼 날갯짓하는 기저귀의 팔분의 육박자 춤사위. 마음 들뜬 하늘은 그것을 보고 옥상을 이리저리 흔드네. 길 건너 가납초등학교 1학년 윤서가 몽당연필로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것처럼 집으로 뛰어오자, 일층 셋집 삽살강아지 자전거 밑을 빠져나가 구멍가게 앞으로 팔짝팔짝 마중을 나가네. 웃음 제조기 몽골 새댁엄마 옥상에서 맨발 뒤꿈치를 바짝 들고 딸내미 부르는 소리에.. 2012. 5. 17.
쓴맛에 관한 고찰/김춘기 쓴맛에 관한 고찰/김춘기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하다가 어머니 회초리에 쓴맛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지. 어느 날인가, 탱크 훈련 중인 미군 병사가 시레이션을 하굣길에 던졌지. 내가 먼저 주워 하필 커피를 입에 털어 넣는 순간, 혀까지 죄다 내뱉었지. 초등학교 때 유사 장티푸스로 사경일 때, 어머니가 코를 막고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으시면, 온몸이 정말 가루약이 되는 줄 알았고. 중학교 입시에 낙방했을 땐, 그냥 밍밍했지. 고등학교 시험에서 미끄럼 탔을 적엔 씁쓸했었고. 사대 졸업하고 선생 휴직 후,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박격포탄 기합 못 받겠다고 버티다가 인간 샌드백이 되었을 때, 바로 쓴맛의 진수를 터득했지. 아들내미 여자친구 인사를 처음 받았을 때처럼 달콤함이 어쩌다 스치기도 하지만, 삶이.. 2012.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