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밭314 옥상, 가을 오후 옥상, 가을 오후 / 김춘기 하늘마저 도약하고 싶은 가을날 오후 동네에서 제일 높은 연립주택 옥상 탑층에서 나온 꽃무늬 앞치마 새댁이 엉덩이를 통통 튕기며 바지랑대를 올리자 건너 편, 티브이 안테나에서 날아온 고추잠자리 쌍이 한 몸이 되어 은빛 줄 위로 날아오르네. 하늬바람이 숨바꼭질을 하고 나올 때마다 만국깃발처럼 펄럭이는 원색의 율동 곁에서 백로처럼 날갯짓하는 기저귀의 팔분의 육박자 춤사위. 마음 들뜬 하늘은 그것을 보고 옥상을 이리저리 흔드네. 길 건너 가납초등학교 1학년 윤서가 몽당연필로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것처럼 집으로 뛰어오자, 일층 셋집 삽살강아지 자전거 밑을 빠져나가 구멍가게 앞으로 팔짝팔짝 마중을 나가네. 웃음 제조기 몽골 새댁엄마 옥상에서 맨발 뒤꿈치를 바짝 들고 딸내미 부르는 소리에.. 2012. 5. 17. 좀생이 선생 좀생이 선생 김춘기 굽이굽이 흐르던 북한강이 속도를 잠시 늦추는 곳, 명지산이 철마다 명품 옷을 갈아입으며 자태를 뽐내는 곳, 그곳에 가평이 있다. 사계절 사람들이 몰려와 산그늘 아래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시냇물 소리에 도시의 찌든 때를 벗기고 가는 곳이다. 나는 오래 전 그.. 2012. 5. 14. 쓴맛에 관한 고찰/김춘기 쓴맛에 관한 고찰/김춘기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하다가 어머니 회초리에 쓴맛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지. 어느 날인가, 탱크 훈련 중인 미군 병사가 시레이션을 하굣길에 던졌지. 내가 먼저 주워 하필 커피를 입에 털어 넣는 순간, 혀까지 죄다 내뱉었지. 초등학교 때 유사 장티푸스로 사경일 때, 어머니가 코를 막고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으시면, 온몸이 정말 가루약이 되는 줄 알았고. 중학교 입시에 낙방했을 땐, 그냥 밍밍했지. 고등학교 시험에서 미끄럼 탔을 적엔 씁쓸했었고. 사대 졸업하고 선생 휴직 후,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박격포탄 기합 못 받겠다고 버티다가 인간 샌드백이 되었을 때, 바로 쓴맛의 진수를 터득했지. 아들내미 여자친구 인사를 처음 받았을 때처럼 달콤함이 어쩌다 스치기도 하지만, 삶이.. 2012. 5. 9. 통조림 뉴욕에 가다 통조림 뉴욕에 가다/김춘기 황도 12궁 따라 돌던 태양이 양자리쯤에 닿는 춘분이 벌써 진지 구축했다고, 사월은 손난로 트럭에 싣고 달려와 아야진포구 일대에 노점 펼친다. 낮은 포복으로 울산바위 오르던 맵찬 바람이 주머니에 숨겨둔 부비트랩의 스위치를 누른다. 당황한 봄은 순간 납죽 엎드리고, 하늘은 중청봉에 진눈깨비를 한 겹씩 쏟는다. 대낮에도 꽃샘은 포구 일대를 쏘다니고는 마을 고샅길 아래 머리를 일찍 내미는 초봄의 새순들을 얼리고, 잠에서 먼저 깬 참개구리 눈망울을 궁굴리게 한다. 며칠 후, 남녘 따순 봄이 동해대로를 달려와 양양 들판의 뚜껑을 열자, 봄비 봄샘 봄동 봄꽃 봄병아리 봄미나리 봄아지랑이가 함께 촛불을 켜고는 마을마다 뛰어다니며 춤추고 미끄럼타고, 벼랑 위에서 엉덩이도 찌며 장기자랑 하는 .. 2012. 4. 17. 이전 1 ··· 49 50 51 52 53 54 55 ··· 79 다음