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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문학장르/좋아하는 詩714

삶/안도현 삶/안도현 게는 이 세상이 질척질척해서 진흙 뻘에 산다 진흙 뻘이 늘 부드러워서 게는 등껍질이 딱딱하다 그게 붉은 투구처럼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싸움터이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설 줄 모르고 게가 납작하게 엎드린 것은 살아 남고 싶다는 뜻이다 끝끝내 그래도 붙잡히면? 까짓것, 집게발 하나쯤 몸에서 떼어주고 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새살이 상처 위에 자신도 모르게 몽개몽개 돋아날 테니까 2022. 8. 17.
소금쟁이/임경묵 소금쟁이/임경묵 물의 거죽이 커터 칼날처럼 반짝인다 가라앉고 싶어도 가라앉을 수 없는 슬픔의 표면장력으로 한 발 한 발 물 위를 걷는다 물 위는 절망과 두려움에 주저앉지 않으려고 몸이 물보다 가벼운 이가 홀로 걷기 좋은 곳. 2022. 8. 17.
소3/권정생 소3/권정생 소야, 몇 살이니? 그런 것 모른다. 고향은 어디니? 그것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 성은? 그런 것 그런 것도 모른다. 니를 낳을 때 어머니는 무슨 꿈을 꿨니? 모른다 모른다. 형제는 몇이었니?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 소는 사람처럼 번거롭기가 싫다. 소는 사람처럼 따지는 게 싫다. 소는 사람처럼 등지는 게 싫다. 소는 들판이 사랑스럽고, 소는 하늘이 아름다웁고, 소는 모든 게 평화로웁고. 2022. 8. 17.
어떤 호사/이명희 어떤 호사/이명희 정육점 골목 오십 대 초반의 건장한 사내가 큰 소 반 마리 들쳐 메고 있다 겨우 한 발 떼고 또 한 발 떼려 한다 어깨에 멘 반쪽 소 놓치지 않으려 목 부위에 박힌 갈고리 꽉 움켜쥐고 발을 옮기려 애를 쓴다 그 소, 한 몸이 서로 헤어지던 시간 떠올리며 버티는지 꼼짝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안타깝게 바라만 본다 뻘건 살점에 힘을 모으는 소, 기를 쓰며 세상 짐 완수하려는 사내 놓으면 안 되는 삶의 무게가 어깨 위에서 사투를 벌인다 살아간다는 애착이 끓는 시간 사내의 근육에 기합 넣는 소리 들린다 요양병원에 있는 늙으신 어머니의 숨소리, 아내의 도마 소리, 아이들의 조잘거림일까 사내는 반쪽 소의 등에 생을 밀착시킨다 평생 채찍을 맞으며 밭을 갈아야 할 운명의 소 죽어서야 사람에게 업혀 가는.. 2022.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