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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밭/詩54

영천사, 한낮<강원문학 신인상 당선작> 영천사, 한낮 / 김춘기 천수경소리와 함께 접시꽃이 붉게 핀다. 마당귀에서 햇살을 쪼아 먹던 참새들이 대웅전 계단에서 깨금발을 뛰고 있다. 장수말벌이 들락거리는 단청 아래, 선잠 깬 쇠물고기가 종을 치며 정오를 알린다. 아침부터 명부전 곁의 밤나무, 하얀 국수를 연신 뽑아낸다. 명.. 2009. 6. 26.
여름 전쟁 여름 전쟁 / 김춘기 대전 갑천 변 국도. 초여름 땡볕 군단이 공터에 주둔하는 사이, 철 울타리 안 대파와 개망초가 몸싸움중이다. 발칸포 K2소총 수류탄도 보이지 않는 여름 전쟁, 별이 뜨거나 달이 뜨면 일시 휴전이다. 날이 밝으면, 다시 벌어지는 국지전투. 순간 다국적군 아까시, 버드나.. 2009. 6. 26.
고집, 인해전술 고집, 인해전술/김춘기 영동고속도로 월곶나들목, 담쟁이가 일제히 유격 훈련처럼 방음벽 기어오른다. 너풀너풀 잎사귀도, 일등병 피부처럼 꺼칠한 줄기도 알루미늄판에 온몸을 밀착하고 뜨겁게 고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아스팔트는 산으로 바다로 씽씽 속도를 싣고 달리지만,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최대한 속도를 낮춰 손톱으로 투명 벽을 타는 담쟁이 군단. 매연을 헤치며 경적 들이마시며, 연신 포복 진격 중이다. 프라이팬처럼 달궈지는 플라스틱 절벽, 언제 다 덮을거나. 어쩌다 지나는 비둘기 울음으로 허기 달래는 담쟁이, 오늘은 여우비 한 자락에도 생기가 돈다. 빗줄기는 늘 땅으로 향하지만, 중력을 거부하고야 마는 저 고집쟁이. 바람 실은 트럭이 몰려오자, 벽에 밀착하여 몸을 더욱 낮춘다. 땡볕을 지고 허공을 향해 포.. 2009. 6. 26.
마다가스카르 바오밥나무/김춘기 마다가스카르 바오밥나무/김춘기 밤마다 강둑에 앉아 호수의 잔별을 건져내는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 너의 국적은 어린 왕자의 별 B-612였지. 네가 번성하면 나라가 멸망한다고, 네가 머리를 내미는 족족 쇠못처럼 뽑혀나갔지. 인도양 마다가스카르 해변에 만년 양산 펼쳐 그늘 드리우는 큰 나무. 카멜레온 여우원숭이가 기어오르면 몸 열어 그들의 집이 되고, 영혼의 묘소가 되기도 했지. 평생 진맥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원주민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아프리카의 성자. 스콜이 퍼붓는 한낮, 달콤한 과육을 빚어 섬의 갈증을 풀어주던 내게도 바오밥이 있지. 땡볕 등에 지고 평생 내게 그늘이 되어주신 아버지. 다랑논에 물 채우듯 늘 내 목을 축여주셨지. 나는 그 무릎을 딛고 쑥쑥 자라났지. 한번도 당신의 바오밥이 되지 못한 .. 2009.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