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술항아리/정경해 술항아리/정경해 헛간 구석진 곳 키를 낮춘 항아리 하나 앉아 있다 살갗에 무성한 비듬 슬은 채 헛배가 부른지 가끔 트림을 하며 먼지를 올린다 항아리는 기억한다 밤마다 찾아와 얼굴을 묻던 그 사내 자신을 사랑하던, 한 남자의 생을 사내가 가슴을 더듬을 때마다 마음껏 젖줄을 물려주던 짜릿짜릿했던 그때를 그 목덜미 물고 놓아주지 않던 사내는 밤마다 울었고 어둠이 장송곡을 연주했다 그럴수록 항아리는 입을 더 크게 벌렸고 사내는 광맥을 찾는 포식자처럼 눈을 번득였다 언제부터인가 항아리의 마른기침이 잦아지더니 사내의 발자국이 지워졌고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술항아리 그렇게 남겨졌다 2022. 6. 24. 나비/이대일(동시) 나비/이대일 엄마는 곧, 나비가 된대요 엄마는 스스로 실을 낼 수 없어 장례사 아줌마 아저씨 두 분이 도와주고 있어요 아빠, 이모, 이모부들과 함께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어요 고치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어요 한 밤, 두 밤, 세 밤…… 지나면 하느님이 주신 하늘하늘 날개옷을 입고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 살짝이 하늘나라로 날아간대요 엄마, 잘 가~ 안녕 아빠는 내가 잘 지킬게…… 2022. 5. 28. 아까운 내 돈/이도일(6학년) 아까운 내 돈/이도일(6학년) 내가 8만원 레고를 몰래 샀다 엄마가 보고 이거 얼마냐고 했다 난 만원이라고 했다 어느 날 엄마가 레고를 실수로 버렸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다시 사라고 만원을 줬다 2022. 5. 18. 곰국 끓이던 날/손세실리아 곰국 끓이던 날/손세실리아 노모의 칠순잔치 부조 고맙다며 후배가 사골 세트를 사왔다 도막난 뼈에서 기름 발라내고 하루 반나절을 내리 고았으나 틉틉한 국물이 우러나지 않아 단골 정육점에 물어보니 물어보나마나 암소란다 새끼 몇 배 낳아 젖 빨리다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 고기 값이 황소 절반밖에 안 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단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 2022. 3. 7. 이전 1 ··· 36 37 38 39 40 41 42 ··· 17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