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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의자장(葬)/이종섶 의자장(葬)/이종섶 우리 부부 죽으면 봉분 대신 나무의자 하나씩 놓아다오 낮에는 햇빛이 놀다 가고 밤에는 달빛과 별빛이 잠들다 가고 적적할 땐 바람이 쉬었다 가게 계절이 바뀌면 자리만 옮겨다오 산등성이에 올라 천지에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고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앉아 허벅지 통통 두드리는 도토리 소리도 들어보게 겨울이 되면 서로 마주보게만 해 다오 한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한 늬 에미가 이제사 불쌍하게 보여서 그러는구나 어쩌다 그런 애비 에미가 생각나거든 새끼들 데리고 한번쯤 다녀가거라 보고 싶었던 손주들을 무릎 위에 앉혀보는 기쁨이 얼마나 크겠느냐 가는 길에 의자를 어떻게 놔야 할지 묻지 말고 너희 좋은 대로 하거라 이참에 우리도 자식 놈이 베푸는 호사 좀 누려 볼란다 쓸쓸할까 뒤돌아보지는 말거라.. 2022. 7. 30.
레미콘 트럭/이동호 레미콘 트럭/이동호 아버지는 신이셨다 트럭에 지구를 올려놓고 자주 출타 중이셨다. 지구는 짐칸에서 저 홀로 빙빙 돌아가고, 그럴 때면, 아버지는 저녁 무렵에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작업복은 은하수에 젖어 반짝이고, 뉴스에서 열대야가 자주 거론될 때에는, 북극의 빙하를 까만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오기도 하셨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우리 머리를 아버지의 손바닥이 쓰다듬을 때마다 후두둑 우리의 발등으로 별들이 떨어지곤 했다. 우리는 자갈이거나 모래였다. 아버지는 몇 포대의 시멘트와 물만으로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셨다. 형은 한 가정의 든든한 바닥이 되었고, 나는 단단한 기둥으로 자랐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지구를 물려주시고 산 속으로 돌아가셨다. 그런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마음에 신전.. 2022. 7. 30.
세탁기/이동호 세탁기/이동호 아내가 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 한다 아내의 완력에 빨래처럼 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무소불위한 잔소리의 권능에 못 이겨 끝내 구겨져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탁기 속에도 사계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세탁기가 지구처럼 자전한다 몸이 바닥의 회전 날을 축으로 공전하는 동안 내 몸통 속에서 아름답게 꽃이 피고 지고 졸졸 시냇물이 흐르고 물거품이 해조처럼 밀려들 적마다 내 속으로 신호가 밀려와서 자라고 머리에서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울리곤 했다 내 몸의 각질이 낙엽처럼 내 주변을 떠돌았다 시베리아 벌판을 고사목처럼 걸어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원하는 내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젖은 아내의 명상 속을 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곧 탈수될 것이다 햇볕 소용돌이치는 어느 베.. 2022. 7. 30.
서쪽을 보다/최금녀 서쪽을 보다/최금녀 ​ ​ ​ 우리는 동쪽에 있다 남편은 늘 동쪽 벽에 기대어 앉아 서쪽 벽을 보고 있다 액자 속 인물들은 표정을 바꿀 생각이 없다 40년 된 소철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다 반가운 적이 없는 기억들이 꽃 진 화분에서 기어나와 틈새를 찾아다니며 핀다 르누아르의 여자는 그림 속에서도 르누아르를 사랑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은 냉동실에 넣어두고 죽음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정장 차림으로 날씨를 읽는다 서쪽 벽은 늘 춥고 어둡다 바라보는 중이다 ​ 2022.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