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밭314 꽃샘바람 꽃샘바람 / 김춘기 늦겨울 뒤란 같다 봄의 정수리라지만 하늘은 키 높이를 어깨까지 낮추고 호반새 울음소리도 한 옥타브쯤은 깔린다. 바람은 적막한 집 문고리만 자꾸 흔들어 건넛방 색 바랜 가족사진 한참 들여다보고, 부엌에 들어가 솥뚜껑 죄다 열어보고, 외양간 먼지 쌓인 구유에도 앉아 보고, 된장 말라붙은 뒤란 장독 쓰다듬어보고는, 묵은 보리 가득하던 창고 안 구멍에 들어가 늙은 쥐와 살아온 얘기도 하네. 바람도 어머님 생각에 옛집 찾아 온 것일까. 2011. 4. 29. 삼현, 봄날 삼현, 봄날 김춘기 사월의 혈맥 따라 참침, 시침 꽂힙니다 들녘으로 산모롱이로 온종일 피가 돌아 다랑이 논배미마다 봄이 찰랑입니다 살여울 몸을 풀며 굽이도는 비암천 쉬리 지느러미가 발가락 간질이자 빨래터 버들가지가 몸 재게 흔듭니다 아버지 발걸음 새벽부터 바쁘십니다 마을 아래 수작골 논 소식 궁금하신 겁니다 경운기 소리에 실려 나도 따라갑니다 뒤란엔 팔순 어머니 장을 담그십니다 아내의 맑은 눈빛 질항아리에 잠기고 몸 씻은 붉은 고추는 참숯 곁에 눕습니다 이팝나무 삼형제 꽃 공장 차렸습니다 구름도 꽃이 되어 산 위에 걸린 한낮 삽살개 꼬리 흔들어 비발디 사계 지휘합니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소재 마을, 남쪽을 빼고 고개 셋이 둘러싸고 있어 세우개(三峴)라고 함 2011. 3. 23. 밥 이야기 밥 이야기 / 김춘기 고요마저 출가한 외양간, 황소 울음도 지워진 빈 것만 가득한 집. 주말 대청에서 아버지와 겸상 차렸습니다. 상추에 풋고추에 봉일천 누이동생이 끓여놓고 간 아욱국에 내 마음 가득 말았습니다. 봉당에서 꼬리치는 흰둥이와 시선 주고받습니다. 밥 한술 뜨는 순간, 안마당 나팔꽃 사이로 어머니가 보입니다. 개울 건너 감자밭에서 돌아와 저녁밥 뜸 드는 사이 달빛에서 손톱을 깎아 주시네요.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침 삼키고요. 쌀밥 콩밥 팥밥 차조밥 수수밥 기장밥, 가끔은 참기름 고소한 김치볶음밥, 생일날 미역국, 대보름날 윤기 흐르는 오곡밥을 그리면서 식구들은 무릎 맞대고 하루 두어 끼 보리밥이거나 밀수제비였지요. 당신은 내게 섣달에도 몸이 덥다고 무 메밀 연근 돼지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며 오.. 2010. 10. 26.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김춘기 궁사의 화살을 받는 과녁의 결연함처럼 오아시스를 향하는 타클라마칸 낙타의 그리움처럼 얼룩말을 쫒는 아프리카 세렝기티초원 사자의 심장박동처럼 홍로 사과가 젊은이의 입에 들어가 씹히는 아픔을 견디는 것처럼 일급 사형수가 또 하루 푸른 날을 기원하며 두 손.. 2010. 9. 16. 이전 1 ··· 55 56 57 58 59 60 61 ··· 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